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
채지연은 붉은빛 아래 뱀처럼 꼬불꼬불하게 길게 늘어선 길에 서 있었다. 길의 양 옆에 드문드문 회색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철근이 콘크리트벽 사이를 뚫고 삐죽이 나와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어서 몹시도 황량한 느낌이었다.
그 건물들을 비롯한 주위의 모든 붉은 풍경은, 물고기가 물 속에서 부유하듯 좌우로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시꺼먼 가로수 하나가 길 옆에 길게 누워 몸부림치고 있었다. 시계가 절규하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그녀는 길을 따라 걸었다. 그녀는 쫓기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겨갈 때마다 절규하는 초침소리가 따라왔다. 출구를 찾고 있었다.
걸물들이고 어디서고 문은 보이지 않았다. 이 <미로찾기> 게임의, 한가운데 미로에 내동댕이쳐진 이후 그녀는 계속 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출구는 없었다.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사자(死者)의 그것처럼 쾡한 눈으로 회색의 싸늘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싹함을 느껴 걸음을 빨리했다. 등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문이 하나 나타났다. 그녀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문을 열었다. 문안으로 들어가자 주위의 풍경이 회색과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출구는 아니었다. 다른 또 하나의 미로일 뿐이었다. 그녀는 깊은 상심에 싸여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그림자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림자의 얼굴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어서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자신을 쫓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림자가 남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자의 손에는 날 선 칼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뛰기 시작하자 그림자와 칼이 쫓아왔다. 출구를 빨리 찾아야 했다.
그녀의 시야에서 주위의 풍경은 물 속의 해초처럼 좌우로 천천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멀리 문 하나가 보였다. 환한 백색 빛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반가움에 더욱 빨리 뛰었다.
쉬익!
그림자가 던진 칼이 날아와 그녀의 귓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귀에서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몇 줄기 피가 그녀의 볼과 가녀린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픈 귀를 감싸쥐고 문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그림자와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졌다. 드디어 문 앞에 다가서자 문에 써 있는 글씨가 보였다.
<M…O…S…S>
그림자가 손을 뻗치는 동시에 그녀는 문을 열어제쳤다. 문을 열자…
쏴아아아아!
그 안은 온통 소용돌이였다! 육중한 굉음을 내며 나선으로 돌아가고 있는 검고 붉은빛의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그 소용돌이의 정중앙 구심점에는 시뻘건 눈이 하나가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소용돌이는 흡입하고 있었다. 소용돌이는 주위의 모든 것을 무서운 힘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소용돌이의 무서운 흡인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소용돌이의 회전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림자는 그녀의 손을 떼어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냘픈 몸이 소용돌이의 흡인력으로 허공에 떠올라 두 다리가 애처롭게 버둥거렸다.
피에 젖은 그녀의 긴 머리칼이 휘날렸다. 그림자가 차갑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억센 힘으로 문고리에서 떼어놓았다.
“안 돼!”
가냘픈 그녀의 몸이 소용돌이의 허공으로 빨려들었다.
쏴아아아아!
소용돌이는 거세게 그녀를 삼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껌을 늘인 것처럼 길게 변해 허공으로 날아가 검고 붉은 나선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갔다.
소용돌이의 가장자리에 떨어진 그녀의 몸이 돌아가면서 점점 가운데로 이동했다.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중앙 구심점의 시뻘건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빠져나오려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팔이 허우적거렸다.
그것은 무서운 고통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피를 토하는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채지연은 벌떡 일어났다. 눈이 부셨다. 아침의 신선한 황금 햇살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방안의 사물들이 잠에서 깨어나 싱싱한 생명력으로 눈부신 색채를 쏘아내 그녀의 눈을 찔렀다.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렸다. 등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무서운 꿈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탁상용 알람시계가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촬영이 없는 모처럼의 아침을 잠으로 즐기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서 가늘고 긴 초콜릿색의 담배를 꺼내어 물고 불을 붙였다.
파아란 담배연기가 노란 햇살에 섞여 흩어졌다.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특별한 담배였다. 그녀에게 환각적인 상태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회원들에게만 지급되는 조직의 선물이었다.
