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
수미는 씁쓰레한 기분이 들었다. 대충 원고를 작성해서 마감시간 전에 기사를 넘겨 위기는 모면했다 하더라도 가슴속 어디에선가 ‘넌 충실하지 못했어. 문화부 기자로서 말이야.’ 하는 자각이 끊임없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수미는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자책감이 더욱 엄습해옴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천래성의 공연을 신문가지로서 감상하고, 그것을 적당히 기사화해서 데스크에 넘기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었다. 수미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가지고, 혹은 답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천래성의 공연에는 무엇인가가 분명 있었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그 어떤 해답이 손짓하며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 해답은 노트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책상 위 한 쪽에 아무렇게나 놓인 채 자신을 힐난하고 있었다.
수미는 천래성의 공연요소를 적어놓은 노트를 다시 한 번 펼쳐보았다. 이미 때가 늦은 것을 알았다는 듯 글씨들이 자신을 향해 조롱하며 웃고 있었다. 그것은 빨간색 펜으로 가필하여 조금 지저분한 모양이 되어 있었다.
원초로부터의 투쟁
천래성… 무대… 남자… 검은 옷… 북소리… 번개와 천둥… 흰빛… 붉고 푸른 조명… 뱀 문신… 칼… 여자 마네킹… 섹스 행위… 마네킹 살인… 피!… 조명등의 깨짐… 암흑…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녀는 자신이 삭제시킨 부분을 제외하고 가필한 부분을 따로 적었다.
무대=세상
남자=?
검은 옷=흰빛과 대립관계
북소리=시간의 흐름을 상징
번개와 천둥=분노를 나타냄
흰빛=선(善)? 남자와 대립적 존재, 막강한 힘을 소유
붉고 푸른 조명=혼돈의 시대
정리한 부분은 그것뿐이었다.
그 다음의 ‘뱀 문신’ 부터는 뭐가 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뱀’ 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을까?
‘뱀’ 이 지니고 있는 사전적 의미나 생물학적 의미 외의 어떤 상징성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 다음 낱말들의 의미들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미 기사가 넘어간 마당에…
수미는 노트를 덮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언젠가는 밝혀내고 말겠어…
“아직도 매스컴에서 관심이 있으신 모양이지요?”
장철민 박사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문영환에게 말했다.
“아, 네…”
장 박사를 뒤쫓아 병원 복도를 걸어가던 문영환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새한 스포츠 신문이라면 전에 어떤 분이 취재를 해가셨었는데… 그 기자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워낙에 많은 기자분들이 찾아오셔서요… 그 덕분에 제 얼굴이 신문에 나오게 되어 한동안은 제법 유명세를 탔지요. 허허허…”
문영환은 그 기자가 지훈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훈이 지금 연재하고 있는 <스타 오유미의 삶과 꿈>이라는 기획물이 그 참신성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는 것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스타 오유미의 삶과 꿈>
그것은 스타 오유미의 불행을 그려냄에 있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스타들의 화려함을 잃은 슬픔보다는 그녀의 성장과정을 통해 내면 속에서 숨쉬고 있던 인간적 갈등, 야망과 좌절 등에 초점을 맞추어간 일종의 휴먼 드라마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문영환이 걸음을 빨리해서 장 박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물었다.
“오유미 씨의 상태는 지금 어떻습니까?”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제 의식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게 또 문제가 되지요. 육체적 고통도 물론 심하겠지만, 그보다도 자신이 입은 사고에 대한 정신적 충격으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마 거기에서 벗어나기란… 글쎄요… 평생 고통에서 해방되기란 힘들겠지요…”
장 박사는 그녀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끼는 듯싶었다.
문영환은 오유미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 고통에는 무관심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오유미 씨는 지금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입니까?”
장 박사가 슬쩍 그를 돌아다보았다. 장 박사의 둥근 두 눈은, 역시 기자들은 비정하기 짝이 없구만 하고 말하고 있었다.
“네, 아직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얼굴이 온통 엉망이 돼놔서 붕대로 칭칭 감아놓았으니까요. 붕대를 푼다 해도 얼굴에는 부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겁니다. 하긴… 부기가 완전히 빠져도 정상적으로 발음이 되지 않을 테지만요.”
