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
“어서 오시오.”
문영환이 방에 들어서자 배중근이 일어서서 그를 맞이했다. 기름을 잔뜩 발라 번들거리는 뱀눈의 머리칼은 가지런하게 뒤로 넘겨져 있어 홍콩 액션배우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극히 의례적인 악수를 나누고 나서 문영환과 뱀눈은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탁자 위에 놓인 양주를 잔에 따르며 뱀눈이 말했다.
“술 한잔 하시지요?”
문영환이 손을 내저었다.
“일부터 끝내고 합시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뱀눈이 탐욕스럽게 생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돈은 준비해 오셨겠지요?”
“물론이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상품의 질이 아니겠소?”
문영환의 두꺼운 안경 너머 쌍꺼풀 진 두 눈이 뱀눈의 어떤 속임수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배중근은 문영환의 두 눈 속에 담겨 있는 일에 대한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하하하… 여전하시는군요, 문 선생.”
“자자, 어서 상품이나 봅시다.”
“좋습니다.”
문영환의 재촉에 배중근은 검은 가방에서 누런 서류봉투를 꺼내어 넘겨주며 말했다.
“공치사 같지만… 지난 일주일 동안 무척이나 힘들었지요. 무더운 날씨도 날씨였지만 세 군데를 한꺼번에 모두 추적하자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소.”
문영환이 그 말에는 응답도 하지 않고 서류봉투를 열었다. 봉투의 내용물은 카세트 테잎 세 개와, 그 테잎 속의 목소리들을 문자로 옮겨 시간대별로 기록한 타이핑 용지 세 묶음이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정도면 문 선생이 찾는 내용은 충분할 겁니다. 그리고 그 테잎과 기록지들에 붙은 번호 있지요? 1번은 박 의원, 2번은 탤런트, 3번은 수기획 사장실의 녹음입니다.”
“어디 검토해 봅시다.”
문영환은 작은 가방에서 기자의 필수품인 휴대용 카세트를 꺼내어 1번 테잎을 집어넣고 작동시켰다.
이어폰에서 통화 중인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박 의원의 목소리였다.
문영환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박 의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말했다.
“감도가 상당히 좋군요.”
배중근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그것들을 다 들어보실 순 없을 테고… 그 기록용지들을 한 번 살펴봐 주십시오. 제 판단이긴 하지만 문 선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빨간색 사인펜으로 표시해 놓았으니까요.”
그의 말에 문영환이 카세트를 멈추고 기록용지들을 훑어보았다. 과연 몇 군데 빨간색으로 표시해 놓은 부분이 보였다. 그는 재빨리 그 중의 한 부분을 읽어나갔다.
TZ-4모델로 도청한 1천 기록철이었다.
# 박 의원의 전화 통화
“지연이?”
상대 통화자의 목소리 내용은 알 수 없음.
“뭐라고?”
“알았어… 그러도록 하지…”
“나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인물이라? 내가 아는 인물인가?”
“도대체 누군데 그래?”
“알겠어… 그럼 한번 만남을 주선해 보라구… 나를 도와주겠다는데 손해볼 거야 없겠지… 그건 그렇고 아까 말한 기자 건 말인데… 앞으로는 우리의 만남도 당분간은 자제해야겠어. 물론 지연이도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도 조심하고…”
“알겠어… 하지만 조심해야 돼… 우리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져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나에게나 지연이에게 모두… 그러니까, 절대 의심받을 만한 행동은 하지 않도록 하고… 당분간은 이 전화도 사용하지 말도록 해… 꼭 연락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시키도록 하라구… 믿을 만한 사람으로… 그것도 지연이와는 관계가 없을 듯한 사람으로 말이야…”
“그럼, 그것은 지연이도 잘 알잖아?”
“알겠어. 지연이의 나에 대한 마음을… 하지만 그렇게까지 가진 않을 거야… 내 어떤 일이 있어도 지연이를 지키고 말 거야. 내 말 알겠지?”
<통화시간 6분 28초>
문영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 배중근이 말했다.
“어떻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문영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배중근의 공적을 지금 인정해 버린다면 이쪽에서 더 이상 요구할 일은 없어지고 대신 그에게 나머지 잔금을 치르는 일만 남을 것이었다.
“글쎄요… 이것은 내가 가졌던 심증을 확인시켜 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배중근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무엇을 더 요구하시는 겁니까?”
