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굉장히 화려한 호텔로서, 그 가는 첨탑은 주위에 죽 늘어선 보잘것없는 건물들과 비교가 되어 마치 귀족의 교만스러운 코처럼 아주 높게 우뚝 솟아 있었다. 그것은 영화 왕국에서 동쪽으로 날아온 극락조가 앉게 되어 있는, 비로드의 보석을 아로새긴 회였다. 현란한 깃털로 몸을 온통 장식한 새들이 폭풍우가 채 멎기도 전에 서쪽으로 날아가려다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흠뻑 젖은 날개를 잠시 동안 쉬어가는 곳이었다.

 

이런 일에는 요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붙여서 이리저리 끈적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냥 무턱대고 걸어가서 안에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하는 전략적 실패를 그는 범하지 않았다. 그곳은 초면의 인간을 순순히 들여보내 줄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여러 가지 수단을 총동원해서 밀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지라, 그는 먼저 로비에서 파란 유리가 끼워진 문을 밀고 나와 꽃집으로 들어갔다.

 

“멘도자 양의 마음에 들 만한 꽃이 뭐 없겠습니까? 이 가게에서는 배달도 해줍니까?”

 

“글쎄요.” 하고 꽃가게 주인은 탐탁지 않게 대답을 했다. 롬버드는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처음에 한 질문은 목소리가 작아서 들리지 않았을 더 반복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대개의 손님들이 난(蘭)이라든가 가디니아 같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을 보내주더군요. 하지만 그런 꽃들은 그분의 고향인 남미에서는 들판에 천지로 자라고 있어서 진귀한 것도 아니라고 하더군요. 정말로 그분을 기쁘게 해주고 싶으시다면…”

 

이것이야말로 귀하고도 특이한 종(種)이라고 하면서 그는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방을 장식한다고 하면서 그분이 직접 주문한 일이 두세 번 있었는데, 그런 꽃은 늘 정해져 있지요. 진한 연어 색깔인 핑크빛의 스위트피였어요.”

 

“좋아요, 이 가게에 있는 스위트피를 몽땅 주시오. 카드도 두 장 주시오.”

 

그는 카드 한 장에 영어로 간단한 문구를 썼다. 그리고는, 작은 포켓 사전을 꺼내어 한자 한자 스페인 어로 번역해서는 두 번째 카드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는 맨 처음의 카드는 던져버리고서 말했다.

 

“이것을 넣어서 곧바로 배달해 주시오. 어느 정도 걸릴까요?”

 

“5분 이내에 그녀의 손에 들어갈 겁니다. 방은 저 탑에 있어서 보이에게는 급행 엘리베이터로 배달하라고 하지요.”

 

롬버드는 로비로 되돌아가서 프런트 앞에 버티고 서서는 맥박이라도 재는 듯이 손목시계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신지요?” 하고 접수 담당원이 물었다.

 

가장 들떠 있을 때 쳐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조금 기다린 뒤, “바로 지금이오!” 하고 롬버드가 별안간 외치는 바람에 접수 담당원이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멘도자 양의 방에다 전화를 좀 해주시오. 지금 꽃다발을 보낸 신사가 방문하려 하는데 사정이 어떤지 물어봐 주시오. 이름은 롬버드, 꽃에 대한 말을 잊지 마시오.”

 

되돌아온 그 남자는 너무나 놀라서 그런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어서 올라오시라고 하는데요.” 하고 말해 주었다. 호텔의 불문율 하나가 여기에서 깨졌던 것이다. 한 판의 승부가 성공한 셈이다.

 

롬버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켓처럼 쏜살같이 탑의 방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는 무릎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열려진 문 옆에 젊은 여자가 마중나와 있었다. 검은 태피터 천으로 만들어진 제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전속 하녀가 분명하리라.

 

“롬버드 씨죠?” 하고 여자가 물었다.

 

“그렇소.”

 

세관의 조사는 아니지만,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듯했다.

 

“신문사의 인터뷰 기자는 아니세요?”

 

“아닙니다.”

 

“사인을 받고 싶어서 오신 것도 아니고요?”

 

“물론이오.”

 

“세뇨리타가 그…”

 

하녀는 뭐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다가, “… 잊고 계신 청구서에 관한 일이라도…?” 하고 물었다.

 

“그런 것도 아니오.”

 

이것이 마지막 질문 같았다. 하녀는 이제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문이 닫혔다가 잠시 뒤에 다시 활짝 열려졌다.

 

“어서 들어오세요, 롬버드 씨. 세뇨리타께서 편지를 보시고 나서, 머리를 손질한 뒤에 만나신다고 합니다. 앉아서 기다리세요.”

 

그는 기가 막히게 현란한 방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현란하다는 것은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그 성층권적(成層圈的)인 전망도, 숨을 삼킬 정도로 사치를 다한 가구들 (사실 그 가구들은 다른 곳에선 보려 해도 볼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음향 때문이었다. 온갖 소음, 잡음이 마구 뒤섞여 아무도 없는 방안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이다. 롬버드도 이렇게 시끄러운 빈 방에 들어간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쪽의 출입구에서는 줄줄, 쏴쏴 등의 소리가 들려왔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기름으로 튀김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그와 함께 향기롭고도 자극적인 냄새가 흘러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필시 튀김을 만들고 있는 게 틀림없다. 별로 잘 부르는 것은 아닌 노랫소리가 약간씩 들려오고 있었다. 또 하나의 출입구… 그것은 먼저 것보다 두 배에 가까운 넓이의 문이었는데, 시종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그곳으로는 더욱 요란한 진동음이 뒤섞여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뒤죽박죽된 잡음을 하나하나 분석한다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었지만, 그런 중에서도 단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삼바의 리듬, 거기에 덧붙여 라디오의 공전(空電)으로 찌륵거리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 다음은 기관총처럼 스페인 어로 쏘아대는 여자의 목소리… 어찌된 일인지 말하는 도중에 한 번도 숨을 쉬지 않고 기세좋게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다가, 조금도 쉬지 정도는 숨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조잘거리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소음들과는 좀 구별하기가 어려웠지만, 삐걱삐걱거리는 아주 집요한 소리까지 흘러들어오는 것이었다. 유리 표면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칠판 위에 분필을 꽉 대고 그어대는 듯한, 고막을 갈기갈기 찢는 아주 참기 어려운 소리였다. 게다가 마지막의 그 저주스러운 소리는 제법 오랫동안에 걸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참을성 있게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방에까지 들여보내준 이상 후반전은 그의 것인 셈이다. 후반전이 아무리 길어진다고 해도 조금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한번 하녀가 화살처럼 뛰어들어온 적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의 당황해 하는 모습으로 보아 더 중요한 용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쏴쏴… 하는 잡음과 바리톤의 가성이 뒤섞인 방으로 뛰어들어가서는 째지는 목소리로 한바탕 늘어놓는 것이었다.

