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환은 필그림 호텔 21층 스카이라운지에 들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채지연이나 박 의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손목의 시계를 흘끗 쳐다본 문영환은 발에 와닿는 푹신한 카펫의 감촉을 느끼며 창가의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빛의 분수를 뿜어내고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가 실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오렌지 쥬스를 한 잔 주문하고 나서 그는 창밖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영동대교 위의 차량들의 빨갛고 노란 두 줄기의 불빛 물결, 유유히 강을 따라 흐르는 유람선이 내뿜는 반딧불처럼 차가운 파아란 조명, 그리고 저 멀리 남산타워의 밑으로 도시를 점점이 수놓는 가로등의 오렌지 불빛들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평화로운 도시의 모습이었다.

 

쥬스를 거의 다 마셔갈 무렵 모나코풍의 둥근 모자를 쓴 보이가 조그만 피켓을 들고 홀 안을 돌아다녔다. 피켓의 양쪽에는 조그만 은종이 한 개씩 달려 있어, 보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챙그랑거리는 맑은 소리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음을 알리는 피켓이었다.

 

맑은 종소리에 문영환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피켓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이름이 검은 매직으로 씌어져 있었다. 문영환이 몸을 일으켜 카운터로 나아가 전화받는 곳이 어디냐고 묻자 카운터 아가씨가 웃으며 말했다. 고른 치아가 매력적이었다.

 

“문영환 씨 되세요? 전화가 온 게 아니고 메모가 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문영환은 아가씨가 건네주는 접혀진 작은 종이를 펴보았다.

 

…호텔 24층 스위트룸 <로즈>로 와주세요. -채-

 

문영환은 메모를 구겨 주머니에 집어넣고 계산을 치렀다. 자리에 돌아온 그는 카메라와 녹음기 등을 챙겨 스카이라운지를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그는, 그녀가 자신을 왜 호텔방으로 부르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의 가슴에 가벼운 흥분이 일렁였다. 예상대로일까?

 

24층에서 내린 문영환은 어렵지 않게 스위트룸 <로즈>를 찾을 수 있었다. 연한 갈색의 마호가니 문에 붙어 있는 영문의 <ROSE>가 멋진 문양으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 노크를 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엷은 미색 원피스 차림의 채지연이 짙은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가슴 위로 가느다란 끈만 달려 있는 원피스였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이 그대로 다 드러나 보였다.

 

“들어오세요.”

 

문영환은 그녀를 따라 방에 들어서며 쑥스러운 듯이 물었다.

 

“왜 저를 이리로 오라고 하셨습니까?”

 

“이런 호텔방에 들어오시는 것이 처음인가요?”

 

채지연이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

 

문영환이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리자, 그녀가 의자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우선 좀 앉으세요.”

 

문영환은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태리제의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은은한 조명으로 실내를 부드럽게 감싸고 18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쓰였음직한 호화로운 의자와 응접탁자가 부드러운 곡선미를 뽐내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브랜디 X.O 한 병과 크리스탈 술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문영환이 그녀가 가리키는 의자에 조심스레 앉자 그녀도 그를 마주보고 앉았다.

 

문영환의 코끝에 싱그러운 여인의 짙은 향내가 풍겨왔다.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는 자극되고 있었다. 그녀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기는 처음이었고, 그것도 호텔방에서 단둘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리라…

 

채지연은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을 채우면서 말했다.

 

“술 한잔 하시겠어요?”

 

술잔에 떨어지는 호박색의 맑은 액체를 쳐다보는 채지연의 눈에는 요염한 빛이 흘렀다.

 

문영환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긴장과 흥분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말을 해야 했다.

 

“좋은 술이군요. 브랜디 X.O라… X는 최고급이란 뜻의 엑스트라(Extra)를 뜻하고, O는 올드(Old)의 약자이지요, 숙성기간만도 45년 이상이 되는…”

 

채지연은 문영환의 승낙이 있기도 전에 문영환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가져다 술을 따랐다.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어요…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이 내용을 보도하고 안하고는 문 기자님 자유예요.”

