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롬버드는 벌써 한 시간 반이나 그의 뒤를 밟고 있었다. 세상에 앞도 못 보는 거지를 미행하는 것만큼 우울한 일이 또 있을까.
인간의 나이는 1년 단위로 세는 것이 보통이지만, 미행하는 상대는 그 수명을 1세기 단위로 세는 거북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한 구획을 가는 데 평균 40분은 걸렸다. 롬버드는 몇 번씩이나 시계를 보며 그 시간을 재보았다.
상대는 길을 안내하는 개조차 데리고 있지 않았다. 사거리를 건널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교통순경들은 신호가 바뀔 때까지 그가 미처 건너지 못하면 잠깐 동안이나마 교통을 차단시켜 주어야만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몇 푼씩을 그의 동냥 그릇 속에 넣어주었다. 그런지라, 천천히 걷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돈을 버는 데 유리한 것이었다.
그것은 롬버드에게는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활동적이고도 사지가 멀쩡한 인간이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시간의 귀중함에 대한 감각이 지극히 예민해져 있는 상태가 아닌가. 이 끝없는, 마치 기어가는 듯한 행진은 옛날 중국에서 행하던 물방울 고문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어서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 몇 번씩이나 울컥 치밀곤 했다.
그는 냉정한 얼굴로 상대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느긋하게 꼬나문 담배가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상점 입구나 진열창 앞에서 잠시 동안 잠자코 서서 기다리면 약간은 거리가 벌어진다. 그러면 큰 걸음으로 몇 발자국만 걸으면 거리는 좁혀져서, 다시 우뚝 멈춰서서는 자기가 노리는 먹이가 현미경처럼 거리를 맞춰 나가기를 기다린다. 이런 식으로 잠깐씩 쉬기도 하고 성큼성큼 걷기도 함으로써 그 지겹게 느린 걸음으로부터 다소나마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거듭해서 자신에게 타일렀다. 밤이 새도록 하는 짓거리는 아닐 게다. 앞쪽에서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가는 잠도 필요할 것이다. 언젠가는 길거리에서 집안으로 들어가 드러누울 때가 오겠지.
그네들에겐 한밤중부터 새벽까지 구걸을 하며 다니는 습관은 없다. 수익체감법칙으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마침내 시간이 다된 모양이다. 롬버드는 이미 거의 포기한 상태였지만, 역시 종착역까지 온 것이다. 상대가 한길을 벗어나 도로에서 벽으로 둘러쳐진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곳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폐허로 되어버린 듯한 곳으로써, 두 사람은 능히 빠져나갈 수 있지만 아무런 도움도 기대할 수 없을 만한 장소였다. 그늘 속에 몸을 숨길 만한 곳이기는커녕, 거꾸로 뭔가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될 것 철도 노선으로 나뉘어 있었다. 겉 쪽에 울퉁불퉁한 화강암을 쌓아올려, 그것이 육교로 되어 있다.
