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의원은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회장실…

 

회장의 으리으리한 사무실은 의원의 기를 죽게 하고 있었다. 그 자신도 어느 정도의 재력가였고, 또한 여러 기업 총수들의 사무실을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이 대니얼 킴이라는, 말로만 듣던 사나이의 사무실은 그 규모나 꾸밈에서 다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200평이 넘어보이는 넓직한 회장실의 한 쪽 벽면에는 커다랗게 세계지도가 부조되어 있었고, 그 세계지도 위로 세계 각 주요도시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들이 붙어 있었다.

 

또한 진귀하고도 고색창연한 세계 각국의 보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서 마치 현대적인 박물관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 주고 있었다.

 

박 의원은 회장을 바라다보았다.

 

공식석상에는 언제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의 사나이, 세계 최고의 글로벌 기업인 모스그룹의 한국 지사장,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미국, 유럽 등지의 세계 정치인들과도 교분이 있다는 막후의 실력자, 그리고 지연이에게 친아버지나 다름없다는 채지연의 후원자…

 

대니얼 킴. 세련된 재색의 신사복을 입고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웅장한 태산과도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 모든 움직임에는 절제와 절도가 있었다.

 

의원은 자기도 모르게 중압감을 느꼈다.

 

‘대단한 사나이로군…’

 

박 의원의 앞에 앉아 있는 그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귀족적인 풍모인 회장은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다만 그의 깊숙한 두 눈은 너무도 날카로웠으며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박 의원은 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옆에 공손히 서 있는 채지연의 얼굴은 회장의 절대권위에 복종하는 엄숙한 표정이었다. 한국 모스 빌딩의 최상층, 회장의 사무실에는 회장과 의원 그리고 채지연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니얼 킴이 입을 열었다. 낮고 아주 묵직했지만 어딘지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 소리는 듣는 상대로 하여금 위압감을 강요하고 있었다.

 

“의원님, 내가 지연이를 통해서 의원님을 뵙자고 한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고 계시겠지요? 지연이는 나에게는 딸이나 다름없습니다. 별다른 오해가 있을 것 같기에 미리 말씀드립니다.”

 

박 의원은 조금 불쾌했다. 회장이 거대그룹의 한국 총수이고 자신과 비슷한 연배이기는 하나 엄연히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인 자신에게 ‘저’ 라는 존칭을 쓰지 않고 ‘나’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서 오는 불쾌감이었다. 그러나 박 의원은 어쩌면 회장이 존칭을 쓰지 않는 미국사회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박 의원이 말했다.

 

“회장님,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와 지연이의 사이를 진작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박 의원은 일부러 ‘저’ 라는 용어를 사용해 말했으나 회장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네, 그렇습니다. 처음에 지연이는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만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연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지만, 얼버무리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더군요. 아비의 심정에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뒷조사를 시켰지요… 나는 놀랐습니다. 지연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나이 또래의 젊은이가 아닌, 나와 비슷한 연배의 의원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젊은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의원이 매우 신망받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라는 것을 깨닫고 생각을 고쳐 먹었지요. 이왕 이렇게 된 것, 의원을 최대한으로 돕는 것이 지연이를 돕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박 의원이 되물었다.

 

“저를 돕는 길이 지연이를 돕는 것이라구요?”

 

“그렇습니다. 문제는 박 의원이 기혼자라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지연이가 이미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두 분의 관계를 상당히 반대해 온 입장이었고 어떻게든 지연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기를 바랐습니다만, 지연이의 마음이 너무 확고부동한지라 결국 내가 포기했던 겁니다. 만약 의원님이 끝까지 지연이를 사랑해 주신다면 지연이는 지금 이 상태로도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사실 놀랐지요.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순진한 사랑이 아닙니까?”

 

회장과 의원이 동시에 채지연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의원이 시선이 자기로 향하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의원은 새삼 자신에게 향한 채지연의 사랑을 확인하자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드는 동시에 가슴이 뿌듯해 옴을 느꼈다.

 

결국 남자라고 하는 동물은 이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가늠하는 경향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박 의원이 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이가 날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회장이 다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의원님을 도울 힘이 있습니다. 만약 의원님이 승낙하신다면 의원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얻게 되시는 것일 겝니다.”

 

회장의 말에 박 의원은 회장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회장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박 의원은 그가 약간 허풍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절 도와주신다니 고맙긴 합니다만…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저를 도와주신다는 말씀이시지요?”

