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롬버드는 양손을 호주머니 속에 푹 찔러넣은 채 감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발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처럼 자기 발밑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는 멈춰서서 이렇게 말했다.
“헨더슨,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할 수 없겠나? 나는 마술사가 아니야. 모자 속에서 여인을 끄집어낼 수는 없다고.”
헨더슨은 진절머리가 나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 자신도 그 일에 대해서는 지겨울 정도로, 아니 꿈속에도 나타날 정도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어. 아무리 졸라봐야 더 이상은 나올 것이 없어.”
“모자 외에는 기억을 못하겠나?”
“몇 번이고 눈에 들어온 거야 틀림없지만 기억이 도통 나질 않아.”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더듬어가 보세. 그런 울상은 짓지 말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어. 자네가 술집에 들어갔을 때 이미 그 여자는 카운터 쪽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때의 첫인상을 말해 보게. 아무거라도 생각해 내봐. 인간의 기억에는 불가사의한 면이 있어. 나중에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검토해 보는 것보다, 벌써 사라져 버렸을 첫인상이 오히려 분명하게 남아 있는 수가 많지. 어땠어, 첫인상 말이야.”
“한쪽 손이 크래커가 담긴 접시 쪽으로 뻗어 있었어.”
그는 지겨운 듯이 물었다.
“아니, 전혀 상대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겨가서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나, 응! 말이 안되잖아, 그건! 어떻게 상대가 젊은 여자인지를 알았지? 거울을 통해서 보고 말을 걸 작정이었나? 그럼, 어떻게 여자가 젊다는 것을 알았느냔 말이야.”
“스커트를 입고 있었으니까 여자였고, 목발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멀쩡한 여자라고 생각했어. 그 두 가지만으로도 나는 충분했어.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계속해서 나는 건너편에 있는 내 ‘젊은 여성’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거든. 말하자면, 마음의 눈을 통해서 말이야. 그런 나에게 무엇을 얘기하라는 건가?”
롬버드는 쌍방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나서 다시 물었다.
“목소리는 어땠지? 뭔가 연상되는 거라도 없었나, 응? 어디 출신이라든가, 어떤 환경의 여자라든가…”
“고등학교를 나왔다든지, 도회지 출신이라든지 하는 것 말이지? 말투는 나와 비슷했어. 순수한 뉴욕 토박이 같았어. 사투리는 조금도 쓰지 않았거든.”
“특별히 사투리 쓰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곳 사람인 모양이군. 하기야 그렇다고 해도 별 도움도 안되겠지만. 택시 안에서는 어땠나?”
“별로. 그냥 타고 있었을 뿐이야.”
“레스토랑에서는?”
헨더슨은 반항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기억나질 않아. 아무리 해봐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겠나? 먹고, 떠들어대고… 단지 그것뿐이었어.”
“그래, 그럼, 무슨 이야기를 했지?”
“기억나지 않아. 한마디도 생각해 낼 수가 없어.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이야기도 없었어. 시간을 때우려고 적당한 사이를 둬가면서 이야기를 했을 뿐이니까. 그 레스토랑의 고기는 맛이 있다든가, 전쟁은 싫다든가 하는 것들 말야.”
“나까지 머리가 이상해져 오는군. 자네가 그 ‘젊은 여성’에게 홀딱 빠졌다는 것은 설마 거짓말이 아니겠지?”
“무슨 소리야? 하지만 그 얘기는 그만두세.”
“극장에서는 어땠나?”
“나. 이미 자네에게도 몇 번 얘기했잖나. 자네도 이렇게 대꾸했잖아. 그것만으로는 어떤 여자인지 알 도리가 없어. 단지 그 시간에 그 여자가 어떤 일을 했다는 사실뿐이지…”
롬버드는 몸을 앞으로 잔뜩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는 일어서게 되었나? 그것이 의문일세. 그때는 공연 도중이었다고 했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렇게 일어서는 사람이 있을까?”
“글쎄.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볼 수는 없으니까.”
