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하얗게 세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눈 위에까지 늘어뜨리고 양배추 냄새를 푹푹 풍기는 더럽고 지저분한 여인이 문을 열었다.
“오배넌 씨 댁이죠? 마이클 오배넌 씨…?”
그가 거기까지 말하자 상대방이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거참, 되게 귀찮게 구는군. 내가 오늘 사무실까지 찾아갔었어요. 그랬더니 거기에 있던 남자가 수요일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했단 말예요. 우리는 그런 가난뱅이 회사를 짓밟을 생각은 없어요. 정말이지.”
“부인, 나는 수금원이 아닙니다. 다만 지난 봄에 카지노 극장의 도어맨으로 일했었던 마이클 오배넌 씨와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찾아온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 양반, 그전에 그런 일을 하긴 했었던 것 같군요.”
여인은 가시돋친 말투로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기울이고 소리질렀다. 롬버드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소리치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 한 가지 직업을 잃고 나면, 그 뒤는 돌절구처럼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인 채 새로운 밥줄은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거예요. 잠자코 앉아만 있으면 누가 자기를 찾아올 줄 아나 봐요, 그 꼴에.”
목소리로 안쪽 어딘가를 향해 소리쳤다.
“여보, 당신에게 손님이 찾아왔어요, 마이크!”
여인은 그렇게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나서는 롬버드에게 말했다.
“상관없으니까 들어오세요. 그 양반, 지금 구두를 꿰매고 있으니까요.”
롬버드는 기차 통로 같은 복도를 지나갔다. 그 복도는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기분나쁜 길이었지만, 물론 그럴 리야 없을 테지. 막다른 곳에 방이 있고, 테이블이 방 중앙에 놓여 있었다.
그 테이블과 나란하게, 롬버드가 찾고 있는 인물이 구질구질한 꼬락서니로 드러누워 있었다. 반듯한 나무 의자를 두 다리에 마주대고 그 위에 몸을 뻗쳐놓고 있었는데, 공중에 붕 떠 있는 부분은 줄로 있었다. 옷차림이라야 구두만 벗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입을 것조차 변변히 걸치지 않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실제로 상반신은 팔꿈치까지밖에 오지 않는 엷은 누런색 속옷만을 걸치고 있었고, 그 위에 멜빵이 걸쳐져 있었다. 발 쪽의 의자에는 발가락 부분에 구멍이 뚫린 양말 두 짝이 천정을 향하고 있었다. 롬버드가 들어가자 그는 경마 예상기사가 실려 있는 분홍색 종이와 시큼한 냄새가 물씬 나는 파이프를 곁에다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쇼, 선생?” 하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롬버드는 모자를 테이블에 놓고는 상대방의 허락도 없이 무턱대고 의자에 앉으며,
“실은, 내 친구가 어떤 사람을…”
그는 말을 꺼냈다. 이런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사형선고니, 경찰과 협의를 봤다느니 하는 등은 서툰 수법이다. 그렇게 되면 완전히 공포에 질려서 알고 있는 것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 친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당신이 극장에서 일하던 지난 5월의 어느 날 밤 어떤 남녀가 입구에서 택시에서 내린 것을 혹시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당신이 택시의 문을 열어주었다고 하던데…”
“글쎄요, 택시 문을 열어주는 게 내 직업이오만…”
“그 두 사람은 조금 늦게 도착했을 겁니다. 그날 밤 맨 마지막 손님이었는지도 오렌지색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꼭대기에는 얇은 깃털로 장식을 한 아주 기묘하게 생긴 모자였지요. 그 여자는 바로 당신 곁을 지나쳐 갔으니까, 그 모자도 당신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당신의 눈이 이렇게 좌에서 우로 천천히 그걸 따라갔을 텐데요. 너무나 눈앞을 가까이 스쳐가면 도리어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는 일이 종종 있긴 하지만.”
“그건 이 양반의 특기예요.” 하고 부인이 입구에 서서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미인이 몸에 지니고 있는 거라면 아주 홀딱 빠져버리는 사람이거든요. 어떤 물건인지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말예요.”
두 남자가 신경쓰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있었어요.” 하고 말을 하고는, “우연히 그곳에서 그 광경을 보았던 그 친구가 내게 얘기해 주더군요.” 하고 롬버드가 말했다.
그는 테이블에 양손을 올려놓으며 상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기억나십니까? 그 여자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오배넌은 천천히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그리고는 윗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고개를 흔들면서 롬버드를 향해 비난의 시선을 보냈다.