“네?”
“오유미 씨는 입술근육이 거의 없어져버렸습니다. 아울러 이빨들도 몇 개 부러져 있는 상태고… 턱근육들마저도 너덜너덜해진 것들을 지금 간신히 봉합해 놓은 상태이지요.”
문영환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오유미가 훨씬 심한 상태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의사소통은 어떻게 합니까?”
“아, 네… 다행히 그녀의 두 팔은 성합니다. 꼭 필요한 것이 있으면 글씨를 쓰거나 간단한 동작으로 의사표시를 할 순 없지요.”
장 박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확인하듯 문영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약속해 주셔야할 것은, 만약 환자가 취재를 거부한다면 그 즉시로 병실을 나가주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환자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 저의 임무이기도 하니까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여깁니다.”
장 박사가 가르쳐주는 병실은 일반병실 특실이었다. 그녀의 상태가 호전되어 중환자실에서 옮겨온 모양이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선 문영환은 반사적으로 침대를 들여다보았다. 한 쪽 눈을 제외한 온 얼굴에 하얀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 있는 오유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입은 하늘색과 하얀색이 번갈아가며 줄쳐진 환자복은 풀이 먹여져 빳빳하고 청결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녀가 오유미란 사실은 침대맡에 꼬리처럼 붙어 있는 카르테만이 확인해 줄 뿐이었다.
제법 큰 병원의 특실치고는 생각보다 아담한 병실이었다. 누가 갖다놓았는지 환자의 머리맡에 있는 흰색과 보라색의 아이리스 꽃잎이 파리한 병실의 공기에 시들어가고 있었다.
장 박사가 다정하게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유미 씨. 오늘은 더욱 좋아보이는군요.”
그녀의 한 쪽 눈이 꿈벅였다. 아마 인사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오늘 신문기자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유미 씨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습니다만, 이 기자분이 오유미 씨를 꼭 만나보아야 한다기에 어쩔 수 없이 허락했습니다.”
오유미의 한 쪽 눈이 힘없이 스르르 감겼다. 이런 흉한 꼴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장 박사가 다시 말했다.
“오유미 씨, 만약 이 기자분을 만나기가 싫으시다면 손을 내저어주세요. 그럼 거부표시로 알고 이 기자분을 내보내겠습니다.”
그녀가 눈을 감은 채로 손을 움직여 흔들어 보였다. 장 박사가 문영환을 쳐다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합니다. 환자가 기자분을 만나기 싫어하시는군요. 아까의 약속 잊지는 않으셨겠죠?”
“잠깐만요… 오유미 씨! 딱 한 가지만 물어보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그만 나가주시오.”
장 박사는 이제 문영환을 밀어내고 있었다. 문영환이 당황하여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잊지는 않으셨겠죠? 오유미 씨! 새한 스포츠 신문사 문영환 기잡니다!”
“이러면 아까하고 약속이 틀리잖소?”
장 박사의 목소리는 짜증 섞인 톤으로 변해 있었다.
“자, 잠깐만요… 박사님, 오유미 씨가 눈을 떴어요. 저건 저를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표시예요.”
문영환의 말에 장 박사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오유미는 눈을 떠서 이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오유미 씨, 이 기자분을 만날 의사가 있으십니까?”
그녀가 팔을 들어 마치 고개를 까닥거리듯 손목을 움직였다.
“그것보세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말릴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오유미 씨가 충격을 받을 만한 그런 이야기는 금해 주시오. 알겠지요?”
문영환이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이런 모습으로 뵙게 되어 정말 뭐라고 드릴 말이 없습니다.”
오유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부기가 가라앉지 않은 그 눈에서 이슬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일전에 저한테 <에스쁘리 호텔>에 관한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걸 확인하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오유미는 눈을 감은 채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그 전화 이후 제 나름대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전화내용을 확인하러 다녔습니다.”
문영환은 아직 오유미가 문제의 제보자인 줄 확신이 서 있지 않은데다 장 박사까지 옆에 서 있었기에 사건의 내용이나 관계된 이름 등을 빼버리고 핵심을 피하는 말로 일관하고 잇었다.
