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면서 굵은 빗줄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빗줄기는 뜨겁게 달아오른 대지의 열기를 식혀내며 아스팔트 위에 점점이 검은 무늬를 그려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비를 피하려 우왕좌왕 뛰었다.

 

사람들은 일기예보를 통해 비가 올 확률이 50퍼센트라는 말만을 듣고 대부분 우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비가 올 확률이 50퍼센트라는 말은 알쏭달쏭한 의미였다. 방송국측의 말로는 퍼센티지로 보도하는 것이 선진국형 보도라고 떠벌리지만 그 말은 정말이지 비가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안일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비가 올 확률이 10퍼센트라 한다 해도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사람들은 일기예보에 관한한 점차 매스미디어를 불신해 가고 있었다.

 

 

지훈은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 근처에 한 카페에서 수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수미와 약속한 날이었다.

 

행위 예술가 천래성의 공연은 7시 30분에 싸릿골 소극장에서 있을 예정이었다. 수미의 말대로 천래성의 공연이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는 신선한 자극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지훈은 언젠가 친구와 함께 전위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음악을 전공한 친구로 유럽에 유학을 다녀온 바 있었다. 그 친구와 함께 본 공연은 지훈이 전에 수미에게 말한 <관객모독> 수준의 애교 있는 공연이 아니었다.

 

젊은 전위음악 작곡가의 공연이었는데, 의도되었는지 의도되지 않은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이상한 음률과 리듬을 즉흥적으로 연주하면서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던 그는 공연의 마지막 즈음에 피아노를 도끼로 때려부수었던 것을 지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렴풋이나마 외국에서의 많은 전위적 공연이 그런 식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눈으로 실제 보는 것은 충격 그 자체였었다.

 

공연이 끝난 후 지훈에게 한 친구의 말은 더욱더 놀라웠다. 유럽 등지에서는 이런 정도의 해프닝식 공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거기서는 해프닝을 이미 예술의 중요한 한 장르로 취급하고 있다면서 별의별 공연이 다 있다는 것이었다.

 

덴마크에서는 저명한 여류 첼리스트가 완전한 나체차림으로 무대에서 첼로를 연주하여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으며, 어떤 해프닝은 너무도 섬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에 질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그 일례로 독일에서의 사건을 들었다.

 

한 쌍의 남녀 전위 예술가들이 나와서 완전 나체로 성행위와 비슷한 해괴한 짓거리를 벌이다가 여자를 의자에 앉혔다. 다음 순간, 남자는 면도칼을 꺼내어 파트너인 여자의 나신을 아주 천천히 그었다. 그것도 단 한 번이 아니고 약 20분간에 걸쳐 온몸을 그물망으로 만들었다.

관객들이 숨을 죽이며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온몸에 흥건한 피가 흘러 실신할 때까지 여자는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녀는 공연이 끝나고 병원에 실려가서는 결국 출혈과다로 사망했다. 물론 여자가 무대 위에서 피를 분수처럼 흘리고 있을 때 관객들은 그것이 교묘한 트릭이라고 생각했고 공연이 끝났을 때에는 모두들 일어서서 브라보를 외치며 열광적으로 박수까지 쳐주었다.

 

 

그 사건 이후 독일 등지의 유럽 행위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공연 전에 생명보험에 드는 것이 유행이 되었으며 전위공연은 생명을 거는 자극적 모험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지훈이 흥미 있어 하자 그 친구는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수미와 약속한 시간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공연 시간까지는 그보다 한참 더 남아 있을 것이었다.

 

지훈은 생각에 잠겨 친구의 말을 회상해 보았다.

 

 

음악에서의 전위공연은 미국의 존 케이지로부터 비롯되었다.

 

존 케이지는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스승이자 친구이기도 한데, 그가 1952년에 발표한 작품 <4분 33초>는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4분 33초>는 어떤 악기로든, 또는 몇 개의 악기로든, 마음대로 연주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무대 중앙에는 연주용 그랜드 피아노 스타인웨이가 뚜껑이 덮힌 채로 한 대 놓여 있다. 잠시 후 펭귄 모양처럼 생긴 연미복을 단정히 입은 존 케이지가 박수를 받으며 등장한다. 그의 손에는 최초로 발표되어 곧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될 작품 <4분 33초>의 악보가 들려 있다.