“당신, 지금 무엇을 물어보고 있는지나 아쇼? 내 직업은 밤마다 수많은 얼굴들을 쳐다보는 겁니다. 더욱이 그 얼굴들의 대부분은 남녀 한쌍이 되는 게 보통이라고요.”
롬버드는 테이블 너머로 상체를 기울이며 노려보면 저절로 상대방의 기억이 되살아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듯이…
“부탁이오, 오배넌 씨. 잘 좀 생각해 봐요. 부탁이오. 불쌍한 내 친구에게는 당신의 기억만이 유일한 희망이오.”
그 말을 듣고 부인이 서서히 다가왔지만 말참견은 하지 않았다.
오배넌은 세 번째로, 하지만 이번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이 안 나는걸. 내가 거기에서 일하던 동안에 차의 문을 열어준 사람들 중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단지 한 사람밖에 없소. 어느 날 밤엔가 술이 잔뜩 취해서 온 남자였는데, 내가 택시 문을 열어주자마자 그 양반이 머리부터 굴러떨어져서 내가 부축해 줄 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흘러나올 것 같아서 롬버드는 얼른 그것을 막으면서 일어섰다.
“그럼, 할 수 없군요. 아무리 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단 말이죠?”
“안 돼요, 아무리 해도.”
오배넌은 다시 그 끔찍한 냄새가 나는 파이프와 경마 기사를 손에 들었다. 부인은 이미 두 사람의 바로 곁에 와 있었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롬버드의 안색을 읽어내려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발린 말을 말 끝에 슬쩍슬쩍 비치면서,
“만일 이 양반이 그 일을 기억해 낸다면 무슨 대가라도 있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아, 물론이죠. 내가 알고 싶은 걸 가르쳐 준다면야 나름대로 보답을 해드릴 생각이지요.”
그녀는 처량하게 남편을 다그쳤다. 그리고 나서 남편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는 밀가루라도 반죽하듯이, 아니면 관절을 마사지라도 해주는 듯이 거칠게 흔들어댔다.
“해봐요, 마이크. 어서 생각해 봐요, 응!”
그 남편은 한쪽 손을 목 뒤로 돌려서 그녀의 팔을 잡고는 소리를 질러댔다.
“그렇게 흔들지 말어! 머릿속에 뭐가 남아 있어도 그렇게 흔들어대면 다 잊어버리겠다, 제기랄!”
“아무래도 안될 것 같군.”
롬버드는 한숨을 내쉬고는 등을 돌려서 실망한 모습으로 좁은 복도를 되돌아나왔다.
뒤에서 멀어져 가는 실내에서는 부인의 목소리가 점차 화가 섞인 울부짖음으로 높아져 가는 것이 들려왔다. 그녀는 남편의 단단한 어깨에 또다시 공격을 가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어떻게 해봐요, 마이크! 저 사람은 단지 당신에게 기억해 내보라고 하는 것뿐이에요. 그래, 그것도 기억해 내지 못한단 말예요, 내 참!”
그녀는 실망한 끝에 남편의 소지품에 애꿎은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고통어린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내 파이프, 내 경마 기사를 어떻게 하려는 거야?”
두 사람이 큰소리를 지르며 서로 욕지거리를 퍼붓는 것을 들으면서 롬버드는 손을 뒤로 하여 문을 닫았다. 그러자 갑자기 무슨 음모라도 꾸미고 있는 듯한 섬뜩한 침묵이 찾아왔다. 롬버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어수선한 발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지고, 이어서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는 오배넌 부인의 목소리가 계단 위쪽에서 열띠게 들려왔다.
“기다려요, 손님! 돌아오세요! 그이가 지금 막 기억해 냈어요!”
“정말입니까?”
롬버드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멈추어서서 부인 쪽을 바라다보았지만 돌아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갑을 꺼내어 그 한쪽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신 남편에게 이것만 물어보시오. 그 여자가 팔에 걸치고 있었던 삼각 슬링이 검은색이었는지, 아니면 흰색이었는지 말이오.”
부인은 그 질문을 앵무새처럼 흉내내어 방안으로 전달했다. 그리고는 대답을 받아 그것을 롬버드에게 전했다. 그 목소리에는 약간 주저하는 빛이 들어 있긴 했지만…
“흰색이었답니다. 이브닝 드레스에 맞춰서요.”
롬버드는 지갑을 도로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안됐군요.” 하고 딱 잘라서 말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