장님의 안식처는 그곳에서 조금 뒤에 있는, 낡을 대로 낡은 매우 누추한 연립주택이었다. 이런 가까운 곳에 숙소가 있으리라곤 예기치 않았던 만큼, 롬버드는 보다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꽤 가까운 곳에서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주변의 거리는 인적이 거의 끊어진 한적한 곳이어서, 그의 구둣소리와 뒤섞여 줄 만한 다른 발자국 소리는 거의 들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런 패거리들은 일반적으로 귀가 아주 발달되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보면서도 울화통 터지게도 꽤나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하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얼른 판단을 바꾸어 잽싸게 따라붙었다. 가능하다면 몇 층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 정도는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입구에 멈춰서서 조심스레 어떤 소리라도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였다. 지팡이 소리가 생각할 수 없으리만큼 천천히 계단을 계속해서 올라갔다. 그것은 마치 꼭 죄어놓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텅 빈 나무 양동이에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그는 숨을 죽이며 귀를 세웠다. 네 번 그 소리가 끊겼다가 템포가 바뀌었다. 계단을 돌고 있는 것이리라. 경사진 계단을 올라갈 때와 지팡이 소리가 둔했다. 마침내 그 소리는 건물 전면에서 뒤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는 위쪽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도 올라가기로 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게다가 재빨리… 지금까지 꽉꽉 누르고 있었던 에너지가 단숨에 방출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계단은 경사가 급한데다가 여기저기 파손되어 있어서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질려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겐 아무것도 안중에 없었다. 뒤쪽을 향한 문이 두 개 있었지만, 그는 이내 구별할 수가 있었다. 그 하나는 꽤 가까이서 보니 변소가 틀림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기다렸다가 또다시 발을 옮겼다. 그는 장님이 얼마나 귀가 예민한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냈다. 그러나 그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가 덜컹거리는 마룻바닥을 한 장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은 체중이 가벼운 탓이 아니라 남달리 예민한 운동신경 덕분이었다. 그는 옛날부터 민첩함에는 누구보다 뛰어났고, 인간의 여린 피부로 감싸여져 있다기보다는 경주용 자동차의 엔진이 되어 보닛 밑에 장치되어 있다는 편이 어울릴 듯한 사내였다.
그는 문틈으로 귀를 갖다댔다. 물론 불빛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안에 있는 남자에게는 빛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불을 켤 필요도 없으리라. 그러나 움직이는 낌새만은 가끔 느껴졌다.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자리를 잡기까지, 몸을 편안히 하기 위해 잠시 동안 바스락거리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사람 소리는 없었다. 혼자 있는 모양이다.
적당한 시간이 지났다. 자, 지금이 좋을 것 같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움직임이 급히 정지하는 듯한 낌새가 나더니 다음 순간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방 그 자체가 진공관처럼 텅 비어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오직 정적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상태는 - 이쪽에서 더 이상 어쩌지 않는다면 - 그가 이대로 밖에 서 있는 한 변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다시 문을 두드리며, “이봐요!” 하고 책망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쾅쾅 두들겨댈 요량이었다.
“이것 봅시다.”
정적 속에서 그의 거친 소리만 울려퍼졌다. 방바닥이 주춤거리듯 삐걱거리고, 입을 문틈에다 대고서 거의 소리랄 것도 없는 소리가 이렇게 물었다.
“누구쇼?”
“친구요.”
그 소리를 듣고 실내의 목소리는 안심하기는커녕 한층 더 부들부들 떨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내겐 친구가 없어. 당신이 잘못 안 거요.”
“좌우지간 문 좀 엽시다. 당신에게 해를 끼칠 만한 위인은 아니오.”
“그건 안돼요. 난 지금 혼자뿐이오. 아무도 안으로 들일 수는 없소.”
자식, 오늘 번 돈이 염려되는 모양이군… 하고 롬버드는 생각했다. 날치기당하지 않고 지내왔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테니까.
“이것 봐요, 문 좀 엽시다. 잠깐이면 되니까 열어봐요. 얘기할 게 좀 있소.”
상대방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대꾸했다.
“돌아가시오. 그렇게 계속 밖에 서 있으면 창문으로 소리칠 거요.”
그러나 위협적인 소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애원하는 듯이 들렸다. 잠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어느쪽도 옴쭉달싹도 하지 않았고,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서로가 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걸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문 한쪽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쪽에는 확고한 외침이 있다.
마침내 롬버드는 지갑을 꺼내어 안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가장 액수가 큰 것은 50달러짜리였다. 그밖에도 소액권 지폐 몇 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액면이 큰 것을 집었다. 그리고는 웅크리고 앉아서 그것을 문 밑 틈새로, 이미 이쪽에선 잡을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실내로 밀어넣었다.
그는 일어서며 다시 말했다.
“엎드려서 문 밑을 더듬어 보시오. 내가 도둑이 아니란 걸 알 거요. 자, 알았으면 어서 문을 열어봐요.”
아직 주저하고 있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뒤에 체인이 벗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빗장도 벗겨지고, 마침내 열쇠구멍으로 열쇠가 돌았다. 아주 단속이 철저했다. 마지못해 문이 열렸다.
