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스가 그녀에게 건네준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클리프 밀번
고용된 밴드맨, 지난번 시즌에 카지노 극장 출연.
현재는 리젠트 극장.

 

그 외에 전화번호가 두 개. 하나는 어느 시간까지의 경찰서의 전화. 또 하나는 그의 집 전화… 이것은 그의 근무가 끝난 뒤에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할 경우를 위해서였다.

 

“이런 식으로 해두면 나에게서 별도로 지시받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 당신이 알아서 생각해서 행동하세요. 당신 직감이 나보다 더 나은 지혜를 내줄 거요. 그렇게 떨고만 있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요. 당신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요.”

 

지금 거울 앞에 앉아서 그녀는 여러 가지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부딪쳐 보는 거야… 이것이 그녀가 생각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깔끔하고도 왈가닥 같은 얼굴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곧게 뻗은 가리마에서부터 한쪽 옆으로 곱게 빗어내린 단정한 머리… 이것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머리 가죽이 아플 정도로 잔뜩 당겨서 말아올린 머리엔 구릿빛 잔털과 그것은 어떤 열매의 즙으로 축축하게 적신 뒤 금속 투구처럼 말린 것이었다. 그 밖에 언제나 그녀의 옷차림새에서 느낄 수 있었던 싱싱하고 우아한 느낌도 역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그 대신 혼자 자기 방에 있는 것조차 부끄러워 몸을 사릴 것 같은 몸에 꼭 달라붙은 옷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스커트는 너무 짧아서 의자에 앉으면 징그럽게 다 드러날 정도였지만…

 

아무튼 이런 모습이라면 남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하리라. 양쪽 뺨에는 둥그런 연지. 마치 정지신호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녀가 노리는 것은 그 반대인 진행신호인 셈이다. 땅콩을 꿴 목걸이가 목 언저리에서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손수건은 레이스 장식이 지저분하게 붙어 있는 부려놓았다. 그 악취미적인 향기에 자기도 질린 듯 콧등을 찡그리며 황급히 핸드백 속으로 쑤셔넣었다. 눈두덩이에도 지금까지는 사용해 본 적도 없는 시퍼런 색을 찍어발랐다.

 

스코트 헨더슨은 이런 장면을 처음부터 죽 거울 옆에 둔 사진틀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쓰러질 듯한 애틋한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당신마저도 이것이 난 줄은 모르시겠죠?”

 

그리고는 후회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예. 눈은 감으시고.”

 

그런 모습에다가 남자가 쉽게 접근해 올 수 있는 음란한 물건들을 잔뜩 걸치고 있었지만, 여기에서 한 수 더 떠보기로 했다. 그녀는 다리를 쳐들고서 장미 장식을 넓적다리를 묶었다. 그곳은 허리를 구부리면 빠듯이 보이는 부분의 바로 밑이었다.

 

그녀는 얼른 돌아섰다. ‘그의 그녀’는 지금 거울에 비친 저 여자여서는 안 된다. 그녀는 ‘그의 그녀’가 아닌 것이다. 그녀는 방안 이곳저곳의 전등을 끄고 돌아다녔다. 겉으로는 냉정한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터였다. 그 모습은 그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마저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였다면야 물론 한눈에 알아볼 테지만. 그러나 그는 여기에는 없는 인물이었다.

 

드디어 문 옆의 마지막 전등을 끄기에 앞서 그녀는 짧은 기도를 중얼거렸다. 외출할 때면 언제나 외어대는 들어 있는 그이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그녀는, “그래요, 아마 오늘밤일 거예요.” 하고 낮게 소리를 내지 않고 중얼거렸다.

 

“반드시 오늘밤은 멋지게 해낼 거예요.”

 

그녀는 전등을 끄고는 문을 닫았다. 그이는 어둠 속 유리 저편에 남겨두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천정의 조명은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밑 보도에는 아직 인적이 드물었다. 그녀는 장내의 불빛이 꺼지기 전에 상대에게 추파를 던질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1초라도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공연작품에 대해서는 반쯤밖에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쇼가 끝나고 나올 때쯤 되면 맨 처음 들어갈 때보다 더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쇼의 제목은 ‘쉬지 말고 춤을’이었다. 그녀는 매표구 앞에서 발을 멈췄다.

 

“오늘밤 좌석을 예약해 두었어요. 맨 앞줄 통로 옆. 이름은 미미 고든.”

 

이 좌석을 손에 넣기 위해서 그녀는 며칠간을 소비해야만 했었다. 그것은 사실 중요한 일은 쇼를 보는 게 아니라, 그녀 자신을 노출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돈을 꺼내어 지불했다.

 

“전화로 말한 대로 틀림없겠죠? 틀림없이 드럼치는 분 옆좌석이죠?”

 

“그렇습니다. 예약을 받기 전에 확인해 두었습니다.” 하고 매표구 남자는 말하며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찡긋 윙크를 보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부러운데요, 그 남자가.”

 

“그건 오해예요. 그 남자야 아무려면 뭐라고 하나요, 누구에게나 취미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내 경우에는 그게 드럼이에요. 쇼를 보러 갈 때는 언제나 드럼 옆좌석에 앉는답니다. 드럼을 치는 모습을 보면 왠지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거예요. 드럼 중독이랄까, 어릴 때부터 그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미쳤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녀는 양손을 벌리며)… 그렇게 된 거예요.”

 

“쓸데없이 끼어들어서 미안합니다.”

 

매표구 남자는 멋적게 사과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표를 받는 사람은 지금 막 도착한 모양이었고, 안내원도 계단 밑 대기실에서 막 올라온 것 같았다. 그녀가 얼마나 일찍 입장했는가는 그것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발코니석, 옛날부터의 통념은 이젠 통하지 않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1층 정면석에서는 그녀가 가장 먼저 온 손님이었다.

 

그녀는 혼자 털썩 자리에 앉았다. 조그만 머리를 금박으로 장식한 인물이 휑뎅그렁한 빈 좌석의 바다에 잠겨 있다. 지극히 조악스럽게 꾸민 그녀의 몸차림은 외투로 잔뜩 감싸고 있어서 다른 세 방면으로는 완벽하게 감추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내보임으로써 효과를 얻고자 하는 상대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등뒤의 좌석들이 점차로 콰당콰당 젖혀지기 시작했다. 극장 안의 빈 좌석들이 거의 채워져 가자 옷 스치는 소리, 나지막한 속삭임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녀는 오직 한곳에만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내려앉은 듯 보이는 조그만 문이었다. 그 문은 그녀의 좌석과는 반대쪽에 있었다. 그 틈새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문 뒤쪽에 모여서 출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그들은 오케스트라 박스로 들어왔다. 모두들 상반신을 앞쪽으로 구부리고서 각각 자기 자리로 향했다. 그녀는 누가 그 남자인지를 몰랐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자리에 앉을 때까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모두가 제자리를 잡고 앉자, 에이프런 스테이지 (불쑥 나온 앞무대) 앞에 가느다란 초생달 모양이 이루어졌다. 지휘자는 푸트라이트보다 한 단 낮은 곳에 있었다.

