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
밤새도록 숨막히는 질문과 대답 속에서 어느새 빛이 창으로 새어 들어왔다. 사람뿐만 아니라 방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변함이 없는데, 묘하게도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올 나이트 파티를 끝낸 뒤 같았다. 재떨이뿐만 아니라 그릇이라는 그릇은 모조리 담배꽁초로 가득차 있었다. 파란색 전기 스탠드는 여전히 켜져 있었고, 사진틀도 그대로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진은 이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실체의 빈 껍질일 뿐이었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행동은 조끼를 벗은 채 와이셔츠 칼라 단추까지 풀어젖혔다. 한 사람은 욕실에 들어가서 수돗물로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활짝 열려진 문으로 코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두 사람은 여전히 담배를 피우면서 실내를 조급하게 서성거렸다.
헨더슨만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밤새도록 앉아 있던 바로 그 소파에 여전히 앉아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 소파 위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욕실에 들어가 있던 버지스라는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머리를 통째로 세면대에 담갔다 꺼냈는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수건은 어디에 있소?”
그것은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그때는 무척이나 심각하게 들렸다.
“직접 수건을 꺼내어 쓴 적이 없어서 모르겠소.” 하고 그는 비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필요할 때는 집사람이 언제나 꺼내어 주었기 때문에 수건을 어디에 보관해 두는지 모릅니다.”
형사는 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문 앞에 선 채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럼, 커튼을 써도 괜찮겠소?”
“그렇게 하시오.”
헨더슨의 목소리는 낮고 맥이 없었다.
심문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이제는 끝났겠지 하고 생각하면 다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극장표가 두 장 있었다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그런데 당신은 왜 그걸 그렇게 우리들에게 믿으라고 강조하는 겁니까?”
그는 사람을 잘못 쳐다보았다. 그는 대화할 때는 으레 말하는 상대방을 쳐다보곤 했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마주보고 있는 상대가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것뿐이오. 사실을 말하는 것이 대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두 사람이 극장표 두 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에 대해서는 도대체 들어보지도 못했소? 그거야 지천으로 깔려 있는 얘기가 아니오. 당신, 안 그래요?”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이봐, 헨더슨, 시치미떼지 마시지. 그럼, 그 여자는 대체 누구요?”
“누구 말입니까?”
“이런 빌어먹을, 또 처음으로 되돌아가 가는군.”
그는 신경질 적으로 되뇌었다.
“이 얘기를 시작한 지 벌써 한 시간 반, 아니 두 시간이나 지났소. 다시 묻겠는데, 그 여자는 누구요?”
헨더슨은 피곤한 듯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버지스가 와이셔츠의 옷자락을 바지춤 속으로 찔러넣으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어 손목에 찼다. 그는 건성으로 시계를 한번 슬쩍 쳐다보고는 어슬렁어슬렁 전화기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티어니.”
아무도 그 말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헨더슨은 눈을 반쯤 내리뜬 채로 멍하니 마룻바닥의 카펫을 바라보고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창가 쪽으로 가서 차양을 움직여 햇볕이 많이 들어오도록 했다.
바깥쪽 창틀에 작은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그 새는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리 와보시오, 헨더슨. 이 새는 어떤 종류요?”
헨더슨이 금방 일어나려고 하지 않자,
“이봐요, 빨리 오지 않으면 날아가 버린다고!” 하고 그는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것처럼 소리쳤다.
헨더슨은 일어서서 그쪽으로 다가가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그래서 방에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참새로군.”
헨더슨은 짤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남자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하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그러리라고 짐작하긴 했소만…”
버지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헨더슨의 시선을 창밖으로 유도해 놓았다.
“이곳에선 전망도 그렇게 나쁘진 않군.”
“좋으시다면 저 새째 몽땅 가지시오.”
헨더슨은 역겹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그리고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형사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를 쏘아보는 세 남자의 시선은 그의 얼굴을 뚫어버릴 듯이 강렬했다. 그는 침착하려고 애썼다. 피부는 마분지처럼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즈음엔 앵글로 색슨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매우 드문데, 그녀는 앵글로 색슨의 특징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눈은 파랗고, 갈색 머리카락은 이마를 따라 잘 빗겨져 있었다. 그리고 남자처럼 선명한 가리마가 타져 있었으며, 연한 갈색의 낙타 코트를 그냥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모자는 쓰지 않았으며 손에는 핸드백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아직은 젊어서 애정이라든가 남자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그런 나이의 여자였다. 아니, 영원히 그런 것을 믿을 수 있는 여자, 사랑의 이상향을 품고 있는 여자 같았다. 헨더슨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초리에서 그런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그녀의 눈은 향나무가 활활 타오르듯이 반짝거렸다.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름도 기억할 수 없고, 어디에서 만났는지도 기억할 수 없는 여자. 하지만 생판 모른 체하고 넘어가고 싶지는 않은 여자라는 듯이.
