비위는 자가 문위이고 강하군 맹현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족부 비백인에게 의탁했다.

 

비백인의 고모는 익주목 유장의 모친이다.유장은 사신을 파견하여 비백인을 영접했고, 비백인은 비위를 촉으로 유학보냈다. 마침 유비가 촉을 평정했으므로 비위는 그대로 익주땅에 남았으며, 여남의 허숙룡 · 남군의 동윤과 나란히 명성이 있었다.

 

그 무렵, 허정이 아들을 잃었으므로 동윤은 비위와 함께 장지까지 가려고 했다. 동윤이 부친 동화에게 말하여 수레를 요청하자, 동화는 뒷쪽이 뚫려있는 녹거를 그에게 주었다. 동윤은 수레에 타기 어렵다는 기색을 하였으므로 비위가 수레 앞쪽에서 먼저 올라탔다. 장지에 도착했을 때 제갈량 및 많은 귀인들이 모두 모였고 수레는 매우 적었다. 동윤은 안색이 편하지 못했지만, 비위는 태연자약했다. 수레를 모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자, 동화는 상황을 묻고 이와 같음을 알고는 동윤에게 말했다.

 

“나는 항상 너를 문위와 비교하여 우열을 구별하지 못했던 것을 회의 했었지만, 오늘 이후로 나의 의혹은 풀렸다.”

 

유비가 태자를 세우자, 비위는 동윤과 함께 사인이 되었으며, 승진하여 서자가 됐다. 유선이 제위에 오른 후, 황문시랑으로 임명되었다. 승상 제갈량이 남쪽 정벌에서 돌아왔을 때, 관료들은 수십 리까지 가서 영접했다. 그들의 나이나 지위는 대부분 비위의 위였지만, 제갈량은 특별히 비위에게 함께 수레를 탈것을 명했다. 이 이후부터 사람들 중에 그를 보는 눈이 바뀌지 않은 자가 없었다.

 

제갈량은 남쪽에서 돌아오던 초기에 비위를 소신교위로 임명하여 오나라로 보냈다. 손권은 성격이 본래 해학스러운 것을 좋아하고 조소하는 것이 끝이 없었으며, 제갈각 · 양도 등은 재능이 넓고 결단성이 있으며 변설에 능하였는데, 변론과 힐난할 때마다 날카로운 기세가 어디로 가든 간에 비위는 바른 말을 하고 독실한 태도로써 이치에 근거하여 대답했으므로 끝까지 굴복시킬 수 없었다. 손권은 그를 매우 기중하게 여겼다. 비위에게 말했다.

 

“그대는 천하의 미덕을 갖춘 사람입니다. 틀림없이 촉왕조 고관의 신하가 될 것입니다. 오나라로 자주 오는 것이 불가능할까 걱정입니다.”

 

비위는 돌아오자, 시중으로 승진됐다. 제갈량이 북쪽의 한중에 주둔하였을 때, 유선에게 요청하여 비위를 참군으로 삼았다. 그는 사자로 유선의 뜻을 받들어 자주 오에 갔다.

 

건흥8년(230)에 비위는 중호군으로 전임되었고, 후에 또 사마로 임명됐다. 마침 군사 위연과 장사 양의가 서로 증오하여 항상 한자리에 앉을 때마다 논쟁을 했다. 위연은 어떤 때는 칼을 들고 양의를 죽이려 했으며, 양의는 얼굴에 눈물을 가득 흘렸다. 비위는 항상 두 사람의 사이에 앉아 간언하고 훈계하며 시비를 구분하고 깨우쳐 주었다.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각기 위연과 양의가 갖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 것은 비위의 조력 때문이었다.

 

제갈량이 죽은 후 비위는 후군사로 임명됐다. 오래지 않아 장완을 대신하여 상서령이 되었다. 장완이 한중에서 부현으로 돌아가자, 비위는 대장군으로 승진했으며, 녹상서사가 되었다.

 

연희 7년(244)에 위나라 군대가 홍세에 주둔하려고 하자, 유선은 비위에게 부절을 주어 병사들을 인솔하여 위나라 군대를 막도로 했다. 광록대부 내민이 비위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와서 함께 바둑을 두자고 청했다. 이때 긴급문서가 도착해 사람과 말은 갑옷을 입었고, 군마를 정비하는 일이 이미 끝났지만, 비위와 내민은 대국에 열중하며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내민이 말했다.

 

“잠시 그대를 시험해 보았을 뿐입니다! 그대는 정말로 적임자입니다. 반드시 적을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비위가 도착하자 적군은 곧 후퇴했다. 비위를 성향후로 봉했다. 장완이 주의 직책을 완곡하게 사양하였으므로 비위가 또 익주자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비위를 국가를 위한 공적과 명성은 대체로 장완과 필적할 만하다.

 

연희 11년(248)에 출전하여 한중에 주둔했다. 장완으로부터 비위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들 자신은 밖에 있었지만, 상을 주어 칭찬하고 벌을 주어 위엄을 갖추는 일은 모두 먼 곳에서 먼저 그들에게 자문을 한 연후에 곧 집행하였다. 그들에 대한 신임은 이와 같았다.

 

그후 연희 14년(251)여름에 성도로 돌아왔는데, 성도의 운기를 보고 점치는 자가 도성에 재상의 자리가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겨울에 다시 북쪽으로 한수에 주둔했다.

 

연희 15년(252)에 유선은 비위에게 부서를 개설하도록 명령했다. 16년(253)정월에 대연회가 개최되었는데, 위나라에서 항복해 왔던 사람 곽순이 그 자리에 출석했다. 비위는 즐겁게 마셔 만취되었을 때, 곽순의 칼에 찔려 죽었다. 시호를 경후라고 했다.

 

아들 비승이 그의 작위를 이었으며, 황문시랑으로 임명되었다. 비승의 동생 비공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비위의 맏딸은 황태자 유선의 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