 

프로그램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체했지만, 사실은 검정을 칠한 듯한 속눈썹 밑으로 앞쪽을 살피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나오는 저 남자일까? 아니었다. 그는 한 자리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그럼, 그 뒤를 따라나오는 저 남자? 저건 너무 악당 같은 얼굴인데. 그 남자가 두 번째 앞좌석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그녀는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클라리넷 주자 정도 되겠군. 그럼, 저기 저 남자, 그래 저 남자가 틀림없을 거야… 아니, 그 남자도 방향을 바꿔 반대쪽으로 가버렸다. 첼리스트였다.

 

이제 더 이상 나올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불안을 느꼈다. 마지막 한 명이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이제 그들은 전부 제자리를 잡고서 악기의 음을 맞추고 있었다. 지휘자도 이미 제 위치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 바로 앞의 드럼 의자만이 묘하게 불길한 느낌을 던져주며 빈 채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쫓겨났나? 제길. 아니,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대역이 그 자리를 메꿀 텐데? 갑자기 병이 나서 오늘밤엔 출연할 수 없게 된 건가? 아니, 하필이면 오늘밤을 골라서 병이 난단 말야! 지금까지는 매일 밤 거르지 않고 출연했었는데. 이 특별석 표를 다시 한 번 손에 넣자면 앞으로 몇 주가 걸릴지도 모른다. 쇼는 호평 속에 진행되고 있었고, 표도 연일 매진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시간은 정말 귀중했고, 또한 점점 있지 않은 것이다.

 

악사들이 낮은 목소리로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그녀는 바로 앞좌석에 있었는지라, 악기 조율 때문에 다른 관중은 들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얘기까지도 거의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그 녀석 오늘 본 적 있나? 이번 시즌이 시작되고부터 제시간에 온 적이 한 번도 없어. 벌금 가지고는 안되겠어.”

 

그러나 알토 색소폰이 말을 받았다.

 

“금발 머리를 쫓아가서 들판 속에라도 처박혀, 여기 오는 것을 잊어버렸나 봐.”

 

그 뒤의 사내가 농담 반 섞어 끼어들었다.

 

“그래도 그 녀석만한 드럼 주자도 구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그녀는 프로그램의 이름에 눈을 떨구고 있었지만, 활자는 부옇고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불안이 엄습해 온몸이 굳어졌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오케스트라 악사들은 모두 눈앞에 있는데, 그 중 오직 한 명… 그녀에게 도움이 될까 말까 한 그 사람만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정말이지 그날 밤 스코트처럼 재수가 없어.’

 

전주가 울려퍼지기 전의 정적이 찾아왔다. 악사들은 긴장을 했고, 악보대의 불이 들어왔다. 벌써부터 절망에 빠져 있던 그녀는 그쪽으로는 눈도 주지 않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오케스트라 박스 쪽에서 한 개의 그림자가 모든 사람의 뒤를 묘하게 돌아와서, 그녀의 바로 앞쪽 좌석을 차지했다. 재빨리 오려고, 또 가능한 한 지휘자의 눈을 피하려고 등을 잔뜩 구부리고 종종걸음으로 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그 남자는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첫 순간부터 어쩐지 자라 목을 연상케 했고, 그 뒤로도 이 인상은 계속 변하지 않았다.

 

지휘자는 그에게 따끔한 눈길을 주었다. 그는 얼굴도 붉히지 않았다. 그리고는 헐떡거리며 옆자리 사내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내일 두 번째 레이스는 반드시 잡을 수 있어. 확실한 정보가 들어왔거든.”

 

“확실하다는 건 불확실한 게 아니란 말이야.”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직 그녀를 보지 못했다. 아직까진 악보대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악기 상태를 맞추고 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준비를 끝내고서, “오늘 경기는 어때?” 하고 옆자리 사내에게 물었다. 그리고는 방향을 바꿔, 마침내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박스의 난간 너머로 극장 안을 바라다보았다. 그녀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가 있는 쪽을 응시했다. 작전은 성공했다. 그녀의 시야 범위 밖에서 그는 누군가를 팔꿈치로 쿡 찌른 듯했다. 그러자 멍청한 대답이 들려 왔다.

 

“응, 알고 있어, 봤어.”

 

그녀의 존재는 그에게 상당한 충격을 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이 더듬는 곡선을 그래프로 그리려고 마음먹는다면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차분하게 대처했다. 이렇게 되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생전 처음 겪는 일인데도, 나나 저 사내나 충분히 서로를 느끼고 있다는 게 묘하군.’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프로그램에 그어진 어떤 선에, 그 수수께끼 같은 기호의 의미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모양으로 빤히 그곳에 시선을 쏟고 있었다. 그것은 점으로 페이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주욱 시선을 집중할 일이 생겼다.

 

빅토리느·······딕시.

 

그녀는 점을 세어보았다. 배역과 출연자의 이름 사이에 24개가 찍혀 있었다.

 

‘자,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지. 꽤 시간을 끌었으니까.’

 

그녀는 천천히 속눈썹을 들어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그녀가 질려서 눈을 돌리려니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그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그가 보고 있는 한은 마찬가지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 눈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

 

‘나에게 흥미가 있소, 아가씨? 좋아요, 주저하지 마시오. 나는 괜찮으니까.’

 

그는 상대가 너무나도 간단히 받아들이는 듯 보이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마음껏 바라보았다. 살짝 웃어주기까지 했다. 그 미소는 그녀가 거부한다면 이내 물러설 준비를 갖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태연스레 받아들였다. 그녀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미소를 보냈다. 그의 미소가 은근해졌다. 그녀의 미소도 마찬가지로 은근해졌다.

 

서론이 끝나고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 그 순간 무대 뒤에서 벨이 울려퍼졌다. 지휘자는 악보대를 톡톡 두드리며 일동의 주의를 모으고는 양손을 크게 벌려 포즈를 취했다. 그 손이 까딱 하고 움직이자 전주곡이 시작되고, 그와 동시에 남자와 여자 사이의 교류는 뚝 끊어져 버렸다.

 

스스로를 위로했다. 지금까지는 잘 진행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음악만 연주되는 쇼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반드시 숨쉴 시간이 있을 것이다.

 

막이 올랐다. 무대 위의 소리나 빛이나 사람 자취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무대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애시당초 쇼를 보러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일에만 주의를 쏟고 있었다. 그녀의 일이란 악사 한 명을 녹이는 것이었다.

 

휴식시간이 되어 다른 동료들이 하나둘 씩 슬슬 자리를 뜨기 시작하자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의 의자는 출구에서 가장 멀기 때문에 나간다 해도 제일 마지막이 된다. 덕분에 그는 다른 얘기를 걸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녀 주위의 관객도 모두 자리를 떠 바깥으로 나가버렸기 때문에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녀의 행동에서 일말의 의심마저 느끼고 있긴 했지만, 그런 불안은 이젠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어때요, 재미있었소?”

 

“너무 멋져요.” 하고 그녀는 어리광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앞으로의 예정은 어때요?”

 

그녀는 입을 샐쭉 내밀며 대꾸했다.

 

“없어요. 있어도 상관없지만.”

 

그는 동료들의 뒤를 쫓아나가면서, “예정이 생겼소.” 하고 다소 아니꼬운 투로 말했다.

 

“바로 지금.”