“동행이 있습니까?”
“아니, 혼자요. 그리고 당신을 해칠 뜻으로 온 게 아니니까 안심하기 바라오.”
“경찰에 관계되쇼?”
“아아, 그런 사람이 아니오. 그럴 생각이라면 경관이라도 한 사람 데리고 왔을 테지만… 자, 아무도 없지 않소. 난 잠시 할 얘기가 좀 있소. 알아듣겠소?”
그는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칠흑 같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 암흑의 장막, 저승이 바로 이런 곳을 가리키리라.
처음엔 복도에서 새어들어오는 황갈색 빛이 쐐기 모양으로 실내로 던져지고 있었지만, 문을 닫자 그것마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전등은 켜지 않소?”
“그래요.” 하고 장님이 대답했다.
“이것이 공평할 거요. 얘기만 한다면 빛이 필요없을 테니까.”
그는 어딘가에 앉은 모양인지, 가까운 곳에서 낡은 침대의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 그날 번 돈을 매트리스 밑에 숨기고, 그 위에 올라앉아 있을 것이다.
“이것 봐요,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두시오. 이거야 원 얘기도 편안히…”
롬버드는 무릎 높이의 주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러다가 거의 망가진 흔들의자의 팔걸이가 손에 닿자, 그것을 끌어당겨 앉았다.
상대의 긴장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할 말이 있다고 했죠? 자, 이렇게 들어왔으니까 어서 말해 보쇼. 얘기하는 덴 눈이 안 보인다고 곤란하지는 않으니까…”
롬버드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담배라도 피우지 않겠소? 당신, 담배는 피우지?”
“손에 들려 있을 때는.” 하고 상대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자, 한 대 빼쇼.”
치직 하는 소리가 나며 라이터의 조그만 불빛이 롬버드의 손에서 비쳤다. 실내의 일부가 빛 속으로 들어왔다. 장님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지팡이를 무릎에 놓고, 언제라도 무기로 쓸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롬버드는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러자 손에는 담뱃갑이 아니라 리볼버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권총을 몸에 바싹 붙여 장님을 곧바로 겨냥했다.
장님이 움찔했다. 지팡이가 무릎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얼굴을 감싸듯이 떨며 양손을 위로 올렸다.
“역시 돈이 목적이었군!” 하고 그는 목쉰소리로 말했다.
“방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롬버드는 꺼낼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권총을 거두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장님이 아니로군. 이런 쇼를 할 필요도 없이 난 진작에 알고 있었소. 단지 내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당신에게 알려주려고 이런 짓을 했을 뿐이오. 50달러짜리에 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아니겠소? 당신은 잠깐 성냥을 켜서 지폐를 들여다봤겠지. 가짜 장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1달러짜리가 아니란 걸 알았겠소. 형태도 촉감도 모두 똑같아. 1달러짜리로서야 문을 열어줄 가치도 없을 테고. 아까 당신이 갖고 들어온 돈도 꽤나 많겠지. 그러나 50달러짜리라면 다소 위험이 있어도 상관없으리란 기분이 들었을 거요. 지금까지 모은 돈에 비교한다면야…”
쓰다 둔 일그러진 양초가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는 얘기를 계속해 나가며 그쪽으로 가서 라이터의 불을 옮겨붙였다.
“역시 경찰이었군.” 하고 장님은 떨면서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자주 닦아냈다.
“좀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오. 당신이 어떤 구실을 만들어 오가는 사람들의 돈을 끌어모으던 나에게는 관심없소.”
의자로 되돌아와 앉으면서 말했다.
“그럼, 도대체 누굽니까? 내겐 무슨 볼일로…?”
“당신이 본 어떤 일을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오, 장님 선생.” 하고 그는 일부러 비웃는 듯이 말했다.