 

“기름을 그렇게 많이 사용해서는 안돼, 엔리코! 세뇨리타가 말씀하셨잖아, 기름을 아끼라고!”

 

그렇게 소리지르고는 그녀가 원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가자, 이번에는 사방의 벽을 뒤흔드는 듯한… 마치 고물 버스 소리 같은 목소리가 사납게 울려퍼졌다.

 

“뭐야, 도대체 이거! 그녀의 입맛을 위해서 요리를 하고 있는 건가, 목욕탕에서 그녀가 올라탄 계량기의 눈금에서 맛보는 기쁨 같은 것이 있어야지!”

 

하녀는 학의 깃털로 장식된 핑크빛 옷을 몸에 걸치고는 누군가를 안기라도 하려는 듯이 양손으로 펼치고 있었지만, 부여된 임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작은 깃털들을 많이 흩부려놓았다. 그녀가 모습을 감추고 나서도 계속해서 깃털은 둥실둥실 마루에서 춤추고 있었다.

 

이윽고 쏴쏴… 하는 소리는 쫙…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해서 그치고, “아아!” 하고 깊으면서도 만족스러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하얀 재킷을 입고 요리할 때 쓰는 모자를 머리에 뒤집어쓴, 통통하게 살이 찐 커피색이 감도는 피부를 지닌 하인이 자신만만한 듯이 성큼성큼 들고 또 하나의 출입구를 빠져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딱 멎었다. 하지만 아주 한 순간이었다. 다시 계속해서 시끄러운 소리가 교향악처럼 폭발되었다. 이것에 비하면 아까까지의 것은 정말이지 침묵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소리 그대로에다가 새로운 소리를 첨가시킨 것이었다. 소프라노의 찢어지는 듯한 음성, 바리톤의 신음 섞인 목소리, 손톱으로 긁는 득득거리는 소리, 여기에다가 징을 두드리는 듯한 무거운 소리가 섞여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보온난로가 붙어 있는 쟁반의 둥근 뚜껑이 와장창 내동댕이쳐지며, 그것이 벽에 부딪쳤다가 차임벨이 굴러 흩어지듯이 요란한 소리를 울리게 했던 것이다.

 

통통하게 살이 찐 하인이 머리에서 김을 올리며 뛰어나왔다. 커피색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계란의 노른자와 고춧가루와 같은 붉은색이 여러 줄무늬로 되어서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는 양팔을 풍차처럼 휘두르면서 소리쳐 댔다.

 

“이젠 정말 나가버릴 거야! 요 다음 번 배로 돌아갈 거야! 아무리 무릎을 꿇고 빌어도 이런 빌어먹을 곳에는 이제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의자에 앉아 있던 롬버드는 머리를 안정시키려고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는 시끄러운 소리에서 귀를 보호해 주기로 했다. 인간의 고막이라는 것은 한 두면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수도 있는 법이다.

 

잠시 있다가 귀를 막았던 손을 풀어보니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 있었기에 그는 안심했다. 잠깐 동안의 이런 소란스러움은 이곳에서는 흔한 일인 모양이었다. 이 정도라면 언제든지 분위기를 되돌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뒤에 전화벨 대신에 현관문 벨이 울렸다. 아까의 하녀가 검은 머리의 말쑥한 신사를 불러들였다. 남자는 의자에 앉아서 롬버드와 함께 기다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롬버드만큼 인내심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 아주 성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금방 일어나서는 불안한 듯이 실내를 왔다갔다 했다. 그러다가 그는 롬버드가 가져온 스위트피 꽃다발에 눈을 두고 멈추어서서는 그 중 한 송이를 뽑아 자기의 코끝에 갖다댔다. 롬버드는 만일의 경우 그 남자와 합세해 보려는 마음을 먹었다가, 그 스위트피 일 때문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가씨는 이제 준비가 됐소?” 하고 그 남자는 나는 듯이 들어온 하녀에게 물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단 말야. 그 생각이 도망가 버리기 전에 이 손으로 꽉 붙잡아야 할 텐데.”

 

‘나도 역시 마찬가지야.’ 하고 롬버드는 남자의 목덜미를 증오스러운 시선으로 노려보면서 생각했다.

 

스위트피 향기를 맡고 있던 남자는 일단 일어섰다. 무릎 주위가 바들바들 떨리고 초조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이디어가 도망가요.” 하고 그는 경고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그 아이디어가 사라져 버리면 나는 다시 낡은 생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녀는 이 절박한 말을 가지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롬버드는 비꼬는 듯이 중얼거렸다.

 

“벌써 낡은 생각으로 돌아가 있는 거 아뇨?”

 

하지만 그 녀석은 성공했다. 하녀가 나와서 서둘러 남자를 방안으로 안내했던 것이다. 롬버드는 남자가 버리고 간 스위트피를 한쪽 발을 들어 구두 끝으로 들어올려서 위로 던져버렸다. 그렇게 해서 상한 비위를 달래보려 할 정도로 핏대가 하녀가 나와서 가만히 그의 앞에 허리를 조금 굽히고는 기분을 맞춰주려는 듯한 투로 말했다.

 

“저분과 의상 디자이너 사이에 꼭 당신을 만나게 해드릴게요. 저런 사람은 상대하기가 정말 어렵거든요, 알고 계시겠지만…”

 

“모르겠소.”

 

롬버드는 혐오스러운 듯이 말하고는 뻗었던 발 끝을 몇 번 떨고는 눈을 돌렸다.

 

그 뒤에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정적이 계속되었다. 물론 비교적 조용하다는 의미이다. 하녀는 한두 번밖에 출입하지 않았고, 전화벨도 한두 번인가 울렸을 뿐이다. 스페인 어의 기관총도 한 번인가 드문드문 들려왔을 뿐이었다. 다음 배로 귀국하겠다고 떠벌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베레모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보풀이 인 오버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온통 울상이 된 그는 단지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빌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오늘밤 식사는 집에서 할 건지 어떤지 물어봐 줄래요. 내가 가서 직접 물어볼 수는 없잖아. 그녀하고는 이제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겨우 롬버드에 앞서 면회한 사람이 작은 도구상자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는 방을 나가기 전에 일부러 한 바퀴 빙 돌아다보고는 또 한 송이의 스위트피를 무례히 다루는 것이었다. 롬버드는 살짝 한 발을 뻗어서 스위트피와 화병을 함께 남자 앞으로 쏟아지게 할까 하고 생각했다가는 곧 속 좁은 생각이라고 느끼고는 그 충동을 억제했다.