 

매정하리만큼 무자비하게 스커트를 끌어내려 버렸다. 가능하다면 비누거품을 듬뿍 내어 온몸이 화끈화끈할 정도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이목구비가 본래 위치로 되돌아왔다. 짙은 화장도 그 변화를 감출 수는 없었다. 오직 그녀 혼자서만이 생각에 잠긴 채, 텅 빈 좌석이 늘어선 가장자리 열에 걸터앉아 있었다.

 

마지막 막이 내리고 극장 안이 밝아졌다. 그녀는 자꾸 멈칫거리며 떨어진 물건을 줍는 시늉도 해보고, 흐트러진 옷을 바로잡는 시늉도 해보며 뒤에 남아 있었다. 다른 관객들은 느릿느릿 통로에서 나가고 있었다.

 

붙어 있는 심벌스를 마지막으로 한 번 두드리고는, 손으로 위치를 바로잡으며 드럼채를 놓고 나서 악보대의 불을 껐다. 이것으로 오늘밤 일은 끝났고, 드디어 자유시간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천천히 그녀 쪽으로 향했다. 이미 이 장소에서의 주도권은 완전히 자기 손에 달려 있다는 투로 그는 말을 걸었다.

 

“음악실 입구 빈터에서 기다려요. 5분 정도 있다가 나갈 테니까.”

 

바깥에서 그를 기다린다고 하는 단순한 행위마저도 그녀로서는 극히 참기 힘든 일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런 감정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작자의 인물 됨됨이가 모든 것을 그런 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다소 불안하기도 했다. 또, 그보다 먼저 나오는 악사들이 지나는 길에 슬금슬금 그녀를 훔쳐보는 것이 불쾌감을 더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의지할 데 없는 허전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빨리 메꾸어 줄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그녀는 몸이 붕 떠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직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한 사이에 그가 다가와서는, 밑도끝도없이 그녀의 팔을 자기 겨드랑이에 끼고서 그녀를 끌듯이 하여 그대로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것도 그의 타고난 천성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신바람이 나서 떠들어댔다.

 

“멋져요. 나의 새 친구는 어때요?”

 

“우리 떨거지들한테로 가지.” 하고 그는 말했다.

 

“그 자식들하고 있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단 말야.”

 

이것으로 그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에게는 그녀는 새 양복 윗도리 단추구멍에 꽂는 꽃과 같은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밤 12시였다. 2시가 되면 그는 맥주에 취해 제정신이 아닐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쪽 작전대로 밀고 나갈 좋은 상태가 될 거라고 판단했다. 그 시간까지 그들은 비슷한 술집 두 군데에 들러 마셔댔고, 동료 패거리들도 이런 종류의 일에도 기묘한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와 그녀도 다른 동료와 함께 장소를 바꿨지만, 일단 새로운 술집에 들어가자 그 동료들은 자기네들끼리 다른 테이블을 잡고, 두 사람과는 합석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빈번히 자리를 떠서는 동료들이 있는 테이블로 갔다가 다시 그녀의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동료들이 두 사람의 자리로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마 그녀는 그의 전유물로서, 서로들 삼가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녀는 한바탕 도화선에 불을 붙일 꼬투리를 찾고 있었다. 이제 슬슬 한 판 벌일 때가 되었겠지. 머뭇거리다간 날이 새고 만다. 그리고 또한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오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회는 오히려 저편으로부터, 그녀로서는 더할 수 없이 좋게 찾아왔다. 그는 거침없이 생각나는 대로 온갖 칭찬을 그녀에게 쏟아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마치 기관차 화부가 건성으로 석탄을 퍼넣는 모습이었다.

 

또다시 칭찬이 시작되자 그녀는 한 마디 끼어들었다.

 

“자기, 극장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 중에서 내가 제일 예뻤다고 했죠? 그렇지만 뒤돌아보며, 그거 참 멋진 여자인데… 하고 말할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 거 아녜요. 그 얘길 좀 해줘요, 응?”

 

“당신과 비교할 사람이 어디 있어.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둬.”

 

“그렇지만 조금 흥미가 생기는데요. 자기가 여러 극장에 출연하면서 아까 내가 앉았던 그런 비슷한 자리에서 멋있는 여자를 꽤 봤을 거 아녜요? 그 중에서 자기가 데리고 나갈 기분이 난 여자가 있을 거잖아요?”

 

“물론 당신이지.”

 

“그러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나 다음에는 또 어떤 여자에게 끌리죠? 나는 그냥 자기가 옛날 일을 어느 정도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묻는 거예요. 자기 같은 사람은 날이 새면 어젯밤 만난 여자의 얼굴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릴 타입 아닌가요?”

 

“내가? 절대로 그렇지 않아. 자, 그 증거를 보여주지. 어느 날 밤 내가 건너다보니까 난간 건너편에 어떤 여자가 앉아 있더군…”

 

부드러운 부분을 잡고 있다가 갑자기 심하게 한 대 얻어맞은 듯이 자기 팔을 꽉 쥐었다.

 

“그것은 다른 극장에서 일할 때였지. 카지노였던가 그랬어. 잘 모르겠지만, 그 여자 어디가 끌렸는지…”

 

희미한 그림자가 하나, 또 하나가 그들의 테이블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하나가 잠깐 발을 멈추고는 말을 걸어왔다.

 

“지금부터 지하실에서 즉흥연주를 하려는데, 올 텐가?”

 

팔짱을 끼고 있던 그녀의 한쪽 손이 벗어나며 실망한 듯 의자 밑으로 축 처졌다. 동료들은 모두 자리를 떠서 슬슬 안쪽에 있는 지하실 입구로 향했다.

 

“싫어요, 자기, 여기에 있으면 안 되요?”

 

그녀는 끌어당기며 말했다.

 

“지금 하던 얘기 끝까지…”

 

그는 벌써 일어서고 있었다.

 

“그만둬. 시시한 얘긴걸. 저 녀석을 피할 방법은 없지.”

 

“연주라면 매일 밤 극장에서 실컷 하잖아요.”

 

“아아, 그거야 돈 때문이지. 지금부터는 취미로 하는 거야. 지금부터 기찬 걸 들을 수 있을 거야.”

 

결국 그녀를 버려두고서라도 갈 것 같았다. 그곳에는 그녀보다 훨씬 강한 매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그녀도 일어나서 그 뒤를 쫓아 벽돌담으로 싸인 좁은 계단을 따라 레스토랑 지하실로 내려갔다. 모두가 모여 있는 그 방은 꽤 그가 이전에도 몇 번인가 와본 적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랜드 피아노도 한 대 있었다. 천정 중앙에서 커다란 알전구가 하나 늘어뜨러져 있었고, 양초를 꽂은 병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방 중앙에는 찌그러진 나무 탁자가 있고, 거의 한 사람마다 한 병씩 진 술병이 놓여져 있었다. 한 남자가 갈색 포장지를 뜯어 많은 담배를 누구나가 마음대로 피울 수 있게 펼쳐놓았다. 계단 저 위의 세계에서 피우는 담배와는 달리 그 속에는 검은 것이 채워져 있었다. 누군가가 ‘리퍼즈’라고 부르는 것을 그녀는 들었다.