그녀는 음악을 듣기 위해 오디오 리모컨을 눌렀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파르티타 제1번>은 대부분의 다른 조곡들과 마찬가지로 <프렐류드>로 시작되고 있었다.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묵직한 피아노 음이 폴리포니의 씨줄과 날줄로 정교하게 직조되어 무지개빛의 실타래처럼 풀려 나왔다.
그녀는 방을 둘러보았다. 금박을 입힌 호화스러운 집기들이 그녀의 맘을 흡족하게 하여 주고 있었다. 굴드의 영롱한 음들이 물방울 보석들처럼 금박의 집기들 위에서 반짝였다.
고상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호화로운 이 장식들… 얼마나 꿈꾸어 오던 생활이었던가?
그녀는 느릿느릿 일어나 커피를 끓였다. 구수한 원두커피의 향내가 음악소리와 섞여 방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커피를 잔에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씁쓰름한 커피의 입자가 깔깔한 혓바닥 위로 몇 바퀴 구르더니 이내 목구멍 속 나락으로 떨어졌다. 위가 쓰려왔다.
아침의 찬란한 햇살이 점령하고 있는 한편 구석에는 길다란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채지연은 그 안락의자로 가서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안락의자의 보드라운 감촉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커피를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쓰디쓴 불행을 마셔버리듯이…
그녀가 그렇게 원하던 삶이 이제 그녀에게 완벽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채지연은 눈을 감았다. 고통스럽던 과거의 조각들이 부스럭거리며 깨어나고 있었다.
박정미의 고향은 충청도의 조그만 소읍인 ㅍ이었다.
지방의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너무도 일찍이 돌아가셨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는 시장에서 억척스럽게 생선장수를 하면서 외동딸을 위해 자신의 피끓는 젊은 삶을 포기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안 계셨어도 그녀는 쾌활한 편이었고 그런 면에서 그녀는 생각보다는 강한 성격이었다.
그렇게 박정미의 삶은 중학교 2학년까지만 해도 풍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평범한 일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중학 2학년 때 어머니에게 남자가 생겼다. 더 이상 끓어오르는 욕망을 억제치 못한 까닭이었으리라…
남자는 시장의 건달로 할 일 없이 술이나 먹으며 행패를 부리곤 하던 작자였다. 어머니가 그와 재혼하게 된 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남자는 정미의 집으로 들어왔다. 정미에게는 리듬이 깨어져버린 듯한 어색한 나날들이었다.
계부는 처음 몇 달간 어머니와 약속한 대로 야간경비를 하는 등 제법 착실한 듯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계략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그는 어머니에게 사업자금을 요구했고, 어머니가 거절하자 순식간에 난폭하게 돌변하였다. 손때 묻은 집안의 살림들이 하나씩 둘씩 깨져 마당에 뒹굴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어머니에게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어머니는 그 동안 모은 모든 돈을 털어 그에게 사업자금을 대주기에 이르렀고, 예정된 수순으로 그는 그 돈을 가지고 줄행랑을 쳤다. 어머니는 돈이 아까워서라기보다는 사랑에 배신당했다는 아픔으로 앓아 누웠다.
딸을 생각한 어머니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장사를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후였다. 다행히 단골들은 어머니를 계속 신뢰해 주었고 그에 따라 생활도 빠른 속도로 회복해가고 있었다.
간신히 생활이 제자리를 잡아갈 무렵 계부가 가방 하나만을 달랑 둘러맨 초췌한 모습으로 다시 모녀에게 나타났다. 사업을 위해 집을 나간 것뿐이라고 그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사업은 성공 직전까지 갔으나 자금이 부족해 실패했다고 그럴듯하게 둘러대었다.
계부는 용서를 빌었고, 어머니는 그의 말을 믿었다.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다만 정도가 더욱 심해진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고, 어머니는 결국 그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어버렸다.
그때의 박정미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계부는 웬 젊은 여자 하나를 집에 데리고 들어왔다. 양산댁이라고 불리는, 화장기가 짙고 천박스러운 말투를 쓰는 여자였다.
박정미의 삶은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모아 두었던 얼마 안 되는 돈은 금방 바닥이 나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계부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양산댁이 술집을 나가며 근근이 벌어오는 돈으로 술이나 마셔대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미가 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녀가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국졸이라는 자신의 핸디캡 때문에 반대하던 양산댁은 그녀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계부는 그럴 때마다 박정미 그녀를 감싸고 돌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다른 여학생들이 한창 멋을 부리고 다닐 때에 그녀는 허기진 배를 맹물로 채워야 했고, 남들이 값비싼 가죽 운동화를 신고 다닐 때에도 그녀는 다 떨어진 싸구려 운동화로 만족해야 했다.