 

하녀가 안에서 나와서, “세뇨리타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일어서려던 그는 양다리가 흐느적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위에서 아래에까지 다리를 툭툭 두어 번 정도 두드리고 나서, 넥타이를 바르게 하고는 커프스 단추를 바로 잡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긴의자 위에 클레오파트라처럼 길게 엎드려서 누워 있는 여자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가 싶더니, 뭔가 털이 자란 부드러운 것이 바람을 헤치고 날아와서는 그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끼익끼익 하는 소리를 냈다. 바깥 방에서 가끔씩 들렸던 아까의 그 유리를 긁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기다란 비로드 천 뱀 같은 것이 살그머니 그의 목을 감아오는 듯 느껴졌다.

 

긴의자의 여자는 애정어린 어머니가 아이의 장난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빙긋이 웃었다.

 

“놀라지 마세요, 시뇨르. 나의 귀여운 비비예요.”

 

여자는 ‘비비’ 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기는 했지만, 그로서는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정체를 확인하려고 둘러보았지만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서 그런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부터의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기에 그는 딱딱해진 표정을 애써 풀고 싱글싱글 웃어보였다.

 

“나는 뭐든지 비비가 하라는 대로 해요.” 하고 여주인은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비비는… 뭐라고 할까… 손님을 감정(鑑定)하는 역할을 하고 비비는 소파 밑에 숨어버린답니다.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면 목에 달라붙지요. 그러한 분에게는 자연스럽게 행동한답니다.”

 

그녀는 안심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당신은 분명히 비비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자, 비비, 이쪽으로 내려와요.” 하고 말하면서 달래었다.

 

“아닙니다. 이대로가 좋습니다. 나는 조금도 상관없습니다.”

 

그는 여유 있는 듯이 그렇게 대답했다. 여자가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어마아마한 실례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 방해물은 오드콜로뉴 (향수 비슷한 화장수)를 흠뻑 뿌리고는 있었지만, 벌써 그의 코는 그것이 작은 원숭이라는 놈의 냄새로 질식할 것 같았다. 휘감겨 있던 원숭이의 꼬리가 풀어지더니 이번에는 반대방향으로 휘감기려 하는 것이었다. 그 녀석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원숭이는 마치 뭔가를 찾으려는 듯이 그의 머리카락을 정성껏 헤쳐가며 조사하기 시작했다.

 

여주인은 재미있는 듯이 빙긋 미소지었다. 이 여자의 기분을 누그러뜨리고 사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이 원숭이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롬버드는 구역질나도록 느껴지는 불유쾌함을 표면에 나타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앉으시죠.” 하고 그녀는 애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머리의 균형에 신경을 써가며 앉았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는 여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검은 비로드 파자마 위에 학의 날개로 장식된 핑크빛 숄을 걸치고 있었다. 그 파자마는 한쪽만으로도 보통 사람의 스커트를 충분히 만들 수 있는 넓이였다. 머리 위에는 타오르는 용암과 같은 끔찍한 것이 얹혀져 있었다. 그보다 먼저 방에 들어왔던 그 스위트피 남자가 만들어서 그녀의 머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하녀가 뒤에서 종려나무 같은 것으로 그것에다 부채질을 해대고 있었다.

 

“앞으로 1분만 있으면 머리 모양이 다 만들어져요.”

 

용암을 뒤집어쓰고 있는 여자가 얌전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스위트피에 넣어서 보낸 카드를 살짝 읽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롬버드 씨, 내가 좋아하는 꽃을 스페인 어로 카드를 써서 보내주시다니 정말 고마워요. 당신, 우리 고향에서 오셨나요? 거기에서 만난 일이 있었던가요?”

 

다행히도 그녀는 롬버드가 자기 신분을 애써 밝힐 필요가 없다는 듯이 다른 화제로 바꾸어 주었다. 커다랗고 검은 눈이 열정적인 빛을 발하면서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듯이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양손을 겹치더니, 그 위에 자기 얼굴을 올려놓고서 한숨 같은 것을 내쉬었다.

 

“아아, 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보고 싶어! 황혼이 지면 플로리다 거리에 켜지는 빨갛고 파란 그 불빛들!”

 

그가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여행안내서를 들여다본 게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도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팔레모 공원의 경마…”

 

“그만하세요.” 하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신음하듯 말했다.

 

“제발, 나, 울고 싶어져요.”

 

연극이 아니었다. 정말로 연극이 아니라는 것을 그로서도 알 수 있었다. 연극처럼 꾸미려는 사람들은 흔히 가슴 속에 잠겨 있는 감정을 야단스럽게 나타내려 하는 법이다. 본능적인 감정 그 자체는 꾸밀 수 없는 것이다.

 

“어쩌자고 고향을 버리고 이렇게 먼 땅에까지 온 거지?”

 

일주일에 7,000달러에다가 쇼 수입의 10퍼센트를 받기로 한 조건인데, 어쩌자고는 무슨 어쩌자고야… 하고 가슴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 동안 비비는 그의 머리를 자세히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는지 결국 포기해 버리고서 롬버드의 팔을 밟고 마루로 휙 뛰어내렸다. 이제 얘기가 좀 부드럽게 진행되겠지. 그의 숱이 많은 머리카락은 돌풍에 휘날리는 건초더미처럼 지독하게도 헝클어져 있었지만, 변덕스러운 여주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빗질하는 것을 삼가기로 했다.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자기의 말을 들어줄 절호의 기회라고 느낀 그는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렇게 방문하게 된 것도, 당신이 재색을 겸비한 분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에…” 하고서 그는 우선 아첨부터 했다.

 

“그래요, 나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 명배우는 자기 손가락을 바라보면서 쑥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스스로가 인정했다.

 

그는 의자를 죽 앞으로 끌고 가서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난 시즌의 곡명을 기억하고 있는지요? 그 왜 손님들에게 작은 꽃다발을 던져주면서 하던…?”

 

그녀는 잠깐 기다리라는 듯이 손가락 하나를 천정으로 향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아, ‘치카 치카 붐 붐’이었지요! 물론 기억하고말고요! 마음에 드셨나 보죠? 그렇게 좋았었나요?”

 

그는 부드러운 말씨로 맞장구를 쳤다.

 

“완벽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자 목 중간에 있는 갑상연골의 돌기가 약간 부풀었다.

 

“친구가…”

 

그의 진격은 거기에서 멎었다. 조금 전에 종려나무로 부채질하던 것을 끝낸 하녀가 또다시 방으로 들어와서는 이렇게 보고했던 것이다.

 

“윌리엄이 오늘의 지시를 받기 위해서 와 있는데요, 세뇨리타?”

 

“잠깐 실례하겠어요.”

 

여자는 롬버드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방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운전사 제복을 입은 키가 큰 남자가 발을 내디디고는 차려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12시까지는 아무런 일도 없어요. ‘콕 블’로 점심을 먹으러 갈 테니까, 10분 전에 호텔 현관에 차를 대세요.”

 

계속해서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로 이어져 나갔다.

 

“일부러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되니까, 저거나 가져가요.”