 

밀번과 그녀가 들어서자, 이내 바깥으로부터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문을 잠그고 빗장을 홍일점이었다. 빈 상자와 종이 상자, 술동이가 한두 개 있어서 앉고 싶으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클라리넷의 애틋한 음색을 신호로 광기어린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어 두 시간은 단테가 그린 지옥 그대로였다. 그것이 끝난 뒤에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아예 음악이 아니었다. 음악은 보다 아늑하고 부드러운 것일 텐데. 그것은 그들의 그림자가 그려낸 마법의 주마등이었다. 그림자들이 시커멓게 떠올라 사방의 벽, 천정까지 부풀어올라 흔들렸다. 그것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악마적인 그들의 현실의 얼굴이었다. 갑자기 어떤 음색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그것은 방안의 공기를 연기로 가득 채웠다. 진과 마리화나도 있었다. 또, 그들의 가슴에 감춰진 광란의 숨결도 있었다. 그 광기에 휘말려 그녀는 몇 번인가 방구석으로 움츠러들기도 하고, 상자 위로 올라가기도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연이어 한 사람씩 그녀 앞으로 다가와서는 그녀 뒤를 쫓아다니며, 여자라고는 그녀 혼자였기 때문에 특별히 그녀를 골라서 정면 벽 옆으로 밀어붙이고 그녀의 면전에서 관악기를 힘껏 불어대는 것이었다. 귀는 꽉 막혀버리고,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흩어져 온 정신이 공포로 떨었다.

 

“자, 이 술통 위로 올라가서 춤을 춰봐요, 춤을!”

 

“싫어요, 출 줄도 몰라요!”

 

“허리고 뭐고, 그냥 흔들기만 하면 돼… 그건 흔들기 위해 있는 거니까. 옷 같은 덴 신경 쓸 필요없어. 우린 모두 친구이니까.”

 

‘헨디!’ 하고 그녀는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리고는 열병에 들뜬 색소폰 소리로부터 몸을 빼냈다. 상대는 그녀를 뒤쫓는 것을 포기하고 마침내 천정을 향하여 소리랄 것도 없는 슬픔의 절규를 힘껏 불어젖혔다.

 

‘헨디, 나는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 참고 있는 거예요.’

 

미래파의 리듬, 귓가에서, 고막 옆에서 이 드럼이 울리면 옆으로 쓰러져 버리리.

 

그녀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벽면을 따라서 보일러실같이 쿵쾅거리는 곳으로 울려퍼지는 음악 보일러실. 그리고는 피스턴처럼 오르내리는 밀번의 팔에 매달려 짓눌린 듯한 소리로 말했다.

 

“클리프, 날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예! 이런 곳에선 쓰러질 것만 같아요.”

 

그는 이미 마리화나에 취해 있었다. 그 눈초리에서 그녀도 알 수 있었다.

 

“어디에 가지? 우리집으로 갈까?”

 

그녀는 ‘예스’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수밖에,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그는 일어나서 그녀를 앞세우고 문 있는 곳까지 더듬어 나아갔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피융 하고 장전된 총알처럼 뛰어나갔다. 그도 뒤이어 따라나갔다. 양해도 이별의 인사도 생략하고, 마음대로 패거리들은 그가 빠져나간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문이 쾅 하고 닫히자 광란의 소음이 칼로 자른 듯이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고요가 되찾아온 것이 처음에는 오히려 위화감을 주는 것이었다.

 

그대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네, 멈춰진 순간에. 제발 그대의 품안에서 생각하고 잠자고 술 마시게 해주오.

 

계단 위의 레스토랑은 어둡고 텅 비어서 단지 안쪽에 비상등 하나만 켜져 있을 뿐이었다. 바깥의 길거리로 나오자, 그 열기에 들뜬 지하실에 있었던 때에 비해 공기가 너무나도 상쾌하고 맑아서 머리가 다가서서 아주 기진맥진해진 듯 얼굴을 벽에 대고는 그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는 문을 잠그느라 그랬는지 그녀보다 한 발 늦게 나왔다.

 

4시쯤 된 게 틀림없겠지만, 주위는 온통 어둡고 거리는 잠들어 있었다. 문득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도망치고 싶은 유혹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거리를 따라 도망칠 자신은 있었다. 지금의 그는 그녀를 쫓아올 만한 상태가 못 되었다.그러나 그녀는 그러지도 못한 채 그냥 서 있었다.

 

그녀의 방에는 사진이 한 장 있다. 그녀가 문을 열 때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그 사진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밀번이 다가와서 도망갈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집들을 아파트로 개조한 지역으로, 한 구역이 한 층씩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문을 열고는 전등을 켰다. 정말 기가 막힌 방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때가 낀 바닥에다 엷게 니스를 발라놓았다. 천정은 멀고 높았다. 창틀은 나팔꽃 모양을 하고 있어 마치 관 뚜껑을 연상케 했다.

 

아무래도 새벽 4시에 찾아올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상대가 그가 아니라 다른 누구였다면 당장에 질색할 곳이었다. 그녀는 잠깐 몸을 떨면서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안쪽에서 조심스레 문고리를 걸고 있었지만, 그녀는 애써 모르는 체하고 있었다. 머릿속을 가능한 한 맑고 자유롭게 하고 싶었다. 문 같은 데 정신을 그는 문단속을 끝낸 모양이었다.

 

“코트는 벗지 그래.”

 

“싫어요. 이대로가 좋아요.” 하고 그녀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추워요, 나.”

 

시간이 너무 없었다.

 

“어쩔 작정이야, 그곳에 그렇게 서서?”

 

“어머나!" 하고 그녀는 짐짓 순종하는 듯, “아녜요, 이런 곳에서 있기만 할 생각은 없어요.” 하고 말하고서 스케이팅 선수가 얼음 위를

지치듯 무심하게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암담한 기분이었다.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색(色), 오렌지… 그래, 혹시 오렌지색 물건은 없을까?

 

“이봐, 무엇을 찾고 있어?” 하고 그가 말했다.

 

“그냥 방이야. 방을 보는 게 태어나서 처음이야?”

 

그녀는 마침내 그것을 발견했다. 방 저쪽 끝에 있는 얇은 실크 스탠드의 갓이었다. 그녀는 그쪽으로 다가가서 스탠드 불을 켰다. 그것은 위쪽 벽에 후광처럼 둥그런 빛을 던졌다. 그녀는 그곳에 손을 대며 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이런 색이 좋아요.”

 

남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듣고 있어요? 나는 이런 색이 좋다니까.”

 

이번에는 그도 멍한 듯한 눈길을 보냈다.

 

“흐흠,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나, 이런 색 모자를 갖고 싶어요.”

 

“사주지. 내일이나 모레.”

 

“어머, 고마워요.”

 

전등이 켜진 채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는 그가 있는 쪽으로 향하자, 스탠드 갓이 마침 머리 꼭대기까지 왔다.

 

“이쪽을 봐요. 자, 나를 잘 보세요. 자기, 이런 모자를 쓴 사람을 본 적이 없나요? 이것을 보고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요?”

 

그는 부엉이처럼 진지한 얼굴로 두 번 눈을 깜박였다.

 

“잘 보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 그런 식으로 잘 보세요. 그러면 생각이 날 거예요. 오늘밤 내가 앉아 있던 맨 앞 좌석에 이런 색 모자를 쓴 사람이 앉아 있었던 걸 당신 본 적이 없어요?”