“다른 경우라면 물론 이것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는 충분할 겁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상대는 국회의원이 아닙니까? 섣불리 이것을 가지고 기사를 써내게 되면 그의 막강한 정치적 배경으로 오히려 내가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일개 연예부 기자가 국회의원을 상대로 멋대로 추측기사를 써냈다고 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쪽에서 도청자료를 그 증거로 내밀 순 없지 않겠습니까?”
문영환의 목소리는 커져 있었다.
“좀더 정밀한 정보와 증거가 필요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 사진이라도 있다면 최소한 증거는 확보하게 되는 셈이겠지요. 그들이 호텔에서 정사하는 장면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들이 함께 만나고 있는 장면 정도의 사진이라도 있어야 기사화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위험부담이 따르겠지만요. 그러므로 사진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각기 다른 상황에서… 그리고 은밀한 곳일수록 좋겠죠.”
논리적인 설명에 배중근이 침묵하자 문영환이 다시 말을 계속했다.
“좀더 추적해 주시오. 이 내용들을 보니까 곧 의원과 채지연이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를 기다려서 사진을 찍어두거나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나에게 그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시거나 하는 것이 좋겠소.”
배중근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추가비용이 듭니다. 이번 것은 지난번에 계약한 대로 잔금을 오늘 결제를 해주시고, 차후 일은 재계약을 하기로 하지요.”
문영환이 눈을 치켜 떴다.
“지난번 계약 때, 정보의 질은 내가 결정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주 확실하고 결정적인 내용으로, 정보로서의 가치가 충분할 때 모든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었지 않았습니까? 80퍼센트나 인상된 액수로 말이오. 그 판단은 물론 내가 결정하는 것으로, 배 형이 분명히 ㅈ동의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배중근이 문영환을 노려보았다.
이것은 둘 사이에 있어 선례가 될 만한 거래였다. 그리고 거래란 일종의 게임이었다. 배중근은 문영환이 거래를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배중근이 손마디를 꺾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이 정도면 정보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어떤 말을 하건,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의 책임도 없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문 선생에게 필요한 말을 하건 안하건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 이 말씀이오. 그것은 문 선생도 잘 아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가 일을 앞으로 더 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연히 재계약을 하거나 추가로 비용이 지급되어야만 할 거요.”
뱀눈과 문영환의 두꺼운 안경 너머의 시선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부딪쳤다.
문영환이 먼저 웃었다.
“우리들은 아직 친구 사이지요?”
“물론이오. 하지만 나에게는 딸린 식구들이 있어요.”
“이해합니다.”
개들을 충직하게 하는 것은 돈이라고 하는 달콤한 먹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적으로 주어야만 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주게 되면 개는 포만감에 빠져 일을 게을리 하게 되고, 그렇다고 너무 적게 되면 이번에는 주인을 따르지 않게 된다.
문영환은 주머니에서 현금이 가득 든 두툼한 봉투를 두 개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배중근이 손을 뻗쳐 그것을 집으려 하자 문영환의 손이 돈봉투 한 개를 잽싸게 다시 집어들었다.
“이것과 추가비용은 다음번에 결제해 드리겠습니다.”
배중근의 눈이 일그러졌다.
배중근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문영환은 밤늦도록 도청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해 갔다. 1번 기록을 다 검토해 보기도 전에 아내는 벌써 잠들어버렸다.
그는 채지연의 음성이 기록된 2번 테잎을 들어, 박 의원과 통화한 내용을 찾아 짝을 맞추어보았다.
채지연과 박 의원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해졌다. 자신이 스캔들을 추적한다는 것을 채지연이 박 의원에게 경고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으나, 채지연은 박 의원에게 누군가를 소개시키려 하고 있었다.
채지연이 극구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그는 누굴까?
통화 내용으로 보아 채지연은 그 미지의 인물과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정치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클 것이므로 자기가 쫓고 있는 영역에서는 그 한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자신은 단지 <의원과 탤런트의 스캔들>만을 추적하고 있는 것뿐이었으므로 거기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의원이 채지연에게 언행을 조심하라고 당부했을 때 채지연이 대답한 대목이었다.
‘그것은 조금도 염려 마세요. 그 기자에 대하여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어요…’
조금도 염려 마세요…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방법’ 으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어요…’
또한 이 말은 ‘어떤 방법’ 이 구체화될 수 있는 조건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채지연 그녀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제지할 것인가? 온 연예계가, 문영환이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었다.