 

남자는 그녀가 가리키는 화장대로 가서, 은제(銀製) 담배케이스를 집어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시종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동작이었다.

 

“그런 것은 싸구려 백화점에서는 팔지 않아요.”

 

남자의 등을 향해서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경멸이 섞여 있는 것 같다고 롬버드는 생각했다. 그녀의 눈빛으로 판단하여 보건데, 윌리엄은 아무런 용무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다시 롬버드를 향해 돌아섰다. 눈빛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아까 그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내 친구가 어느 날 밤 여자를 데리고 당신의 쇼를 보러 갔었나 봅니다. 이렇게 방문한 것도 사실은 그 일 때문입니다.”

 

“나는 그 친구를 위해서 그 여성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녀는 오해를 했다. 새로운 흥미가 일어나는지 눈을 반짝였다.

 

“오, 정말 로맨틱하군요! 나는 로맨틱한 얘기를 무척 좋아해요.”

 

“유감입니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는 대사(大事)입니다.”

 

다른 경우에도 그랬었지만, 상대가 겁을 집어먹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그는 상세한 이야기는 피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재미있다고 느껴졌던 모양이다.

 

“탐정물이군요!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해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루한 건 질색이에요.”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그 기색으로 보아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작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급히 일어서더니 손뼉을 딱딱 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딱총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다. 하녀가 뛰어들어왔다. 새로운 손님이 찾아와서 이번에도 양보해야 되는 건가 하고 롬버드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몇 신 줄 알아?” 하며 댄서는 하녀를 나무랐다.

 

“시간에 신경을 쓰라고 내가 몇 번 얘기했는 줄 알아?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 이젠 시간을 놓쳤단 말이야.”

 

눈깜짝할 사이에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부는 듯한 그 계절풍이 쏴… 하고 그의 주위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스페인 어의 기관총 소리, 손톱으로 유리를 긁는 듯한 그 끔찍한 소리, 비비의 뒤를 쫓아 방안을 온통 뒤집으면서 쫓아다니는 하녀… 롬버드는 자신이 회전목마의 축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롬버드도 큰소리로 아우성을 치기 시작함으로써 그 요란법석통을 더욱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 훌륭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아니, 왜 그러고 있어요! 반대쪽으로 돌잖아!”

 

그는 찢어져라 고함쳤다. 드디어 그 활극의 막이 내려졌다. 비비는 들어갔다.

 

병이 든 원숭이는 맥없이 여주인에게 매달려 있었다. 양팔을 목에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그녀가 수염이 무성하게 나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거였다. 그는 다시 자기의 용건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매일 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고 있는 당신에게, 그 중의 특정한 한 사람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질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시즌 내내 일주일에 6회 밤공연, 낮공연 2회를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나는 지금까지 텅 빈 극장에는 나간 적이 없어요.” 하고 드디어 그녀는 천성적인 그 겸양의 자세를 발휘해서 말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방해가 안돼요. 한번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극장에서 불이 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손님들이 다 도망갔다고 생각하세요?”

 

그는 그 화재 이야기가 일단락지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내 친구와 그 여성은 맨 앞줄의 통로 근처 자리에 앉아 있었답니다.” 하고 호주머니에서 꺼낸 종이쪽지를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즉, 당신이 보기에는 객석을 향해서 왼쪽에 해당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주실 것은 바로 이겁니다… 그 여성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거죠. 더구나 노래의 두 번짼가 세 번째 코러스인가가 나오는 도중에…”

 

그녀의 눈에는 이상한 빛이 감돌았다.

 

“공연중에요? 재미있군요. 그런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언뜻 보니까, 어여쁜 그녀의 손가락이 보복을 하기 위해 손톱을 갈고 있기라도 한 듯이 비로드 바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럼, 그녀는 내 노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단 말이군요. 분명히 기차시간이라든가 뭔가가 생각이 나서였겠죠?”

 

“아니,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어요.” 하고 롬버드는 당황해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치카 치카 붐 붐’ 노래를 부를 때 당신은 그녀에게 꽃다발을 던져주는 걸 잊었죠. 그래서 그녀는 일어나서 당신의 주의를 끌려고 그녀는 당신 앞에 서 있었던 거죠. 그런데 우리들은…”

 

그녀는 그러한 일이 정말로 있었던가를 기억하려는 듯이 눈을 두세 번 깜박거렸다. 머리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게 주의를 하면서, 긴 손가락으로 귀의 뒤쪽을 찔러보기도 했다.

 

“당신을 위해서 어떻게든 기억해 보겠어요.”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하고 있는 듯했다. 기억을 되살리는 방법을 남김없이 총동원한 모양이었다. 어색한 손동작으로 보아 항상 피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열심히 피워댔다.

 

“안 돼, 기억이 나질 않아요.”

 

결국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미안해요. 아무리 해도 20년 전의 옛날 일처럼 느껴져요.”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당신 기분을 이해하지만 안되겠네요… 하는 듯이 두어 번 혀를 찼다.

 

그는 쓸모가 없어진 종이조각을 호주머니에 넣으려다가 문득 거기에 잠깐 눈길을 두었다.

 

“아,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이런 것이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그 여성은 당신과 똑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아주 비슷한 복제품이라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뭔가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다는 듯이 갑자기 그녀는 등을 폈다. 지금까지는 별 볼일 없었다 해도, 지금이야말로 그녀의 주의를 완전히 자기 쪽으로 쏠리게 할 수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실 같이 가느다란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몸을 움직일 수도, 아니 호흡하는 것까지도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비비까지도 발밑에서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볼 정도였으니까.

 

드디어 기억이 되살아난 모양이다. 그녀는 거칠게 담배를 비벼껐다. 그리고는 정글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괴성을 질렀다.

 

“아… 아…! 이제 겨우 생각이 났어요! 지금 막!”

 

스페인 어의 정신없는 폭포수가 그와의 대화에서 그녀를 휩쓸어 가버렸다. 그것은 격심한 소용돌이, 지독한 격류가 되어 주위를 온통 뒤집어엎었다가는 차차 가라앉더니, 다시 원래의 영어로 돌아와서 말했다.

 

“그때에 일어섰던 그 앞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던 그 여자는 나하고 똑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을 과시하려고 했지요. 그녀는 스포트라이트까지도 내게서 빼앗아 갔었어요. 흥! 기억하고 말고!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런 일을 누가 잊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이 멘도자를 만만히 봐서는 안되지!”

 

그 콧김이 너무 셌기 때문에 비비는 마른 나뭇잎처럼 1~2 미터쯤 불려 날아가는 것 같은 상태였다. 사실은, 두려워서 스스로가 움찔움찔 도망가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때 하녀가 나타났으나, 그것은 이 기분 나쁜 분위기를 표출시키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을 뿐이었다.

 

“의상실에서 아까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여주인은 팔을 머리 위에서 몇 번 꼰 뒤에 큰소리로 말했다.