 

그는 어리둥절해서 엄숙한 어조로, “아아… 나에게 500달러를 준 그 사람 말이지!” 하고 말하자마자 황급히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는 일이었는데.”

 

그는 얼굴을 들고는 순진한 표정으로, “내가 이미 내뱉고 말았나?” 하고 중얼거렸다.

 

“예, 들었어요.”

 

대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처음 입을 떼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 한번 일이 터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야 어렵지 않게 풀려나가는 것이다. 그 마리화나 담배가 기억력에 어떤 작용을 불러일으킨 것이리라.

 

그녀는 서둘러 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도움이 될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놓쳐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녀는 얼른 전기 스탠드를 내려놓고 재빨리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괜스레 비틀거리며,

 

“한 번 더 말해 주세요. 듣고 싶어요. 제발, 클리프. 자기, 내 친구잖아. 그랬잖아요, 자기가 그렇다면 얘기해 줘도 좋잖아요.”

 

그는 또 눈을 깜빡거리며,

 

“무슨 얘기? 나는 잊어버렸단 말이야.” 하고 멍청히 대답했다.

 

약으로 끊어진 사고의 줄을 다시 잇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톱니바퀴를 벗어나 달랑 떨어지는 전선을 이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렌지색 모자 말예요. 봐요, 이쪽을 잘 보세요. 500달러… 500달러면 큰 돈이에요, 이젠 생각났죠? 나하고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던 여자 말예요…”

 

“그래.” 하고 그는 대답했다.

 

“내 바로 뒤쪽에 있었어. 나는 봤어.”

 

그는 웃음을 지웠다.

 

“그 여자를 보기만 하고 500달러를 받았지. 그 여자를 보고선, 봤다고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거든.”

 

그녀는 자신의 팔이 점점 그의 칼라를 따라서 그의 목을 죄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양팔이 그녀의 의지를 무시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그의 얼굴 바로 앞에 갖다대고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더 얘기해 줘요, 클리프. 으응, 꼭 들려줘요. 난 자기 얘기를 듣는 게 아주 재미있어!”

 

그의 눈이 다시 윤기를 잃어버렸다.

 

“무슨 얘기를 하라는 거야, 또 잊어버렸단 말이야.”

 

다시 사슬이 끊어진 것이다.

 

“그 여자를 봤다는 얘기를 안 한다는 약속으로 자기가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 500달러를 그 여자한테서 받았잖아요, 클리프? 누가 자기한테 500달러를 주었나요? 가르쳐 줄래요, 으응?”

 

“한 손이, 어둠 속에서였어. 그 손이 준 거야. 손과, 목소리, 손수건. 그렇게 말하니까 또 하나 있어… 권총이야.”

 

그녀의 손이 천천히 그의 목덜미까지 돌아갔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알았어요. 그런데 그거 누구의 손이었는데?”

 

“글쎄, 그 당시도 그렇고 나중에도 그렇고 난 통 모르겠어. 아니, 사실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조차도 모를 때가 있는걸. 약기운 때문에 그런 환상을 본 걸 거야. 그러다간 또 그게 실제로 일어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어서 그 얘기 좀 들려주세요.”

 

“이런 얘기였어. 어느 날 밤 늦게 쇼가 끝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거든. 계단 밑 홀까지 왔는데, 그곳은 언제나 불이 켜져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캄캄했단 말이야. 전구가 끊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하고서 더듬어서 계단 밑까지 왔는데 글쎄 손이 불쑥 뻗어나와서 나를 붙잡는 거야. 무겁고 차가운 느낌이 드는 손이 나를 꽉 눌렀어. 나는 벽 언저리까지 내려가서 이렇게 물었지. ‘누구요? 당신 도대체 누구요?’ 그것은 남자였어. 목소리로 알았지. 잠시 뒤에 어둠에 눈이 익자 뭔가 하얀 물건, 손수건 같은 것이 상대방 얼굴 주위에서 보였어. 그것으로 가려서 그런지, 목소리는 들리더구먼. 그 남자는 내 이름과 직업부터 묻더군. 나에 관해서는 뭐든지 알고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나서 어젯밤 극장에서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자를 본 기억이 있느냐고 묻더군. 그래서 나는 당신이 묻지 않았으면 생각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물으니까 생각이 나는군요… 하고 대답했지. 그러자 남자는 조금도 흥분한 기색도 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너, 죽고 싶어!’ 하고 묻는 거야. 나는 대답이 막혔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어. 그러고 있는데 그 남자는 내 손을 잡고서 자기 손에 쥐어져 있는 싸늘한 것을 만지게 하더구먼. 권총이었어. 나는 기겁을 무엇을 뜻하는지 내가 알아차릴 때까지 떠나려고 하지 않는 거야. 그러더니 다시 이렇게 말하더군. ‘당신이 만일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떠들어대면 이놈을 먹여줄 거야.’ 하고 말이야. 그리고 나서 잠시 뒤에 또 한마디 하는 거였어. ‘그 대가로 500달러를 받아두는 게 좋지 않겠어?’ 곧 이어 지폐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가 내게 뭔가를 쥐어주더군. ‘500달러야. 성냥 갖고 있나? 자, 성냥을 켜서 직접 확인해 봐.’ 나는 성냥을 켜서 봤어. 틀림없는 500달러더군. 그런 뒤에 내가 눈을 들고 남자 얼굴을 쳐다보려고 하자 그 남자는 성냥불을 훅 하고 불어서 꺼버리더구먼. ‘못 봤다고 하면 되는 거야. 그런 여자는 없었던 거야. 누가 물어도 ‘노’라고 말하는 거야. 그렇게만 하면… 당신 목숨은 안전하지.’ 조금 지나서 그 사람이 또 묻더군. ‘자, 다른 사람이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그래서 나는, ‘그런 여자는 본 적이 없는데요. 여자 같은 건 없었어요.’ 하고 말했지만, 사실 그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단 말야. ‘좋았어. 그럼, 이제 가도 좋아. 잘 있게.’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어. 손수건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무덤 속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았어. 나는 도저히 문 앞까지 제대로 갈 수가 없었어. 겨우 방안으로 들어와서 안쪽으로 단단히 자물쇠를 걸고는 창 쪽으로 마리화나에 취해 비틀비틀하고 있었거든. 그런 느낌은 당신도 알겠지?”

 

그는 새삼 그때의 오싹한 기분이 다시 살아나는 듯 큰소리로 웃어젖혔다. 그러다가는 갑자기 뚝 멈추고 말았다.

 

“그 500달러는 그 다음날 경마장에서 몽땅 날려버리고 말았어.”

 

그는 비굴한 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초조한 듯이 몸을 뒤척이며 의자 팔걸이에다 그녀를 내렸다.

 

“당신이 자꾸 물으니까 또 생각이 나는데. 덕분에 나는 다시 공포를 느끼게 되었단 말야. 자, 봐, 이렇게 떨고 있잖아. 그 뒤로는 나는 가끔씩 흠칫흠칫 놀라곤 하지… 담배 한 대만 줘. 또 붕 뜨고 싶은 기분이야. 가라앉은 기분을 다시 한 번 되살리고 싶어.”

