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양쪽으로 사형수 감방이 줄지어 서 있는 복도… 그의 독방 바로 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깁니다.”
그리고 나서 열쇠꾸러미의 짤랑거리는 소리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가 외쳤다.
“면회요, 헨더슨.”
헨더슨은 대답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길고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두 사람은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벌써 잊어버렸소?”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을 잊을 리가 있습니까?”
“나는 어느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소, 심판대로 보낼 뿐이오.”
“그럼,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집어넣은 사람이 보내진 장소에서 도망치지 않고 얌전하게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들르셨군? 내가 하루 종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아야 만족스럽다는 거 아닙니까? 대단히 수고가 많으시군. 자, 잘 보시오. 나는 이 독방에서 꼼짝않고 있소이다. 이젠 안심하고 돌아가시지.”
“아주 날카롭군, 헨더슨.”
“서른두 살의 나이로 죽게 된 남자가 어떻게 달콤한 말을 속삭일 수 있겠소?”
버지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에 알맞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아픈 곳을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두 번 눈을 깜박거렸다.
그는 좁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좁지요?” 하고 헨더슨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대화가 끊기자 버지스는 자신도 갇혀 있다는 착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등을 돌려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헨더슨이 앉아 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피우겠소?”
헨더슨은 비웃는 듯한 얼굴을 들었다.
“담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형사는 쉰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헨더슨은 마지못해 한 개비 꺼내들었다. 피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면 혹시 버지스가 나가주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듯했다.
버지스가 불을 붙여주었다. 헨더슨은 더욱 경멸하는 표정으로 작은 불꽃 너머로 가만히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드디어 사형집행일이 결정되었나요?”
“당신 기분은 이해하오…” 하고 버지스는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조용하게 말했다.
그러자 헨더슨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내 기분을 당신이 안다고!” 하고 내뱉듯이 소리쳤다. 그리고는 담뱃재를 털고서 바로 그 손으로 상대방의 발을 가리켰다.
“당신은 그 발로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소!”
이어서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발을 가리키며,
“나는 그런 자유조차 없소!”
그는 고함을 지르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젠 나가! 어서 여기에서 나가 달란 말이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봐. 나 같은 중고품이 아닌 신품을 찾아보란 말이야!”
그는 다시 웅크리고 벽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연기는 벽에 부딪쳐 버섯구름처럼 펼쳐져서 다시 그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왔다.
두 사람은 이제 얼굴을 마주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버지스는 아직 그곳에 선 채로 돌아갈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상고는 기각된 것 같소.”
“그래요, 기각되었습니다. 이젠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지요.”
그는 몸을 돌려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엇 때문에 고통이 오래 가질 않아서 유감입니까? 아니면 나를 두 번 죽일 수 없어서 실망하셨나?"
버지스는 담배가 썩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것을 바닥에 버리고는 발로 비벼 껐다.
“벨트 아래를 치면 반칙이오, 헨더슨 씨.”
헨더슨은 잠시 동안 상대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분노의 불꽃으로 타올라서 시뻘개진 그의 눈이 갑자기 상대방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몇 달이나 지난 지금, 도대체 무슨 일로 찾아온 거요?”
버지스는 자기 목을 만지며 말했다.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소. 형사로서는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이미 내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었소. 아무래도 설명하기가 어렵군.”
그는 어색하게 말을 끊었다.
“어려울 것이 뭐 있소? 나는 독방에 감금된 사형수에 불과한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말하기 어려운 거요.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단을 내렸다.
“나는 당신이 결백하다고 믿고 있소.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거요. 이렇게까지 된 뒤에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그러나 헨더슨 씨, 나는 당신이 범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소.”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 좀 해보시오. 그렇게 앉아서 내 얼굴만 쳐다보지 말고.”
“무슨 말을 하면 좋겠습니까? 시체를 묻은 남자가 다시 그것을 파내어, ‘할 말이 없군. 내 실수였소.’ 하고 사과한다면 시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건 당신 말이 맞소. 물론 말하기 곤란하겠지. 그때 당시에 나는 내 나름대로 확실한 증거에 의해서 일을 처리했소. 하지만 이젠 그 고정관념 속에서 벗어나고 싶소. 내일이라도 당장 그때와 똑같은 차례대로 되풀이할 생각이오. 내 개인적인 감정 같은 건 절대로 개입시키지 않겠소.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조사해 가는 것이 내 임무이니까.”
“바뀌었는지 모르겠군요.” 하고 은근히 비꼬면서 헨더슨이 말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소. 다른 여러 가지 사실과 마찬가지로 막연한 것이오. 그것은 지난 몇 달 동안 천천히 내 마음에 스며 들어왔소. 마치 물이 종이에 스며들듯이. 사실은 법정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일종의 반작용이라고나 할까. 당신에게 불리한 증거로 제시된 것들을 나중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모두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소. 내가 말하는 것을 당신이 모두 이해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엉터리 알리바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교묘하고 한치의 틈도 없는 게 보통이오. 그렇지만 당신의 경우는 터무니없고 허점투성이였소. 문제의 그 여자에 대해서 무엇 하나 어린애라도 그 정도는 분별할 수 있을 거요. 법정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사이에 그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군. 저 남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모두 진실이다… 라는 생각이 말이오.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으면 끈질기게 부인할 리가 없다. 자기가 결백하지 않다면 저렇게 철저하게 기회를 묵살시켜 버릴 리가 없어. 꺼림칙한 점이 있는 사람은 더욱 교활하고 약삭빠른 법이지. 그런데 당신은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는데도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 개의 명사와 한 개의 형용사만 되풀이할 뿐이었소. ‘여자’, ‘모자’, 그리고 ‘기이하다’ 고 말이오. 나는 당신 말이 진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소.