 

채지연은 술잔을 들어 입에 호박색의 맑은 액체를 조금 흘려넣었다. 내리깐 속눈썹이 선정적이었다.

 

그녀의 속눈써을 쳐다보던 문영환은 어느새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 녹음기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오프 더 레코드가 아니란 말씀이시죠?”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박 의원을 처음 만난 부분부터 설명해 주시지요.”

 

문영환은 수첩을 꺼내어 메모할 준비를 했다.

 

“좋아요… 박 의원님을 처음 만난 것은 그러니까… 한 세 달쯤 전 어느 파티장에서였어요. 이상하게도 저와 의원님은 서로 첫눈에 상대방을 의식하게 되었죠. 운명의 힘이라고나 할까?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마력이 우리를 휩쓴 거죠. 서로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 볼 때 정말로 서로에게 불리한 만남이었어요.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눈을 멀게 했어요. 주위의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었죠… 제 말 이해하실 수 있겠죠?”

 

문영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술잔에 남아 있던 호박색 액체를 단숨에 목구멍에 쏟아붓고 다시 술잔을 채웠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육체관계를 맺었어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때까지 순결한 몸이었어요. 박 의원님도 놀라시더군요. 아마 일과성의 불장난쯤으로 생각하셨던 모양이에요. 어쨌든 그 이후 저는 세상에서 인정해 주든 그렇지 않든 오직 우리 사랑의 순수성을 믿었죠.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었어요. 의원님을 위해서라면 말이죠. 그런데 그런 도중에 갑자기 문 기자님이 끼여들었어요.”

 

그녀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공포의 문 기자님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저는 아무리 그런 문 기자님이라 해도 우리 사이를 알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만큼 우리는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고 있었거든요.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지만 일단 문 기자님의 추적에 걸린 이상 거기에서 빠져 나오기란 쉽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스캔들로 인해서 저만 피해를 입는다면야 참을 수 있는 노릇이지만 의원님이 피해를 입게 된다고 생각하니 전 견딜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의원님과 상의를 했죠.”

 

문영환은 그녀가 교묘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박 의원과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어떤 방법’ 을 강구했고 지금은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시 술을 한 번에 다 들이켰다.

 

“의원님은 저보고 문 기자님을 매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어요.”

 

채지연은 문영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물기가 촉촉히 배어 있는 검은 눈동자에 문영환의 얼굴이 포로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깊은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의 우아한 곡선으로 이어진 어깨선을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말렸죠. 공포의 문 기자님은 매수라는 방법이 절대 통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요…”

 

문영환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매수가 아닌 다른 ‘어떤 방법’ 도 통하지가 않습니다.”

 

채지연이 가늘게 웃었다. 미소짓는 그녀의 얼굴은 취기로 인해 발그레했다.

 

“물론 알고 있어요. 하지만 너무 자신만만해 하지는 마세요. 세상의 모든 일에는 항상 예외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다시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녀는 취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문영환은 아직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문영환은 묘한 흥분이 전신을 감싸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저에게 여지껏 예외란 없었습니다.”

 

“그러시겠지요. 그러나…”

 

채지연이 도중에 말을 끊고 빈 술잔을 내밀었다. 그녀의 잘 다듬어진 손톱에는 금분이 섞인 갈색의 매니큐어가 불빛에 빛나고 있었다.

 

“술을 좀 따라주시겠어요?”

 

“술을 잘하시는군요. 그러나 이 술은 그렇게 마구 마시면 취하게 되는 독한 것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오늘은 어쩐지 취하고 싶어요.”

 

그녀의 그 말에는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 듯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문영환의 바람인지도 몰랐다.

 

문영환이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자 그녀는 다시 단숨에 그것을 마셔버리고 이번에는 술잔을 문영환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 한 잔 하시고 나서 얘기를 계속하기로 해요.”