“잘 들어봐요. 당신은 5월 어느 날 밤, 카지노 극장 앞을 어슬렁거리며 나오는 손님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지…”
“그렇지만 그곳엔 하도 많이 가봐서…”
“내가 말하는 것은 하룻밤, 어느 특별한 날의 밤이오. 다른 날 밤 같은 건 필요없어. 그런 거야 아무려면 어때. 자, 그 특별한 날 밤… 남녀 두 명이 극장에서 나왔소. 여자의 차림새가 좀 특이했지. 모자 꼭대기에는 더듬이처럼 곧고 긴 깃이 꽂혀 있었소. 그 두 사람은 현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택시를 타려고 했지. 그때 당신이 달라붙은 거요. 자, 지금부터가 중요한 부분이니 잘 들어요. 당신이 내민 그릇에 여자가 자선을 베풀 생각이었는지 자기가 피우다 만 담배를 던져넣었소. 덕분에 당신은 손가락을 데었지. 그때 동행한 남자는 황급히 그걸 집어내며, 사과하는 뜻에서 1달러짜리 두 장을 당신에게 쥐어주었소. 그리고는 아마 이런 식으로 얘기했을 거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만 실수를 해서.’ 어때, 기억이 날 텐데? 불붙은 담배가 매일밤 그릇 속에 던져져서 손가락을 델 리도 없겠고, 또 한꺼번에 한 사람에게 아닐 테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어떡하실 거요?”
“할 수 없지. 지금 당장 이곳을 나가 가까운 경찰서에 가서 사기꾼이라고 알리는 수밖에. 당연히 당신은 형무소에 근무하지 않으면 안되겠고,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실려지겠지. 그리고 앞으로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게 발견되면 그 즉시 경찰 신세가 되겠고.”
침대 위의 남자는 미친 듯 마구 제 얼굴을 잡아뜯었다. 그 순간에 검은 안경도 눈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고 있든 말든 억지로 말하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좌우지간 당신이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선 내게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얘기를 몽땅 해주시오. 그리고 다시 한 번 내 친구인 어떤 형사에게 그 얘기를 해주고. 그 양반을 여기로 데리고 올 수도 있고, 당신을 그 양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갈 수도 있고…”
거지는 다시 동요의 기색을 보였다.
“그러면 몽땅 탄로나는 거 아뇨, 그거? 그것도 상대가 형사라니! 나는 장님으로 되어 있으니 그 두 사람을 봤다고 할 수도 없고. 당신은 아까 내가 모른다고 잡아뗀다면 어떻게 하겠다고 나를 협박했지만, 이것도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경찰 그 자체와는 관계가 없소. 내가 말을 해놔서 죄가 안되게 약속을 받을 거요. 자, 어때? 기억하고 있어, 없어?”
“예, 기억하고 있어요.”
장님 거지는 낮은 목소리로 인정했다.
“그 두 사람을 분명히 봤죠. 나는 그 극장 밖처럼 밝은 장소에서는 검은 안경을 끼고 있어도 눈을 거의 감고 있죠. 그러고 있는데 담배에 손가락을 데어서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말았던 겁니다. 그래서 안경 너머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었죠.”
롬버드는 지갑에서 뭔가를 꺼내어 보였다.
“이 남자?”
장님은 안경을 위로 올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그런 것 같은데. 잠깐 뿐이지만, 이 사람인 것 같습니다.”
“여자는 어땠소? 다시 한 번 보면 알아볼 수 있겠소?”
“아, 또 봤어요. 남자는 그날 밤뿐이었지만, 여자는 그 뒤 적어도 한 번은 더 봤어요.”
“뭐라고?”
롬버드는 벌떡 일어나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빈 의자가 그의 등뒤에서 흔들렸다. 그는 장님의 어깨를 잡고서 정보를 쥐어짜내려는 듯이 뼈와 가죽만 남은 상대의 몸을 밀어붙였다.
“그 얘기를 해봐! 어서, 빨리!”