그녀의 당시 소원은 조그만 카세트레코더를 갖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학교 친구들은 영어공부나 음악을 듣기 위해 그것 하나쯤은 가지고 다녔다. 그녀는 그것이 너무도 부러워 용기를 내어 계부에게 말해보았지만 그것을 사줄 계부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영양실조인 상태에서 무엇을 잘못 먹어 식중독이라도 걸렸는지 그녀는 건넌방에 누워 있었다. 가뜩이나 마른 그녀의 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의식이 오락가락했지만 병원에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양산댁은 마침 대낮부터 술에 잔뜩 취해 안방에서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코를 고는 소리가 건넌방까지 들려왔다.
계부가 문을 살그머니 열고 건넌방에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옆에 앉아 잠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다정스럽게 말했다.
“배가 아프다고 했지? 내가 낫게 해줄게… 우리 예쁜 딸이 아파서야 쓰나… 이 아버지가 아픈 배를 고쳐줄 거야… 자, 자 착하지?…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계부는 그녀의 티셔츠를 걷어올리고 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소름이 끼쳤지만 그녀는 너무나 힘이 없어 그저 눈만 감고 있을뿐 저항할 수 없었다. 무력감에 그녀는 잠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호흡이 서서히 거칠어지면서 손이 배에서 가슴으로 올라와 주물렀다.
계부의 눈이 짐승처럼 변해갔다. 그는 잠든 그녀의 바지를 내렸다. 그 바람에 그녀가 눈을 떴다.
달려드는 계부의 입에서 썩은 쓰레기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너무도 놀란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치려 하자 그의 억센 주먹이 그녀의 연약한 턱을 강타했다.
그녀는 실신해 버렸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아랫도리가 거칠게 찢겨나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다음날, 누워 울고 있는 그녀에게 계부는 어디서 구했는지 중고 카세트를 주었다. 피에 젖은 요를 빨면서 그녀는 울지 않으려 애썼지만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계속 터저나오고 있었다.
그날밤 이후 그녀가 있는 건넌방에 수시로 계부가 들락거렸고, 그때마다 그녀는 작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그녀는 너무도 약했고, 세상을 거부할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힘이 필요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힘이 생기면 이 짐승을 꼭 죽일 것이라고…
언젠가 계부가 말했다.
“날 탓하지마… 넌 타고난 요부야… 너에게는 남자를 홀리는 힘이 있어… 그걸 알 때가 올 거야…”
어느 날, 계부가 그녀의 몸 위에서 식식대고 있을 때 술집에 나갔던 양산댁이 몸이 불편애서 일찍 들어왔다가 그만 그 흉측한 꼴을 보고 말았다. 양산댁은 미친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양산댁은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마구 때렸다.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
양산댁에게 현장을 들킨 그녀는 그날로 본디 자기 집임에도 불구하고 그 집에서 쫓겨나왔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 길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서울에 온 그녀는 공장에 취직했고, 회사에서 운영하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다. 본래 영특했던 그녀는 3년 뒤 ㅈ대학 생물학과에 어렵지 않게 입학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얼마 안 되는 소지품에는 카세트가 항상 따라다녔다. 그것은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계부가 준 그 고물 카세트는 ‘증오’ 와 ‘복수’ 가 무엇인지 그녀에게 확인시켜 주었고, 순간순간 의미 있는 삶이 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처럼 고대하는 복수의 시간은 좀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가난했고, 단순한 아르바이트로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지켜가기에도 벅찬, 고학생이었다.
‘복수’ 는 점차 아득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채지연은 문득, 회상에서 깨어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제 겨우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초콜릿색의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어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독한 파아란 연기가 폐 속의 구석구석에 모두 가득 차도록 깊게 들이마셨다.
폐 속에서 한 바퀴 돌아 걸러져 나온 연기는 우유빛이었다. 나른한 쾌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눈을 감고 다시 과거를 떠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미에게 운명의 갈림길이 다가왔다.