 

회장은 채지연을 쳐다보고 말했다.

 

“지연이, 잠깐 자리를 좀 비켜주겠어?”

 

“네, 회장님.”

 

지연이 짤막하게 대답하고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방을 나갔다. 어떠한 명령이라도 받아들일 것 같은 태도였다.

 

그녀가 내는 구두의 또각거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들렸다.

 

그녀가 방을 나가자 회장이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무릎에 올려놓으며 나지막히 말했다. 왼편 가운뎃손가락에 끼여 있는 굵은 반지가 은은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뿔 달린 염소머리 모양이었다.

 

“나는 의원님이 대통령을 꿈꾸고 있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의원이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하하하…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긴 우리 둘밖에는 없으니까요.”

 

‘과연 이자의 본심이 무엇인가?’

 

박 의원이 상체를 뒤로 젖혀 등을 기대며 말했다.

 

“좋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시지요.”

 

“의원님은 분명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 자질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이란 자리에 앉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나는 의원님이 그 자리에 앉을 때까지는 물론 그 후까지라도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박 의원은 이제 본격적으로 거래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모든 대답은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었다.

 

“그 온갖 지원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모든 것이 되겠지요. 자금, 인력, 정치적 배경, 선거에 대한 아이디어 등등 무엇이든 원하시는 만큼 거의 무한정이 되겠지요.”

 

‘거의 무한정?’

 

박 의원의 입가에 냉소가 흘렀다. 이 회장이라는 자는 겉보기와는 달리 너무나 허풍이 센 것 같았다. 여기서 이렇게 계속 현실 감각이 없는 이자의 비위를 맞추며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인가를 계산했다.

 

회장이 박 의원의 생각을 읽고 나서 다시 말했다.

 

“내 말을 믿기 어려우신 모양이군요. 그럼,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박 의원님이 만약 대통령이 되신다면, 물론 역사에 길이 남을 그런 훌륭한 대통령이 되고 싶으시겠죠?”

 

“그야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내치(內治)도 중요하겠지만 외치(外治) 또한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외치란 대통령 자신의 능력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 겁니다. 국민의 신망이 두텁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지요.”

 

“…?…”

 

“내 말은, 우리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우리의 친구들이 퍼져 있어서 항상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지요. 그 친구들에는 물론 정치가들도 있지만 그 밖에도 여러 분야에 골고루 퍼져 있습니다. 경제, 사회, 문화 등등 모든 분야에 말입니다.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항상 긴밀히 서로 연락을 하지요. 그러고는 곧 해결점을 찾아냅니다. 어느 한 특정한 국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보다 훌륭한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서로가 협조하는 것입니다.”

 

박 의원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모스>라고 하는 거대한 글로벌 기업은 그럴 만한 방대한 조직과 자금이 있었다. 그리고 회장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들었다.

 

‘보다 훌륭한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서로가 협조하는 것입니다…’

 

박 의원은 이 거래에서 처음부터 자기가 한 수 밀리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회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금이라는 면에서 예를 들어 볼까요? 이미 잘 아시고 계시겠지만 우리 모스그룹은 세계 최대의 기업입니다. 한국 모스만해도 연간 매출액이 20조 원을 넘습니다만 전세계 모스그룹의 총연간 매출액은 1조5천억 달러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박 의원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벌어졌다. 연간 1조5천억 달러!

 

회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의 돈이라면 웬만한 나라를 사고도 남을 겁니다. 물론 그 대부분의 자금은 자국들의 이익을 위해 재투자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상당한 자금이 될 것입니다. 만약 의원님이 결심만 하신다면 우리 모스그룹의 방대한 조직과 자금을 사용하실 수 있게 됩니다.”

 

박 의원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이 세상에 공짜란 없었다.

 

“회장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그 결심이란 어떤 조건을 의미하시는 것이겠지요?”

 

회장이 잠깐 말을 멈추고 의원을 바라다보았다.

 

의원은 노련한 정치인답게 결과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단한 조건입니다.”

 

박 의원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간단한 조건이라면?”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 드는 그런 미소였다.

 

“회원이 되시는 겁니다. 의원님이 우리 모스그룹의 특별회원이 되시는 것이 그 조건의 전부입니다.”

 

‘회원? 모스그룹의 특별회원?’

 

박 의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껌벅거렸다.

 

“무슨 소리인지 난 도통 모르겠소.”