“전화가 제보해 준 그 내용은 거의 사실로 판명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발표할 단계는 아니지만… 하지만 사실이 완전히 드러날 경우 저는 그 제보자와의 약속대로 신문지상에 그걸 발표할 생각입니다.”
오유미의 가녀린 하얀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문영환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완벽한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는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 <완벽한 확인>을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그날… 오유미 씨가 그녀… 채지연을 본 날 말입니다. 에스쁘리 호텔에서 오유미 씨를 본 사람은 찾아냈습니다. 에스쁘리 호텔 벨보이인데 당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더군요. 당신이 너무도 유명한 탤런트이기 때문에 변장을 했어도 소용없었다고까지 말했어요. 같이 있던 남자는 누구지요?”
그녀의 손이 격심하게 떨렸다. 문영환은 그것으로 <완벽한 확인>을 완료했다.
장 박사가 환자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그의 말을 제지시켰다.
“이제 그만 해야겠소. 지금 환자가 뭔가에 충격을 받고 있소. 환자에게는 안정이 필요하단 말이오.”
문영환은 장 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더 이상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는 나오면서 크게 외치듯 말했다.
“오유미 씨의 소원대로 채지연의 일은 곧 신문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오유미의 어깨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그는 밖으로 나왔다.
문영환은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에 앉아서 그대로 시동을 걸어놓은 채 생각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채지연, 또는 박성화 의원이 오유미의 사고에 깊이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오유미가 제보자인 것을 확신하는 순간부터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유미의 윤화사고는 사고로 위장된 테러였다?
언젠가 다방에서 본 TV에서 경찰이 오유미의 사고는 브레이크 파열 및 정비불량이라고 한다면 오유미의 차에, 전문가인 누군가가 약간의 손을 보면 사고로 보이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채지연은 몰라도 박성화 의원이라면, 사회적 역량으로 보아서나 동기로 보아서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유망한 정치가가 스캔들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일은 어디서나 흔히 있는 일이었다. 특히 섹스 스캔들에 관한 한 우리나라 국민은 아무리 박성화 의원이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었고, 의원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박성화 의원은 야망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자기가 나아갈 길을 그 누구보다도 뚜렷이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 나타난다고 한다면 정치인들의 속성상 그대로 방치해 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스캔들을 발설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거나 목격자를 없애는 것은 영화에서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전적인 스토리였다.
그러나 거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정말 만약에 오유미 그녀가 사고로 위장된 테러를 당했다고 한다면, 오유미가 스캔들을 발설한 사실이나 또는 그녀가 에스쁘리 호텔에서 의원의 스캔들을 목격한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 사실을 그들이 알 수 있었을까?
더구나 오유미는 채지연의 상대 남자가 국회의원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40대의 남자가 채지연과 같이 호텔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을 뿐인 것이다.
오유미가 멍청하게도 문영환 자신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채지연의 스캔들을 떠벌리고 다니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 그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테러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비밀을 발설하기 이전에 그녀를 테러했어야 옳다.
만약에 그 스캔들을 오유미가 자신에게만 털어놓았다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유미와 자신뿐이라는 얘기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 비밀을 안다는 것은 채지연이나 의원이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일 테고, 오유미를 테러한 이후의 목표는 문영환 자신이 될 것이었다.
이제부터의 목표는 문영환 자신인 것이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낀 문영환은 차를 빼내어 주차장을 나섰다. 경찰의 사고기록을 조사해서 정말로 오유미의 사고가 테러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었다.
경찰서 안은 너무도 후덥지근해서 문영환은 견딜 수 없었다. 경찰서뿐만 아니라 여름철 모든 관공서는 에너지 절약이라는 명제 아래 에어컨의 사용이 제한되고 있었다.
오유미 사고의 담당자인 박 순경은 정복의 단추를 풀어헤치고 하얀 런닝셔츠가 드러나 보이는 채로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다가 문영환을 맞았다.
문영환은 엉거주춤 일어서는 박 순경에게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새한 스포츠 신문 문영환 기자입니다. 박 순경님이라고 하셨지요. 일전에 TV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TV에서 자신을 보았다는 말에 박 순경은 헛기침을 해댔다.
“아… 흠흠… 그렇습니까?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박 순경의 어깨와 목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오유미 씨 사고에 관한 것입니다.”