 

“그녀라면 조금 더 기다리게 해도 돼! 지금 아주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녀는 긴의자에서 내려와 한쪽 무릎을 구부려서 자세를 바르게 한 뒤에 롬버드와 마주섰다. 지금의 정신상태를 오히려 자기의 예지의 표출이라고 보고 있는 듯했다. 양팔을 과시하듯 롬버드 쪽으로 쑥 내밀고는 딱다구리처럼 두 손으로 자기 가슴을 탁탁 두드리는 것이었다.

 

“나를 보세요! 아주 오래 전의 일이지만, 내 창자는 지금까지도 이렇게 뒤틀리고 있다고요! 보세요, 내가 어떻게 화를 내고 있는가를!”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의 팔로 몸통을 꽉 껴안고서 방안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몸을 돌리려고 폭이 넓은 바지의 끝을 크게 휘둘렀다. 비비는 구석에다 머리를 처박고 의지할 데 없이 웅크리고 앉아서는 가느다란 손을 포개고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그래서 당신과 당신 친구는 그 여자를 찾아내어서 어떻게 하려고요? 그 점에 관해서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

 

싸움을 걸려드는 듯한 그 어감에서 롬버드는 어떤 것을 짐작해 냈다. 만일 그의 대답에서 조금이라도 디자인 남용자에 대한 호의적인 변명이 들어 있으면, 멘도자는 뭔가를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분명히 그녀에게서는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최종목표는 반드시 같지는 않다고 말하고는, 그녀의 목표와 자기의 목표가 일치될 수도 있다고 꾸며보기로 했다.

 

“내 친구는 지금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하찮은 사실을 일일이 들어서 말씀드리면 오히려 폐를 끼치게 되니까 요점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 친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그 여성에게 달려 있습니다. 즉, 그 친구가 그날 밤 죽 그녀와 함께 있었던 것을 증명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가 그녀와 만난 것이 바로 그날 밤뿐이었거든요. 하지만 그 여자의 이름도, 주소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방으로 손을 써서 찾고 있는 중이지요…”

 

멘도자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잠시 뒤에,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요. 그녀의 정체를 찾아내는 데 실마리가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씀드리지요. 하지만 그녀와 만난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일어난 것을 보았을 뿐이에요. 그 이상은 아무것도 말할 게 없군요.”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녀가 롬버드보다 더 절망의 빛이 짙은 것 같이 보였다.

 

“그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까? 함께 온 남자 말입니다.”

 

“전혀 신경쓰지 않았어요. 남자가 있는지 어땠는지도, 객석이 깜깜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거든요.”

 

“사실은 여기에 한 가지 커다란 사실이 어긋나 있어서 전체가 연결되지 않고 거꾸로입니다만,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증인들은 그 남자는 기억하고 있지만 여자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요. 그런데 당신의 경우는 여자는 기억하고 있지만 남자는 모른다는 거죠?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가 어느 날 밤 극장 의자에서 일어섰다는 것만으로는 말이죠.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고, 또 그녀에게 동행이 있었는지도 모르고서는 말이죠. 동행이 있다고 해도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한 사람의 증인을 내세워서, 그 두 개의 고리를 잇고 싶은 겁니다.”

 

그는 실망한 듯이 양손으로 무릎을 탁 치면서,

 

“처음 상태로 되돌아간 것 같군요. 매우 실례했습니다.”

 

“어쨌든 더 노력해 보겠어요.”

 

그녀는 이렇게 약속을 하고는 롬버드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도움이 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겠어요.”

 

그는 가망성이 없다고 느꼈다. 서둘러서 악수를 나누고, 우울함으로 가득찬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는 절망의 늪에 잠겨 있는 듯이 보였다. 지금까지 어떤 경우보다도 확실한 증거를 잡을 듯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기에 실망이 더욱 컸던 것이다. 드디어 희미한 빛을 잡았나 보다고 생각한 순간에 훌쩍 도망가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하는 듯이 그의 얼굴을 빤히 훑어보고 있었다. 잠시 지나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이번에는 누군가가 회전문을 밀어주었고, 그리하여 그는 길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나오기는 나왔지만, 어느 쪽으로 가야 좋을지 결심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잠시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든 모두 희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쪽으로든 가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사소한 일조차도 그 상황에서는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택시가 지나가기에 그는 불러세웠다. 그러나 손님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차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지라 그는 잠시 동안 그 장소에 시간이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일이 인생에서는 자주 있는 법이다. 그는 멘도자에게 아무런 연락처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떠나가 버렸다면 그녀로서는 연락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두 대째의 택시를 타고서 막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 호텔의 회전문이 열리며 보이가 뛰어나왔다.

 

“선생님, 지금 멘도자 양의 방에서 나오셨습니까? 방금 그분이 전화를 하셨는데, 괜찮으시다면 다시 한 번 들러주십사 하더군요.”

 

그는 다시 호텔로 가서 단숨에 올라갔다. 처음과는 달리 희망에 찬 기대감 같은 게 그를 엄습해 왔다. 이번에는 마음이 아까와 같진 않았다. 그녀는 파자마를 벗고서 다른 것으로 갈아입으려는 참이었다. 아직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묘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도 당황하는 빛도 없이 물었다.

 

“당신 결혼하셨나요? 그렇지 않다 해도 결국은 당신은 아내를 맞아들일 테니 같은 뜻이겠군요.”

 

무슨 함축성이 있는 말 같았지만, 그로서는 의미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흘려들었다. 그녀는 기다란 천을 집어서, 그것을 허술하게 어깨에 걸쳤지만 몸을 가리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녀는 자기 발밑에서 입에다 핀을 물고 앉아 있는 사람을 물러가게 했다.

 

두 사람만이 있게 되자, 그녀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당신이 돌아가고 나니까 그때의 일이 생각나더군요. 저어, 내가 좀… 짜증을 냈댔어요.”

 

‘윌리엄 때문에 그런 모양이군.’ 하고 그는 문득 머릿속에서 생각이 났다.

 

“그리고 나는 짜증이 날 때는 항상 물건을 때려부숴야만 직성이 풀린답니다.”

 

그녀는 마루에 산산이 조각이 나서 흩어져 있는 유리를 가리켰다. 부서진 향수병이 방 한가운데 나뒹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떠오른 거예요. 우리들이 아까 얘기했던 그 여자에 관한 것인데, 그때도 내가 짜증을 냈던 게 문득 기억이 나지 않겠어요. 지금 물건을 던져서 저렇게 부숴놨잖아요. 바로 그때에도 물건을 던져서 저렇게 만든 일이 있었거든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상한 일이죠? 기억이 나더군요. 그래서 그거라도 도움이 될까 생각해서요.”

 

롬버드는 용수철처럼 그녀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그 일에 관해서 계속 설명해 나갔다.