 

사람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저 실험정신에 가득 찬 천재 작곡가의 초연작품이 어떤 형태의 음향으로 울려나올까 하고 기다리고 있다.

존 케이지는 인사를 아주 공손하게 한 뒤 의연한 걸음걸이로 피아노 앞에 가서 앉는다. 그리고 닫혀진 스타인웨이의 뚜껑을 열어제치고 악보를 보면대 위에 펼쳐놓는다.

 

사람들은 기대감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그의 길다란 손가락을 뚫어져라 주시한다.

 

존 케이지는 웬일인지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면대에 풀어놓고 악보를 주시하고 있다. 물론 악보는 관객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자꾸 흘러가는데도 케이지는 피아노 건반 위엔 손도 대지 않는다. 관객들은 작곡가의 이상한 행태에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의자가 삐걱거린다. 어떤 사람은 긴장이 풀어져 기침을 해대기 시작한다.

 

정확히 4분 33초가 지난 후 케이지는 악보를 덮고 일어선다. 그리고 관객들을 향하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곤 퇴장해 버린다. 관객들은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

 

 

작품 <4분 33초>의 악보는 다음과 같이 작성되어 있었다.

 

4' 33"
● 1st Movenemt (1악장) Tacet
● 2st Movenemt (2악장) Tacet
● 3st Movenemt (3악장) Tacet

 

Tacet이라는 말은 연주하지 말고 침묵을 지켜 가만히 있으라는 음악용어이다.

 

적어도 케이지에게는 관객들이 웅성대는 소리, 의자의 삐걱임, 기침소리, 숨소리 등 모두가 음악이었던 셈이었다. 맨 처음 관객들은 케이지의 장난 같은 그 행위에 대해 분노했으나, 케이지가 가지고 있던 음악철학을 이해한 뒤로는 그에 대한 찬사와 열광으로 바뀌었다.

 

 

서양음악의 발달사는 한 마디로 기존의 음악적 질서를 깨뜨리는 역사였다. 화성은 조성음악에서 무조음악으로 발달하여 갔지만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음악가들은 아직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부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음악의 기본적 재료의 질서였다.

 

이 기본적 재료란 음계와 음원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음계는 조성음악의 7음계에서 무조의 12음계로 발달하였지만 그 역시 기본적 재료의 카테고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음원에 대하여는 많은 실험이 행해져서 악기의 발달을 가져왔고, 피아노의 경우 줄에 나사를 단다든가 헝겊을 매달아 기존의 음색을 바꾸어보는 등 노력해 왔지만 근본적으로 음악적 기본재료의 한계성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존 케이지라는 40세의 천재는 그 두 가지의 재료를 한꺼번에 그것도 아주 간단하게 깨뜨려버렸다. 그것은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것이었다.

 

그 공연은 현대 예술사에 한 획을 긋는 혁명적 사건이 되었다. 보편적 인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에서 예술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로써 음악이니 연극이니 미술이니 하는 장르의 벽이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많은 예술가들이 존 케이지의 뒤를 이어 여러 문화의 기존 관념과 인식을 넘어서려는 실험적인 공연들을 수도 없이 행해오게 된 것이었다.

 

“지훈 씨!”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지훈이 눈을 떴다. 어느새 잠이 살짝 든 모양이었다. 수미였다.

 

“미안해요… 차가 막혀서 좀 늦었어요.”

 

그녀의 맑고도 지적인 눈이 안경 너머에서 웃고 있었다. 지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7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차를 마실 사이도 없이 그들은 공연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와 공연장인 싸릿골 소극장으로 향했다.

 

비는 더욱 거세어져 있었고 이따금씩 번개와 천둥까지 치는 음산한 날씨로 변해져 있었다.