 

“전세계에는 우리의 회원들이 아주 많습니다. 아까 말한 친구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의원님도 그들 속에 같이 합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한 회원 친구를 불러보지요.”

 

회장은 벽에 붙어 있는 시계들을 쳐다보았다.

 

“지금 캘리포니아는 한밤중이군요. 이 친구가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계와 세계지도가 있는 벽의 반대편에 가서 섰다. 회장이 박 의원을 불렀다.

 

“의원님, 이리 좀 오시겠습니까? 친구를 소개하겠습니다.”

 

의원이 조금 어리벙벙했다. 그러나 회장의 계속되는 손짓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의 옆에 가서 섰다.

 

회장이 주머니에서 작은 리모트 컨트롤을 꺼내어 벽면에 쏘았다.

 

순간! 하얗던 벽면이 푸른색으로 변했다. 의원이 흠칫 놀랐으나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리모트 컨트롤의 버튼을 몇 개 계속해서 눌렀다.

 

잠시 지지직거리며 텔레비전의 노이즈 같은 것이 벽에 생기더니 곧 이어 어느 집의 내부를 비추어주고 있었다. 호화로운 집기들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사람의 집은 아닌 듯싶었다.

 

박 의원이 낮게 신음했다.

 

“으음… 이 전체 벽면이 화상통신 화면이었군요.”

 

박 의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은발의 서양인이 벽면 가득히 나타났다. 회장이 반갑게 영어로 말했다.

 

“잘 있었나, 맥?”

 

서양인은 보기에도 아주 값비싼 검은색의 실크 잠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머리에는 은발이 부드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아니 이 밤중에 누구지?”

 

“날세, 대니얼 킴. 그리고 이곳은 지금 대낮이라네.”

 

“오, 대니… 정말 오랜만이군. 그래 참, 자네는 한국에 있지.”

 

박 의원은 귀를 기울여 그들의 영어로 진행되는 대화를 경청했다.

 

저 맥이란 남자는 대니얼 킴과 아주 친밀한 사이임이 분명했다. 대니얼 킴을 대니라는 약칭으로 부르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박 의원은 그 맥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영화배우이기라도 한 것일까?

 

맥이라는 남자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자네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아, 소개하지. 박 의원이라는 분인데… 이곳 국회의원이야… 나하고는 친구 사이이지.”

 

“아, 그래? 회원인가?”

 

“아니,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곧 우리 회원이 될 걸세.”

 

맥이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시오? 박 의원… 나는 맥 브라이언입니다.”

 

박 의원이 자기도 모르게 같이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의례적인 인사의 영어였다.

 

“안녕하시오? 미스터 맥 브라이언…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맥 브라이언이 다시 회장의 얼굴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니, 그런데 무슨 일이지?”

 

회장이 화면에서 눈을 돌려 박 의원을 쳐다보고 말했다.

 

“자네가 얼마 안 있으면 한국에 온다는 소리를 들었네. 맥… 여기 있는 박 의원은 상공위원회 소속이니까 분명히 자네와 만나게 될 걸세. 그때 자네가 이 박 의원을 여러모로 도와주었으면 하네…”

 

박 의원은 회장의 그 말을 듣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맥 브라이언이 누구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의 상원의원이었던 것이다. 국제 무역분쟁 조정위원회의 위원장인 그는 한미간 무역마찰에 관한 사안으로 한 달쯤 뒤 한국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박 의원은 갑자기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맥 브라이언이 빙글 웃으며 말했다.

 

“회원으로서의 부탁인가? 아니면 친구로서의 부탁인가?”

 

회장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낮게 말했다.

 

“둘 다일세, 맥.”

 

“알겠네… 그러도록 하겠네.”

 

회장의 눈이 추억을 꿈꾸는 표정이 되었다.

 

“맥, 옛일들이 생각나는군. 대학 시절 말이야…”

 

상원의원인 맥 브라이언이 대답했다.

 

“그래, 참 좋은 시절이었지…”

 

회장이 다시 말했다.

 

“고맙네, 맥… 나중에 한국에 올 때 보세.”

 

맥 브라이언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잘 있게, 대니… 그리고 박 의원도… 나중에 한국에서 봅시다. 그럼 이만…”

 

“안녕, 맥.”

 

회장이 손에 쥐고 있는 리모트 컨트롤의 빨간 단추를 누르자 화면이 꺼져 푸른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원래의 하얀 벽으로 돌아왔다.