“자네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의 일조차 알지 못하니 당연하지. 어쨌든 좋아, 그 문제는 일단 뒤로 미루도록 하세. 결과가 나오면 어느 것이나 원인으로 거슬러 그는 잠시 동안 초조한 듯이 왔다갔다 했다. 조금 시간을 둠으로써 두 사람의 머리를 식히려는 생각이었다.
“그 여자가 일어섰을 때 잠깐이라도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나?”
“쳐다본다고 하는 것은 눈동자의 움직임에 의한 물리적인 행위일 뿐이지. 그러나 살펴본다고 하는 것은 뇌세포를 이용하는 지능적인 행위야. 나는 밤새도록 그녀를 쳐다보기는 했지만 살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단 말일세.”
“미치게 만드는군.”
롬버드는 얼굴을 찡그리며 양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도저히 자네에게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을 것 같군. 그러나 누군가 그것을 알게 해줄 상대, 즉 그날 밤 자네가 그 여자와 함께 두 사람이 여섯 시간 동안이나 함께 거리를 헤맸으면 적어도 누군가는 본 사람이 있을 텐데.”
헨더슨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꾸했다.
“그 점은 나도 골백번은 생각해 봤어. 그리고는 나의 착각이란 것을 알았네. 아마 그날 밤 길거리의 사람들은 죄다 집단 난시에라도 걸렸던 모양이야. 경찰에서도 내게 몰아세우더군. 당신 머리가 이상한 거 아니야? 그런 여자가 정말로 있었나? 당신의 환상이 아니고?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란 말이지? 하고 말일세.”
“지금은 그런 마음을 버리는 게 좋아!” 하고 롬버드가 거칠게 내뱉었다.
“시간이 거의 다 됐소.” 하고 밖에서 간수가 소리쳤다.
타다 남은 성냥을 주워 벽 쪽으로 가지고 갔다. 벽에는 성냥의 시커먼 그을음으로 그려놓은 짧은 선이 평행을 이루며 몇 갠가 그어져 있었다. 위쪽의 선은 모두 사선이 덧붙여져 X자형이 되어 있었지만, 아래쪽에는 아직 매끈한 선만이 몇 갠가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중 한 선에 사선을 그어 X 표시를 했다.
“그것도 잊어버려!”
롬버드는 퉤 하고 손바닥에 침을 뱉고는 성큼성큼 벽으로 다가가서 마구 문질러버렸다. X 표시도, 그냥 선만의 표시도 모두 순식간에 지워져 버렸다.
“조금 더 이쪽으로 와보게.”
그는 연필과 종이를 꺼내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일어서지.” 하고 말했다.
“이미 자네도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짐작하겠지?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은 산 재료야. 즉, 제2급의 증인이지. 법정에도 소환되지 않았고 경찰도, 자네의 변호사도 그냥 흘려버린 사람들 말이야.”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여러 귀신들이 법정에 나왔었지만 죄다 소용없었어. 그런 귀신 제2급품을 끌어들여서 제1급의 귀신을 찾는 데 이용하려는 것이 자네의 생각인 모양인데, 차라리 영매(靈媒)에게라도 찾아가는 편이 낫지 않겠나?”
“나로서는 그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자네와 소매를 스쳤을 뿐이라고 해도 괜찮아. 자네와 길거리에서 그저 마주친 사람이라도 괜찮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존재 한다는 거야. 아직 우리들이 쐐기를 박을 수 있는 여지가 어딘가에 틀림없이 남아 있을 거야. 아무리 얄팍해도 좋아. 우리들 손으로 한번 리스트를 만들어보세. 자, 시작하지. 우선 술집부터.”
“또 술집이야?” 하고 헨더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바텐더는 이미 쓸모가 없어. 자네들 두 사람 말고 술집 안에 있었던 사람은?”
“없었어.”
“잘 좀 생각해 봐, 초조하게 굴지 말고, 빌어먹을. 억지로 생각해 내려고 하면 더 생각이 나지 않는 법이지.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된다고.”
(4~5분이 경과했다.)
“잠깐, 박스 석(席)에 앉아 있었던 어떤 여자가 판을 돌려댔어. 술집을 나오다가 얼핏 그것을 보았지. 어때, 도움이 되겠나?”
롬버드는 연필을 움직여 나갔다.