 

“아, 아닙니다. 나는 일할 때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지금은 일하고 있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되지 않겠어요?”

 

채지연이 일어서서 고개를 숙여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 바람에 그녀의 탐스러운 젖무덤 굴곡이 원피스 사이로 그대로 드러났다.

 

문영환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우려하던, 아니 어쩌면 마음속으로 기대하던 상황이 바야흐로 벌어질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정말로 그녀의 숨겨진 ‘어떤 방법’ 일까?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오똑한 콧날 밑에서 붉은 입술은 타는 듯이 요염하게 불타고 있었다.

 

문영환은 그녀에게서 풍겨나오는 농염한 유혹의 몸짓을 읽었으나 그것이 그녀의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소 감정이 배제된 마른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저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 겁니까?”

 

채지연이 묶은 머리칼을 풀었다. 긴 머리칼이 그녀의 어깨 위로 가지런히 쏟아졌다. 머리칼에서 거부할 수 없는 진한 유혹의 향기가 풍겼다.

 

“아뇨… 아무것도 문 기자님에게 원하는 것은 없어요.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저와 같이 술을 한 잔 마셔주시면 돼요. 그 다음부터는 문 기자님의 요구라면 무엇이든지 응해드리겠어요.”

 

그녀의 말에 문영환은, 바지 속에서 그의 상징이 의지와는 무관하게 팽창하며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는 데까지 가는 수 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술은 제가 마시죠.”

 

문영환이 단숨에 술을 비웠다. 목구멍 속의 세포들이 에틸 알콜의 자극으로 따끔거렸다.

 

그녀가 웃으며 풀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이 빛에 반사되며 한 올 한 올 허공 속에서 흩어지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젠가 TV에서 본, 그녀가 출연한 샴푸광고의 한 장면이었다.

 

문영환은 갑자기 눈이 침침해지는 것을 느꼈다. 술은 너무 독했다. 그녀의 얼굴이 두 개로 겹쳐 보이더니 점점 아득해 가는 의식 속으로 그녀의 머리칼에서 풍기는 향기가 짙게 녹아들고 있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를 깨닫기도 전에 그의 몸이 중심을 잃고 기우뚱했다. 탁자 위의 술잔과 술병이 그의 무너지는 상체로 인해 어지럽게 바닥에 흩어졌다.

 

채지연은 물수건으로 자신의 손톱을 정성스레 닦아냈다. 금분이 섞인 갈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 사이에 하얀 가루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긴 해도 이 정도의 양이면 7, 8시간 정도는 문영환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 하얀 가루약은 모스그룹 산하 의약 연구소에서 특별히 제조한 것으로 브라질 원산의 강력한 마취제인 큐라레 성분 외에 인공적으로 합성된 물질이 다소 포함되어 있었다.

 

채지연은 손톱을 완전히 청소하고 난 뒤 탁자 위에 엎디어진 그를 쳐다보며 수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이기수가 이 호텔 총지배인인 홍정길을 비롯해 몇 명의 하급 모스회원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문영환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이기수가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메말랐으나 단호했다.

 

“저자를 빨리 그곳으로 옮겨! 둘이 옆에서 부축하고…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것처럼 해서…”

 

채지연은 그곳이 어디인지 묻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마 문영환은 한국 모스 빌딩 지하에 있는 비밀의 방들 중의 하나로 데려갈 것이었다. 자신도 그곳에 몇 번인가 가본 적이 있었다. 가끔씩 회원들의 비밀교육이 행해지기도 하고 또 더러는 그들만의 독특한 비밀의식을 치르기도 하는 곳이었다.

 

모스 빌딩의 지하는 모두 4층이었다.

 

지하 1층은 여느 건물들과 다름없이 식당이나 매점 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지하 2층부터 4층까지 거의 모든 자리를 주차장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 보일러실, 전기배선 통제실, 화재 검색실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부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 비밀의 지하 5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은 비밀의 출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통하여 소수의 사람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으며 무장한 경비원들이 항상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도 모두 모스의 비밀회원들이었다.

