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오후 9시 30분. 그날 비로소 사람의 행렬이 끊어지고 두 사람의 변덕스러운 손님을 잘 처리한 뒤 겨우 쉴 틈을 가질 수 있었다. 가게 안에는 롬버드와 조수인 젊은 남자 둘만이 남아 있었다.
롬버드는 피곤한 듯이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쑥 내밀고 완전히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은 위쪽으로 올라가 이마에 내려온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윗도리를 벗은 조끼 차림에서 그는 셔츠의 깃을 풀어 젖혔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문질러댔다. 손수건은 곧 시커멓게 되었다.
땀방울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손님들은 먼지도 털어내지 않고서 갖고 온 물건을 그냥 그의 앞에 내놓는 것이었다. 먼지가 많이 쌓여 있으면 있을 수록 많은 돈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롬버드는 손을 닦고 나서 더러워진 손수건을 던져버렸다.
그는 돌아서서 비스듬히 높게 쌓여 있는 프로그램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이젠 돌아가도 좋아, 제리. 마감 시간이 다됐군. 30분 뒤에 가게 문을 닫아야겠어. 바쁜 시간도 끝난 것 같으니까.”
19살 정도의 비척 마른 젊은이가 프로그램으로 둘러싸인 참호 속에서 날렵하게 일어나서는 윗도리를 입었다. 롬버드는 돈을 건네주었다.
“자, 15달러. 사흘치 급료네.”
“이제 나오지 않아도 됩니까?”
“응, 나도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아.” 하고 롬버드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좋다면 이것들을 폐품상에 팔아도 좋아. 조금이나마 돈이 될 테니까.”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흘 동안 꼬박 사들인 것을 폐품 가게에 팔아버리란 말입니까?”
“나는 원래 괴짜거든.” 하고 롬버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잠자코 있어야 돼.”
청년은 멋적은 듯이 등뒤를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밖으로 나갔다. 롬버드는 청년이 자기를 미친 녀석으로 여길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자기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이것이 성공하리라고 확신은 못했지만… 애당초부터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다. 너무나 경솔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청년이 밖으로 나갔을 때 젊은 여자 한 사람이 가게 앞을 지나갔다. 롬버드가 그것에 신경을 쓴 것은, 나가는 조수를 바라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여인의 등장으로 가로막혔다는 이유에서뿐이었다.
그녀는 문 앞을 지나가다가 잠깐 발을 멈췄다. 그리고는 다시 걷기 시작하여 텅 빈 진열창 건너편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 잠깐 동안 그는 그녀가 가게 안으로 들어올 것 같다고 느꼈었다. 짧은 휴식이 끝났다. 외투깃을 털로 장식한 코트를 입고 검은 테의 안경을 쓴 노인이 지팡이를 옆에 끼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롬버드는 당황해 했다. 손님은 롬버드가 사무용으로 쓰는 테이블 앞에 가로막고 섰다. 너무 과장된 제스처를 취해서 롬버드는 잠시 동안 그것이 실제의 장면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고, 마치 연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롬버드는 무심코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하루 종일 이러한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다. 하지만 한꺼번에 트렁크 가득 프로그램을 갖고 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여어!”
푸트라이트가 가스등이었던 구시대의 유물이 낭랑한 목소리를 울렸다. 이게 평소의 실력이라면 그 방면에 꽤나 실력이 있는 인물이리라.
“당신은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이오. 당신이 낸 광고가 내 눈에 띄었다는 게 말이오. 나는 당신의 내게는 이곳의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는 희귀한 것들이 많이 있거든. 당신이 꽤나 좋아할 것이 이 트렁크 속에 가득 들어 있단 말이오. 우선 저 그리운 제퍼슨 극장의 것을 보여 주겠소.”
롬버드는 황급히 손을 흔들어서 거절했다.
“제퍼슨 극장의 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모두 다 갖고 있으니까요.”
“그럼 올림피아 극장은 어때요? 그리고…”
“아니, 이젠 됐습니다. 또 무엇을 갖고 계신진 모르지만, 그런 종류의 것은 전부 다 샀습니다. 지금 불을 끄고 가게 문을 닫으려던 참이었어요. 내가 지금 갖고 싶은 것은 카지노 극장의 먼젓번 공연 것뿐입니다. 그것을 갖고 계십니까?”