“아, 역시 그 일이었군요. 오유미 씨 사고 건이라면 제 담당이지요. 그래서 텔레비전에도 한 번 나와봤고… 흠흠…”
또다시 헛기침을 해대는 그의 모습은 자신이 TV에 나온 사실이 자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문영환이 슬쩍 맞장구를 쳤다.
“아주 멋지던데요. 텔레비전에 나오신 모습이…”
박 순경은 기분이 좋아졌다.
“거… 텔레비전 위력이 확실히 무섭던데요… 뉴스에 한 번 잠깐 비추었을 뿐인데도 온 일가친척,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빗발치듯이 오더란 말입니다. 개중에는 술 한잔 사라고 하는 전화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친구가 그 뉴스를 보고서는 연락을 해왔지 뭡니까? 거기다 우리 애들도 학교에 가서는 우리 아빠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자랑까지 해대니 졸지에 스타가 되어버렸고 그 통에 애들 과자값깨나 나갔지요… 동네사람들도 제가 지나가면 수군수군대는 걸 보면 역시 텔레비전… 그게 확실히 사람 홀리게 하는 마술상자인가 봐요…”
문영환은 그의 그런 모습을 받아줄 여유는 더 이상 없었다.
“오유미 씨의 사고기록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고의 원인이 정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 캐비닛 속에 그 사고기록이 들어 있으니까요.”
박 순경이 검은 표지의 사고기록철을 찾아가지고 와서 문영환 앞에 앉았다. 잠깐 움직였을 뿐인데도 그의 이마에선 땀이 흐르고 있었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였다.
“어디 보자… 아, 여기 있군요.”
“어디 한번 봅시다.”
문영환이 뺏듯이 사고기록철을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그 내용은 이미 보도된 바와 별반 다름이 없었고 사고 당시의 도로상황이 서툰 솜씨로 그려져 있었다. 문영환은 사고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싶었다.
“이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아, 그러죠. 이쪽을 보시겠습니까?”
박 순경은 일어서서 커다란 자석칠판이 붙어 있는 한 쪽 벽으로 다가갔다. 자석칠판에는 여러 가지의 도로상황이 그려져 있고, 어린이 완구 같은 여러 종류의 모형 자동차들이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박 순경은 노란 승용차 모형을 하나 집어들어 칠판에 붙여놓았다.
그는 실감나게 모형차를 움직여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 이것을 오유미 씨의 벤츠라고 합시다. 이 차는 여의도 쪽에서 지금 이렇게… 반포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1차선에서요…”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쳐 닦아내며 계속 말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벤츠가 1차선에서 차선을 바꾸어 4차선으로 옮겨갔습니다. 아마도 반포로 빠지려고 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벤츠는 과속상태였고… 아마 120정도였을 겁니다.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트럭 모형을 집어들어 진입로에 붙여놓았다.
“여기서 이 15톤 트럭이 진입하려고 좌측 깜박이를 켜고 들어왔습니다. 그때 벤츠와 트럭 사이는 약 100미터 이상쯤 되었을 겁니다. 그 정도면 보통, 아무리 과속하던 차라도 브레이크를 밟거나 차선을 바꾸면 추돌사고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오유미 씨의 벤츠는 그대로 달려와 트럭의 뒤꽁무니 속으로 꽝! 하고 들어가버렸습니다.”
박 순경은 설명을 마치고 나서 자리에 돌아와 앉아 물을 한 컵 따라 마셨다.
“어떻습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그럼, 브레이크 파열이나 뭐 기계에 이상이 있던 거군요?”
대답을 기다리는 문영환의 얼굴엔 어떤 기대감이 숨어 있었다. 박 순경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글쎄요… 사실 그것 때문에 조금 골치가 아픈데요…”
“왜요? 텔레비전에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렇지요. 그때는 그런 줄로만 알았거든요. 나중에 철저하게 사고차량을 조사해 보았는데 어디서고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겁니다. 브레이크 쪽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조인트 하나 이상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유미 씨가 졸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것도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목격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사고 전 벤츠는 비상 깜박이를 계속 켜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또 하이빔을 깜박깜박 켜대기도 했다니까요.”