 

회원들이 문영환을 부축해서 방을 나간 뒤 이기수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말했다.

 

“아이람, 수고가 많았어.”

 

“그를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쎄… 그 자신의 마음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지? 어쨌든 골치 아픈 일이 한 가지는 덜어지는 셈이지. 그가 승낙을 하든 안하든 간에 말이야.”

 

채지연은 그가 문영환의 생사에는 이미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기수가 굳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아이람이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어. 회장님께서 직접 내리신 거야. 이제까지의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임무야. 이리와서 내 옆에 앉아.”

 

채지연은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며 그의 옆에 가서 다소곳이 앉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해… 박 의원을 만나서 그에게 결혼하자고 말해. 물론 박 의원은 아마도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 그러면 아이람은 더 이상 이렇게 숨어서 만나는 것은 싫다고 말하는 거야… 박 의원보고 우선 이혼수속을 밟아 달라고 해.”

 

채지연이 의아한 얼굴로 이기수의 굳은 표정을 주시하며 물었다.

 

“아니… 왜 갑자기 그렇게 박 의원을 몰아세워야 하죠?”

 

“중요한 것은… 그의 약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야… 꼼짝도 하지 못할 그런 약점을 말이야… 아이람도 알다시피 회장님을 만나뵌 후로 그는 우리의 비밀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됐잖아? 그런데 그의 마음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런 만큼 그는 어느 정도 우리에게는 위험인물일 수 있어. 그렇다고 해서 그를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는 중요한 인물이니까 말이야. 어쨌든 그가 혈맹의식을 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어.”

 

“그런다고 그가 우리에게 충성의 혈맹의식을 할까요?”

 

“우리는 그 장면을 비디오로 녹화를 할 거야… 그것은 나중에 의원의 사무실로 배달이 될 것이고… 동봉된 편지에는, 만약 당신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똑같은 테잎을 각 매스컴에 보낼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을 거야. 아이람이 연기를 잘하게 되면 그는 우리에게 결정적인 약점을 하나 남기게 되는 거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지?”

 

채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결국 그렇게 하는군요…”

 

“녹화될 테잎에는 많은 정보를 담을수록 좋을 거야. 아이람과의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여야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만들 수가 있지 않겠어? 그러자면 평상시의 대화 정도로는 부족해. 그가 흥분할수록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지. 또 그렇게 되도록 아이람이 분위기를 유도해 가는 것이 중요해. 녹화테잎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체 상황을 짐작할 수 있도록…”

 

채지연은 고개를 말없이 끄덕였다.

 

그녀는 오늘따라 왠지 기분이 우울함을 숨길 수 없었다. 조직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지만 조직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오기란 불가능했다. 어디서부터 이런 상황이 시작되었을까?

 

그것은… <블러드 팩트>였다.

 

그것은 조직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피의 서약이었고, 단순하고도 호기심이 일었던 그 의식은 그녀의 영혼을 파멸로 이끈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블러드 팩트 의식이 끝난 후 그녀에게 조직내의 이름이 주어졌다. <아이람>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진 것을 눈치챈 이기수는 채지연의 허리를 부드럽게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행동에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계획적이었든 아니든 간에 그가 당시에 베푼 친절은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것이었다. 자연스레 그것은 감사에서 사랑으로 바뀌어졌고 그가 이끄는 대로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기수는 그녀에게 있어 모든 행동의 지시자였고, 인생의 보호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기수의 말이라면 절대 복종에 가까운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를 따르는 것이 행복했다.

 

저주받을 블러드 팩트 이후 무언가 자신의 인생이 정상적이 아닌 이상한 길로 접어드는 것을 느낀 그녀였지만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늦은 시기였고 그에게 진 빛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그녀는 그가 베푼 친절과 사랑에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 했으며, 결국 그것이 그녀를 오늘날까지 오게 한 것이었다.

 

이기수의 애무를 받아들이면서 채지연이 속삭였다.