흥분해서 말한 것이 그만 도가 지나쳐 롬버드의 얼굴로 침이 튀고 말았다.
“이 나에게 카지노 극장의 프로그램을 내놓으라는 거요? 그 따위 극장의 것을…! 이래봬도 나는 옛날 이 미국 땅의 무대에서는 가장 뛰어난 비극 배우라고 갈채받았던 사람이란 말이오!”
“잘 알고 있습니다.” 하고 롬버드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 필요할 것 같지가 않군요.”
운전사가 트렁크를 들고 나갔다. 하지만 트렁크의 주인만은 잠깐 입구에 멈춰서서, “카지노 극장이라고, 쳇!” 하고는 휑하니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또 잠시 뒤 잡역부같이 보이는 허름한 노파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녀는 외출하는 꼭대기가 많은 장미꽃으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쓰레기통에서 주운 것이 아니면 헛간 구석에 몇십 년 동안 처박혀 있었던 것을 뒤집어쓰고 온 것 같았다. 가죽같이 늘어진 양볼은 열병에라도 걸렸는지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이것도 역시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솜씨로 더덕더덕 찍어바른 것이 역력히 나타났다.
그가 얼굴을 들고 동정어린 눈길로 노파를 쳐다보았을 때, 그녀의 오동통한 어깨너머로 뜻밖에도 아까의 그 젊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아까와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그녀는 잠깐 동안 완전히 걸음을 멈추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앞으로 한 발 내디딘 걸음을 일부러 뒤로 끌어당겨 활짝 열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대충 가게 안을 훑어보고 나서 다시 걸어갔다.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리라. 원래 이번 일은 통행인의 주의를 끌기 위해 광고나 선전에 힘을 기울였으므로 여자가 두 번씩이나 엿볼 마음을 일으켰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첫날에는 많은 카메라맨들이 사진을 찍으러 올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조금 전에 갔었던 목적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 번 지나쳐 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보통 어딘가로 가는 경우, 같은 길로 되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테니 별로 이상한 것도 아니리라.
잡역부 같은 노파는 롬버드의 앞에 와서 흠칫흠칫 망설이면서 말했다.
“저, 젊은이… 오래된 프로그램을 산다는 것이 사실이우?”
그는 노파 쪽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물건에 따라서요.”
노파는 팔에 걸치고 있던 시장 바구니 속을 바스락바스락거리며 뒤졌다.
“두세 장이지만 혹시나 해서 갖고 와 봤수. 내가 합창단에 있을 때의 것인데… 전부 갖고 왔어요. 사실 내게는 이것이 무척 소중한 거라오. ‘미드나이트 램블스’와 1911년의 ‘플로릭스’ 같은 것들…”
그것들을 꺼내어 놓으면서도 노파는 아쉬운 듯이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이 그 노란색의 것들을 한 장씩 넘기며 말했다.
“보세요, 여기에 내 이름이 나와 있잖우. 도리 골든… 그 당시의 내 예명이지요.”
이 마지막 시간은 어떠한 인간보다 더 지독한 살인자라고 그는 생각했다. 더군다나 시간은 벌을 받지 않는 살인자인 것이다. 롬버드는 프로그램은 뒷전으로 돌리고 숱한 고생으로 꺼칠꺼칠해진 노파의 손만 쳐다보았다.
“한 부에 1달러씩 드리겠습니다.”
그는 내뱉듯이 말하고는 지갑을 꺼냈다. 그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훌쩍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고맙수, 젊은이!”
손을 빼낼 틈도 없이 그녀는 롬버드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화장이 눈물에 지워져 연분홍색 눈물이 흘렀다.
“저것이 그런 가치가 있는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오.”
사실 조금도 가치가 없는 거였다. 단돈 1센트의 값어치도…
“그럼, 할머니, 이것을…” 하고 그는 동정하듯이 돈을 꺼내어 주었다.
“아, 이제는 밥을 먹을 수 있겠군. 멋진 식사를 해야겠어!”
뜻밖의 행운에 취한 듯 노파는 비틀비틀 걸어나갔다. 노파가 나가자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젊은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파에 가려 있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다. 가게 앞을 이미 두 번이나 지나쳐 갔던 바로 그 젊은 여자였다. 아까는 너무 짧은 순간이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 여자가 틀림없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것보다도 아까처럼 문 밖에 서 있을 때가 훨씬 젊어 보였다. 그것은 젊은 여자로서의 매력이 거의 그녀에게서 사라져 버렸으며 거친 인상마저 주었기 때문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한 발 앞서 다녀간 노파 정도로 거칠어 보였다.