같은 대학의 연극영화과 친구인 조희수와 명동의 어느 호텔에서 열린 패션쇼에 우연히 가게 된 것이 그 시초였다.
패션쇼는 가난에 찌든 채 복수의 일념 하나만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음악에 맞추어 우아한 스텝을 밟고 있는 저 늘씬한 모델들은, 자신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별세계에 살고 있는 동화 속 공주님들이었다.
그녀들의 환상적이면서도 너무도 멋진, 나비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그 옷들은 자신이 입고 있는 낡은 청바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녀는 자기가 처한 현실에 눈을 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수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멍하니 동화 속의 공주들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을 때 친구인 조희수는 같은 학과인 연영과의 교수 손문숙을 발견하고 뛰어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조희수의 소개에 박정미도 손 교수에게 공손히 절을 하였다.
잠시 박정미의 몸매를 눈으로 훑던 손 교수는 그녀에게 뜻밖의 그러나 거절하지 못할 제의를 했다.
“음… 몸매가 괜찮군… 아주 날씬해… 어때? 아르바이트 삼아 모델 한번 해보겠어? 내가 소개해 줄 테니… 물론 처음에는 기본교육을 받아야 할 테지만 말이야… 어때? 해보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 박정미는 <블랙 캣츠>라는 모델클럽에서 일하게 되었다. 교육기간 중 보수는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햄버거집에서 하루 종일 서 있는 것보다는 나았으며,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손 교수의 격려 또한 그녀에게 큰 힘이 되고 있었다.
두 달이 지나자 박정미의 걸음걸이는 모델로서의 틀이 완전히 잡혀 있었고 그와 동시에 그녀는 꿈에 그리던 패션쇼에 나가게 되었다. 물론 아직은 초보자로서의 티를 완전히 벗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다.
손문숙은 그녀에게 이번에는 <연예계의 스타제조기>라고 불리우는 이기수 매니저를 소개해 주었다.
장발인 이기수의 특이한 외모는 금방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터프한 외모와는 달리 그는 상냥하고 부드러웠으며, 그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박정미는 금세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기만 할 뿐이었다. 옷과 장신구를 비롯해서 화장품, 꽃 등등 온갖 선물이 그녀에게 전달되었고 나중에는 전세이긴 했지만 자그마한 아파트까지 얻어주어 그녀를 그 지긋지긋한 자취방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당연히 그녀는 그를 원하게 되었다. 그가 만약 자신의 아픈 과거를 용서해 준다면 그를 위해 무엇이라도 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기수는 그녀의 은밀한 유혹에도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여전히 선물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그녀의 표정을 즐길 따름이었다.
그녀는 몸이 더욱 달았다. 그에게 무엇이라도 보답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가진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만약 그가 원한다면… 목숨보다 더한 것이라도 바치고 싶었다.
어느 날, 그녀는 용기를 내어 수줍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전 당신을 위해 무엇이라도 드리겠어요. 정말로 원하신다면 이 목숨까지도요…”
그러자 그가 싱긋 웃었다.
“정말?”
그녀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대답했다.
“네…”
그가 농담처럼 말했다.
“정미의 영혼까지도?”
“네…”
그녀 역시 농담처럼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기수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그는 즉시 농담을 구체화시켰다.
그날 밤, 호텔에서 이기수와 함께 지내게 된 박정미는 블러드 팩트(Blood Pacts)라고 불리는 혈맹의식을 치렀다.
간단했고,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의식이 끝나고 박정미가 고대했던 그와의 사랑이 있었다.
그녀는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가슴 한구석에 깊게 패어 피를 흘리고 있는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망각해 보려는 그녀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기수는 아주 만족해 했다. 진한 사랑의 행위가 끝나고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녀가 그와의 관계가 끝날 것을 각오하고 물었다.
“제가 처녀가 아닌 것에 실망하셨나요?”
“아니, 천만에… 정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서 그래.”
“특별한 능력이라니요?”
“그래, 말하자면… 남자를 기쁘게 해주는 본능적인 힘이 정미의 내부에 숨어 있어.”
박정미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겁탈했던 계부가 뇌까렸던 말이 생각났다.