문영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렇담 참 이상하군요. 차에 이상도 없었다, 졸지도 않았다, 그럼 혹시 오유미 씨가 완전초보이거나 술이라도 마신 건 아닌지요? 약물을 복용할 수도 있구요. 감기약이라도…”
“저도 하도 이상해서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오유미 씨는 운전 경력이 오 년이 넘은 베테랑급이었고, 술도 물론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약물이나 대마초라도 피우지 않았나 해서 박병원의 그 담당의사에게 문의해 보았습니다만 역시 아니었습니다.”
오유미의 사고는 위장된 테러가 아닌 다만 우연일 뿐일까?
문영환이 조금 화가 난 듯이 물었다.
“그럼, 도대체 사고원인이 무엇이지요?”
박 순경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귀신에게 씌기라도 했나 보지요.”
“귀신요?”
문영환은 그만 픽 웃고 말았다.
그러나 오유미의 사고는 정말 이상한 것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귀신에게 씌었는지도 모른다. 문영환은 언젠가 주간지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났다.
도로의 곳곳마다에는 지박령(地泊靈)이라고 하는 원한에 사무쳐 죽은 영혼이 있어, 자신의 지역을 지나가는 운전자 중 자신과 영파(靈波)가 비슷한 경우에는 그 운전자를 덮쳐 차를 사고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운전자 자신은 왜 사고가 나는지도 모르게 엉겁결에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차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거나 핸들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운전자의 상태가 피곤하거나 졸립거나 할수록 이런 지박령들이 달라붙기 쉬운 상태가 되고, 특히 사고 다발지역에는 이런 원한에 사무친 지박령들이 있는 곳이 많다는 기사였다.
꼭 믿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이 경우에는 그 말이 맞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영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농담처럼 물었다.
“그럼, 오유미 씨가 사고를 당한 그 지점에서는 사고가 자주 일어납니까?”
박 순경이 따라 일어서며 웃었다.
“글쎄요… 일 년에 한 열 건 정도야 일어나겠죠… 그거야 뭐 날씨에 따라 달라지죠. 그런데… 저… 사진은 안 찍어가시나요?”
“네?”
“기자분들이 오시면 보통 사진을 찍어가시는 거 아닌가요?”
박 순경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눈치챈 문영환은 마지못해서 카메라를 꺼내 대충 셔터를 몇 번 누른 다음 밖으로 나왔다.
이로써 오유미에 대한 테러의 의심은 완전히 풀렸다. 그녀의 차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것은 테러의 가능성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유미가 사고를 당한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일 것이었다. 문영환은 조금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다.
한풀 꺾일 때가 되었는데도 더위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덥고, 지루한 계절이 되고 있었다.
어디선가 도심에 어울리지 않는 매미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그의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지훈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벽에 걸린 하트 모양 시계의 빨간 바늘이 벌써 밤 1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기사원고를 작성하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신문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제일신문 문화면에 실린 천래성 공연에 대한 기사는 그의 머리를 갸웃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연극영화과 교수이자 평론가인 손문숙이 기고한 그 글은 그 공연에 대한 찬사를 일관되어 있었다.
공연장에서 본 그녀의 얼굴 모습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지적이면서도 오만해 보이는 40대 여교수의 마른 듯한 얼굴이었다.
지훈은 다시 한 번 신문의 공연평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우연한 기회에 천래성 씨의 전위공연 <원초로부터의 투쟁>을 관람하게 되었다. 천래성 씨의 모노드라마인 이번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상징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연은 충격과 감동 바로 그 자체였다. 전위공연이 홀대받는 우리 풍토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해 온 천래성 씨는 이번 공연에서 그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관객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가게 해주었다.
그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神)을 무대의 배경으로 격렬한 율동과 거침없는 연기를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충동의 세계와 삶에 대한 진솔한 투쟁을 역설하고자 했다.