 

회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박 의원을 안내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박 의원이 자리에 앉으면서 우리 말로 물었다.

 

“맥 브라이언 상원의원이 회원이자 친구이신가요?”

 

“그렇습니다. 특히 맥은 나하고는 아주 절친한 사이지요. 대학을 같이 다녔으니까요… 대학 때 저 친구의 권유로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한국 모스 회장이 된 직접적인 동기이기도 하지요.”

 

박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놀라는 표정이었다. 회장이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기로 할까요?”

 

박 의원이 회장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회장님 말씀의 논점은, 내가 모스회원이 된다면 모스그룹은 나에게 대통령이 될 때까지, 아니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나를 지원해 준다는 것이군요. 자금이든 정치적 배경이든 또는 그 밖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렇습니다.”

 

박 의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이것은 굉장히 매력적인 유혹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의 지론은 그를 만류하고 있었다.

 

‘세상에 공짜란 어디에도 없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자신을 지원해 줄 까닭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설사 채지연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구실에 불과할 것이었다. 박 의원은 혹시 채지연이 자신에게 다가온 것이 의도적인 것이라면,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비로소 들었다.

 

박 의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모스그룹이 어떤 단체를 만들어 회원들을 지원해 준다는 소리는 여지껏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성격의 단체입니까?”

 

회장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일종의 비밀결사입니다. <프리메이슨>같은…”

 

‘프리메이슨?’

 

박 의원은 언젠가 프리메이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프리메이슨은 18세기 초에 영국에서 일어나 삽시간에 전세계에 퍼진 비밀조직으로 귀족이나 부유층, 지식인 등이 주로 그 회원이 되었다.

 

중세의 석공조합을 그 기원으로 만들어진 프리메이슨의 강령은 초인종적, 초국가적, 초계급적, 상애적, 평화적 인도주의였고, 당대의 많은 유명인사들을 비밀리에 규합하고 있었다.

 

수많은 유명인사나 심지어는 왕족들마저도 프리메이슨의 일원이 되었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배후에는 이들이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철학자 칸트나 과학자 뉴튼도 프리메이슨의 비밀단원이었으며 음악가로 바그너나 모차르트 등도 그 일원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인 오페라 <마적>은 그가 속했던 프리메이슨의 가르침이나 그 의식과 깊은 연관성이 있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완성작품은 1791년에 작곡된 <프리메이슨 칸타타>였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비엔나에서 사망했으며 미완성인 채 남겨진 마지막 작품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레퀴엠>이다.

 

일설에 의하면, 모차르트의 석연찮은 죽음에는 바로 프리메이슨이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즉, 열렬한 프리메이슨의 신봉자 모차르트가 그들의 숨겨진 비밀을 알고서는 깊은 회의를 느껴 탈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그런 의도를 안 프리메이슨 조직이 결국은 비밀리에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는 주장이 역사 연구가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박 의원이 양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결사라… 회원이 되기 전에 그 단체의 강령이나 내세우는 모토쯤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장의 눈이 자랑으로 빛났다.

 

“여기서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일단 프리메이슨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초국가적이고, 초인종적인 단체이지요. 우리의 이상은 전세계를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상으로 말이지요. 그래서 더 이상 국가간의 분쟁이나 갈등은 없어지게 하는 겁니다. 정치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모든 면에서 개혁을 하는 겁니다.”

 

회장의 신념에 가득 찬 말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낡은 사고와 낡은 관습을 새롭고 강력한 사상으로 대체하여 전세계를 지상의 낙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힘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언제든지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있습니다.”

 

박 의원이 신음하며 내뱉듯이 외쳤다.

 

“그, 그건 공산당식 사고방식이군요!”

 

회장이 씨익 웃었다. 그런 질문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 모습이었다.

 

“다릅니다. 애초의 출발점부터 다르기도 하지만 실행방법은 더욱 다릅니다. 공산주의는 무력을 그 기반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나갑니다. 전세계가 우리 생각에 동조할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 밖에 귀찮은 점도 많겠지만 전인류의 동조를 얻어내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섣불리 무력을 사용하거나 하면 금방 반감을 갖게 될 것이 뻔하니까요.”

 

박 의원이 다시 물었다.

 

“낡은 사고와 관습을 대체할 그 새로운 사상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함입니까?”