헨더슨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지었다.
버지스가 은밀히 신호를 보낸 모양이었다. 남자들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자 방안에는 핸더슨과 젊은 여자만이 남게 되었다.
그가 손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낙타 코트는 그녀의 어깨에서 벗겨져 소파 안 구석으로 떨어지고 여자는 로켓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몸을 돌려 피하려고 했다.
‘뜻대로 하면 안 돼. 저놈들은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고…’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그녀는 그의 팔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당신은? 당신은 어때요? 대답해 봐요!”
“나는 여섯 시간 동안이나 당신의 이름을 꺼내지 않으려고 애써 왔어. 그런데 어떻게 저놈들이 당신을 끌어들이게 되었지? 어떻게 당신을 알아낸 거지?”
그는 잠시 멈췄다.
“제기랄! 내 팔이 하나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만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당신이 괴로운 입장에 놓인다면 나도 함께 고통을 받고 싶어요. 당신은 내 마음을 몰라요.”
그녀는 얼른 자기 입술로 그의 입을 막았다.
“대답은 못하고 키스부터 하는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고 애원하듯이 말하는 그녀의 숨결이 그의 얼굴에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억측하지 마세요. 그럴 필요도 없어요.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것은 내게 잘못이 있는 거예요. 하지만 내 마음은 분명해요.”
“그럼, 괜찮다고 말해 줘.” 하고 그는 서글프게 말했다.
“나는 마셀라를 미워한 것이 아니야. 단지 이대로 함께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라고. 나는 마셀라를 죽이지 않았어.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그건 말도 안돼…”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쁜 표정으로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다.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세요? 당신이 미남이기 때문에? 똑똑하기 때문에? 용감하기 때문에? 당신도 그렇게는 생각지 않겠죠?”
그는 미소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손을 멈추고는 살짝 입을 갖다댔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당신 가슴속에 있는 거예요. 그것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단지 나만이 볼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의 마음속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들어 있는지 아세요? 당신은 정말 멋진 분이세요. 하지만 그것은 모두 마음속에 숨겨져 있어서 나 말고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나만의 것이에요.”
천천히 얼굴을 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나는 말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판단은 내가 하는 거예요. 자신을 학대하지 마세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나서 현관 쪽을 바라다보았다. 그러자 환하게 밝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저 사람들은 뭐래요?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반신반의하고 있어. 확실하게 알고 있다면 이렇게 지금까지 나를 붙잡고 있겠어? 그런데 어떻게 해서 당신까지 끌어들이게 되었지?”
“어젯밤 집에 들어갔더니 당신이 6시경에 전화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이곳으로 전화를 걸었어요. 11시쯤 되어서요. 그때 저 사람들은 이미 이 집에 와 있더군요. 저 사람들이 할 이야기가 그래서 그 이후 줄곧 감시당하고 있었어요.”
“아니, 그럴 수가! 밤새도록 잠도 못 자게 했단 말이야!”
그는 흥분했다.
“당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어떻게 잠을 잘 수 있겠어요?”
그녀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어요. 다른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아요. 그것은 머지않아 밝혀질 거예요… 당신, 저 사람들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했어요?”
“우리들의 일 말이야?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았어. 나는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거든.”
“그럼, 그것을 이용하는 거예요. 지금 저 사람들은 당신이 뭔가 숨기고 있다고 끼어들었으니까 저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모조리 말해 주는 거예요. 우리들에게는 창피한 것도, 두려운 것도 없잖아요. 이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결말도 빨리 나요. 게다가 저 사람들은 우리 둘이 단순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버지스가 방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이어서 다른 두 사람이 들어오자, 버지스가 그 중 한 사람에게 눈짓을 보내는 것이 헨더슨에게도 보였다.
“아래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집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리치먼 양.”
헨더슨은 그에게 다가갔다.
“이 여자를 공범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요? 이 여자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요.”
“모든 것은 당신이 하기 나름이오.” 하고 버지스가 말했다.