이성과 감성의 한계를 초월한 깊은 내면의 세계를 폭발적이고도 흡인력 있는 연기를 통해 조명해 준 이번 작품은, 일상적 인습과 의식의 평범함을 깨뜨려 예술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자율적인 인간의 의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암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원시적인, 그 신선하고도 감동적인 폭력의 순수성과 미학적인 인간의 자폐적 공격성으로 빛이라는 하나의 상징에 대항하는 구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 승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냄으로써 극적으로도 성공을 하고 있다.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이번 공연에 숨은 주역들인 스탭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중에서도 특히 조명과 음향 담당 스탭을 칭찬해 주고 싶다. 상징성의 구도를 극명하게 만들어낸 환상적이면서도 리드미컬한 조명과 단순한 북소리만으로 극의 완급을 원할하게 만들어준 음향은, 이들이 얼마나 이번 공연에 심혈을 기울였나를 알게 하는 한 징표이다. 그들이 기울인 노력이 관객의 감동에 일조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번 공연이 제 연극분야나 또한 일반 예술분야 사이에서도 많은 찬반의 논란거리를 제공할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고, 또 여러 분야에 앞으로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 계속적으로 실험적인 공연들이 올려지리라 기대된다. 그것들은 결국 이 땅에 풍성한 문화적 수확을 가져다줄 것이고, 그에 따라 낡은 관습이나 정체적 인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스러운 의지를 가진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천래성 씨의 본질적 인간탐구에 대한 끝없는 노고에 깊은 감사와 찬사를 아울러 드리고 싶다.
기사를 다 읽고 난 지훈은 머리를 저었다.
그가 본 천래성 공연의 느낌은 예술로 포장된, 광기에 휩싸인 폭력과 공포였다. 무언가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런 공연 중의 행동양식이 손문숙의 말대로 관습이나 정체적 인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러운 의지를 가진 인간상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광기에 휩싸인 폭력이나 살인을 조장하는 것이나 다름아닌 것이다.
더구나 천래성을 모방한 그런 류의 공연이 우리 풍토에 뿌리내려 버린다면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선과 악의 경계를 혼돈스럽게 할 우려가 있었다.
대학교수인 손문숙은 그런 위험성을 모른단 말인가? 그녀는 어떤 의도로 이러한 무책임한 글을 썼을까?
지훈은 새한 스포츠 신문에 난 강수미의 공연평을 떠올렸다. 그것은 공연의 진행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학문적 수사를 동원해 전체로는 일반론적인 수준에 머무르면서도, 그 말미에 이번 공연의 의도를 모르겠다고 분명히 적어놓았다.
지훈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매스컴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뢰는 곧 기자들에게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야 하는 책임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공정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자들은 최선을 다해 그 보이지 않는 일정한 룰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신문기자로서 지훈은 그것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과중한 정신적 부담과 피로감을 주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매스컴은 항상 옳기만 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과거 정부나 군에서 매스컴을 전적으로 통제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역사적인 과거가 있어서인지 사람들은 정치적인 기사에 관하여는 곧잘 의심을 하거나 배후에 감추어진 진실을 밝히는 것에는 이골이 날 정도였다.
또한 정부의 어떤 스캔들이 터질 때면, 그것을 조기에 진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정치적 사건이 아닌 또 다른 사회적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정치적 스캔들을 슬쩍 은폐시키거나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에 집중시키는 매스컴의 교묘한 플레이에 대해서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런 사람들도 문화 사회 등 다른 부분에 대하여는 의심을 품는 법이 별로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 부분이 훨씬 더 중요한 사안이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 분야의 전문가들 이야기니까 모두 믿을 수 있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수준도 각기 천차만별이거니와 그들의 입장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파벌이라든가 금전적 수입에 관련된 개인적 수준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어서 공정성에는 항상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도, 사람들은 일단 활자화된 문장이거나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가 한 번 내뱉은 말에는 놀라우리만치 너무도 쉽게 믿어버렸다.
마치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언제나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신(神)이라도 되는 양 맹신하고 보는 것이다.
손문숙의 글은, 공연을 관람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거나 간에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가치관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 틀림없었다.
지훈은 신문을 휙 내팽개쳐버렸다. 신문은 겹겹의 음산한 회색 날개를 부르르 떨며 사나운 몰골로 방바닥에 추락했다.
지훈은 방바닥에 떨어져 신음하고 있는 신문종이를 뒤로 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영화배우 이주영의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이 일을 맨 처음 귀띔해 준 문영환 선배에게 아무래도 한 턱을 내야 할 것 같았다.
문 선배가 추적하고 있다는 그 사건은 도대체 뭘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