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는 자가 맹기(孟起)이며, 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 사람이다. 부친 마등(馬騰)은 영제(靈帝) 말기에 변장(邊章) 한수(韓遂)등과 함께 서주(西州)에서 일을 일으켰다.

 

초평 3년(192)에 한수와 마등은 병사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갔다. 한조 때, 한수를 진서장군으로 임명하여 금성(金城)으로 파견했고, 마등은 정서장군으로 임명해 미현에 주둔시켰다. 후에 마등이 장안을 습격했지만, 패배하여 양주로 돌아왔다. 사예교위 종요는 관중을 지키며, 한수와 마등에게 편지를 보내 복종할 경우와 반항할 경우의 화와 복에 대해 진술했다. 마등은 마초를 보내 종요를 수행하여 평양에서 곽원(郭援)과 고간(高幹)을 토벌하도록 했으며, 마초의 장군 방덕이 직접 곽원의 머리를 베었다. 후에 마등은 한수와 화합하지 못하여 경기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마등을 불러 위위로 임명하고, 마초를 편장군으로 임명하고 도정후로 봉하여 마등의 부하를 통솔하도록 했다.

 

마초는 군대를 통솔한 후 한수와 연합하고, 양추(楊秋) · 이감(李堪) · 성의(成宜)등과 연결하여 동관까지 군대를 진군시켰다. 조조는 한수 마초와 단독으로 말을 타고 와서 회담을 했다. 마초는 그의 강대한 힘을 믿고 의지해 몰래 조조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조조 주위에 있는 장수 허저가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었으므로 감히 행동하지 못했다. 조조는 가후의 책략을 이용하여 마초와 한수가 서로 의심하도록 만들었으므로, 그들의 군대는 크게 패배했다. 마초는 도주하여 동족들을 지켰다.

 

조비는 안정까지 추격했지만, 마침 북쪽에 일이 발생하여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양부(楊阜)가 조조에게 권유하여 말했다.

 

“마초는 한신 경포의 용감함이 있고, 또 강인과 호인의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대군이 돌아가 그에 대한 방비를 엄히 하지 못한다면 농상(籠上)의 여러 군은 국가의 영토가 안될 것입니다.”

 

조조가 돌아간 후 마초는 과연 각 동족들을 인솔하여 농상의 군현을 공격했다. 농상의 군현은 모두 그에게 호응했으며, 양주자사(韋康)를 살해하고, 기성을 점거하여 그곳의 백성들을 차지했다. 마초는 자칭 정서장군이라고 하고, 병주목을 겸임했으며, 양주의 군사를 총관리했다.

 

위강의 옛 관리와 백성 양부, 강서(姜敍) · 양관(梁寬) · 조구(趙衢)등은 공모하여 마초를 공격했다. 양부 · 강서는 노성(虜城)에서 병사를 일으켰으므로 마초는 출병하여 그들을 공격했지만 공략할 수 없었다. 양관 · 조구가 기주의 성문을 닫았으므로 마초는 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진퇴양난에 처한 마초는 곧 한중으로 달려가 장로에게 의지했다. 장로는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는 부족한 인물이었으므로, 마초는 내심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유비가 성도에서 유장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밀서를 보내 투항을 원했다.

 

유비는 사람을 보내 마초를 맞이했고, 마초는 병사를 이끌고 곧장 성아래까지 도착했다. 성 안에서는 두려워 떨었으며, 유장은 즉시 항복을 했다. 유비는 마초를 평서장군으로 임명하고, 임저(臨沮)를 다스리도록 했으며, 이전에 조조에게 봉해진 것에 따라 도정후에 봉했다.

 

주석) 마초는 유비가 그를 후하게 대우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유비와 대화할 때는 항상 유비의 자(字)를 불렀다. 관우는 이 점을 노여워하며 그를 죽이기를 원했다. 유비는, “사람들이 나에게 돌아오고 있는데, 그대들은 화를 내며 나의 자를 부른 사람을 살해하려고 하니, 천하에 무엇을 보일 것입니까!” 라고 했다. 장비는, “그러면 그에게 예를 가르치도록 하십시오.” 라고 했다. 다음날, 대회의를 열어 마초에게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관우와 장비는 칼을 쥐고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 보았지만, 관우와 장비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유비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며, 다시는 유비의 자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날 탄식하며 “나는 오늘 내가 패배한 까닭을 알았다. 군주의 자를 불렀기 때문에 관우와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라고 했다. 그후로는 경의를 갖고 유비를 존중하여 섬겼다.

 

유비는 한중왕이 되자, 마추를 좌장군 가절로 임명했다.

 

장무 원년(221)에 마초는 승진하여 표기장군이 되었으며, 양주목을 겸임하였으며, 승진하여 태향후(泰鄕侯)에 봉해졌다. 책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부덕한 몸으로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고 종묘를 받들게 되었다. 조조 부자는 대대로 죄를 저질렀고, 짐은 그 때문에 참담하며 두통 같은 질병이 있다. 사해 안은 원망하고 분통해 하며 정의로 돌아오고 근본으로 돌아와 저족과 강족이 복종하였으며 훈육도 정의를 양모하게 되었다. 그대의 신의는 북쪽 땅에 빛나고, 위엄과 무예도 모두 빛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대에게 중임을 맡기고, 강한 적을 제합하고 만 리를 통치하며 백성들의 질고를 살펴주길 바란다. 그대는 조정의 교화를 밝게 선양하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의 백성들을 보듬으며, 상주고 벌주는 것을 신중히 함으로써 한왕조의 복운(福運)을 증대시키고 천하에 보답해야 한다.”

 

장무 2년(22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47세였다. 임종할 때, 상소를 올려 말했다.

 

“저희 집안의 2백여 명은 조맹덕에게 주살당하여 거의 전멸되었는데, 오직 사촌동생 마대(馬岱)만이 있을 뿐입니다. 쇠락한 집안의 제사를 이을 사람이니, 폐하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외에 또 할 말은 없습니다.”

 

마초에게 위후(威侯)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아들 마승(馬承)이 작위를 이었다. 마대의 지위는 평북장군(平北將軍)까지 이르렀고, 승진하여 진창후(陳倉侯)라는 작위를 받았다. 마초의 딸은 안평왕(安平王) 유리(劉理)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