“이 여자를 여기에 데려온 것도 모두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였어.”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모두 말하겠소.” 하고 헨더슨이 소리쳤다.
“그 대신 이 여자에게 신문기자들이 몰려들거나, 이 여자의 이름이 신문에 실리지 않도록 그쪽에서 조처를 취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대로 말해 준다면.” 하고 버지스도 조건을 붙였다.
“이야기하지요.” 헨더슨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려, 지금까지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로,
“캐롤. 걱정하지 말고 푹 잠이나 자. 곧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거야.”
그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에게 키스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이 자랑스러운 듯이…
“상황을 계속 알려주세요. 가능한 한 빨리요. 할 수 있다면 오늘 안으로 알려주세요.”
버지스는 그녀와 함께 문 쪽으로 가서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경관에게 말했다.
“티어니에게 전해 주게. 이 여자에게 아무도 접근시키지 말도록. 이 여자에 대해서는 이름도 가르쳐 줘서는 안되고, 무엇을 물어와도 대답해서는 안돼. 아무튼 어떤 정보도 새어나가서는 안 된단 말이야.”
그가 방으로 돌아오자 헨더슨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고맙소, 당신 진짜 신사로군.”
형사는 흘끗 그를 쳐다보긴 했으나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자리에 앉아서 수첩을 꺼내어 빽빽하게 쓰여진 두세 장에 줄을 죽죽 그어 지워버리고는 새로운 면을 펼쳤다.
“그럼, 시작합시다.”
“그러시오.” 하고 헨더슨도 대답할 준비를 갖추고 다가섰다.
“당신은 부인과 말다툼을 했다고 했는데 분명합니까?”
“그렇습니다, 틀림없습니다.”
“두 장의 극장표 이야기도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부부 사이의 감정이 원만하지 않았던 것이로군?”
“처음부터 감정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얼마 전에 나는 집사람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리치먼 양과의 일은 집사람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야기를 했죠. 뭐, 하나도 숨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죠. 그렇지만 집사람은 이혼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리치먼 양과 밖에서만 어울리는 것은 졸렬한 짓이고, 나도 그런 장난은 계속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어떻게 해서든지 리치먼 양과 결혼하고 싶었죠. 사정이 그래서 서로 떨어져 있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이런 이야기도 도움이 됩니까?”
“매우.”
“그저께 밤에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리치먼 양에게 하소연 비슷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난감해 하는 것을 ‘이야기해 볼께요.’ 하며 자기가 나서겠다고 하더군요. 나야 물론 안 된다고 펄쩍 뛰었죠. 그러자, ‘그럼, 한 번 더 당신이 설득해 보세요. 이번에는 방법을 바꿔서 이론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하고 그녀가 말하더군요. 그런 방법은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사무실에서 전화를 걸어 내가 잘 다니는 레스토랑에 자리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다음에 극장쇼 프로 두 장을 샀습니다. 무대 앞쪽의 통로 쪽 좌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는 둘도 없는 친구의 송별식에도 갈 수 없다고 연락했지요. 잭 롬버드라는 친구인데, 남미에 가서 2~3년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런 얼굴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거지요. 하지만 한번 마음먹은 거, 어떻게 해서든지 결말을 지어야겠다고 단단히 별렀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내에게는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눌 마음조차 없었던 거죠. 이제까지 살던 식으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계속해 나가자는 겁니다. 그때 내 마음이 울컥 치밀어올랐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보통 화가 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끝까지 버티더군요. 내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도 입을 꼭 다물고 있었습니다. 내가 외출준비를 다 끝냈는데도 아내는 의자에서 일어서려고도 하지 않았죠. 아내는 ‘다른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게 어때요? 어떻게 아까워서 내게 10달러씩이나 쓰겠어요?’ 하며 빈정거리더군요. 그래서 보란 듯이 아내 앞에서 리치먼 양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하지만 마침 그녀는 집에 없더군요. 마셀라는 배를 움켜쥐고 고소하다는 듯이 크게 웃어대는 겁니다, 글쎄. 그런 상황에서 내 기분이 어땠었는지는 당신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나는 핏대가 머리 끝까지 올라서 큰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지금 거리에 나가서 맨 처음 만나는 여자를 당신 대신 데리고 가지! 군소리 없이 고분고분하고 포근한 여자를 말이야!’ 그리고는 모자를 집어들고 문을 쾅 닫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태엽풀린 시계처럼 점점 작아졌다.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바뀔 수 없는 진실입니다.”