 

“당신 핸드백 속에 들어 있을 거야. 함께 그곳에 있었으니까 몇 개비 넣고 왔을 거잖아.”

 

자기처럼 그녀도 늘상 피우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핸드백은 테이블 위에 있었다. 그녀가 그곳으로 갈 틈도 없이 그는 핸드백을 열고 알맹이를 전부 쏟아놓았다.

 

“안 돼요!” 하고 그녀는 말렸다.

 

“그건 아무것도 아녜요. 보지 마세요!”

 

그녀가 빼앗기 전에 그는 벌써 읽고 있었다. 그것은 버지스에게서 건네받은 필요없는 쪽지였다. 그는 우선 천진스러운 놀라움부터 나타냈다. 아직 완전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리라.

 

“아니, 이건 나에 관한 것이잖아! 내 이름과 근무처…”

 

“안 돼, 안 돼요!”

 

“우선, 내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보시오. 만일 그곳에 없을 경우엔…”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불신의 빛으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폭풍 같은 속도로 그의 눈에서 솟아올랐다. 눈 속에 나타난 그 모습은 아주 혐오스러운, 그러고도 경직된,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였다. 마약의 환각에 의한 공포, 공포에 떨고 있는 대상마저 없애버리고 말 거라는 그런 공포였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검은 중심부가 안구의 홍채(虹彩)를 삼켜버린 것처럼 보였다.

 

“놈이 당신을 보냈군. 당신은 우연히 나와 만난 게 아니야. 누군가가 나를 쫓아다니고 있어, 그게 누구지? 나는 모르겠어. 그 녀석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누군가가 누구야, 나를 죽이려고 하는 그놈이! 말을 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당신이 말을 시켜서!”

 

그녀는 지금까지 마약상습자를 상대한 경험이 없었다. 그가 부르짖는 말은 알아들을 순 있었지만, 전혀 그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것이 의심이나 불신, 공포 같은 감정을 솟아오르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알 턱이 없었다. 더욱이 그러한 감정이 원래부터 그의 가슴에 잠겨 있다고 해도, 그것이 발화점을 넘어선 곳까지 팽배해 있다고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저 그의 표정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인간과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점까지는 확실했다. 위험수위를 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막고 화제를 돌리는 지혜를 갖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을 도무지 짐작해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사실 그녀는 제정신이고, 남자는… 일시적이긴 하지만 머리가 돌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한 채 멍청히 서 있었다. 머리를 갸우뚱, 속눈썹 밑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듯이 하고서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신에게 말한 것 같은데. 아아, 무슨 말을 했는지 생각이 나면 좋을 텐데!”

 

그는 혼란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나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은걸요.”

 

그를 진정시킨 후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와 같은 의도를 확실히 나타낸다면 그가 방해하리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슬쩍 한 발자국씩 조금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양손을 뒤로 돌리고 문을 찾으면서,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문을 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기가 조금씩 뒤로 물러서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자신의 시선으로 상대의 시선을 잡고 있었다. 동작이 아주아주 느릿한 탓으로, 점점 긴장의 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그녀는 느꼈다. 몸을 사린 독사가 슬슬 물러서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나는 말했어.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당신에게 말하고 말았어. 그래서 당신은 지금 이곳을 빠져나가 누군가에게 보고하려는 거지? 나를 노리는 작자에게 말이야. 그러면 그 녀석은 이리로 와서, 그 녀석이 말한 대로 나를…”

 

“아니에요, 정말 당신은 말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는 진정하기는 커녕 점점 흉폭해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은 점점 조그맣게 줄어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눈치채이지 않게 행동하기가 곤란했다. 마침내 그녀는 벽까지 다다랐다. 뒤로 돌린 양손으로 잡히는 것은 매끈매끈한 벽 뿐이고, 문의 열쇠구멍이 어디에 있는지 닿지 않았다. 아무래도 예측이 빗나간 모양이다.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슬쩍 옆눈길로 보았다. 2~3m 왼쪽에 검은 것이 보였다. 혹시 그가 앞으로 1~2초만 지금 있는 장소에서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눈치채지 않게 옆으로 움직이기란 뒷걸음치기보다 더욱 힘든 일이었다. 먼저 한쪽 발의 뒤꿈치를 비껴놓고, 다음에 구두의 앞 반쪽을 그 뒤로 살짝 이동시켰다. 이어서 다른쪽 발도 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움직여 두 발을 같은 형태로 맞추었다. 그것도 상반신을 움직이지 않은 채 해야만 했다.

 

“자기, 기억하지 못하세요? 나는 의자를 주었잖아요. 바로 그랬어요. 오, 그만두세요!”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칭얼칭얼 콧소리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이 공포의 미뉴에트가 시작되고 나서 겨우 몇 초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하룻밤처럼 길게 느껴졌다. 만일 그녀의 손에 그 마법의 담배가 한 개비라도 있어서, 그것을 그에게 던져줄 수만 있다면 아마도… 게처럼 옆걸음을 치다가 그녀의 몸이 가볍고 조그만 테이블을 건드려 조그만 물건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미세한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 부주의한 사건이 그녀의 목적을 어긋나게 하고 말았다. 그것은 가식을 벗겨버리고 그의 미친 신경이 기다리고 있던 계기를 만들어 본능적으로 걱정하고 있었던 사태가 마침내 발생한 것이다.

 

그는 자세를 고쳐서, 납인형이 받침대에서 굴러떨어지듯 의자에서 일어나 양손을 갑자기 앞으로 쑥 내밀고서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기겁을 해서 문에 매달렸다. 목에서는 꽉 죄는 듯한 가는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물론 비명으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급히 더듬는 양손이 어떤 일을 하는지 확인할 만한 여유는 있었다. 열쇠는 구멍에 꽂힌 채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내긴 했지만 그녀는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그만 문앞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얼른 벽을 떠나 방 한쪽을 가로질러 창 쪽으로 도망갔다. 창에는 윤곽을 흐릿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가 계속 쫓아오고 있지만 창으로는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터라 창문을 열고서 비명을 지를 수도 없게 되어 있었다. 창 양쪽에 너덜너덜한 먼지투성이의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녀는 등뒤에 있는 커튼 한 장을 그에게로 던졌다. 목에서 어깨에까지 휘감겨진 커튼을 벗고 있는 사이에 그의 움직임은 아주 둔해졌다.

 

그녀는 얼른 다른쪽 구석으로 달려가서 소파 뒤로 뛰어들었지만, 건너편 끝으로 도망치기 전에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 두 사람은 소파를 따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마치 고양이가 쥐를 쫓듯 두 번 정도 좌우로 돌았다. 그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장면이었다. 5분 전만 같았으면 그녀도 이것이 ‘이스트 린’ 같은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멜로드라마에서 나오는 일이지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넘겨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는 생애에 두 번 다시 웃어버릴 수도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인생 그 자체가 앞으로 2~3분 내에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돼!” 하고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안돼! 그만두세요! 나에게 이런 짓을 했다간 그들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알겠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잖아요!”

 

그녀는 인간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마약금지효과를 향해 말을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지름길을 택했다.