 

“루앞,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신 줄 알았어요.”

 

그의 얼굴에 순간, 복잡미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하지만 우리에게는 보다 커다란 원대한 목표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

 

이기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있게 그녀를 끌어안고 격렬한 몸짓으로 그녀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의 몸을 받아들이면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몸서리쳐지도록 고통스러운 자신의 과거들이 스쳐 지나갔다. 떠오르는 또 하나의 기억들은 미국에서의 일들이었다.

 

‘릴랙스! 테이크 잇 이지! (Relax! Take it easy!)’

 

 

계부의 처참한 죽음 이후 박정미 그녀는 이기수의 주선 아래 미국으로 향했다. 정식회원으로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은 회원은 반드시 다녀와야 할 곳이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캘리포니아주의 해안 최남단 도시 샌디에이고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레이하운드로 3시간 정도를 계속 남쪽으로 달려왔던 그녀가 버스에서 내려 처음으로 본 것은 푸른 종려나무들이 화려하게 죽 늘어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들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 있어서 먼 땅에서 온 낯선 이방인에게 밝은 남국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금발의 미국 회원은 그녀를 최신형 BMW에 태웠다. 차를 타고 달리면서 그는 자신을 제임스라고만 소개했다.

 

도시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끝이 없어보이는 광활한 사막이 펼쳐졌다. 남캘리포니아의 사막은 완전한 모래밭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가끔씩 눈에 띄는 선인장들 외에는 거의 풀 한포기 없는 메마른 대지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녹아 내릴 듯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제임스가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그녀는 작열하는 남캘리포니아의 태양 아래에 거대한 피라밋형의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의 벽은 채색유리로 태양빛을 반사시켜 성게 모양의 눈부신 은빛 가시들을 파아란 하늘에 쏟아내고 있었다.

 

피라밋들은 가장 큰 것을 중심으로 작은 피라밋 5개가 오각형으로 둘러서 있었다. 그녀의 최종 목적지였다.

 

제임스가 주머니에서 패스를 꺼내 보여주자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는 아무 말없이 웃으며 그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정문을 통과하면서 그녀는 하얀색의 커다란 철제 입간판을 보았다.

 

<MOSS Institute of Psychics (모스 심령 연구소)>

 

그 피라밋형 건물들은 일반인들에게 대부분 공개되어 있었다. 때문에 건물들 안팎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미국 혹은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거나 취미수준으로 심령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박정미는 제임스의 안내로 입구에서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나서, 작은 피라밋 중 하나에 마련된 특별 기숙사에 여장을 풀었다.

 

이튿날, 그녀는 전신에 걸치는 대규모의 수술을 받았다. 일류의 성형외과 의사들은 그녀의 눈을 좀더 크게 만들었고, 코를 높였으며, 턱을 깎아냈다. 그녀의 허리는 별로 손댈 것이 없었지만 결국 그녀의 엉덩이와 유방은 적당한 크기로 부풀려졌다.

 

수술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거의 완벽한 모습을 갖추기까지 몇 달간 여러 번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수술이 끝났을 때 그녀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동양남성의 성적 취향을 연구한 모스그룹 소속 성형외과 의사들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예술작품이기도 했다.

 

수술을 받고 있던 몇 달간 그녀가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서도 모스회원의 기본교육들을 착실히 받아 나갔다.

 

그 기본교육들이란 주로 초급의 ESP 과정들이었다.

 

ESP란 초감각적 능력(Extra Sensory Power)을 지칭하고 있는 말로, ESP의 P는, Power(능력)뿐 아니라 여러 단어의 머리글자 의미로 사용되어 초감각적 심령(Extra Sensory Psychic), 또는 초감각적 지각(Extra Sensory Perception)이란 뜻이 되며, 보통은 모든 것을 포괄하여 단순하게 초능력이라 불리는 말이다.

 

박정미 그녀가 맨 처음 받은 교육은 텔레파시(Telepathy : 정신감응)의 기초과정으로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카드를 알아맞히는 것이었다.