“당신이 외출하고 나서의 행적과 시간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똑같습니까?” 하고 버지스가 물었다.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고 어떤 여인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말한 대로 처음 만난 여자에게 함께 극장에 가자고 했지요.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이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집에 돌아오기 10분 정도 전까지는 죽 그 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 여자를 만난 것은 몇 시였습니까? 대강이라도 좋으니까.”
“집을 나서고 나서 2~3분 정도 지난 뒤였습니다. 50번 구획에 있는…”
잠시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잠깐만요. 지금 생각났어요. 그 여자와 만난 정확한 시간이 말입니다. 내가 극장표를 꺼냈을 때 둘이 함께 벽시계를 쳐다보았거든요. 그때가 정확히 6시 10분이었습니다.”
버지스는 손톱으로 아랫입술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 술집의 이름은?”
“확실히 기억나진 않아요. 빨간 네온 간판이 번쩍이고 있었다는 것밖에는…”
“당신이 6시 10분에 정말로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소?”
“틀림없이 그곳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요, 그것이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당신을 좀더 초조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이제 죄다 가르쳐 주겠소. 당신 쓰러지는 순간에 부인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가 화장대의 모서리에 부딪혀서 깨어져 버렸더군요. 그것이 정확하게…”
그는 수첩을 보면서 읽어주었다.
“6시 8분 15초.”
그리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두 발 달린 동물이, 아니 날개가 달려 있다고 해도 여기에서 50번 구획까지 1분 45초 동안에 갈 수는 없지. 당신이 6시 10분에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기만 하면 당신 혐의는 깨끗이 벗겨지는 거요.”
“지금 방금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벽시계를 봤다고요.”
“그것은 증거가 되지 않아요. 아직까진 근거 없는 진술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오.”
“그럼, 어떻게 해야 증거가 되는 겁니까?”
“그것이 확인된다면야…”
“꼭 술집에 있었던 시간을 확인해야 하는 겁니까? 여기에서의 시간이 분명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잖습니까!”
“하지만 여기에서는 당신의 말밖에는 증명할 수 있는 다른 것은 하나도 없지. 우리들이 어젯밤부터 줄곧 당신 곁에 붙어 있었던 것을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소.”
헨더슨은 두 손을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흠, 알겠습니다.” 하고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버지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술집에서 만났다고 하는 그 여자가 시간을 확인해 줄 수 있겠지요?”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어요.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요, 확인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이제 문제는 해결됐소. 그녀의 증언이 당신에게 부탁받은 것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말이오. 그녀의 주소는?”
“모릅니다. 처음에 만났던 술집으로 돌아가서, 그냥 거기에서 헤어졌으니까.”
“흠, 그럼, 이름은?”
“그것도 모릅니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쪽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성도 모른다는 거요? 여섯 시간이나 함께 있었으면서? 그럼, 그녀를 뭐라고 불렀소?”
“그냥 ‘당신’ 이라고만 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그 여자의 인상을 말해 주시오. 어떻게 해서라도 찾아내야 하니까.”
긴 시간이 흘렀다.
“말해 주시오.” 하고 다시 버지스가 말했다.
헨더슨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는 내뱉듯이 말했다.
“제기랄, 생각이 나질 않는군!”
그는 토하기라도 하듯이 외쳐댔다.
“그녀에 대해선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소. 아주 깨끗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단 말입니다.”
그는 눈앞에서 손을 휘저으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어젯밤 여기에 돌아왔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마셀라의 시체를 보고, 정도로 시달리지 않았습니까? 그 여자의 모습은 강렬한 빛에 노출된 필름처럼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어요. 함께 있었던 동안에도 그다지 눈여겨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지금은 내 머릿속이 어수선한 것들로 꽉 차 있어서 도저히 생각나질 않아요.”
그는 도움을 요청하듯이 모두의 얼굴을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그녀는 별로 특징이 없었거든요.”
버지스가 도와주려고 나섰다.
“침착하게 잘 생각해 보시오. 자, 눈동자의 색깔은?”
헨더슨은 꼭 쥐고 있던 손을 양쪽으로 펼치며 모르겠다는 몸짓을 했다.
“기억이 그렇게 안 나요? 좋아, 그럼 머리카락은 어떤 모양이었소? 색깔은?”