‘날 탓하지 마… 넌 타고난 요부야… 너에게는 남자를 홀리는 힘이 있어… 그걸 알 때가 올 거야…’
계부를 생각하자 온몸이 오싹해 오는 동시에 슬픔이 밀려왔다. 그 짐승 같은 계부만 아니었더라면 지금 이 자리의 그녀는 훨씬 당당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녀는 설움에 북받쳐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눈물은 그칠 줄 모르게 계속되었고, 이기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꼭 감싸안고 어린아이 달래듯 가만히 어루만져주었다.
그녀의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그가 물었다.
“누가 정미에게 상처를 주었지? 도대체 그토록 심한 고통을 준 게 누구였지?”
그녀는 겨우 진정되었던 설움의 감정이 다시 솟아올라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이기수의 품안에서 자신이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혐오스러운 과거를 고백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이기수는 공분을 표시했다.
“세상에 그런 나쁜 놈이 있을 수 있나! 그런 놈은 죽어 마땅해!”
박정미가 눈물로 퉁퉁 부은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고 말했다.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죽이고 싶었어요! 밤이면 밤마다 그놈을 죽이는 꿈을 꾸었죠. 하지만 그뿐이었어요. 어렸기도 했지만 저는 너무도 힘이 없었어요. 그 무력감을 상상할 수 있겠어요? 그 짐승 같은 놈이 헐떡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처절한 무력을요… 흑흑흑…”
그녀는 심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이기수가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
“그래… 알아…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그녀는 계속 흐느꼈다.
“흑흑흑…”
그가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정미! 아직도 그놈을 죽이고 싶어?”
“그럼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고 죽일 거예요. 제가 여지껏 살아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어요!”
그녀의 대답은 터질 듯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나서 힘없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흑흑… 제겐 힘이 없어요… 흑흑흑…”
이기수는 힘없이 떨어져 있는 그녀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받쳐들어 자신의 눈을 응시하게 했다. 그의 눈은 어떤 결의가 있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녀가 도리질했다.
“아녜요. 저도 머리 속으로는 완전범죄를 수도 없이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은 감옥으로 가게 되고 말 거예요. 만약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뿐 아니라 선생님도 마찬가지 신세가 될 거에요. 그렇게 할 순 없어요. 그 짐승 같은 놈 때문에 인생을 감옥에서 보낼 순 없어요.”
“그래, 맞아… 짐승 같은 놈 하나를 죽였다고 해서 감옥에 가서야 되겠어? 하지만 우리에게는 방법이 있지. 그 짐승 같은 놈을 아주 감쪽같이 없앨 수 있어.”
“우리?”
“그래, 이제부터 정미는 나와 같은 ‘우리’ 야. 아까 정미가 블러드 팩트를 한 이후부터 정미는 막강한 힘을 소유하게 된 거야. 그 누구라도 막을 수 없는 힘이지…”
그녀가 뺨 위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제가 막강한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마음놓고 그놈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말해보라구…”
그녀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실행에 옮겼을 거예요.”
이기수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어떤 방법인데 그렇지?”
이미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녀의 두 눈은 계부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뼈에 사무친 이 한을 풀 수 없어요. 전 너무나 고통스러웠어요… 그 짐승 같은 놈을 고통 없이 없애서는 안 돼요. 그놈에게 처절한 고통을 주어야만 해요. 그래야 지하에 계신 어머니도 기뻐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기수가 증오에 불타고 있는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증오란 가장 강력한 힘이지… 말해봐. 그놈을 어떻게 했으면 좋은지를…”
박정미의 불끈 쥔 두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가능하면 백주(白晝)에… 그것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도로에서 피를 잔뜩 쏟으며 천천히 죽어가야 해요. 그걸 제가 눈으로 보아야만 해요.”
이기수가 신음했다.
“잔인하군… 하긴 그 정도의 짐승 같은 놈이라면 그것도 과분해… 어쨌든 얼마나 커다란 고통이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박정미가 어색한 듯 웃으며 말했다.
“제가 너무 황당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죠? 말도 안 되는… 물론 제가 감옥에 가기를 작정한다면 쉬운 일이 되겠지만요… 쓸데없는 농담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이기수가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올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는 감촉을 즐기며 말했다.