 

“그녀가 나하고 똑같은 모자를 쓰고 깝죽거렸던 그날 밤에 나는 음악실로 돌아와서는 곧…”

 

한번 한숨을 쉬고 나서 계속했다.

 

“내 양손을 묶어두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여간 테이블 위에 있는 것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 저런 상태로 만들어놓았지요.”

 

그녀는 한쪽 손을 휙 하고 휘둘렀다.

 

“내 기분을 이해해 주시겠죠? 내가 나빴나요?”

 

“당신의 죄가 아닙니다.”

 

“꽉꽉 들어찬 관객들 앞에서 내게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게다가 이 멘도자가 그것을 눈감아 줄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로서도 그렇게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가 흥분을 잘하는 성격이라는 것은 아까부터 보아서 익히 알고 있는 터였기 때문이다.

 

“무대 감독과 내 하녀가 나를 간신히 뜯어말렸지요. 무대복 차림으로 음악실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나를요. 나는 그 여자를 극장 현관에서 찾아내서는 내 두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거든요.”

 

순간 그는 정말로 그렇게 되었더라면, 극장 입구에서 멘도자가 그녀와 싸움이라도 벌였더라면 일이 지금처럼은 되지 않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일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었다면 헨더슨이 말해 주지 않았을 리가 없고, 그녀 또한 더 빨리 기억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눈으로 꼭 그녀를 보고 싶어요.”

 

그녀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아직 그때의 기분에 싸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롬버드가 조심스럽게 두세 발자국 뒤로 물러설 정도였으니까. 그녀는 그와 마주보고 서서는 자세를 낮추고, 마치 새우처럼 두 손의 손가락을 바들바들 떠는 것이었다. 비비는 무서웠는지, 아니면 애원이라도 하는 듯이 그 작은 손을 굳게 쥐었다 풀었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등을 펴고서 평형수영이라도 하는 듯 기지개를 켜며 말을 이었다.

 

“그 다음날이 되어도 나는 화가 풀리지 않더군요. 나라는 여자는 그 정도로 끈질겨요. 그래서 그 모자 가게로 가서 내 모자를 장식해 준 디자이너에게 화풀이를 해댔죠. 거기에서 손님들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그 디자이너에게 모자를 내던졌어요. 그리고는 이렇게 한바탕 쏴붙였지요. ‘당신은 이 모자를 내 무대용으로 하나만 만들었다고 했죠, 그렇죠? 어느 누구도 이것과 똑같은 것은 만들 수 없다고 하면서 말예요?’ 그런 다음에 그 모자를 그 여자의 얼굴에다 대고 북북 비벼댔어요. 그 가게를 나오면서 보니까, 그녀는 입에 처박힌 모자의 재료들을 토해내고 있더군요.”

 

그녀는 뭔가를 도와주려는 듯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런 말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는지요? 어때요? 그 사기꾼 같은 디자이너는 분명히 같은 모자를 사간 손님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있는 곳에 가면 당신이 찾고 있는 여자에 대해서 알 수가 있을 텐데요.”

 

“아주 좋습니다! 이젠 됐어요!”

 

그가 하도 크게 외치는 바람에 겁에 질린 비비가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가서는 꼬리까지도 감추어버렸다.

 

“그 디자이너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기다리세요. 찾아볼 테니까.”

 

그는 변명하려는 듯이 자기 관자놀이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여러 쇼에 출연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의상실이 바뀌어서 잘은 모르지만…”

 

그녀는 사람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지난번 시즌 쇼 때의 청구서를 조사해서 모자에 관한 것이 있는지 찾아봐.”

 

“하지만, 세뇨리타, 그렇게 오래 된 청구서는 없을 텐데요?”

 

“바보 같은 소리. 처음부터 한번 조사해 보란 말이야.”

 

여느 때처럼 여배우는 무관심한 투로 말했다.

 

“지난달 분을 찾아보면 될 거야. 지금까지도 청구서가 계속오고 있으니까.”

 

롬버드로서는 참고 있기 어려운 기나긴 시간이 지났을 때에야 비로소 하녀가 돌아왔다.

 

“예, 찾았어요. 역시 이번 달에도 와 있더군요. ‘모자, 한 개, 100달러.’ 그리고 이름은 ‘케티샤’로 되어 있습니다.”

 

그 청구서를 롬버드에게 건네주었다.

 

“아시겠어요?”

 

그는 주소를 적고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의 손이 히스테릭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 작은 종이쪽지가 눈처럼 마루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발로 밟아서 뭉개며 말했다.

 

“대단히 끈질겨요.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청구서를 보내오니 말예요. 창피한 줄도 모르는 모양이야.”

 

그녀가 얼굴을 들었을 때는 롬버드는 벌써 옆방을 지나쳐서 출구로 향하는 중이었다. 실로 건방진 남자였다. 알고 싶은 것을 안 이상, 그녀의 이용가치는 거기까지 뿐이었고, 이제는 한시바삐 다음의 고리를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롬버드에게 일이 잘될 거라고 말하며 방을 나갔다. 그녀의 동기는 자기의 분을 풀기 위해서였지 결코 애타주의(愛他主義)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현관문까지 쫓아갔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스커트가 걸려서 현관문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복수의 마음을 담아 그의 등뒤에다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 여자, 꼭 붙잡기를 빌겠어요. 그년, 아주 혼내줘 버려요!”

 

여자는 다른 일은 참을 수 있었지만… 자기와 같은 모자를, 그것도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쓰고 있는 상대에게는 말투까지 경멸조로 바뀌는 법이다.

 

그 상점에 들어서자, 그는 육지에 올라온 물고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여기보다 더 괴상한 장소일지라도 발을 내디뎠을 게 분명했다.

 

그것은 골목길에서 잘 보이는 건물 중 하나였는데, 보통 주택을 상점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점에서는 돈을 들여서 독자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거꾸로 점점 더 평범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1층 전부가 상업용어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전시실 같은 모습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는 자기 용건을 알리고, 그 전시실의 한쪽 구석에서 몸을 숨기듯이 하고서 기다렸다. 그는 쇼가 한창 진행될 때에 들어왔던 것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열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해도 역시 기분은 안정되지 않았다. 남자는 자기 말고는 없는 듯 보였다. 외모로 보아서 한 칠십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한 명 북적거리는 손님 속에 섞여서 앉아 있긴 했다. 그 옆에 있는 귀여운 처녀는 필시 노인의 손녀일 것이고, 그녀가 옷을 고르기 위해서 억지로 끌고 온 게 틀림없으리라.

 

‘인간의 마음은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이로군.’ 하고 롬버드는 신경질적인 시선을 노인에게 던진 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밖에는 모두가 여자들이었다. 문지기도, 시중드는 사람도 몽땅 여자였다.