“그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어떤 색이 떠올랐다가는 곧 다른 색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 색인가 보다고 생각하면 다시 처음의 색깔로 돌아가 버리는 겁니다. 이거야 원! 모르겠습니다. 틀림없이 중간색이었는데. 갈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니고.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는 갑자기 얼굴을 번쩍 쳐들고 말했다.
“모자만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오렌지색 모자, 이것은 도움이 안될까요? 그래요, 틀림없습니다, 오렌지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어젯밤에 썼던 모자를 벗어버리고 앞으로 반년 동안 그것을 쓰지 않고 다닌다면 어떡하겠습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
헨더슨은 고통스럽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 여자는 뚱뚱했소, 그렇지 않으면 비척 말랐소? 키는 컸소, 작았소?”
버지스는 화살처럼 빠르게 질문을 퍼부었다. 헨더슨은 좌우로 몸을 비틀었다. 날아오는 질문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틀렸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우리를 놀리는 거야!” 하고 다른 남자가 차갑게 말했다.
“분명히 어젯밤의 일이오? 혹시 일주일 전이나 일년 전의 일이 아니고?”
“나는 원래 다른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 못합니다. 아무 일이 없는 보통 때 조차도 그런데…”
“지금 제정신이야!” 하고 한 형사가 소리쳤다. 헨더슨은 혼자서 머릿속으로 생각해야 하는 말을 무심코 내뱉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체격은 보통 여자들과 비슷했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그 말이 결정적인 것이었다. 점점 험악해져 가던 버지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는 마음이 넓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는 필요없이 거추장스럽게 들고 있던 연필을 호주머니에 집어넣는 대신에 마음속 깊이 쌓아두었던 분노를 담아서 맞은편 벽을 향해 냅다 집어던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벗어두었던 윗도리를 급하게 껴입고는 넥타이를 앞으로 돌려 단정히 맸다.
“자, 모두…” 하고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나가지. 너무 늦었어.”
그는 현관 쪽으로 나가다 말고 헨더슨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당신, 도대체 우리들을 어떻게 보고 이렇게 놀리는 건지 모르겠어.” 하고 그는 호통치듯이 말했다.
“우습게 보았다면 커다란 착각이오. 당신은 그 여자와 적어도 여섯 시간은 함께 있었다고 했소. 그것도 바로 어젯밤에. 그런데도 당신이 그 여자의 인상에 대해서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술집에서는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앉아 있었고, 식사했다고 하고서. 또, 극장에서는 세 시간 동안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구경했다고 했소. 게다가 가고 올 때도 함께 택시를 탔고… 그런데도 여자가 오렌지색 모자를 썼다는 것밖에는 특징이 없다고 말할 수 있소! 우리들에게 그것을 믿으라는 거요? 이름도, 키도, 몸집도, 눈도, 머리카락도, 게다가 아무런 특징도 하나 없는 가공의 환상 같은 것을 우리가 믿으라는 말이지? 그 환상의 여인과 함께 저녁 내내 있었고, 아내가 살해되었을 때는 집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죄다 받아들여라 그 말이군! 별로 훌륭한 솜씨는 못 돼요, 당신. 그런 것은 열 살 먹은 어린애라도 모두 알아차릴 수 있는 거라고. 당신의 말로 우리는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않는데 당신이 적당히 꾸며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 내가 보기에는 이쪽이 훨씬 더 확률이 높은 것 같소만… 함께 있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저녁의 복잡한 거리 속에서 우연히 보게 된 여자를 한 명 생각해 두었다가, 그 여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믿게 하려고 애쓴다는 것이오. 지금으로서는 이 두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일부러 그녀의 인상이나 특징을 얼버무려서 우리들이 그녀를 찾아내어 사실을 밝히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소?”
“자, 어서 갑시다.” 하고 다른 사람이 투박하게 생긴 소나무를 톱질하는 듯한 목소리로 헨더슨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나서 농담처럼 이렇게 덧붙였다.
“버지스는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지만, 한번 화가 났다고 하면 철저하게 파헤치는 사람이오.”
“체포되는 겁니까?”
스코트 헨더슨은 다른 남자에게 팔을 잡힌 채 문 쪽으로 끌려가면서 버지스에게 물었다. 버지스는 헨더슨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답은 막 나가려고 하는 순간에, 어깨너머에 있던 세 번째 남자에게 내리는 지시 속에 들어 있었다.
“조, 전기 스탠드를 끄게. 이제 당분간 여기에서 저것을 이용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