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趙雲)의 자(字)는 자룡(子龍)이고, 상산(常山) 진정(眞定)사람이다.

 

본래 공손찬(公孫瓚)에 속해 있었는데, 공손찬이 선주(先主 : 유비)에게 전해(田楷)를 도와 원소(袁紹)를 막도록 했을 때 조운은 선주를 따라 기병을 이끌었다.

 

1) 조운별전(趙雲別傳)에 이르는 바는 다음과 같다.


조운은 신장이 8척(尺)에 풍채는 크고 늠름했다. 본래 군(郡)에서 천거되었고, 의(義)로움을 추구하는 아전과 병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로 갔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冀州牧)을 칭하고 있었는데, 공손찬은 기주 사람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매우 우려하여, 조운이 자기에게로 온 것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조운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들으니 귀주(貴州) 사람들이 모두 원씨(袁氏)를 원한다고 하던데, 그대는 어찌하여 혼자 마음을 돌렸는가? 마음이 혼란스러워 혼자 반(反)하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라고 묻자, 조운은 대답했다.

 

“천하가 심히 어지러운지라 백성들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데다, 현(縣)에 재앙이 들이닥치면 백성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고을에서는 어진 정치를 펴는 쪽을 따르겠다는 것일 뿐, 원공(袁公)을 홀대하거나 장군을 섬기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는 공손찬을 따라 정벌길에 올랐다. 이때 선주 또한 공손찬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선주는 조운과 자주 만나 사귀었다. 조운은 스스로 선주에게 의탁하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조운이 형님의 상(喪)을 당하여 공손찬의 양해를 얻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선주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굳게 손을 잡으며 헤어지려 할 때 조운은 선주에게 말했다.

 

“그간 입었던 덕(德)을 죽을 때까지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선주가 원소를 따르게 되었을 때, 조운은 업에서 선주를 만났다. 선주는 조운과 한 침상(寢牀)에 누워 잠을 자며 몰래 조운을 보내 병사 수백 명을 모집하며, 모두 유(劉) 좌장군(左將軍)의 부곡(部曲)이라 하였지만 원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조운은 선주를 따라 형주(荊州)로 갔다.

 

선주가 조공(曹公 : 조조)에게 쫓겨 당양(當陽)의 장판(長阪)에까지 이르게 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조운은 유비의 어린 아들(곧 후주 유선이다)을 품에 안고, 감부인(甘夫人 : 곧 후주 유선의 어머니이다)을 보호하여 모두 화를 면하게 했다. 그리고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주가 촉(蜀)으로 들어갈 때 조운은 형주(荊州)에 남았다.

 

2) 조운별전(趙雲別傳)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처음에 선주가 패하자 조운이 북쪽으로 가버렸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주는 손에 극(戟 : 창의 일종)을 들고 소리쳤다.

 

“자룡은 나를 버리고 달아날 사람이 아니다.”

 

얼마 있지않아 조운이 도착했다.

 

조운은 강남을 평정하고 편장군(偏將軍)이 되었고, 계양태수(桂陽太守)를 겸하여 조범(趙範)을 대신했다. 조범에게는 번씨(樊氏)라는 형수(兄嫂)가 있었는데 그 용모가 매우 뛰어났다. 조범은 조운과 짝을 지어주려고 했지만, 조운은 이를 사양하며 말했다.

 

“경은 나와 같은 성씨(姓氏)이니, 경의 형수는 곧 나의 형수와 같은 것이오.”

 

끝까지 사양하며 배필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조운에게 번씨를 받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운은 이렇게 말하며 번씨를 취하지 않았다.

 

“조범이 항복하여 따르기로 했지만, 그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소. 더우기 천하에 여자는 많은데 어찌 급히 취하려 한단 말이오.”

 

과연 조범은 달아났으나, 조운은 조금도 서운해 하지 않았다.

 

전에 조운이 하후돈(夏侯惇)과 박망(博望)에서 싸울 때, 하후란(夏侯蘭)을 사로잡았다. 하후란은 조운의 고향사람이었지만 서로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운은 선주에게 하후란이 법률에 밝아 군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하며 그를 천거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운은 하후란이 자신과 가까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그의 삼가고 살펴 생각함이 이와 같았다.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갈 때, 조운을 남겨 사마(司馬)의 일을 보게 했다. 이때 선주에게 손권의 누이 손부인(孫夫人)이 있었는데, 그녀는 교만하고 굳세어 오(吳)나라의 관리와 병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방자하여 법을 따르지 않았다. 선주는 조운에게 특별히 내부의 일을 장악하도록 하여 이를 엄중히 바로 잡도록 하였다.

 

손권은 유비가 서정(西征)길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많은 배를 보내 누이인 손부인을 데려가려고 했다. 손부인은 후주(後主)를 오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하였지만, 조운은 장비와 함께 강을 끊고 후주를 데리고 돌아왔다.

 

선주(先主 : 유비)가 가맹관에서 돌아와 유장(劉璋)을 공격하면서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은 조운 · 장비 등과 함께 강(양자강을 말하는 듯함)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郡縣)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이르자, 조운을 보내 육지로 나와 강양(江陽)으로 오도록 하여, 성도(成都)에서 제갈량과 합류하도록 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조운은 익군장군(翊軍將軍)이 되었다.