 

 

날씨가 불순한 탓인지 관객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200석 안팎의 객석이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반원형의 무대는 바닥에서 30cm 정도밖에 높지 않았고, 객석은 무대를 중심으로 계단식의 부챗살 모양으로 퍼져 있어 음향학적 구조로서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무대와 관객자리와의 거리가 불과 1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 소극장에서는 그 동안에도 많은 실험적 연극이며 해프닝에 의한 전위음악 따위들이 공연되어 왔었다. 그런 까닭에 이 싸릿골 소극장은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문화계 안팎의 많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왔던 장소였던 것이었다.

 

지정좌석제가 아닌 모양인지 티켓에 좌석번호도 명기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빈약해 보이는 의자들 어디에도 번호표지가 붙어 있지 않았다.

 

수미의 주장으로 그들은 맨 앞의 객석에 자리를 골라 앉았다. 문화부 기자로서 수미는 모든 것을 빼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지훈의 바로 옆에는 노란 블라우스의 다소 마른 여자가 친구 사이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여자들 몇 명과 자기들끼리 무언가 작은 소리로 소근거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미가 주위를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쪽에 제가 아는 분이 있네요. 저분은 날 모르시겠지만… ㅈ대학 연영과 손문숙 교수…”

 

그러고 보니 수미는 ㅈ대학 출신이었다. 지훈이 고개를 돌려 수미가 말한 방향을 바라다보았다. 꽤 지적으로 보이는 짙은 베이지색 원피스 차림의 40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선입관 탓일까? 오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훈도 무의식적으로 객석을 둘러보았지만 알 만한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훈은 안내 팜플렛을 펴들고 대충 훑어보았다. 검은 표지의 팜플렛 전면에는 굵은 글씨로 오늘 공연의 제목과 함께 천래성의 얼굴이 커다랗게 인쇄되어 있었다.

 

‘원초로부터의 투쟁?’

 

오늘 공연의 제목은 <원초로부터의 투쟁>이었다.

 

지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해프닝의 제목치고는 좀 괴상한 느낌이 들었다.

 

팜플렛의 전면 밑부분에는 작은 글씨로 이 공연의 후원 및 협찬이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인 한국 모스 그룹이 맡고 있다고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런 대기업들이 이런 조그마한 문화행사에 지원을 한다는 것은 이 땅의 문화발전을 위해서도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천래성의 프로필난에는 그가 한때 미국에서 수학한 적이 있음을 적어놓고 있었다. 어떤 예술이고 외국물을 먹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이상한 풍토가 우리나라에 팽배해 있다는 생각에 지훈이 입맛이 썼다.

 

수미는 공연의 중간중간에 무엇인가 적어볼 요량인지 노트를 꺼내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은은하면서도 중후한 징소리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세 번 울렸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사람들은 부스럭거리던 모든 움직임을 중지하고 일제히 무대를 쳐다보았다.

 

무대는 별다른 장식이 없어 휑한 느낌이 드는 빈 공간이었다. 이윽고 무대 중앙에 크고 둥그런 밝은 빛의 원이 나타났다. 1000와트짜리 롱핀이 비춰대는 그 빛은 죽은 것 같아 보이던 무대에 생기를 되찾아주었다. 무대의 구석구석 모든 입자가 빛으로 황홀하게 반짝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둥근 원의 빛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무대는 다시 생기를 잃고 음산한 침묵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밖에 비가 오는 탓인지 공기가 눅눅하여 지훈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둥…둥…둥…

 

낮고 묵직한 북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느릿한 걸음으로 오늘의 주인공 천래성이 흐릿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몇 사람이 박수를 쳤지만 천래성은 인사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박수소리가 제풀에 시들해졌다. 천래성이 무대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우뚝 섰다. 그의 모습에서는 어떤 중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양팔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검은 삼베로 된 거친 천을 온몸에 둘둘 말아 감고 있었고, 그의 머리는 면도로 완전히 밀어버린 삭발이어서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위에서 곧바로 내리비추는 조명으로 인해 삭발한 민숭머리가 빛났으며 얼굴윤곽에 따른 빛과 그림자의 콘트라스트가 선명했다.