 

마네킹들이 하나씩 천천히 안에서 나타나 이쪽 저쪽으로 우아하게 걸어가면서 방 앞을 빙 돌았다. 게다가 롬버드가 일부러 선택한 그 구석 자리가 바로 길 모퉁이였기 다가왔다. 그 덕분에 그는 그 우아한 모습들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앞에서 멈춰서는 경우도 있었다. 무의식 중에 그는, ‘나는 물건을 사러 오지 않았소.’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용기는 사실 없었다. 그는 아주 기분이 나빴다. 더구나 다른 것이 보고 싶은데.


그녀들의 얼굴만 바라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더욱 핏대가 나는 것이었다.

 

미리 연락을 해놓았던 처녀가 들어와서 그를 구해내 주었다.

 

“마담 케티샤가 2층의 내실에서 뵙겠다고 하는군요.” 하고 그 처녀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심부름을 하는 처녀가 그를 안내해서는 문에다 노크를 하고 나서 계단을 내려가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책상 맞은편에 살이 찌고, 머리카락은 붉은 중년의 아일랜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의상 디자이너라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고, 다만 뚱뚱하고 칠칠치 못한 인상만이 강하게 풍길 뿐이었다. 그녀는 돈을 벌어들이는 데는 마법과 같은 힘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리라.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는 하나도 치장하지 않고 이처럼 지저분한 모습으로 사람을 맞는 것이다. 하지만 첫인상으로는 호감이 가는 편이었다.

 

그녀는 크레용으로 채색한 디자인 스케치를 한장 한장 잽싸게 넘기면서 추려내고 있었다. 합격품은 왼쪽에, 불합격품은 오른쪽에… 아니, 그 반대인지도 모르지.

 

“무슨 일이신가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멘도자와 만나고 나서 곧장 이리로 왔기 때문에 아직 피곤이 풀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시간도 꽤 늦어서 벌써 오후 5시에 접어들고 있었다.

 

“실은 당신이 전에 거래하던 고객을 만나고 곧바로 이리로 왔습니다. 남미의 여배우 멘도자.”

 

그래도 그녀는 얼굴을 들지 않고, “용건만 말씀하세요.” 하고 말하며 기분나쁘게 재촉했다.

 

“당신은 작년에 그녀의 쇼를 위해서 모자를 만들어 주었죠. 기억하고 있습니까? 가격은 100달러. 나는 그 모자의 모조품을 사간 여자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나는 그녀를 스케치들부터 피난시켰다. 합격품은 서랍 속에, 불합격품은 휴지통 속에.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짜증을 낼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런 감정에 타임 스위치를 꽉 누를 수도 있는 여자 같았다. 그점에 있어서는 멘도자 같은 여자보다는 훨씬 다루기가 쉬웠다. 그녀는 매우 정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쪽 손을 수류탄같이 책상 위에다 내리치고 나서는 소리질렀다.

 

“그 이야기, 그 모자에 관한 일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해요. 그때에도 말했지만, 똑같은 것은 결코 만들지 않았습니다. 내가 원본을 발표할 때는 진짜의 것이었어요. 복제할 수 있었다고 해도, 우리 상점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책임은 질 수 없어요. 손님을 배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복제품이 있었잖습니까?”

 

그가 맞대꾸했다.

 

“그리고 그 모자는 극장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멘도자의 눈에까지 띄게 된 겁니다.”

 

그녀는 양팔꿈치를 책상 위에 얹어놓은 채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하고 싶어하든가요! 명예훼손죄로 고소라도 하려는가요? 그녀가 계속해서 그렇게 고집을 부릴 작정이라면 고소해도 좋아요! 그녀는 거짓말쟁이에요. 돌아가서 그녀에게 내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전해 주세요!”

 

그는 모자를 벗고 방구석에 있는 의자로 다가갔다. 여기에 온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꼼짝도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머리를 흔들거리며 피로를 풀었다.

 

“그녀는 내가 여기 온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까 그녀의 일은 잊어버리시지요.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의 목적에 관계되는 겁니다. 정말로 그 복제품 모자는 있었습니다. 사실은 내 친구가 극장에서 그 모자를 쓴 여자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죠. 아니라고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나는 단지 그 여자의 이름만 알고 싶을 뿐입니다. 이곳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명단에 적혀 있을 그 여성의 이름만을요.”

 

“그런 것은 적어두지 않아요. 우리 상점에서는 그런 식으로는 장사를 안 해요. 당신, 도대체 언제까지 그 쓸데없는 얘기만 늘어놓을 건가요?”

 

그는 턱을 쑥 내밀고는 지지 않겠다는 전체가 진동했다.

 

“하늘에다 두고 맹세하겠소, 지금 한 남자의 목숨이 시간 단위로 헤아릴 정도로 절박합니다! 당신은 거기에 그냥 앉아서 내 질문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태도로 나온다면, 나도 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여기에서 잘 수밖에 없소. 내가 말하는 뜻을 모르시겠습니까? 한 남자가 9일 뒤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단 말입니다.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모자를 쓰고 있었던 그 여성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이라면 그 여성의 이름 정도는 가르쳐 줄 수가 있을 텐데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모자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 여자에 관한 겁니다.”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채로 흘러나왔다. 이제서야 짜증이 풀린 것이다.

 

“그 남자의 이름이 뭐죠?”

 

“스코트 헨더슨. 자기 아내를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갇혀 있는 남자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에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책상을 내리쳤다. 하지만 아까 같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 친구는 죄가 없어요. 사형집행을 어떻게 해서라도 중지시켜야 합니다. 멘도자는 이 상점에서 특별 주문한 모자를 샀지요. 그것은 다른 상점에서는 만들 수 없는 모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그것과 똑같은 모자를 쓰고 극장에 나타났어요. 그는 그녀와 함께 그날 밤을 보냈지만, 이름이고 뭐고 하나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녀만 있다면 살인이 일어난 그 시간에 그가 집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지요. 이만하면 모든 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해 주지 않는다 해도 나로서는 이 이상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 여자는 사건의 단서를 주는 데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거라는 인상을 그는 받았다. 이미 결단을 내리고 있었지만, (결단을 내리는 데는 시간이 길게 걸리지 않았다) 자기방어를 위해서 그녀는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설마 이것은 마귀할멈이 덮어씌우는 법률의 올가미는 아니겠죠? 그녀는 아직까지도 모자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와서 심한 행패까지 부렸어요. 내가 고소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고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러한 얘기가 세상에 상품은 신용을 철저히 지켜야 하거든요.”

 

“나는 변호사가 아닙니다.”

 

그는 상대방이 경계심을 풀게끔 했다.

 

“나는 남미에서 온 기술자입니다. 의심스럽다면 신분증명서를 보여드리지요.”

