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 촉서
내민은 자가 경달(敬達)이고 의양군(義陽郡) 신야현(新野縣) 사람이며, 내흡의 후예이다.
부친 내염(來)은 한나라의 사공(司空 : 관직명. 삼공의 하나로 국가의 토목건축과 수리공정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이었다. 한(韓)나라 말, 큰 혼란을 만나 내민은 누이를 따라 형주(荊州)로 도망쳤다. 매부 황완(黃琬)은 유장(劉璋)의 할머니의 조카였으므로, 유장은 사람을 보내 황완의 처를 맞이하도록 했다. 내민은 그래서 누이와 함께 촉군(蜀郡)으로 들어갔고, 항상 유장의 빈객(賓客)이 되었다.
내민은 서적을 광범위하게 읽어 좌씨(左氏)의 춘추(春秋 : 좌씨전. 공자의 춘추를 노나라 좌구명이 해석한 책)에 뛰어났으며, 특히 창힐편(倉 篇)과 이아(爾雅 : BC 2세기경 주나라의 주공이 지은 것으로 전하는 자서)의 훈고(訓誥 : 자구의 해석. 문장 전체의 의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부분적인 문자나 어구를 설명하는 것임)에 정통하였고, 문자를 교정하는 일을 좋아했다.
유비(劉備)는 익주(益州)를 평정한 후, 내민을 전학교위(典學校尉)로 임명했고, 태자(太子)를 세웠을 때는 가령(家令)으로 임명했다. 유선(劉禪)이 제위에 오른 후, 그를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 관직명. 광록훈에 속하며, 낭관의 수령 가운데 하나이다. 호분숙위를 통솔하여 황제의 숙위와 잡역을 담당하였고, 아울러 궁정의 각 집무기관 및 관원들의 경호를 맡았다)으로 삼았다. 승상(丞相 :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천자를 보필하던 최고관직) 제갈량(諸葛亮)이 한중(漢中)에 주둔했을 때, 내민에게 군좨주 · 보군장군(輔軍將軍)이 될 것을 요청했고, 후에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을 떠나게 되었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후, 내민은 성도(成都)로 돌아와 대장추(大長秋)로 임명되었지만 또 다시 면직되었고, 후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 : 관직명. 조정의 고문관. 진나라 때의 낭중령의 속관이던 중대부를 한무제 때 광록대부라고 고쳐 불렀다. 삼공 다음가는 높은 벼슬이었으나 실권은 없고 다만 명예직이다)가 되었으나 재차 잘못을 범하여 쫓겨났다.
내민이 앞뒤로 여러 번 면직되거나 강등된 것은 모두 말에 절도가 없고 행동이 일상적인 규범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 당시 맹광(孟光) 또한 중대한 일에 있어서 신중한 태도가 없이 시정(時政 : 그 때의 정사)에 간여하는 의론(議論)을 발표하는데, 내민보다 더 심했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많고 박학한 학자로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내민은 형초(荊楚 : 지방명칭)의 명가(名家)이며 태자의 노신(老臣)이었으므로 특별히 우대를 받았다. 이 때문에 그는 면직된 후에 또 기용되었다. 후에 유선은 내민은 집신장군(執愼將軍)으로 임명하여, 관직의 중요함으로써 스스로 경계하도록 하고자 했다. 내민은 경요(景耀) 연간(年間)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내충(來忠) 역시 유가경전을 광범위하게 읽었고, 내민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으며, 상서(尙書 : 천자와 조신 사이에 왕래하는 문서를 맡아보던 관직) 상충(尙充) 등과 함께 대장군(大將軍 : 병마의 대권을 관장하는 총사령관. 최고의 무관직으로 삼공보다 위였다) 강유(姜維)를 보좌했다. 강유는 그를 평가하여 참군(參軍 : 군의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다)으로 임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