 

두 다리를 벌리고 한동안 우뚝 서 있던 그는 무대 바닥에 그대로 털퍽 주저앉았다. 북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둥…둥…둥…둥…

 

수미가 갑자기 지훈의 팔짱을 꼈다. 보드라운 팔의 촉감이 기분 좋게 전해졌다. 지훈의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조명이 붉은색으로 바뀌었고, 무대 위의 천래성은 앉은 채로 허리를 이용하여 천천히 원을 그리며 땅에 닿을 듯이 머리를 숙이고 상모를 돌리듯 돌렸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그의 속도를 쫓아가고 있었다. 붉은 조명은 점점 더 어두워져 희미한 그의 윤곽만을 어슴푸레 나타내주고 있었다.

 

수미가 지훈의 귀에 대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가만히 속삭였다.

 

“지훈 씨, 분위기가 아주 그럴듯한데?”

 

지훈이 가만히 웃으며 집게손가락 하나를 입으로 갖다대서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갑자기 북소리가 멈추더니, 천래성이 흔들어대던 모든 동작을 정지했다. 그의 그런 동작은 관객의 시간까지 정지하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었다.

 

콰쾅!

 

갑자기 귀청을 찢는 천둥소리가 났다. 관객들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 중에서도 지훈 옆에 앉아 있던 30대의 노란 블라우스의 여자는 너무나 놀라 그만 새로 갈아입은 팬티가 노란 액체로 젖어 버렸다. 얼굴이 빨개졌지만 그녀 자신 외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었다.

 

무대는 섬광으로 번쩍였다.

 

그럴 때마다 천래성의 뒤로 그의 검은 그림자가 명멸했다. 섬광이 끝나고 조명은 하얀 빛으로 바뀌면서 밝아졌다.

 

천래성은 무대의 한편 구석으로 기어가서 강렬한 빛을 못 견디겠다는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숨기는 시늉을 했다.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면서 무릎이 꺾여졌다. 그의 몸이 사르르 무너져내렸다.

 

사지를 쭉 뻗고 엎드린 그의 몸은 죽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희고 강렬한 빛이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천래성은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일어섰다. 삭발한 그의 얼굴에는 어떤 결연한 의지가 번뜩였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다시 시작되고, 푸른빛으로 바뀐 조명 아래에서 그는 무대 위를 뛰어다니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무질서하고 난폭한 것이었다. 그러나 검은 삼베천 밖으로 드러난 그의 우람한 팔근육은 보디빌더의 그것처럼 너무도 훌륭하여 원초적인 힘과 파격적인 정열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훈 옆의 노란 블라우스 여자는 감탄한 눈길로 무대를 바라보며 무아지경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천래성은 노란 블라우스 여자의 심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이번에는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어댔다. 검은 삼베천이 출렁거렸다. 노란 블라우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흑’ 하고 신음을 삼켰다.

 

천래성이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고개를 땅에 닿을 듯이 돌리기 시작했다. 맨 처음 보여주었던 동작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붉은 조명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는 점뿐이었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다시 빨라지며 어떤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달았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멈췄다. 우주가 정지해 있었다.

 

순간! 무대의 모든 조명이 꺼져 주위는 암흑으로 변했다.

 

수미는 지훈과 팔짱 낀 손에 무의식중 힘을 주며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어쩐지 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콰쾅!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천둥소리가 다시 귀청을 강타했다. 천래성은 두 손으로 고막을 막고 엎드려 있었다. 그의 모습만이 섬광과 함께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되풀이했다.

 

기막힌 조명의 연출효과였다. 다시 강렬한 흰빛이 무대 전체를 감쌌다.

 

천래성이 천천히 일어서서 주먹을 불끈 쥐고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번쩍 쳐들었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항의의 표시 같았다.

그러나 흰빛은 그런 그의 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한층 더 강렬하게 무대를 비추고 있었다. 무대 전체가 흰빛의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무대 뒤편 배경벽의 작은 점까지도 똑똑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눈부신 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천래성은 무언가에 자꾸 도전하고 있는데 강렬한 흰빛이 계속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연속적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었다. 그것의 시작은 공연의 제목처럼 원초로부터인지도 몰랐다.