남자가 맨 처음 들어간 술집에서 별로 관심도 없는 여자를 우연히 알게 된다. 그것뿐이 아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죽어 있고 자신은 범인으로 몰리는 상황이 된다. 당연히 그는 몹시 당황하겠지…”
그는 정감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어떨까? 그날 스쳐지나간 일들을 모두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마저도 그 소동 탓으로 깨끗이 지워지고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될까? 도대체 어느 쪽일까? 그 의문이 계속해서 내 머리를 괴롭혔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것은 더욱 강하게 내 머리를 압박해 왔소. 전에도 한 번 여기에 왔다가 되돌아간 적이 있었소. 그녀를 만나보았소.”
헨더슨은 목을 길게 빼고 말했다.
“그래서 무엇을 알아냈습니까?”
그는 헨더슨의 질문에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 아직 아무것도 알아낸 것은 없소. 아마 당신은 그녀가 나를 설득해서 여기로 보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오. 하지만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요. 오늘 내가 여기에 들른 것은 내 스스로 찾아온 것이지 누가 억지로 보낸 것이 절대로 아니오. 나는 다만 당신을 돕고 싶을 뿐이오.”
그는 감방 안을 왔다갔다 했다.
“나는 이제 무거운 짐을 벗은 기분이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 수사방법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헨더슨은 잠자코 있었다. 그는 바닥을 쳐다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덤벼들 듯한 태도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서성거리는 버지스의 그림자가 그의 머리 위를 이리저리 지나갔다. 하지만 헨더슨은 그쪽은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 그림자가 멈추고 호주머니를 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사람이라도 좋으니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야 하오. 자기의 시간을 완전히 당신을 위해서 희생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말이오.”
그는 또다시 동전을 짤랑거렸다.
“나는 안 되오. 나는 처자식이 있는 몸이오. 직장을 그만둘 수도 없소. 게다가 당신과 나는 남남이니까.”
헨더슨은 조용하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부탁한 적도 없습니다.”
그는 행동을 멈추고 헨더슨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당신이 잘 아는 사람을 하나 고르시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약속이라도 한다는 듯이 치켜들었다.
“그렇게 한다면 나도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겠소.”
그 말에 헨더슨은 머리를 들었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가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누가 좋을까요?”
“누구라도 관계없지만, 정열을 갖고 이 일에 뛰어들 사람이면 좋소. 신념이 있고, 돈이나 명예에 욕심이 없는 사람… 당신이 스코트 헨더슨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당신 대신에 자신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나약하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 이런 열의와 신념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오. 그런 사람이 아니면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소.”
그는 말하면서 한 손을 헨더슨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마치 잘 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당신에게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여자가 있소. 하지만 그녀는 나이가 아직 어려. 정열은 있어도 경험이 없단 말이오. 최선은 다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돼요.”
여기에서 비로소 헨더슨의 거친 얼굴빛이 차차 누그러졌다. 얼핏 감사의 눈길마저 보였다. 그는 젊은 애인에게 바치고 싶은 감사의 뜻을 대신 형사에게 보냈던 것이다.
“나도 느끼고는 있었습니다…”
“이 일은 남자가 아니고는 안돼요. 생각해 주는 남자가 필요하오. 반드시 있을 거요. 누구에게나 그런 친구가 한 사람 정도는 있는 법이니까.”
“나도 전에는 그런 친구가 있었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어려워집니다. 특히 결혼하고 나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한 그런 의리 있는 친구라면 떨어져 나갈 리가 없지요.” 하고 버지스가 말했다.
“진정한 친구라면 변하지 않는 법이오.”
“전에는 그런 친구가 있었지요.” 하고 헨더슨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한 때는 친형제처럼 친하게 지냈지만 이젠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친구에게 시간제한 같은 건 없소.”
“요전에 만났을 때 남아메리카로 떠난다고 했었습니다. 어느 석유회사와 5년간 계약을 맺었다고 하면서…”
그는 형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당신은 형사라는 직업에 맞지 않게 꽤 순진한 사람이군요. 5,000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 친구에게 이제부터 시작하려는 새로운 장래를 포기하고 내 일을 맡아달라고 하는 게 너무 지나친 요구는 아닙니까? 더욱이 지금은 가깝게 지내고 있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얼굴이 두꺼워진다는 게 맞는 말 같습니다. 이상(理想)도 시들해져 버리고 서른두 살의 남자는 스물다섯 살 때의 친구와는 다릅니다. 이제는 단지 서로 안다는 것에 지나지 않지요. 나도 역시…”
버지스가 그의 말을 막았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옛날에 그 친구가 당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무릅쓸 수 있는 사람이었소?”
“물론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렇게 해줄 거요. 우정에 나이란 관계가 없는 거니까. 옛날에 갖고 있던 우정이라면 지금도 똑같이 갖고 있을 거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옛날에도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을 거고.”
“하지만 그런 것으로 우정을 테스트하는 건 옳지 못합니다. 그 친구가 그렇게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려워요.”
“그 친구가 당신의 생명보다 5년 계약의 일 쪽을 더욱 중요시한다면야 물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당신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이오. 안 된다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 일단 기회를 줘보는 게 어떻겠소?”
그는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펼쳤다.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시, 남미석유회사 본사. 존 롬버드 귀하.>
‘자네가 떠난 뒤 마셀라를 죽인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네. 중요한 증인을 찾아내면 무죄를 증명할 수 있네. 내 변호사들도 해보았네만 자네에게 그 일을 부탁해야겠네. 나를 도와주게. 자네 말고는 없네. 사형집행일은 10월 셋째 주네. 나를 도와주게, 스코트 헨더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