 

텔레파시란 독심술의 원천이었고, 카드 알아맞히기는 텔레파시의 가장 기초적인 훈련방법이었다. 카드는 모두 다섯 종류로 뒷면은 일반 카드와 같이 꼭 같은 무늬가 인쇄되어 있고 앞면은 동그라미, 네모, 별, 열십자, 그리고 물결 무늬로 만들어진 카드였는데 한 도형당 5장씩 합계 25장을 한 세트로 사용해 실험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 그림 카드들은 원래 초심리학의 아버지란 호칭을 얻고 있는 J.B. 라인 박사가 초능력의 실험도구로 창안하였다. 그는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주 더이앰에 있는 듀크 대학에 초심리학 연구소를 창설하고 그 연구소장을 지낸 사람이었는데, 통계학을 도입하여 초능력을 숫자로 검증하려 한 것이었다.

 

즉, 카드의 도형을 알아맞힐 확률은 20퍼센트이지만 어떤 초감각적인 능력이 발휘된다면 그 수치는 올라가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이것은 결국, 1959년 미국 정부의 극비실험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호에서 행해졌다.

 

 

노틸러스호는 1952년 6월에 기공되어 54년 1월에 진수되었고, 55년 1월 17일 드디어 원자력에 의한 역사적인 항행을 개시하였다.

 

단 1회의 연료 보급으로 6만 해리를 잠수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강의 잠수함이었다.

 

1959년 7월 29일, 노틸러스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민간인이 승선했다. 그가 승선하자 노틸러스호는 곧바로 바닷속으로 잠수해서 대서양으로 나간 뒤 8월 13일 기지로 귀환할 때까지 16일 동안 잠항을 계속했다.

 

그 민간인 사나이는 그 동안 밀실에 틀어박혀 하루 두 차례씩 서류에 사인을 한 뒤 함장에게 넘겨주었는데, 함장은 그 종이를 1급 비밀의 붉은 도장이 찍힌 누런 봉투에 넣고는 다시 그것을 철제의 육중한 캐비닛에 넣어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 민간인이 작성한 서류는 바로 ESP 카드의 배열이었다.

 

매일 같은 시각, 노틸러스호에서 2000km나 떨어진 미국 메릴랜드주 프렌드쉽에 위치한 미공군 과학 연구소의 한 밀실에서는 다른 한 연구원이 ESP 카드가 자동으로 섞여 1분마다 튀어나오는 카드혼합기 앞에 앉아서 무작위적으로 카드가 뽑아져 나올 때마다 그것을 순서대로 기록했다. 그도 역시 그 서류들을 금고에 보관해 두고 있었다.

 

16일 후, 노틸러스호가 기지로 귀환하자 마자 민간인은 봉인된 1급 비밀 봉투를 들고 곧바로 비행기에 올라 프렌드쉽 공군기지에 도착한 다음 양쪽의 서류 기록들을 비교 검토했다.

 

그 결과 확률적 통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70퍼센트 이상의 경이적인 적중률을 보였던 것이다.

 

 

ESP 카드는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 모 TV에서 연말 특집으로 마릭이라는 한 일본인 초능력자를 내세워 방영된 <미스터 마릭 쇼>에서 소개되었었다. TV에서 보여준 그의 적중률은 100퍼센트였다.

 

 

박정미의 카드 적중률은 별로 좋지 않았다. 기껏해야 30퍼센트를 겨우 웃돌 뿐이었다.

 

그 외의 여타 다른 훈련들에서도 그녀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단 하나 심령적인 분야에서 만큼은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은 그녀가 선천적으로 영접(靈接)하기 쉬운 특수한 체질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체질은 특히 위저 보드에서 그 효과를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볼 때, 그녀는 뛰어난 영매나 강신술사가 될 소질이 엿보였지만 애초에 그녀가 이곳에 보내진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것이 박정미의 운명이었다.

 

그녀가 그 다음에 받은 교육은 약물사용에 관한 것이었다.