 

지훈은 공연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아마도 천래성은 인간의 원시시대 모습을, 그리고 저 강렬한 흰빛은 대자연을 묵시적으로 그려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천래성의 번쩍 치켜든 그 모습은 대자연의 횡포에 일방적으로 당해온 인간이 드디어 대자연 앞에 반기를 드는 광경을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천래성이 다시 쓰러졌다. 그의 두 손은 빛을 거부하는 듯 허공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흰빛은 승리를 거두고는 둥근 원으로 변해 무대의 이곳 저곳을 날아다녔다. 하얀 빛으로 뭉쳐진 원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면서 쟁반만한 크기로 변해버렸다. 그 원은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 고통에 떠는 천래성의 얼굴을 한 번 비추어보더니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주 짧은 순간 다시 완전한 암흑이 되었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붉은 조명과 푸른 조명이 함께 너울거리며 무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혼돈의 시대였다. 그 혼돈의 빛 속에서 천래성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용트림을 쓰며 다시 일어섰다.

 

관객들은 마음속으로 천래성의 꿋꿋한 의지를 찬양하고 그에게 신뢰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지훈은 그 정도면, 해프닝치고는 꽤 고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둥…둥…둥…

 

아주 느릿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비장한 감마저 드는 소리였다.

 

천래성은 북소리에 맞추어 다시 춤을 추었다. 그리고 춤을 추면서 몸에 걸치고 있는 검은 삼베를 천천히 벗겨냈다. 검은 천이 껍질처럼 바닥에 뒹굴었다.

 

울긋불긋한 조명에 그의 알몸이 드러났다. 그는 간신히 팬티라 부를 수 있는 얇은 살색의 타이즈 한 장만을 달랑 걸치고 있었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빨라졌다. 그의 몸은 예상대로 훌륭했다.

 

그런데! 그의 상체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푸르고 검은… 꿈틀거리는 비늘을 가진 짐승이었다. 그가 몸을 돌려 무대 뒷면 벽 쪽을 향하여 돌아서자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온몸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뱀이었다!

 

그의 넓은 등판에는 모습도 선명한 삼각형의 머리를 가진 뱀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이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보기에도 징그러운 짐승이었다.

 

천래성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뱀이 꿈틀거리며 살아 숨쉬고 있었다.

 

둥 두둥두 둥 두둥둥 둥둥…

 

북소리의 리듬이 섬세해지면서 더욱 격렬해져 갔다. 관객들은 난데없는 뱀의 출현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노란 블라우스 여자는 황홀했다. 천래성의 벗은 몸은 그녀를 달뜨게 하는 힘이 있었다. 더구나 뱀은 불굴의 정력과 발기한 남성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침대 위에서 저 뱀 사나이와 뒹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온몸이 흥분으로 떨려왔다.

 

천래성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은 천을 다시 집어들고 아까보다 더욱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그때, 무대의 천장에서 빛나는 무엇인가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낚싯줄에 매달린 길이 30cm 정도되는 칼이었다.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등산용의 그것을 매달고 있는 낚싯줄은 흐릿한 조명으로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칼이 저 혼자 스스로 부유하는 듯이 보였다.

 

천래성이 손을 뻗쳐 칼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혼돈의 조명 속에서도 요염하게 빛나고 있었다.

 

노란 블라우스 여자는 한층 더 가슴이 뛰었다. 칼은 심리학적 분석에 의하면 그 뾰족한 형태와 공격적인 행동, 무언가를 찌르기 등 그 암시성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남성의 또 다른 상징이 되고 있었다.

 

두둥 두두두둥 두두두둥두두둥둥…

 

북소리가 빠른 리듬으로 관객들의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복잡한 리듬이었다.