그는 목 뒤를 핀으로 찔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슬쩍 바라보고 나서는 너무 노골적으로 상대방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눈치 채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받은 인상은 복잡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멋진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그 아름다움이 이제는 급속하게 그녀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교양이나 지성미, 그리고 세련된 품위 같은 것이 피부 바로 아래에서 아직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외모는 딱딱하고 거친 껍질에 점차 덮이기 시작하여 본래의 있었다. 그 기구한 행진에서 그녀를 구해 내는 것은 이미 때늦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느낀 바로는, 그것은 가속도가 붙어서 진행되고 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절망한 상태로 술만 마셔댔기 때문인지, 이제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심한 궁핍이 닥쳐온 탓인지, 아니면 그 절망감을 술로 달래려고 했었던 탓일까? 이 세 번째 증세는 여러 군데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앞의 두 가지 추측보다도 더한 원인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결정적인 요소의 자리를 앞의 두 가지에게 양보해 버린 듯했다. 참기 힘든 고뇌, 마음속의 번민, 후회와 불안… 이런 것이 몇 개월도 아니고 끝없이 그녀의 가슴을 흔적만이 남아 있고 이제는 차츰 사라져 가고 있었다. 육체적인 소모… 지금은 그것만이 나타나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쾌활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한 가지만은 갖추었다.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눈에 두드러진 탄력성과 여유…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인간의 달관이라고 할까. 막다른 곳에 몰리면 허름한 하숙집에서 가스 마개를 열어놓고 인생을 끝마칠 그러한 부류의 여자였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세 끼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듯했다. 양볼은 그늘지게 움푹 패어서 거친 피부를 통해 뼈의 골격이 드러나 보였다. 옷은 위에서 아래까지 온통 검은색이었는데, 미망인의 상복은 아니고, 때가 타지 않기 때문에 그 옷 한 벌만 입고 그냥 지내는지 지독히도 검은색이었다. 스타킹까지도 검은색이었는데, 구두 뒤꿈치의 윗부분이 하얗게 초생달 모양으로 닳아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값싼 위스키를 밤낮 가리지 않고 퍼마신 모양인지 바삭바삭하게 목이 바싹 쉬어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아직 지성의 망령이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다. 저속한 말을 사용하고 있긴 해도, 그것은 그녀가 스스로 선택해서 대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배운 것이지, 더 세련된 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 듯한 느낌을 주었다.
“프로그램을 사들일 만한 돈이 아직 남아 있으신가요?”
“어떤 물건인지 우선 보기나 합시다.” 하고 그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겉이 번지르르하고 엄청나게 큰 핸드백이 열리며 프로그램 두 장이 꺼내어졌다. 같은 날 밤의 똑같은 것이었다. 지지난 시즌의 리자이너 극장에서 공연된 뮤지컬 쇼의 프로그램이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떤 남자와 함께 갔었을까… 그는 그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때는 생활이 안정되고, 옷차림도 깨끗했으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 놓이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으리라. 그는 목록을 보고 미수집된 ‘구멍’을 조사하는 체하며,
“아, 이것은 없군요. 흠, 7달러 50센트 드리지요.” 하고 말했다. 여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것뿐인가요?” 하고 그는 그녀를 유도했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가게는 오늘밤으로 닫아버리니까요.”
그녀는 주저했다. 그 시선이 핸드백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그는 알아차렸다.
“하지만 한 장씩 사지는 않겠죠?”
“그럼, 여기에 갖고 온 것만이라도…”
그녀는 다시 핸드백을 열고 프로그램 한 장을 꺼냈다. 핸드백의 입구가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그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핸드백을 탁 닫아버렸다. 그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이어서 그녀는 프로그램을 펼쳤다.
그는 자신 쪽으로 프로그램을 돌렸다.
‘카지노 극장’
이 사흘 동안에 겨우 모습을 나타낸 최초의 한 장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우선 공연작품에 대한 소개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날짜는 다른 극장의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주별로 나타나 있었다.