 

그는 호주머니에서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모조리 꺼내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시다면 안심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괜찮습니다. 나의 관심은 헨더슨에 대한 것 뿐입니다.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중이거든요. 당신들의 사소한 싸움 같은 건 나로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편에 들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그것은 남의 일에 불과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이 꼭 닫혀 있는가를 확인하려고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자, 됐어요. 사실은, 이 상점의 비밀이 누설되고 있는 게 분명해요. 이것만은 멘도자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아시겠죠? 복제된 모자의 원본은 여기 것이에요. 물론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여기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몰래 바깥으로 흘러나간 모양이에요. 당신에게만은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만, 이 이상 소문이 퍼지면 곤란합니다. 만일 이 일이 알려지면 나는 모든 사실을 부정할 거예요. 우리 상점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는 디자이너는 결백해요. 그녀가 우리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죽 함께 일해 온 친구로서, 즉 동업자 같은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가 고안한 아이디어를 50이나 75달러 같은 돈을 받고서 팔아넘길 여자는 아니지요.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이 상대와 경쟁하게 되니까요. 멘도자가 우리 상점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돌아간 날, 나는 그녀와 둘이서 비밀리에 조사해 보았지요. 그런데 바로 그 모자의 스케치만이 그녀의 앨범에서 없어진 거예요. 복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훔쳐간 사람이 있었던 거죠. 분명히 바느질하는 여자의 소행이라고 우리들은 짐작했지요. 그 모자를 실제로 재봉한 여자 말이에요. 하지만 당연히 그녀는 부인했고, 이쪽에서도 확실한 증거는 없었어요. 서둘러 만들었을 거예요. 우리들이 조사하기 전까지 훔쳐간 스케치를 앨범에 다시 끼워넣으려 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거지요. 그리고 우리들도 그와 같은 불상사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여자를 그만두게 했지요.”

 

그녀는 엄지손가락으로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롬버드 씨, 그렇기 때문에 우리 상점의 판매대장에는 복제된 모자를 산 사람의 이름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단서도 없어요. 힘을 다해서 도와드리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내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이 그 여자를 꼭 찾아야만 한다면 우리 상점에서 일한 그 바느질하던 처녀를 만나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다 해도 그녀가 그 모자에 대해 알고 있다고는 보장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 당시 그녀를 내쫓을 때는 우리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지요. 만나고 안 만나는 것은 당신 자유예요.”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단서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또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할 수 없군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는 암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약간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는 친절하게 말하고 나서 책상 위에 있는 스피커의 스위치를 눌렀다.

 

“루이스 양, 그 멘도자 모자 사건 이후에 내쫓은 봉제공 처녀 있지? 그 처녀의 이름을 알아봐 줘요. 하는 김에 주소도.”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책상에다 팔을 괴고 기다렸다. 그의 그런 태도를 보고서 그녀는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친구 일에 대단히 열심이군요?”

 

말씨는 매우 아름다웠다. 이런 억양으로 말을 한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아주 드문 일이리라. 그러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그녀는 헛기침을 해야만 했으니까. 대답을 요하는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묵묵히 있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서랍을 열더니 아일랜드산 위스키를 꺼냈다.

 

“육교 밑에서 팔고 있는 어린애 장난감처럼 약한 위스키예요. 정말이랍니다.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이것을 한잔 마시곤 하지요. 이런 것은 죽은 남편에게 배웠어요.”

 

그때 스피커를 통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은 매지 페이튼. 여기에서 근무했을 때의 주소는 14번가 498번지입니다.”

 

“14번가 중에서도 어느 쪽?”

 

“여기에는 그렇게밖에 적혀 있지 않아요.”

 

“좋습니다.”

 

롬버드가 말했다.

 

“동쪽이든 서쪽이든 둘 중에 하나겠죠.”

 

그는 번지를 적고서 모자를 쓰고 단추를 끼고는, 다시 생긴 희망을 가슴에 품고 나갈 준비를 했다. 휴식의 시간이 끝났던 것이다. 그녀는 불빛을 막으려는 듯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앉아 있었다.

 

“좀 기다려 보세요. 그녀에 관한 일이 생각날지도 모르겠군요. 좋은 단서가 말예요. 잘못을 시인할 처녀는 아니니까요.”

 

그녀는 얼굴을 갸웃거리다가,

 

“겨우 그녀에 대해 생각이 났어요. 아주 내성적인 처녀였지요. 그녀의 옷차림을 보고서 짐작할 수가 있죠. 그러한 처녀들은 돈 문제라면 다른 처녀들보다도 오히려 유혹에 빠지기 쉽답니다. 또, 그러한 애들은 대개 남자를 무서워해서 남자와 사귀려 들지도 않아요. 그러한 방면에 예비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남자를 사귄다 해도 쓸모없는 인간을 잡게 되지요.”

 

상당히 날카로운 안목이었다. 롬버드는 그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멘도자에게 100달러를 받고 그 모자를 팔았지만, 그 처녀라면 50달러를 받고서도 복제품을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 점에 착안해 보세요. 분명 입맛이 당겼을 거예요. 만일 그녀를 찾아내신다면.”

 

“만일 찾아낸다면요.”

 

롬버드는 맞장구를 치고서 무거운 걸음걸이를 계단으로 옮겼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흑단처럼 검은 문을 열어 주었다. 위쪽의 네모난 창문은 닫혀 있고, 그 맞은편 쪽에선 노란 커튼이 보였다.

 

“무슨 일이죠?”

 

“매지 페이튼이라는 여자를 찾고 있는데요.”

 

그녀는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왜 아주 순진하고 평범한 처녀 말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알고 있어요. 떠난걸요. 이사한 지 꽤 오래 되었어요.”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밖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고 있었다. 일부러 밖에 나왔기에 뭐 재미있는 것이라도 보려는 듯한 태도였다. 그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짐작도 못하시나요?”

 

“그냥 훌쩍 떠났어요… 나는 그것밖에 몰라요.”

 

“아니, 그래도 뭐 좀 짐작가는 점이라도 없나요? 짐을 날라 준 사람이라도?”

 

“그녀 혼자서 했어요.”

 

아주머니는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며, “저쪽으로 갔어요.” 하고 대답했다.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리킨 쪽은 오직 길 뿐이다. 길, 그리고 강. 강의 맞은편에는 15에서 20개 정도의 주(州)가 놓여 있다. 그 끝은 태평양이고.

 

하숙집  아주머니는 신선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고 있었다. 거리 구경도 이제는 싫증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뭐 이야기를 꾸며보라면 못할 것도 없지요. 당신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그녀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그것을 훅 불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표시했다.

 

“그런데 왜 그러죠? 당신 얼굴색이 너무 안 좋군요.”

 

“그래요. 여기에 있는 돌층계에 앉아서 쉬어도 좋을까요?”

 

“어서 편안하게 앉도록 하세요.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니까, 출입에 방해가 되지만 않게 해준다면야.”

 

꽝! 하고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