 

그는 이제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길게 늘어진 검은 삼베천을 휘두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춤을 추면서 칼로 검은 천을 꿰뚫어 흔들었다. 칼에 매달린 검은 천이 허공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가 좀더 힘차게 돌리자 잘 벼른 칼날에 천이 ‘북’ 소리를 내며 찢겨나갔다. 검은 천이 굵은 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북소리가 뚝 끊겼다. 동시에 조명이 은은한 노란 불빛의 원으로 바뀌어 무대는 좀전의 혼란스럽던 분위기에 비해 안정되고 평화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밝아진 조명 아래 천래성의 벗은 상체에서 뱀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무대 한옆으로 가서 거기 놓여 있는 굵은 밧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1000와트짜리 롱핀에서 만들어내는 작은 빛의 원이 밧줄 끝을 따라갔다.

 

밧줄 끝에 매달려 나온 것은 뜻밖에도 벌거벗은 여자 마네킹이었다. 관객들이 숨을 죽였다.

 

천래성이 실물 크기의 마네킹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갈색 머리를 한 나체 마네킹은 녹색의 눈과 쌍꺼풀에 아이섀도가 짙게 칠해진 전형적인 서양식 여자 마네킹이었다. 허약해 뵈는 가늘고 긴 팔다리가 어딘지 애처롭게 보이면서도 그의 벗어제친 알몸과 함께하는 때문인지 무척 선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노란 블라우스 여자는 어떤 기대감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천래성은 마네킹 여자의 등 뒤로 돌아가서 마네킹의 허리를 감싸안고 양손으로 조그만 젖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노란 블라우스 여자는 아까와는 다른 그 무엇으로 팬티가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천래성은 마네킹의 젖가슴을 움켜쥔 채 마네킹의 팔을 가만히 위에서부터 혀로 핥아 내려갔다. 그의 혀가 마네킹의 손가락 끝에서 멈추게 되자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혀는 다시 마네킹의 가냘픈 허벅다리로 이어졌고 계속 무릎으로 종아리로 내려갔다.

 

일련의 행동이 끝나자, 천래성은 마네킹의 허리를 껴안아 무대 바닥에 조심스레 눕혔다. 그러고 나서 마네킹 위로 몸을 밀착시키고 엉덩이를 위에서 아래로 절도 있게 찌르기 시작했다.

 

둥…둥…둥…둥…

 

또다시 북소리가 들렸다. 기묘하게도 북소리와 엉덩이의 리듬과는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북소리가 빨라지고 있었다.

 

노란 블라우스의 여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흥분으로 달아올라 아랫도리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옆에 앉아 있는 지훈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지훈이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지훈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훈은 씁쓰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치워버렸다.

 

그런 노골적이고 낯뜨거운 장면이 연출되자, 수미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지훈과 자리를 같이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새한 신문 문화부 기자로서의 의무감은 그녀의 시선을 조금도 떼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칼날의 번쩍임이 차갑게 시야를 뚫었다.

 

천래성은 언제 들었는지 오른손에 칼을 들어 마네킹의 가슴에 내리꽂았다.

 

피!

 

새빨간 피였다. 마네킹의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피는 앞자리의 관객석을 덮쳐 피할 겨를도 없이 지훈과 수미, 그리고 노란 블라우스 여자에게도 부려지고 있었다.

 

수미의 안경에 피가 뿌려져 빨간 점 사이로 무대가 보였다. 피비린내가 확 풍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악!”

 

여자들이 기겁을 하여 비명을 질러댔다.

 

콰쾅!

 

놀란 사람들이 감정을 정리하기도 전에 눈부신 섬광이 다시 일며 천둥소리가 메아리쳤다. 다시 강렬한 흰빛이 무대를 환히 비추었다. 천래성의 꿈틀거리는 뱀의 문신과 함께 얼굴과 온몸에는 시뻘건 피가 흥건히 묻어 있어서, 마치 방금 지옥에서 빠져나온 악귀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미는 지훈의 팔을 꽉 잡고 그의 어깨에 기대어 인상을 찡그린 채 대담하게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관객들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에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마음이 약한 사람들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고개를 무릎 속에 파묻고 있었고, 아예 흑흑대며 울어버리는 여자도 있었다.