 

“이를테면 새로운 선(善)을 추구하는 가치관의 정립이지요. 이 세상 인간들의 모든 대립의 근원은 서로 가치관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종교분쟁이 그 대표적 예가 되겠지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정부가 들어서서 그러한 가치관을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선(善)의 개념이기도 하지요.”

 

박 의원의 눈이 커졌다.

 

“그, 그렇다면 기존의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겁니까?”

 

회장이 크게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소리였다.

 

“하하하… 의원님은 아직도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우리는 절대 어떤 국가를 전복시키려 한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서서히 온 세계가 우리를 따라올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우리의 조용한 혁명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고, 거기에는 주로 각 분야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지요. 그런 판에 무엇을 얻으려고 정부를 전복하는 구태의연한 방법을 쓰겠습니까?”

 

박 의원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바뀌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징조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흐르면 모든 국가의 제도나 가치관이 바뀌게 마련입니다. 모든 제도나 가치관은 그 시대에 맞게 스스로를 변화시켜 왔습니다. 근세 들어 왕정(王政)에서 민주정치로 바뀌었듯이 또다시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정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겁니다. 우리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이미 필연입니다.”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회장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믿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이미 기정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조용한 혁명은 전세계적으로 이미 상당히 진척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박 의원이 거듭 놀라서 눈을 치켜 떴다.

 

“이미 상당히 진척되어 있는 상태라구요?”

 

“그렇습니다. 일례를 들어볼까요? 지금 전세계에서 추진되고 있는 경제의 블록화 현상이 그 좋은 예입니다. 유럽연합 EU도 우리가 오랫동안 노력해 왔던 우리의 결실이지요.”

 

박 의원이 솔직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모스그룹의 비밀활동과 그것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요…”

 

회장이 낮게 웃었다.

 

“아까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전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라는 말 말입니다.”

 

“…?…”

 

“유럽연합 EU는 결국 하나의 거대국가가 된 셈이 아닙니까? 또한 세계의 경제 블록화 역시 여러 개의 국가들이 지역별로 뭉쳐서 결국 전세계가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경제통합은 종국에는 정치적 통합으로 이어지게 되겠지요. 이것들이 모두 전세계를 하나로 묶는 작업의 바로 전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박 의원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아, 아니 그렇다면 EU나 경제 블록화 현상의 배후에 모스그룹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박 의원은 회장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우리 회원들이 이미 국가의 수반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지금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유럽에는 이미 우리 회원인 대통령들이 많지요. 곧 다른 대륙에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도 회원인 인사들이 이미 상당수 있습니다.”

 

“네? 우리나라에도?”

 

“놀라실 것 없습니다. 그 중에는 꽤 관록이 있는 정치인들도 있고 정부의 기관장, 회사의 사주나 경영인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사실들을 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회장이 잠시 침묵하다가 박 의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나는 박 의원님이 우리 회원이 되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 나를 선택하셨습니까?”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닙니다. 지연이의 사랑이 박 의원을 선택하게끔 한 것입니다.”

 

“그럼, 지연이도 회원인 것이 분명하겠군요.”

 

회장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지연이는 회원이 아닙니다. 다만 나에게 딸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지연이는 그러한 단체가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습니다.”

 

정치로 단련된 박 의원은 회장의 말이 거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화제를 돌렸다.

 

“회원의 권리가 막강한 만큼 그 의무도 상당하겠지요?”

 

“따로 특별한 의무란 없습니다. 단지 회원을 서로 돕기만 하면 되지요. 그것도 마음 내킬 때만 도와주면 되는 겁니다.”

 

박 의원의 동물적 거래감각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이번 경우처럼 너무나 달콤해 보이는 크고 화려한 미끼 뒤에는 날카로운 그리고 한 번 걸리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낚싯바늘이 숨겨져 있는 법이었다.

 

“그거 너무나 좋은 조건이군요. 권리만 있고 의무란 없다?”

 

회장이 침묵하자 박 의원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아무리 의무가 없다 해도 회원들의 구심점이 물론 있겠지요? 내 생각으로는… 미국 아니 전세계의 구심점은 모스그룹의 총회장인 R.M. 모스 씨일 것이고 한국에서의 구심점은… 한국 모스의 회장인 당신 미스터 대니얼 킴이 되겠군요… 맞습니까?”

 

회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의원은 대통령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아주 훌륭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스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

 

적어도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국가의 수반이…

 

의원인 자신의 양복에 꽂혀 있는 <몽블랑 다이너스티> 만년필의 은은한 황금빛을 내려다보았다. 부산의 어느 열렬한 지지자로부터 선물받은 것이었다.