“그날 밤에서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어요. 그래서 같은 여자인 걸 알았죠.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남녀 한 쌍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자가, ‘좋아질지도 모르겠어요.’ 하고 말하기에 날 보고 그러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의 발소리가 이쪽으로 향해 오더군요. 그리고는 돈을 넣어주었습니다. 25센트짜리 동전이었죠. 나에게는 소리만으로도 구별이 가능합니다. 바로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것 때문에, 아 그때 그 여자로구나… 하고 느꼈던 거지요. 아주 번뜩 스쳐가는 느낌이어서 보통 사람이라면 못 느꼈을 겁니다. 여자가 내 앞에서 지극히 짧은 순간 발을 멈추더군요. 그런 일은 보통 사람들에게선 거의 없는 일이었지요. 이미 돈을 주고 난 뒤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어딘가를 살펴보고 있는 모양이구나 하고 알아차렸습니다. 나는 손에 그 당시에는 큰 물집이 생겨 있었거든요. 그 여자가 손가락 옆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그러더니 여자가…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어머 이상한 일도 다 있네!’ 하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죠. 그리고는 여자의 발자국 소리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바로 이런 정도의 얘기인데…”
“그러면…”
“아, 잠깐만, 아직 얘기가 더 있어요. 그래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릇 속을 들여다봤지요. 그랬더니 처음의 25센트짜리 동전 외에 1달러짜리 지폐가 더 들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여자가 준 거였죠. 여자는 왜 25센트짜리 동전을 준 뒤에 다시 1달러짜리를 더 내놓았겠습니까? 그건 그날 밤 바로 그 여자였기 때문이지요. 내 손의 물집을 보고, 며칠 전 밤에 일어난 일이 생각났던 거지요…”
“흠, 아마 틀림없을 거야.” 하고 롬버드는 안타까운 듯이 이를 깨물었다.
“당신이 그 여자를 정말로 봤다면, 그녀가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정면에서 본 것이 아니라서요. 눈을 뜰 만한 배짱은 사실 없었거든요. 불빛이 너무 밝아서, 잘못하다간 들킬 염려도 있고 해서. 여자가 등을 돌리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1달러짜리를 봤습니다. 그리고는 여자의 뒷모습을 슬쩍 보았죠. 그때 마침 차를 타려는 순간이었습니다.”
“뒷모습을 봤단 말이지! 그래, 그것만이라도 말해 봐요. 어땠소, 뒷모습 말이오?”
“아니, 뭐 전체를 다 본 건 아니었어요. 눈을 뜬 것이 발각되면 곤란하거든요. 그때 막 그녀가 발을 들어 차에 오르려고 하는 바람에 실크 스타킹의 솔기와, 한쪽 구두의 뒷굽뿐이었지요. 속눈썹 사이로 본 것이어서 그 정도밖에는 초점이 맞지 않았죠.”
“첫날밤엔 오렌지색 모자, 그리고 일주일 뒤의 밤엔 스타킹 솔기와 구두의 뒷굽뿐이라고!”
롬버드는 거지를 침대로 밀어붙였다.
“이런 식이라면 그 두 가지를 몰라도 20년은 족히 걸리겠군.”
그는 문 입구로 가서 문을 열어젖히고는 거지 쪽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더 알고 있어, 나는 다 알아! 그것을 다 털어내려면 직업을 드러내는 수밖에 없겠군. 첫날밤 당신은 극장 밖에서 번쩍 눈을 뜨고 그녀의 전신을 본 게 분명해. 또, 두 번째 밤에도 여자가 차에 타며 운전사에게 말한 목적지 같은 걸 들었을 텐데…?”
“아뇨, 그렇지 않았소.”
“아무튼 이곳에 꼼짝말고 있어. 이곳을 떴다간 알아서 해. 아까 말한 그 양반에게 전화를 걸고 오겠어. 이곳으로 오라고 해서 함께 얘기를 들어봐야겠어.”
“경찰을 부른다고?”
“괜찮다고 했잖아. 나나 그 양반이나 당신에겐 관심없어. 그러나 내가 나가고 없는 사이에 도망이라도 친다면, 뒤끝이 안 좋을 거야.”
그렇게 말을 내뱉으며 그는 문을 닫았다.