‘매수?…’
몇 년 전에 방송국의 어떤 연예프로 담당 PD가 가수들에게서 정기적으로 뇌물을 상납받아 온 사건을 문영환이 추적한 적이 있었다. 폭로 직전, 문영환이 뒤를 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 PD는 마지막에 거액의 돈을 싸들고 와서는 사건을 조용히 해결하고자 했다.
한동안 거절하던 문영환은 웃으며 그 돈을 받았다. 그리고 그 PD가 돌아간 후, 그 돈은 검찰에 증거물로 제시되었고 당연한 결과로 담당 PD는 구속이 되었다. 물론 그 사건은 문영환의 특종으로 결말이 났고, 그 일 이후 연예가에서 문영환은 더욱더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채지연이 그 사건을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설사 채지연이 모른다 할지라도 최소한 그녀의 매니저인 이기수는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채지연은 자신을 스타로 키워준 매니저 이기수에게 이 일을 상의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채지연이 생각하고 있는 ‘어떤 방법’ 은 최소한 ‘매수’ 라고 하는 치졸한 것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방법을 동원할 것인가?
문영환은 송추 근처 촬영장에서 본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육감적인 도톰한 입술과 상대를 그대로 빨아들일 듯한 그 커다란 눈망울…
문영환은 자신의 눈이 게슴츠레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마른 입술에 혀를 굴려 침을 발랐다.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혹시… 여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려는 것은 아닐까? 전통적이면서도 언제나 효과를 발휘하는 그 방법!
채지연의 육탄공세?…
문영환은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상상했다. 맑고 하이얀 피부, 꽤 두텁게 솟아오른 가슴과 쭉 뻗어내린 싱그러운 두 다리, 그리고 그 사이의 작은 둔덕…
짜르르한 통증이 기분 좋게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세포들이 자극으로 흥분되어 아우성쳐댔다.
그는 머리를 흔들어 몸이 요구하고 있는 상상을 떨쳐버리고, 다시 기록들을 검토해 갔다.
마지막으로 의문이 가는 부분은 3번 수기획 사장실의 통화기록 끝 무렵에서 발견되었다. 전화도청 전용 PSR-70모델로 기록한 단 세 마디뿐인 영어 통화였다.
# 수기획 사장실의 통화
“누구야?”
“루앞입니다.”
“삑… 삑… 삑…”
<전기적 신호에 의한 음향으로 사료됨>
“멈춰!”
<통화시간 3분 31초>
그때까지 수기획의 전화 내용은 자신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저 일반적인 업무전화이거나 사적인 극히 평범한 내용들뿐이었다.
물론 수기획의 통화자는 대부분 이기수였고, 가끔씩은 직원인 듯한 남녀의 목소리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어 통화라니…
문영환은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3번 테잎을 카세트에 넣고 그 부분을 찾아 들어보았다. 내용은 기록과 똑같았고, 가운데 목소리는 틀림없는 이기수의 목소리였다.
이기수는 한때 미국에 유학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문영환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사귄 미국인일까?
어느 외국인과의 통화였겠지만, 내용과 시간에서 의문점이 떠오른 것이었다.
이기수의 목소리는 자신을 분명히 ‘루앞’ 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미국에 유학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것은 미국에서 사용했던 이기수의 이름이라고 치부하더라도, 겨우 세 마디만을 했는데 통화시간이 3분 31초나 된다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세 마디 말 이외는 오로지 서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아니면 그 순간에 도청장치의 어딘가에 이상이 있었거나…
그러나 그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은 그 통화 이후 다시 정상적으로 도청기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기수의 상대는 분명 그보다 윗사람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이기수가 자기 이름을 ‘루앞’ 이라고 밝힌 뒤 ‘sir’ 를 붙여 확실한 경어를 사용했다는 데서 알 수 있었다.
영어로 서로 이야기할 때, 경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임에 비추어, 이것은 마치 군대같이 상하체계가 분명한 관계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 미지의 상대가 ‘멈춰(Stop!)’ 이라고 외친 뒤부터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전기적 신호에 의한 삑삑 소리가 들린 후에 그는 왜 멈추라고 했을까?
무엇을 멈추라고 한 것일까?
그렇다!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고 나서 침묵으로 일관했다면 분명 대화를 중지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통화시간이 그렇게 길어졌을까? 침묵으로 끝까지 일관된 전화가…
그 전기적 신호음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계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위험을 알려주고 있는 듯한 삑삑 소리란?
한참을 생각한 후 문영환이 나지막하게 외쳤다.
“이, 이럴 수가!”
그의 등에서 공포로 인한 세포의 떨림이 일어났다.
그 미지의 상대는 도청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