“정말 황당한 방법이군…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에는 일러. 정미가 아까 행한 블러드 팩트 이후 정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막강한 힘을 가진 분과 친교를 맺게 된 거야. 그런 만큼 정미도 막강한 힘을 나누어가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분이라니요? 그게 누군데요? 대통령?”
이기수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높으신 분이야…”
“……”
“차차 알게 될 거야, 모든 것을… 그건 그렇고, 아까 말한 복수를 해야겠지? 하지만 그건 아직 내 힘으로는 부족해… 송구스럽지만 회장님께 부탁을 드려야겠어… 그놈이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나?”
박정미는 언제나 그 짐승 같은 계부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반신반이하면서…
“네.”
며칠 후…
충청도의 어느 소읍에,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검은색의 대형 캐딜락이 한 대 들어섰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흘끔흘끔 쳐다보았지만 캐딜락은 유유히 도로를 질러 달려갔다.
밖에서는 누가 탔는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검은 유리창의 캐딜락이 멈춘 곳은 어느 낡은 회색 슬레이트 지붕의 초라한 집 건너편 도로였다.
캐딜락 안 앞좌석에는 운전기사와 이기수가, 그리고 뒷좌석에 박정미와 회장이 함께 타고 있었다.
박정미의 떨리는 손에는 고물 카세트가 들려 있었다. 회장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눈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회장은 먼저 지나가는 행인에게 파장을 맞추었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번거로웠지만 이 방법은 직접 사람을 대면하고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걸어가던 행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 집의 대문을 힘차게 두드리고 나더니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제 갈길을 갔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안에서 화장기 짙은 얼굴의 천박한 표정을 한 여자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헐렁한 몸빼바지에 알록달록한 꽃무늬 티셔츠를 걸쳐 입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양산댁이었다.
대문을 연 양산댁은 밖에 사람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는지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회장은 이번에는 양산댁의 얼굴을 쳐다보며 파장을 맞추어갔다.
그런 회장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흘렀다.
순간!
그녀의 어깨가 움찔하더니 머리를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밖으로 나온 양산댁의 손에는 부엌칼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있었고, 줄줄 침이 흘러내리는 입으로는 무엇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어 흡사 미친 사람 같아 보였다.
양산댁은 길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부엌칼로 땅바닥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악을 써대는 노랫소리에 땅바닥을 두드리는 부엌칼이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술집 작부 출신다운 행동이었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어떤 이는 혀를 차서 쯧쯧 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또 어떤 이는 빙글 웃으며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미친 여자의 행동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동네 이웃인 듯한 한 할머니가 놀란 듯이 그녀를 일으켜 세워 집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양산댁은 그 손길을 홱 뿌리치고는 한술 더 떠 이번에는 몸에 걸친 티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옷을 벗어가는 도중에도 그녀의 입에서는 악을 쓰는 구슬픈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알록달록한 티셔츠가 벗겨지고 때에 찌든 브래지어 사이로 살찐 젖통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웃 할머니는 당황하여 “이를 어쩐댜…” 하며 슬그머니 사라지더니 어디선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한 남자를 데리고 왔다.
박정미의 계부였다.
말끔한 잿빛 신사복 차림의 계부는 몽롱한 눈을 끔벅이다가 곧 사태를 파악했다. 계부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이 미친년아!”
양산댁은 계부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노래를 계속했다. 계부가 손을 들어 올려 양산댁의 따귀를 세게 갈겼다.
철썩!
양산댁의 몸이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머리칼이 풀어헤쳐졌다. 귀기 들린 모습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부엌칼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양산댁의 초점 없는 눈이 이상하게 빛났다. 그녀는 손에 든 부엌칼로 자신의 브래지어 끈을 하나하나 잘라냈다. 알몸의 그녀가 일어섰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두 개의 젖무덤이 두부장수의 종처럼 흔들거렸다.
계부가 자신의 윗저고리를 벗으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야! 이년아! 그만두지 못해!”
흰색 와이셔츠 차림의 계부는 자신의 잿빛 윗저고리로 양산댁의 몸을 가리려 하였다.
양산댁의 침을 흘리고 있는 입이 백치처럼 웃었다. 계부가 간신히 양산댁의 어깨를 윗저고리로 덮고서 집 쪽으로 밀었다. 양산댁의 몸이 중심을 잃고서 계부의 힘에 밀려 기우뚱했다. 양산댁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일었다.