전화 저편의 목소리가 깜짝 놀라는 듯했다.
“아니, 벌써 실마리를 잡았단 말이오?”
“어느 정도는 잡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도 있는 그대로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당신이라면 더 많은 것을 캐낼 수가 있을 테니까요. 내가 지금 있는 곳은 123번가와 아베뉴 공원이 합쳐지는 곳인데, 철도 선로 바로 앞집입니다. 지금 곧 이리로 와 주시죠. 그리고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 순찰중인 경관에게 부탁해서 내가 돌아갈 때까지 그 건물 입구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나는 길 걸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샛길 입구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몇 분 뒤 버지스는 속도를 늦춘 순찰차에서 뛰어내렸다. 순찰차는 그대로 달려 사라졌다. 그는 롬버드와 경관이 서 있는 건물 입구로 향했다.
“이 안입니다.”
롬버드는 말과 동시에 아무런 설명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나는 돌아가도 되겠군요.”
경관은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수고했습니다.”
롬버드는 뒤에 대고 말을 던졌다. 그리고는 버지스와 롬버드는 잽싸게 계단을 가로질러 오르기 시작했다.
“맨 꼭대깁니다.” 하고 말하면서 롬버드는 앞장서서 오르기 시작했다.
“녀석이 그 여자를 두 번 봤다고 하더군요. 장님이지만, 웃으시면 안됩니다. 가짜거든요.”
“흠, 그 정도만 해도 여기 온 보람은 있겠군.” 하고 버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난간을 붙잡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첫번째 층계참까지 올라갔다.
“눈감아 주시기 바랍니다… 가짜 장님이란 것 때문에 경찰을 두려워하고 있거든요.”
“알아서 처리하겠소. 그 정도의 가치만 있다면.” 하고 버지스는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2층 층계참.
“아직 한 층 더 위입니다.”
롬버드가 확인하듯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잠깐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하고 버지스가 헐떡거리며 물었다. 롬버드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졌다.
“이상한데, 내가 내려올 때는 확실히 한 개가 켜져 있었는데. 전기가 나간 건가, 아니면 누가 장난을 친 건가?”
“켜져 있었던 게 확실하오?”
“확실합니다. 녀석의 방은 어두웠지만 열려진 문틈으로 복도의 빛이 비쳐 들어왔었던 게 생각나거든요.”
“내가 앞장서겠소. 손전등을 갖고 있으니까.”
버지스가 옆쪽으로 빠져나가 앞장섰다. 그는 막 손전등을 꺼내어 들려고 하다가 그만 계단과 계단 사이의 층계참에서 갑자기 두 팔과 두 다리를 탁 짚으며 롬버드에게 소리쳤다.
“뒤로 물러서요.”
손전등이 동그란 원을 그리며 켜진 순간 주위의 벽과 가장 아래쪽 계단 사이의 조그마한 장방형 마룻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엔 흉하게 구부러진 모양으로 한 인간이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다리를 아래쪽에서 두세 계단째에 거꾸로 내던지고 몸통은 층계참에 늘어져 있었고, 머리는 층계참 벽 때문에 부자연스럽고 날카로운 각도로 뒤로 젖혀져 있었다. 기적적으로 무사한 검은 안경이 한쪽 귀에 걸려 있었다.
“이 남자요?” 하고 버지스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롬버드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버지스는 남자 위로 구부리고 앉아서,
“부러졌군. 즉사했소.”
그는 손전등으로 계단 위쪽을 비추며 그쪽으로 올라가서 마루 이쪽 저쪽을 살펴보았다.
“헛디뎠군. 계단 꼭대기에서 발을 헛디뎌 거꾸로 굴러떨어져 층계참 벽에 머리를 부딪쳤소. 계단 맨 위쪽 가장자리에 미끄러진 흔적이 있어요.”
롬버드는 천천히 그의 곁까지 올라가서는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아주 깊숙히 훅… 하고 한숨을 토해 냈다.