“그 여자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것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는 건데 말야. 그 여자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이 없나?”
“없어. 그 빌어먹을 여자 이상으로 기억이 나질 않아. 단지 얼굴을 돌려서 그 여자를 쳐다봤다는 것 뿐이야.”
“그럼, 다음으로 가보세.”
“택시? 이것도 이미 조사가 끝났어. 그 운전사는 법정에 나와서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더군.”
“그럼, 레스토랑은? 그 메종 블랑세에는 물품보관소의 아가씨 같은 사람도 없었나?”
“있기는 있었지만, 그 여자를 기억하지를 못하더군. 아가씨는 그래도 정상적인 핑계를 갖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지. 물품보관소가 있는 벽 쪽으로는 나 혼자서만 갔었으니까. 그 환상의 여인은 나와 헤어져서 화장실에 갔었거든.”
롬버드는 다시 연필을 굴렸다.
“화장실에는 시중드는 여자가 있었을 텐데? 또 가령, 그녀가 자네와 동행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고 해도 그 여자를 따로 볼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잖겠나? 그리고 레스토랑에서는 그 여자를 관심 있게 본 사람도 없었나, 응?”
“그 여자는 나중에 혼자서 테이블로 왔으니까.”
“그럼, 이제 극장으로 가세.”
“낚시바늘 같은 희한한 머리를 기른 그 정도야. 그는 그 여자가 쓰고 있는 모자를 보고서 처음에는 멍청히 바라만 보다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구먼.”
“좋아, 그것은 집어넣어 보세.”
롬버드는 뭔가를 긁적거리면서 물었다.
“안내원은 어떤가?”
“우리들은 늦게 도착했지. 손전등으로 어둠을 밝게 비춰주었다는 기억밖에는 없어.”
“그건 안되겠고. 무대 쪽은 어떤가?”
“출연자들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그 쇼라는 것이 눈이 팽팽 돌 정도로 변화무쌍한 프로여서 말이야.”
“아니, 그녀가 일어섰다면 누군가가 눈여겨보았을 텐데? 출연자들 중에서 경찰조사를 받은 사람은?”
“내가 조사해도 별 상관은 없겠군. 이 사건에서 우리들은 조그만 것 하나라도 지나쳐 버려서는 안돼, 그렇잖나, 응? 어떤 일이라도 말이야. 그날 밤, 자네 주위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가령 앞 못 보는 장님이라도, 나는… 아니, 왜 그래?”
“아!” 하고 헨더슨은 날카롭게 소리쳤다.
“뭐야, 왜 그래?”
“자네가 지금 한 말 때문에 막 기억이 났어. 장님이 있었어. 돌아오는 길에 장님 거지가 끈질기게 달라붙었거든…”
이렇게 말하고 나서는 롬버드가 연필을 급히 움직여 메모하는 것을 보고는, “이봐, 농담이겠지?” 하고 반신반의하듯 물었다.
“그렇게 보이나?” 하고 롬버드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알게 될 걸세. 다 포함시키는 거야. 그밖의 다른 것은 없겠지?” 하고 말하고는 그 종이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서 일어섰다.
“이 순서대로 더듬어보면 어딘가에 돌파구가 있을 걸세!”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굳게 약속하고서 문 쪽으로 걸어가서 철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서는 헨더슨의 시선을 쫓아, 그것이 X 표시를 지운 흔적 위로 멍하니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벽 좀 쳐다보지 마!” 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나서 복도의 반대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네를 저곳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할 테니까.”
“놈들이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어.” 하고 헨더슨은 비꼬는 투로 말했다.
광고란에 게재.
‘지난 5월 20일 오후 6시 15분경, 안젤모 술집의 박스 석에 어떤 일행과 동석했었던 젊은 여자를 찾습니다. 당신은 그때 좌석 옆을 지나가는 오렌지색 모자를 되돌아본 기억이 없습니까? 만일 그런 기억이 있다면 아래 장소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술집 안쪽을 향해서 앉아 있었을 겁니다. 기억이 나면 급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의 운명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회답에 관해서는 절대로 비밀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당(當) 신문사 내 654번 J.L.’
회답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