 

3) 조운별전(趙雲別傳)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익주(益州)가 평정된 뒤, 성문 밖의 뽕나무 밭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논의하기 위해 성도(成都)의 옥사(屋舍 : 임시거처)에 모였는데, 조운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곽거병(전한의 무제 때 흉노를 정벌한 명장)은 아직 흉노(匈奴)를 토벌하지 못하자, 황제가 내린 집까지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라의 적은 비단 흉노만이 아닐진데, 어찌 편안함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천하가 평정된 후라고 해도, 뽕나무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밭을 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익주(益州)의 백성들은 처음 병란(兵亂)을 겪어 어려움이 많았으니 밭과 집을 돌려주고, 영(令)을 내려 편안히 거주하며 생업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런 연후에 부역을 줄여준다면 민심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주(先主)는 그의 말을 따랐다.

 

건흥 원년(建興元年 : 촉한 유선의 연호로 서기 223년),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었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에 다시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승진되었다.

 

건흥 5년, 제갈량을 따라 한중(漢中)에 주둔했다. 다음 해에 이르러 제갈량이 군대를 일으켜 사곡도(斜谷道)에서 나아가 승승장구 하자, 조진(曹眞)은 대군을 보내 이에 대적했다. 제갈량은 조운을 등지(鄧芝)와 함께 가서 항거하도록 하고, 자신은 기산(祁山)을 공격했다.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敵)은 강한 군사였으므로 기곡(箕谷)을 잃게 되었는데, 군사를 모아 다시 지켰으므로 대패(大敗)하지는 않았다. 군대를 물린 후,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벼슬이 낮아졌다.

 

4) 조운별전(趙雲別傳)이 전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제갈량이 말하기를, “가정(街亭)에서 군사를 물렸을 때 장졸들은 돌아오지 못해 흩어져 버리고 말았는데, 기곡(箕谷)에서 군사를 물렸을 때는 능히 장병들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어찌 된 연고인가?” 라고 묻자, 등지(鄧芝)가 대답했다.

 

“조운이 스스로 후방을 끊어 엄호한 뒤 군수물자(軍需物資)를 소홀히 버리지 않았기에, 병사와 장수들도 서로 힘을 합해 나뉘어지지 않고 두루 따르게 된 것입니다.”

 

조운의 군수물자에 명주가 많이 남아있자, 제갈량은 이를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주려 했는데, 조운이 나서서 말했다.

 

“군대의 일이란 이로움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나누어 주려 하십니까? 청컨데 그 물건들을 모두 적안부(赤岸府)의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겨울이 오는 10월이 되기를 기다려 하사하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제갈량은 그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따랐다.

 

하후연(夏侯淵)이 패한 후, 조공(曹公)은 한중땅을 차지하기 위해 군량미를 북산(北山) 아래로 운반하였는데, 군량은 수천만 포대나 되었다. 황충(黃忠)이 이를 취하려 하자 조운도 군사를 이끌고 황충을 따라 나섰다. 황충이 때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은 경무장(輕武裝)한 수십 기(騎)의 기병을 이끌고 나가 주위로 황충을 찾아 나섰다. 이때 조공(曹公)의 대군이 나타났는데, 조공이 병사들을 출전시키자 조운은 그 앞의 한 곳을 날카롭게 공격하며 싸웠다. 대병(大兵)이 점점 다가오자 형세는 위급해졌지만 조운은 그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가며, 한편으로는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틈을 찾았다. 조공의 군사는 패했으나 다시 세를 모아 주위를 포위했다. 조운은 적진에 빠져 있었는데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장수 장저(張著)가 부상을 입자 조운은 다시 말을 달려 장저를 구하여 데리고 왔다. 이때 면양(沔陽)에는 장익(張翼)이 있었는데 조공의 군사가 추격하여 주위를 포위하자, 장익은 문을 닫고 저항하려 했지만, 조운은 진영으로 들어오자 문을 다시 크게 열더니 기(旗)를 내리고 북소리를 멈추게 했다. 조공의 군사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물러갔다. 조운은 다시 하늘이 진동할 듯 북을 울리며 조공의 군사들의 뒤에 쇠뇌를 쏘아대자, 조공의 군사들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 짓밟고 밟히며 한수(漢水)에 이르렀는데,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다음날 아침, 선주(先主)는 조운의 진영으로 와서 그가 싸운 곳을 둘러보더니, “자룡(子龍)의 몸은 담력 덩어리로구나!” 라고 말하면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주연(酒宴)을 베풀어 먹고 마셨다. 군중(軍中)에서는 조운을 일컬어 호위장군(虎威將軍)이라고 불렀다.

 

손권이 형주(荊州)를 기습하자 선주(先主)는 대노(大怒)하여 손권을 토벌하고자 했다. 조운이 나서 간(諫)했다.

 

“국적(國賊)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그러니 먼저 위(魏)를 멸하면 오(吳)는 곧 스스로 굴복할 것입니다. 비록 조조의 몸은 죽었다고 해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제위를 도적질하여 찬탈했으니, 마땅히 민심을 따라 속히 관중(關中)을 도모하여 황하(黃河)와 위수(渭水)를 점거한다면 흉악한 역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관동(關東)의 뜻있는 선비(義士)들은 반드시 군량을 가지고 말을 달려와서 대왕을 맞이할 것입니다. 위(魏)를 놔두고 먼저 오(吳)와 싸우기 위해 병력을 일으켜 교전한다면 싸움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주는 듣지 않고 동정(東征)길에 오르며, 조운을 남겨 강주(江州)를 감독하도록 했다. 선주가 자귀에서 패하자, 조운은 군사를 이끌고 영안(永安)에 이르렀으나 오군(吳軍)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7년(229)에 세상을 떠났는데, (261년 3월) 시호가 순평후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