 

국민들의 열화와도 같은 그 성원을 배반할 수는 없었다.

 

회장이 입을 열었다. 위압감이 드는 목소리였다.

 

“의원님, 결정을 내려주시지요. 우리 회원이 되겠다는 결정을…”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군요.”

 

“왜, 이 제안이 맘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만 사안이 워낙 놀랍고 중대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군요.”

 

회장이 눈을 치켜 떴다.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의원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나와 지연이의 진심 어린 호의를 무시하시는군요. 정 그러시다면 앞으로 지연이와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박 의원이 큰소리로 반격을 했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것을 의원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아니? 회장님! 지금 나에게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좋습니다. 어디 해보시지요. 물론 내 정치생명은 그것으로 끝이 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개인에 국한된 문제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회장님께 들은 그 내용들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는 것을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박 의원의 말에 노한 회장이 일어섰다.

 

“무엇이오? 그 추한 스캔들로 명예가 땅에 떨어진 의원의 말을 누가 믿을 수 있겠소? 충격 때문에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하겠지…”

 

박 의원은 따라 일어섰다. 물러서면 더욱 불리한 법이었고 또한 설전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과연 그럴까요? 지연이와 깊은 관계가 된 것도 모두 처음부터 계산된 당신들의 계략이라고 한다면 더욱 재미있을 거요!”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회장의 눈에서 음산한 붉은빛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원이 알아차리기 전에 그 빛이 사라졌다. 어쨌든 의원은, 회장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회장이 어투를 바꾸어 부드럽게 말했다.

 

“의원님… 이러지 맙시다. 나는 의원님을 호의로 대한 것뿐입니다. 싸우는 것을 원한 게 아닙니다. 나는 진정으로 의원님과 친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것들을 말씀드린 겁니다.”

 

박 의원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회장님의 호의를 인정하겠습니다. 나도 회장님과 친구로 지내길 원합니다. 그러나 회원가입에 대해서는 오늘은 더 이상 저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지는 마십시오.”

 

“끝내 거절하시는군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들은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긴 이야기한다고 해서 믿을 사람도 별로 없겠지만요. 또 만약 내 입을 통해 이 이야기가 세상으로 알려지게 되면 내 정치생명뿐 아니라 내 목숨까지도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이야기를 발설하는 따위의 그런 어리석은 일은 절대 없을 거요.”

 

회장이 완전한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잘 알았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군요. 다만 우리가 친구 사이라는 것만큼은 항상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머리 속에서 분주하게 계산이 행해지고 있었다.

 

“회장님, 이렇게 그냥 가게 되어 미안합니다. 그러나 좀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지요. 여러 각도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며칠 생각할 기회를 주십시오.”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세계는 벌써 변혁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누가 빨리 그 변혁의 흐름을 읽느냐 하는 것과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서 그 흐름에 얼마큼 빨리 동참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친구로서 충고드리는 것입니다.”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저도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날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회장과 박 의원은 악수를 나누었다. 회장은 의원의 손이 땀으로 축축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원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서 회장실을 나섰다. 회장실을 나서자 문 앞을 지키던 두 명의 녹색 제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절도 있게 손을 올려 모자에 갖다대며 군대식 경례를 했다.

 

복도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채지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운 표정으로 의원에게 다가왔다.

 

“의원님, 회장님과 이야기는 잘 끝내셨나요?”

 

그의 마음은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지연이와의 관계를 빨리 끝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그의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계산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은 그냥 그래… 하지만 좋은 결말이 있겠지… 그런데… 지연이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 사실대로 말해주겠지?”

 

채지연의 눈이 의아함으로 커졌다. 순진한 얼굴이었다.

 

“지연이도 모스회원인가?”

 

“네? 모스회원이라니요… 그게 뭔데요?”

 

박 의원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조그만 표정의 변화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채지연의 얼굴은 너무나 청순했고 가련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거기에서는 어떤 의심도 품을 수 없었다.

 

“아, 아냐… 아무것도… 가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의원은 채지연이 훌륭한 연기력을 지닌 탤런트라는 사실을 비로소 상기했다.

 

저 순진무구한 얼굴은?

 

의원은 채지연과 함께 있고픈 마음이 사라졌다. 엘리베이터를 나서며 의원이 고뇌에 찬 얼굴로 말했다.