 

마약에서 마취제, 독극물에 이르기까지 약물의 종류는 다양했고, 갖가지 사용법을 익힐 수 있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녀는 1급 킬러가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4개월쯤 지나 모든 성형수술이 완벽하게 끝나고 나서 몸이 완전하게 회복이 되자 그녀는 새로운 작은 피라밋으로 옮겨졌다. 그 지하에는 극비의 훈련소가 있었다.

 

그곳은… 섹스 훈련소였다…

 

훈련소장은 40대 중년의 여자로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는 미모의 중국인이었다.

 

그녀는 한마디로 그 방면의 전문가였다. 원래부터 유명한 중국의 각종 방중술은 물론 세계 각국의 온갖 진귀한 성습관에 있어 경험으로나 지식 어느쪽으로도 정통했다.

 

훈련소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인 젊은 남녀들이 각기 20여 명 가량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발되어진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일종의 대인용(對人用) 전술무기였다.

 

권력이나 금력에 대한 욕망이나 명예욕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서 중요한 것이었지만 성에 대한 욕구 역시 인간의 본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그들은 세계의 중요 인사들을 공략할 주요한 전술무기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백인도, 흑인도, 동양인도 있었으며 모두들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곳에서 지켜야 할 중요한 규칙 중의 하나는, 회원끼리는 교육과정상 꼭 필요한 언어 이외에는 서로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 회원들 중에서 자국민을 만난다면 그것은 더욱 철저하게 지켜져야 할 사항이었다.

 

박정미는 그곳에서, 자신을 패션쇼에서 손문숙 교수에게 인사를 시켰던 학교 친구인 조희수를 알아보았다. 얼굴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목소리와 눈빛만은 서로 속일 수 없었다.

 

박정미는 그제서야 친구인 조희수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손 교수에게 소개를 시켰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았지만, 후회하기에는 너무나 늦은 때였고 규칙대로 그들은 서로 말을 나누는 법이 없었기에 확인할 길은 없었다.

 

훈련은 하루에 정확하게 두 번씩 아침저녁으로 행해졌다. 그들의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비디오로 녹화되어 꼼꼼하게 체크되었고 점수가 매겨졌다. 모든 육체의 동작들은 물론 표정의 미묘한 변화와 욕망의 신음소리까지도 점수의 대상이 되었다.

 

박정미에게 있어 훈련의 첫날은 악몽과도 같았다. 온몸이 근육 덩어리인 커다란 체구의 흑인이 그녀의 첫 훈련대상으로 지정된 것이었다. 곱슬머리 흑인의 거대한 남성을 보는 순간 그녀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곱슬머리가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을 때 그녀의 온몸은 한차례 파르르 떨며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흑인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빙긋이 웃고는 커다란 흑갈색의 손으로 그녀의 하얀 몸을 애무하면서 말했다.

 

“릴랙─스! 릴랙스! 테이킷 이지! (Relax! Relax! Take it easy!) 힘을 빼! 긴장을 풀어!”

 

그리고 그것은 곧 일상적인 훈련이 되었다.

 

 

훈련을 모두 마치고 귀국했을 때 그 모든 일들은 추억 속으로 묻혀 갔다.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완전히 잊기 위해 그녀는 이름도 박정미에서 채지연으로 바꾸었다. 그 이후 이기수의 막강한 지원 아래에서 그녀는 일약 톱스타로서의 길을 숨가쁘게 달려왔던 것이다.

 

그리고 의원을 만나기 한 달쯤 전 그녀는 비밀리에 수술을 마치고 또 하나의 새로운 처녀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의원에 대한 빛나는 연기는 그대로 완벽한 것이었다…

 

 

박정미… 아니 채지연은 감았던 눈을 떴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기수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이기수, 아니 루앞이 자신에게 행했던 블러드 팩트는 일종의 거래였던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팔고 그 대신 그토록 원했던 계부에의 복수 그리고 세상의 부와 명예를 단숨에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