 

마네킹의 가슴에서는 아까보다 약해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피가 계속 뿜어지고 있었다. 무대바닥은 피로 가득한 가득한 광란의 현장이 되고 있었다. 그 하얗고 강렬한 빛 앞에서 천래성은 아까처럼 허약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피가 뚝뚝 흐르는 자신의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다시 치켜들고 빛을 향하여 똑바로 섰다.

 

그러자 하얀 빛이 더욱 강렬하게 천래성의 몸을 비추었다. 그는 고개를 바싹 치켜들고 여지껏 자신을 괴롭혀오던 머리 위의 하얀 빛을 쏘아내는 조명등을 광포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마네킹에서 팔 하나를 잡아 뽑았다. 어깨부터 뽑혀진 팔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조명등을 향해 마네킹의 팔을 힘껏 집어던졌다. 마네킹 팔은 피를 뿌리면서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더니 정확하게 조명등의 중심부에 맞았다.

 

와장창!

 

조명등이 깨지며 전기가 합선된 듯 방전된 전류가 ‘파지직’ 하고 타올랐다. 조명등에서 조각조각 깨진 유리 파편들이 한꺼번에 무대 위에 떨어졌다. 파아란 불꽃이 탁탁 소리를 내며 천장에서 튀고 있었다. 그와 함께 다른 모든 조명이 일시에 꺼졌다.

 

“꺄악!”

 

아까보다 더욱 심한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단발마처럼 들려왔다. 수미도 너무나도 놀라서 지훈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지훈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고 갑작스러운 그 상황에서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수미의 머리를 감싸안고 보호해 줄 뿐이었다.

 

여자들의 엉엉 하고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불 켜! 불 켜!”

 

누군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혼란 속에서, 꺼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시에 불이 들어왔다. 무대에는 천래성도 마네킹도 이미 다 사라져 버린 상태였고, 다만 깨진 유리 파편들과 흥건한 핏자국만이 좀 전의 충격적인 장면을 회상시켜 줄 뿐이었다.

 

수미가 지훈의 품 안에서 일어나 바른 자세로 앉았다. 지훈이 얼빠진 모습으로 우두커니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무대 위로 관계자인 듯한 사람이 올라와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화울링이 나는 듯 삑삑거리는 소리가 귀에 몹시도 거슬렸다.

 

“손님 여러분, 이제 공연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아까 마네킹에서 뿌려져 나온 피는 진짜 피가 아니고 식용색소를 넣어 만든 물감입니다. 옷에 묻었을 경우 세탁을 하게 되면 모두 지워집니다… 특수효과를 위해서 마네킹에 가스를 주입시켰는데 실수로 너무 많은 양의 가스가 주입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세탁비로 얼마간의 보상금을 준비했습니다. 많은 액수는 아닐지라도 저희의 성의로 알아주시고 옷에 물감이 묻으신 분은 모두 받아가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그 소리에 몇 사람이 박수를 쳤다. 객석을 빠져나가면서 누군가 말했다.

 

“올 여름 피서 한번 끝내주게 했군…”

 

지훈과 수미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섞여 서둘러 싸릿골 소극장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천래성은 담배를 피워 물고 출연자 대기실에서 옷을 입고 있었다. 가슴이 뿌듯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공연을 했다는 만족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계집들의 비명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계집들이 뱉어내는 비명소리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였다. 그것도 처절하게 토해낼수록 그에 상응하여 흥분은 절정에 다다르곤 했다.

 

하지만 오늘의 공연에서 아쉬운 점도 있었다. 마네킹이 실제로 살아 있는 생물이었다면 훨씬 더 큰 만족감이 일었을 것이었다. 공연 도중에도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몰랐다.

 

천래성은 피에 굶주린 맹수와 같은 잔인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저… 사인 좀 해주시겠어요?”

 

그가 돌아다보니 30대 중반의 웬 여자가 도발적인 눈빛을 빛내며 웃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노란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블라우스는 물론이고 머리칼까지 빨간 물감이 점점이 흩뿌려진 채로 묻어 있었다. 까무잡잡한 살결의 패인 가슴이 꽤 불룩했다.

