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은 자가 자균(子均)이고 파서군 탕거현 사람이다. 그는 본래 외가 하씨(何氏)에게서 길러졌는데, 후에 성을 왕(王)으로 고쳤다. 두호박호를 따라 낙양으로 가서 교위의 관직을 받았고, 조조의 한중 정벌을 수행하였다. 유비에게 항복하여 아문장 · 비장군으로 임명됐다.

 

건흥 6년(228)에 왕평은 참군 마속의 선봉대에 소속되었다. 마속이 수로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 진지를 구축하고 혼란스럽게 지휘하자, 왕평은 여러 번 마속에게 간언했다. 그러나 마속은 그의 의견을 사용하지 않아 가정에서 패했다. 마속의 부하들은 전부 사방으로 흩어졌고, 오직 왕평이 인솔하는 천 명만이 북을 울리며 독자적으로 견지했다. 위나라 장수 장합은 복병을 의심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왕평은 각 군대에 흩어졌던 병사를 서서히 흡수하고 장사들을 인솔하여 돌아왔다.

 

승상 제갈량은 마속과 장군 · 장휴 · 이성을 죽이고, 장군 · 황습 등의 병사를 빼앗았다. 왕평은 특별히 큰 표창을 받았고, 참군의 관직을 더했다. 또 왕평에게 오부의 병사 통솔권을 주었고, 군영의 일을 맡겼으며, 관위를 승진시켜 토구장군으로 하고 정후로 봉했다.

 

건흥 9년(231)에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였을 때, 왕평은 따로 남쪽의 군영을 지켰다. 위나라 대장군 사마선왕이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이 왕평을 공격했는데, 왕평이 수비를 굳게 하고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장합은 이길 수 없었다.

 

건흥 12년 (234)에 제갈량이 무공에서 죽자, 군대를 물려 돌아왔다. 위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 차례의 싸움으로 패배시킨 것은 왕평의 공로이다. 왕평은 후전군 · 안한장군으로 승진했으며, 거기장군 오일을 도와 한중에 주둔했다. 또 왕평은 한중태수를 겸임했다.

 

왕평은 건흥 15년(237)에 승진하여 안한후에 봉해지고 오일을 대신하여 한중을 다스렸다.

 

연희 원년(238)에 대장군 장완이 면양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왕평은 다시 전호군이 됐고, 장완 막부의 일을 담당했다. 6년(243)에 장완은 돌아와 부현에 주둔했고, 전감군 · 진북대장군으로 임명되었고 한중을 다스렸다.

 

연희 7년(244) 봄에 위나라 대장군 조상이 보병과 기병 10여만 명을 이끌고 한천으로 향했는데, 선봉은 벌써 낙곡에 있었다. 그 당시 한중에서 수비하던 군사는 3만 명도 안되었으므로, 장수들은 매우 놀랐다. 어떤 이가 말했다.

 

“현재의 힘으로는 적을 대항하기가 부족합니다. 응당 한중과 낙성 두 성을 굳게 지켜야만 합니다. 적군을 만나면 들어오게 하고, 이 시간 안엔 부현의 군대는 관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왕평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중은 부현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습니다. 적군이 만일 관성을 얻게 된다면 곧 화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응당 먼저 유호군과 두참군을 파견하여 응세를 점거하도록 하고, 저는 후원을 담당해야 합니다. 만일 적군이 병사를 나눠 황금으로 향한다면, 저는 천 명을 이끌고 산을 내려와 직접 공격할 것이고, 이 시간 내에 부현의 군대는 나아가 이를 수 있으니 이것이 계책 가운데 상책입니다.”

 

오직 호군 유민만이 왕평의 견해에 동의하고 즉시 시행했다. 부현의 여러 군대와 대장군 비의가 성도로부터 서로 이어 도착했으므로 위나라 군대는 후퇴하여 돌아갔다. 왕평은 본래 계책과 같이 되었다. 이때, 등지는 동쪽에 있었고 마충은 남쪽에 있었으므로 왕평은 북쪽 변방에 있었는데, 모두 명성과 사적이 빛났다.

 

왕평은 전쟁터에서 성장하여 글자를 쓸 수 없었고,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열 글자에 불과했지만, 구술로 문서를 작성한 것은 모두 식견이 있고 조리가 있었다.

 

왕평은 사람들에게 <사기><한서>의 여러 기전을 읽도록 하여 그것을 듣고 그것의 대의를 모두 알았으며, 왕왕 논설하는 가운데 그 주지를 잃지 않았다. 그는 법도를 준수하였으며, 말할 때는 농담을 하지 않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단정하게 앉아 있었으므로 무장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나 성정이 협소하고 의심이 많고, 사람들을 스스로 경시했으므로 이것으로써 손해를 입었다.

 

연희 11년(248)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왕훈이 뒤를 이었다.

 

당초, 왕평과 같은 군 출신인 한창의 구부는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관대하고 후덕하였다. 또한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공명과 작위는 왕평만 못했고, 관직은 좌장군까지 이르렀고 탕거후로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