그 순간!
한 걸음 밀린 양산댁이 갑자기 몸을 틀어 계부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칼이 계부의 가슴에 박혔다.
“어이쿠!”
비명소리와 함께 계부의 무릎이 꺾어지며 하얀 와이셔츠에 빨간 점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마치 장난꾸러기 어린아이가 하얀 침대보에 빨간 잉크를 쏟아놓고 있는 듯 빨간 점이 점점 커졌다.
“꺄─악!”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행여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뒷걸음을 쳤다.
양산댁은 쓰러진 그의 배 위에 올라탔다. 그의 몸이 일순 꿈틀거렸다.
양산댁이 두 손으로 칼을 계부의 가슴에서 빼냈다. 칼이 빠짐과 동시에 피가 양산댁의 벗은 몸에 점점이 뿌려졌다.
하지만 왕년에 한가락하던 건달이자 깡패였던 계부는 이 정도의 상처쯤은 견디어낸 과거가 있었다. 칼이 빠져나가자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계부가 있는 힘을 다해서 다시 칼로 자신을 찌르려고 하고 있는 그녀를 밀치고 일어섰다.
“이 썅년이!”
계부의 억센 발이 양산댁의 얼굴을 걷어찼다.
퍽!
이빨리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양산댁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넘어졌다. 부엌칼이 그녀의 손에서 날아가고 입에서는 찐득한 검붉은 액체가 쏟아졌다. 나동그라진 양산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손을 땅을 짚은 채 겨우 몸을 일으켰다.
삐익─ 삐익─
누가 신고했는지 경찰과 방범대원이 호각을 불며 뛰어왔다. 젊은 방범대원이 양산댁의 몸을 덮치자 경찰은 수갑을 꺼내어 재빨리 그녀의 양손에 채웠다.
그녀의 눈은 안개가 끼어 있는 듯 아주 흐리멍텅한 상태였다.
이웃인 남자 하나가 계부를 부축했다. 계부는 괴로운 표정으로 가슴을 감싸쥐고 부축을 받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슴을 감싸쥔 손가락 사이로 몇 가닥의 핏물이 흘러 땅에 떨어졌다.
방범대원이 팔을 잡고 양산댁의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힘없이 일어서서 알몸인 채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경찰과 방범대원이 양산댁의 수갑이 채워진 양팔을 하나씩 단단히 부여잡았다.
사건은 그냥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회장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흐흐흐…”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였다.
끌려가던 양산댁의 어깨가 다시 부르르 떨렸다. 그와 동시에 양산댁의 눈이 뒤집어져 핏발 선 흰자위만 남았다.
그녀가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킬킬킬…”
젊은 방범대원이 놀라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다음 순간! 방범대원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 것을 후회했다. 양산댁은 번개같이 달려들어 방범대원의 입에 키스했다.
“아악!”
방범대원이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입을 떼어낸 양산댁의 입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방범대원은 손으로 입을 감싸며 그 자리에서 뒹굴었다. 땅바닥에 피가 튀었다.
방범대원이 뒤로 벌렁 나가떨어지자 경찰은 엉겁결에 붙잡았던 손을 놓아버렸다. 경찰이 그녀의 팔을 놓음과 동시에 양산댁의 몸이 비호같이 계부에게로 달려들었다. 계부를 부축하던 남자도 너무도 처참한 꼴을 목격하고서 황급히 물러났다.
양산댁은 수갑을 찬 두 손을 벌려 계부의 머리 위로 집어넣으며 목을 끌어안았다. 마치 다정한 연인이 그러하듯 그녀는 계부의 목에 매달렸다.
그리고…
양산댁의 사납게 벌려진 입이 계부의 목줄기로 향했다.
“으아아악!”
그 소리에 양산댁의 눈이 웃었다.
양산댁과 계부는 한 몸이 되어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경찰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녀를 계부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지만 그녀의 사나운 입은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양 거머리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보다못한 경찰이 방망이로 그녀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퍽! 퍽! 퍽!
머리가 터져 핏물이 튀었지만 계부의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양산댁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검은 캐딜락에서 작은 물건이 하나 차창을 통해 밖으로 버려졌다. 고물 카세트였다.
채지연은 감았던 눈을 뜨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그녀는 정성 들여 꼼꼼히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