‘5월 17일부터 일주일간’
그는 숨을 죽였다. 바로 그 주다. 그 주가 틀림없다. 그것은 5월 20일 밤의 일이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 눈빛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얼굴을 숙였다. 귀퉁이에는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한번 접혀졌던 것을 편 것도 아니었다. 만일, 그렇다면 접혀진 자국이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접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시치미를 떼고서 어색하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것의 짝이 있을 텐데요? 대개 두 장이 한 쌍이 되어 있죠. 그렇다면 더욱 많은 값을 드릴 수 있을 텐데.”
그녀는 눈치를 살피는 듯한 시선으로 롬버드를 쳐다보았다. 문득 그녀의 손이 핸드백을 더욱 세게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그 작은 동작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손을 살그머니 떼었다.
“내가 프로그램을 인쇄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될 수 있으면 나는 두 장을 한꺼번에 사고 싶은 겁니다. 이 쇼에 당신은 혼자서 가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다른 프로그램은 어떻게 됐나요?”
이 질문에는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마치 함정에라도 빠지지 않았나 하는 눈초리로 가게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테이블에서 한두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뒷걸음질쳤다.
“나는 한 장만 갖고 있어요. 사시겠어요, 안 사시겠어요?”
“그렇다면, 액수가 좀 적을 텐데…”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좋아요, 얼마든지…”
그녀는 서 있는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손을 뻗어 돈을 받았다. 롬버드는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문 가까이로 다가갈 때 그가 소리를 지르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방이 경계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온화하게 억제된 목소리였다.
“잠깐 이리로 와보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 발을 멈추고 의아해 하는 눈초리로 뒤를 홱 돌아다보았다. 그것은 누가 불러서 자동적으로 뒤돌아보는 동작과는 달랐다. 경계의 빛이 보였다. 그가 일어나서 손가락을 구부려 이리 오라는 신호를 보내자, 그녀는 누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듯한 비명을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리고 이내 가게 문을 돌아 눈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테이블을 옆으로 밀어젖히고 재빨리 뒤쫓았다. 무서운 기세로 그가 뛰쳐나가는 바람에 등뒤에서 애써 젊은 청년이 쌓아놓은 몇 개의 프로그램 산더미가 휘청 흔들리더니 무너지며 종이 눈보라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그가 보도로 뛰쳐나갔을 때 여자는 다음 모퉁이 쪽으로 발을 옮겨놓고 있었지만 하이힐 때문에 마음놓고 달리지 못하고 있었다.
뒤돌아본 그녀의 눈에 쏜살같이 쫓아오는 롬버드의 모습이 비쳤다. 그녀는 전보다 한층 커다란 비명을 질러대며 속도를 높였다. 롬버드와의 거리가 반 정도로 좁혀졌을 때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 달아났다.
하지만 그는 골목에서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2~3 미터 바로 앞에 그의 자동차가, 틀림없이 이런 사태가 있으리라는 예감을 했는지 하루 종일 주차되어 있었다. 그는 여자를 앞질러 길을 막고 양어깨를 붙잡아 옆 건물의 벽에 밀어붙였다.
“자, 꼼짝 말고 있어!”
그는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술에 절은 생활로 호흡이 매우 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질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마, 말하겠어요. 내, 내가 무엇을 했다고 이러는 거죠?”
“그럼, 왜 도망쳤지?”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하고 여자는 괴로운 듯이 말했다.
“당신이 쳐다보는 눈빛이…”
“그럼, 핸드백을 좀 봅시다. 어서 열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마음대로 열겠소!”
“이 손 좀 놔줘요. 내가 열겠어요.”
그는 더 이상은 입씨름하지 않았다. 힘껏 핸드백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끈이 끊어져 버렸다. 그는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여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다음, 핸드백을 열고 손을 집어넣었다. 여자가 조금 전에 가게에서 내놓았던 것과 똑같은 프로그램이 한 장 더 나왔다. 그는 핸드백을 땅에 떨어뜨리고 나서 두 손으로 그것을 펼쳐보려고 했다. 하지만 모든 면이 단단히 달라붙어 있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비틀어 틀듯이 잡아떼지 않으면 안되었다. 표지부터 맨 뒤까지 모두 오른편 위쪽 귀퉁이가 꼼꼼하게 접혀져 있었던 것이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얼핏 보니 날짜도 다른 한 장과 똑같았다.
스코트 헨더슨의 프로그램… 초라한 스코트 헨더슨의 프로그램이 되돌아온 것이다. 운명의 갈림길에 간신히 맞추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