 

여자가 큼직한 종이와 사인펜을 내밀었다. 새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진 긴 손톱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천래성은 그녀의 눈빛을 읽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엑스터시에 빠진 암캐의 농염한 빛이 진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사인을 해주는 대신 웃으며 말했다.

 

“귀 좀 빌릴까요?”

 

“네?”

 

반문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귀를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가 나지막히 속삭이듯 말했다.

 

“필그림 호텔 2014호로 와!”

 

그의 숨결이 그녀의 귓볼을 부드럽게 간지럽히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하면서도 달콤한 유혹의 그 말에 그녀의 몸이 벌써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싸릿골 소극장을 빠져나온 지훈과 수미는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수미의 차가 세워져 있는 야외 주차장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차들이 지나가면서 혜성처럼 오렌지 불빛의 길다란 꼬리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바퀴가 옆으로 쏟아놓는 물방울 역시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산이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어깨 한 쪽씩은 어쩔 수 없이 빗물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레 팔짱을 낀 채 밀착해 있었다. 밤비는 차가웠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따뜻한 체온을 의식하고 있었다.

 

수미는 안경을 벗은 모습이었다. 공연 중에 빨간 물감이 튀었던 까닭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오늘 공연 어땠어요?”

 

지훈이 솔직히 말했다.

 

“글쎄…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저도 그래요. 기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 방향을 도무지 못 잡겠어요.”

 

지훈의 머리에 마네킹이 피를 흘리는 장면이 너무도 생생한 모습으로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수미가 말했잖아? 이런 공연은 일상을 뛰어넘어 새로운 인식의 차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어쩌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겠지.”

 

“그렇긴 하지만 너무 끔찍하잖아요.”

 

수미가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글쎄 그걸 나도 이해 못하겠어…”

 

“저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그 빡빡머리 천래성은 우리 인간의 조상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고, 강렬한 흰빛은 자연을 상징하는 줄 알았어요. 인간이 끊임없이 자연에 도전하고 또 계속 실패하면서도 그 의지를 잃지 않는 그런 것 말이죠.”

 

수미는 지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랬어. 적어도 마네킹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지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들은 어느새 주차장에 와 있었다.

 

그녀의 차는 빨간색의 소형차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어 열쇠구멍에 밀어넣었다. 찰칵하고 도어룩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우산을 받치고 서서 그녀가 비에 젖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가 차문을 열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지훈을 바라다보았다. 지훈이 사랑이 듬뿍 담긴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연의 영향이었을까? 수미의 얼굴은 안경을 벗고 있는 탓인지 전혀 새롭게 보이고 있었다. 섹시한 얼굴이었다. 눈이 빛나고 있었다.

 

둘의 시선에 전류가 흘렀다. 주차장에는 그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아까는 정말 무서웠어요… 그리고… 웁!”

 

지훈이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우산이 바닥에 뒹굴며 낙엽처럼 바람에 날렸다. 가린 것 없는 그들의 머리 위로 차가우면서도 상쾌한 빗방울이 쏟아졌다.

 

“아!”

 

수미가 짧게 신음소리를 내며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지훈이 도망하려는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고 가슴을 밀착시켰다. 그녀의 솟아오른 부드러운 가슴이 지훈에게 느껴졌다. 작은 새처럼 그녀의 가슴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수미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지훈이 그녀의 입술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멀리 형형색색의 네온사인들이 한 쌍의 연인들을 바라보며 축복의 윙크를 보내고 있었다.

 

잠시 후, 수미는 힘겹게 지훈을 떼어내고 황급히 차문을 열고 올라탔다. 귓볼이 빨개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속에는 왠지 모를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차문을 닫자마자 지훈을 그대로 남겨둔 채로 누가 볼세라 그대로 달려가버렸다.

 

차가운 빗방울이 지훈의 이마를 때리고 있었다. 달콤하면서도 풋풋한, 수줍고도 떨리는, 수미와의 첫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