 

소파 위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의자 등받이 너머로 그녀를 붙잡았던 것이다. 그녀가 갇혀 있는 조그만 삼각형 공간 안에는 몸을 숙일 만한 여지도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한쪽 깃을 낚아챘다. 그러나 꽉 잡히기 전에 그녀는 두세 번 몸을 비틀며 흔들었다. 그 바람에 윗도리의 한쪽 팔이 어깨에서 찢겨져 나가서 그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그가 그대로 소파에 펄썩 엎어진 사이에 그녀는 옆의 조그만 틈새를 빠져나가 미끄러지듯 네 번째의 마지막 벽면에 이르렀다. 이로써 방을 완전히 한 바퀴 돌아, 다시 문이 있는 벽까지 가려고 했던 것이다.

 

네 번째 마지막 벽면에는 검은 통로가 빠끔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이 선반인지 욕실인지 모르지만, 지금 막 소파에서 술래잡기를 경험한 그녀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얼른 지나쳤다. 그러는 편이 아까보다 더 손쉽게 아무데나 숨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바깥으로의 출구… 오직 그 하나의 탈출구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문으로 향하다가 그녀는 문득 화려한 의자 하나를 붙잡고 그를 경멸하듯 슬쩍 돌아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에 띄고 말았다. 지금까지 겨우 5초 정도의 탈출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지쳐 있었다. 방의 마지막 구석을 더듬어, 그곳을 돌아 그 끝없는 그가 앞서 방향을 바꿔 앞길을 막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그녀는 멈출 수도 없이 그와 부딪칠 뻔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그의 손 안에 닿는 벽 사이에 갇히고 말았다. 그의 양손이 게처럼 덮쳐왔다. 그녀는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서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이제 움직일 방향은 그쪽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양팔 사이를 쏙 빠져 그 밑으로 기어서 옆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녀는 이름을 불러댔다. 그것은 지금 이 시간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스코트! 오, 스코트!”

 

문 바로 앞이었지만 그곳까지 더듬어갈 시간도 없었다. 비록 더듬어갔다고 해도 지칠 대로 지쳐서 도저히…

 

조그만 전기 스탠드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아까 그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사용했던 바로 그 스탠드였다. 그를 때려눕히기에는 어림도 없는 물건이었지만 아무튼 그녀는 그것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에게 명중하기는커녕, 바로 앞쪽에 허무하게 떨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전구는 얇은 양탄자에 부딪쳐 깨어지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는 아무런 방해물도 없이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그 결과는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때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 그의 손톱 끝에 무엇인가가 걸린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이 난 것이었다. 조금도 부서지지 않은 줄기 푸른빛이 벽 언저리에서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는 양손을 앞으로 죽 뻗으며 그녀 앞으로 길게 쓰러지고 말았다. 구원의 문과 남자와의 사이에 조그마한 간격이 벌어졌다. 그녀는 그 사이로 지나가기가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더욱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쓰러진 그의 손이 몇 번 그녀에게 걸렸다. 그녀는 뛰어넘듯 그의 몸을 돌아, 바닥을 헤집고 있는 그의 손끝을 스치며 문에 달라붙었다. 순간이란 것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길게도, 또 짧게도 느껴지는 법이다. 남자가 쓰러지면서 바닥에 얼굴을 묻고 뻗어버리는 시간도 그녀에게는 한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치 꿈속의 일처럼 그 손이 자기 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엔 한쪽 방향으로 돌려봤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반대쪽으로 완전히 한 바퀴 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쓰러진 채로 바닥을 배로 기면서 5 센티미터 정도의 사이를 메꾸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목을 잡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때 찰칵 소리가 났다. 손잡이를 얼른 잡아당기자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무엇인가가 구두 뒤꿈치의 둥근 부분을 힘없이 스쳤다. 손톱으로 긁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새롭게 생긴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뒤는 공포와 안도감이 뒤섞인 순간이 남았다. 추적의 손이 뻗어오지나 않을까 빗나갔다. 그녀는 위험스러운 발걸음으로 희어멀거니 비치는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발밑이 잘 보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관성에 의해 달려 내려가는 것이었다. 문이 눈에 들어와서 얼른 그것을 열었다.

 

바깥은 상쾌한 밤이었다. 이제 위험은 지나갔지만, 그래도 그녀는 불안한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그 꺼림칙한 방의 기억은 두고두고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그녀는 인적이 끊어진 보도를 술 취한 것처럼 새걸음으로 비틀거리며 걸었다. 사실 그녀는 취해 있었다. 전율과 공포에 취해 있었던 것이다.

 

길 모퉁이를 돈 기억은 있지만, 그 뒤는 어디쯤 갔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마침내 앞쪽에서 등불이 보여, 그곳을 향해 뛰기 빨리 그곳에 닿고 싶었다. 그 집에 들어서니 유리 케이스 안에 이탈리아식 소시지와 감자 샐러드를 가득 담아놓은 접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심야영업을 하는 간이식당인 모양이었다. 남자가 혼자 카운터 앞에서 졸고 있을 뿐, 손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눈을 뜨고 멍하니 서 있는 젊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옷은 찢어져서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남자는 머뭇거리며 나와서는 카운터에 양손을 댄 채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요, 아가씨? 사고라도 당했습니까? 도와줄 일이 있으면 말씀하시죠.”

 

“5센트짜리 동전 한 개만 주세요.” 하고 말했다.

 

“5센트짜리 동전 하나… 전화를 걸고 싶어서 그래요.” 하고 말했다.

 

그녀는 전화기 앞으로 가서 5센트짜리 동전을 밀어넣었다. 횡격막의 반사운동 탓인지 그녀는 계속 흐느껴 울고 있었다. 친절한 주인은 가게 안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봐, 여보, 잠깐 나오구려. 가련한 아가씨가 지독한 일을 당한 것 같아.”

 

그녀는 버지스를 집에서 찾아냈다. 이미 동이 터오는 5시경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도 잊었지만, 그는 알아차린 것 같았다.

 

“버지스, 이쪽으로 와주세요. 굉장히 무서워요.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 동안에 식당의 주인 부부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 그럴 수밖에 없어요. 아스피린은 다 떨어졌으니까.”

 

부인이 다가와서 그녀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동정어린 손길로 그녀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가씨, 그 녀석들에게 무슨 일을 당한 거유? 어머니라도 와주실까?”

 

그녀는 계속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는 엷은 미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부터 달려올 어머니는 다름아닌 늠름한 형사일 테니까.

 

버지스는 귓부리까지 외투 깃을 세우고 혼자서 가게에 들어왔다. 그녀는 김이 솟아오르고 있는 블랙 커피의 두꺼운 컵을 감싸쥐고 있었다. 기온과는 무관한 몸의 버지스가 혼자서 찾아온 것은, 이것이 공식적인 임무가 아니고 그에게만 관계된… 즉, 어디에도 기록할 필요가 없는 개인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겨우 안심하면서 콧소리를 섞어가며 버지스를 맞이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나서, “아, 저런!” 하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그녀 곁의 의자를 끌어당겨 옆에 앉았다.

 

“꽤 혼났겠군.”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10분 전의 모습을 보셨어야 하는 건데.”