 

“지연이… 내가 오늘은 바쁘니까 며칠 있다가 만나기로 해. 생각을 좀 해야 할 일도 있고… 내가 연락하지…”

 

“네, 알겠어요… 의원님.”

 

채지연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의원이 나가자 회장은 인터폰에 대고 가만히 말했다.

 

“루앞!”

 

세계지도가 부조된 벽면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문이 스스르 열렸다. 감쪽같이 만들어놓은 비밀의 장소였다.

 

장발의 사나이가 나왔다. 이기수였다. 이기수는 회장 앞에 나아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섰다.

 

“루앞, 다 듣고 있었나?”

 

“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습니다. 왜 의원을 그냥 보내셨습니까? 없애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우리의 비밀을 안 이상…”

 

회장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루앞,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 의원은 반드시 우리 회원이 되어야만 한다. 지금 그 의원말고 다른 대안이 있는가? 그는 분명 차세대의 대통령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그보다 더 좋은 먹이가 또 있을까?”

 

루앞이 죄송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루앞이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이람이 침대에서 의원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요?”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의원은 역시 나의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의원을 회원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는 지금 지연이, 아니 아이람과의 관계를 청산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다. 그 아이람과의 관계가 끝나는 대로 그는 모종의 조치를 취할 것이다. 우선 나름대로 조사를 하겠지.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어떤 범법적인 요소가 발견되면 즉시 손을 써서 관계기관에 통보해 우리를 덮치려고 할 거야.”

 

루앞의 표정에 당혹감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의원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은 시간을 벌자는 속셈이었군요.”

 

“그래 맞았어. 물론 그가 그렇게 하려 해도 우리의 각 조직들이 그것을 거부하겠지만 일은 빨리 성사시키는 것이 좋겠지. 그러니 우리는 그에게 그럴 정도의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회장이 말을 멈추고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회장의 눈이 번쩍 떠졌다. 무서운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계획을 수정한다. 원래의 계획대로…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루앞?”

 

루앞이 절도 있게 부동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넷! 잘 알고 있습니다.”

 

“루앞, 그 기자 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네, 오늘 모든 것을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도청도 그 기자의 짓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회장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기자는 언제나 성가신 존재가 되기 쉽지. 하지만 언론은 우리에게는 강력한 도구일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는 실수가 없도록 해!”

 

“네, 회장님.”

 

루앞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박 의원과 채지연은 함께 모스 빌딩을 나왔다. 그러고 나서 각자 헤어져 이미 대기해 있는 자신들의 차에 올라타고는 사라졌다. 각기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이때, 그들의 모습을 주의 깊게 모고 있던 밴트럭이 있었다. 밴트럭 운전석에 앉아 있던 젊은 사내가 카메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거 뜻밖의 수확인걸… 박 의원이 들어갈 때는 혼자이더니 나올 때는 채지연과 둘이라?… 저 안에서 둘이 무슨 짓을 하고 나온 거지?… 어쨌든 뱀눈 형님이 좋아하겠지?”

 

운전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쪽은 어때?”

 

사방이 두루 막힌 적재함 안에서 웃통을 벗어제친 채 구슬 같은 땀을 흘리고 있던 다른 사내가 이제껏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어들고 대답했다.

 

“TZ-4의 배터리가 거의 다된 모양이야… 이거 너무 더워서 이 짓도 못해 먹겠군…”

 

운전기사가 웃으며 말했다.

 

“혹시 채지연이가 신음하는 소리는 없었어?”

 

뒤의 알몸 사내가 대답했다.

 

“아니, 온통 잡음뿐이었어…”

 

“헌데, 그건 그렇고 사진 찍었으면 이제 다된 거 아냐?”

 

“아니야.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형님이 그랬어. 다른 사진이 몇 장 더 필요해… 오늘은 따로따로 갔으니 뒤쫓아가봐야 독사진밖에 안 될 거고… 이제부터는 무얼한다?…”

 

“무얼하긴 무얼해? 이제부터는 제끼는 거야. 그 동안 고생도 많이 했으니까 형님이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실 거란 말이야… 우리 어디 가서 차 세워 두고 화끈하게 한잔 빨자구. 늘씬한 계집들을 옆에 끼고 말이야…”

 

알몸 사내의 입이 헤 벌어졌다. 아까부터 기다리던 말이었다. 잠시 후 밴트럭은 어디론가 휭하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