“뜻하지 않은 때에 사고를 일으키다니! 겨우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문득 말을 끊고, 손전등 빛 속에서 버지스를 살피듯이 쳐다보면서 물었다.
“사고 이외의 것은 생각할 수 없겠습니까?”
“당신과 경관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다른 일은 없었소?”
“허… 들어온 사람도 나간 사람도 없었는데요.”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는?”
“전혀. 만일 들었다면 곧 달려와 봤을 겁니다. 하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적어도 두 번은 이 위쪽 철길로 긴 열차가 지나갔습니다. 그것이 지나갈 때는 시끄러워서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죠. 어쩌면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버지스도 수긍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리지 않았겠군. 대체 사고가 아니라면 너무나도 우연이 많아. 저 벽에 머리를 열 번 정도 들이박는다 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텐데. 목뼈가 이건 재수없게 즉사했다는 얘긴데, 그러한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소?”
“그런데 저 전등은 또 어떻게 된 걸까요? 지나치게 우연이 겹치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내가 급히 계단을 달려 내려갈 때 저 전등은 분명히 켜져 있었어요. 그렇지 않다면 천천히 내려갔을 겁니다. 그런데 나는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거든요.”
버지스가 벽을 따라 손전등을 비추다가 곧 전구를 발견했다. 전구는 소켓 속에 끼워진 채 벽 옆에 붙어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뜻을 잘 모르겠소. 만일 그가 가짜 장님 짓을 하고 있었다면, 아니 적어도 거의 눈을 감고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전등이 켜져 있던 없던 문제가 안될 것 아니겠소? 어둡다는 게 그에게는 불리할 리 없으니까. 실제는 캄캄한 쪽이 밝을 때보다 발밑이 훨씬 정확했을 거요. 평소 눈을 사용하는 데 익숙해 있지 않을 테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고 롬버드가 말했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도망치려고 급히 서둘러서 뛰쳐나간다… 너무 다급한 끝에 눈을 감는 걸 잊어버리고 그만 뜬 채로 있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때의 그는 우리들보다 훨씬 불편하겠군요.”
“당신 얘기에는 모순이 많아요. 만일 그가 눈이 부셨다면 전등은 켜져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전등이 꺼져 있는 걸 문제삼고 있으니. 도대체 당신 요점은 어느 쪽에 있는 거요? 어느 누구라 해도 계산에 넣을 수는 없잖소. 또한, 저런 식으로 굴러떨어져 목뼈가 부러지리라고도 예상할 수 없는 거 아니겠소?”
“그렇군요. 그럼, 우연한 사고였겠군요.”
롬버드는 자포자기한 듯 한 발자국 한 발자국마다 모든 체중을 다 쏟아넣으면서 무겁게 계단을 내려갔다.
“이 녀석을 족치면 뭐라도 나올지 모르지만, 이렇게 되어서야 다 틀려버리고 말았잖습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시오. 또 다른 실마리를 찾아봅시다.”
“그러나 이제 저 녀석에게서는 다 틀려 버렸어요. 게다가 단서는 죄다 저 녀석이 갖고 있어서 물어올 때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롬버드는 시체가 뒹굴고 있는 계단참으로 발을 내딛다가 갑자기 휙 몸을 돌렸다. 버지스는 벽을 가리켰다.
“전등이 들어왔잖아! 당신이 계단을 내려가는 진동으로 켜진 거요. 이제야 첫번째 수수께끼가 풀렸군. 저 녀석이 굴러떨어지는 충격으로 전류가 끊어졌던 겁니다. 전선 어딘가가 접촉이 잘 안 되는 모양이오. 이것으로 전등 문제는 풀렸소.”
이어서 그는 롬버드에게 말했다.
“당신은 돌아가는 게 좋겠소. 보고는 내가 할 테니까. 당신이 또 다른 것을 찾아낼 생각이라면, 여기서 속상해 해봐야 아무 소용 없잖소.”
롬버드는 아주 의기소침해져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에서 거리로 옮기고 있었다. 평상시의 경쾌함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뒤에 남은 버지스는 층계참의 시체 옆에 그냥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