 

그 이야기는 그쯤에서 끊어버리고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버지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래도 그만한 가치는 있었어요.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본 것 같아요. 그뿐만 아니라, 건네준 것 같아요. 아마도 그 여자의 지시로 움직이고 있는 자가 있나 봐요. 당신이라면 모든 진상을 알아내실 수 있죠?”

 

“갑시다.” 하고 그는 짤막하게 말했다.

 

“많이 알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오. 지금부터 그곳에 가봐야겠어. 그전에 우선 당신을 택시에 태워서…”

 

“아니에요. 나도 함께 가겠어요. 이젠 괜찮아요. 무섭지 않아요.”

 

식당의 주인 부부도 입구까지 나와서 하얗게 밝아오는 거리를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을 전송했다. 부부의 얼굴에는 버지스에 대한 분노의 빛이 완연히 떠올라 있었다. 남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새벽 5시에 저런 처녀를 혼자 내버려두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어! 일이 다 벌어진 뒤에야 오고 나서, 이제 그 녀석들한테 찾아간다고 뭘 어쩌겠다는 거야! 누이동생이나 잘 보살필 생각은 않고, 쯧쯧!”

 

버지스는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는 뒤에 처져 있었지만, 그는 손짓으로 염려 말고 올라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녀가 따라 올라갔을 때에는 그는 잠시 전부터 머리를 가만히 문에 대고 아무리 조그만 것이라도 죄다 엿들으려는 듯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도망친 것 같은데.” 하고 버지스가 속삭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물러서요. 언제 무엇을 갖고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그녀는 계단을 몇 칸 내려갔다. 머리와 어깨만이 마루면 위로 나와 있었다.

 

버지스가 문에다 뭔가를 꺼내어, 거의 소리가 안 나도록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문이 조금 열렸다. 그는 한 손을 뒷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신중하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도 숨을 죽이고 올라갔다. 언제 기습을 당할지 모른다. 갑자기 공격해 오려고 숨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문지방에까지 다다랐을 때 갑자기 불이 켜져서 그녀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버지스가 방의 전등을 켠 것이다. 문으로 들어서려는 참이었다. 조금 전에 그녀가 실내를 한바탕 휩쓸고 다녔던 마의 시간에 그냥 지나친 입구였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문지방을 넘어갔다. 버지스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무사히 안으로 들어갔으므로 방안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시 소리도 없이 전등이 켜져서 버지스가 들어간 어두컴컴한 방이 하얗게 빛나는 욕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 욕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욕실 안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네 발 달린 구식의 욕조였다. 이어서, 그 곁에 세탁 가위와 같은, 두 쪽으로 구부러진 사람 같은 것이 보였다. 뒤집어진 신발 바닥도 보였다. 이런 아파트에 고급 바닥재가 있을 리 만무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욕조 바깥쪽까지 대리석이 깔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바깥 표면에 가느다란 붉은 줄기가 한두 줄 흐르고 있는 것이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 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붉은 줄이 쳐진 대리석…

 

그 순간, 그 남자가 안 좋게 되어 그곳에 쓰러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버지스의 채찍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발을 멈추게 했다.

 

“오지 말아요, 캐롤. 저쪽으로 가요!”

 

그는 한두 걸음 되돌아와서 문에 손을 얹고는 쾅 하고 닫지 않고, 그저 그녀가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만 살짝 닫아놓았다. 그녀는 좀 뒤로 물러나서 기다렸다. 그녀는 한쪽 손목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공포감은 아니고, 일종의 정신적 긴장감에서 오는 전율이리라. 욕실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에야 그녀도 알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도 짐작이 갔다. 겨우 그녀가 도망칠 수 있었던, 그 마약 기운 탓으로 극대화된 공포의 발작에 견딜 수 없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천벌의 촉수가 마침내 자기 몸을 엄습해 오는 걸 느낀 것이리라. 그 촉수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그 공포와 두려움은 꽤나 대단했을 테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한 장의 쪽지에 의해 그녀의 확신은 한 층 굳어졌다. 거의 마지막에는 뜻도 없이 휘갈겨 쓴 선이 있는 나무의 그루터기 같은 연필에서 끝나고 있었다.

 

‘놈들이 나를 쫓아온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버지스가 나왔다. 얼굴색은 아까보다 훨씬 창백해져 있었다. 그녀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자기 마음과는 달리 바깥문 쪽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버지스가 서서히 그녀 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저것을 봤나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쪽지 말이다.

 

“흠, 들어섰을 때 봤소.”

 

“저 남자는…?”

 

대답 대신에 그는 한 손가락을 귀밑에 대고서 반대쪽 귀까지 싹 일직선으로 옆으로 그었다.

 

“자, 나갑시다.” 하고 그가 퉁명스럽고도 악당 두목 같은 투로 말했다.

 

“여기는 당신이 있을 만한 장소가 못 돼요.”

 

두 사람이 방을 나오자, 그는 그런 물건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는 듯이 바깥문을 닫았다.

 

“저 욕조…” 하고 그는 그녀를 앞세우고 그녀의 움츠러진 어깨에 양손을 얹고서 계단을 내려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앞으로 홍해(紅海)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 욕조가 생각날 것만 같군.”

 

그리고는 그녀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거리 모퉁이에서 그녀를 택시에 태웠다.

 

“당신은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요. 나는 이 길로 경찰서에 가서 보고를 해야 하니까…”

 

그녀는 택시 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젠 다 틀렸군요.” 하며 울먹였다.

 

“그래요, 이젠 다 틀렸어, 캐롤.”

 

“그 남자가 한 말을 내가 대신 얘기하면 안되나요…?”

 

“그것은 전문증거(傳聞證據)라고 하는 겁니다. 당신은 어떤 인간으로부터, 그 여자를 보긴 했지만 그것을 실토하지 말라고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건 간접적인 증언이 되는 거지요.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어요. 법정에서 받아주지도 않고.”

 

그는 주머니에서 좁게 접은 손수건을 꺼내어 손바닥 위에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손수건에 싼 물건에 빤히 시선을 쏟았다.

 

“그게 뭐예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면도날이군요.”

 

“보다 확실하게.”

 

“한 개의 안전면도날… 그렇죠?”

 

“맞아요. 그런데 한 남자가 구식의 접는 식 면도날로 자기 목을 자르려고 할 경우… 나는 그런 구식 면도기를 그의 몸 밑 욕조 바닥에서 발견했지만… 욕실의 약품 선반 위에 이런 안전면도날이 또 놓여 있는 건 어찌된 일일까요? 면도날 같은 건 대개 안전식 아니면 구식 중 한 가지를 사용하지, 양쪽 다 사용하는 남자는 드물거든.”

 

그는 그것을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말을 이었다.

 

“자살… 이라고 결론이 나겠지. 나로서도 당분간은 그렇게 생각해 둘 작정이오. 캐롤, 당신은 돌아가요. 어떻게 되었든 당신은 오늘밤 여기에 없었던 겁니다. 당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 그런 식으로 생각해 둡시다.”

 

동녘이 서서히 트기 시작한 도로에서 택시는 그녀의 집을 향해 달렸다. 그녀는 머리를 맥없이 떨어뜨리고 있었다.

 

오늘밤도 틀렸군요, 예, 헨더슨. 역시 오늘밤도 틀렸어요. 그렇지만, 아마 내일 밤, 그렇지 않으면 모레 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