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
MBS 방송국 7층 제4스튜디오에서는 <여명> 녹화가 한창이었다.
천장에서 비추고 있는 조명등의 뜨거운 열기로 연기자들은 땀을 비오듯 흘렸다. 그 때문에 연기자들의 분장이 자꾸 지워져 모두들 짜증을 내고 있었다. 스튜디오 안에서는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틀 수 없었다. 동시녹음을 위해서였다.
채지연의 극중 이름은 ‘소연’ 이었다. 카메라는 스튜디오 중앙에 지어놓은 시골 양반집 사랑방 세트를 <달리 인> 하고 있었다.
소연은 시골처녀의 수수한 차림으로 방 한 쪽 구석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상대는 성격파 탤런트였다. 30대의 양반이 명령조로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소연이 대답하지 않고 한 손으로 옷고름을 꼭 잡고 두 무릎 사이로 고개를 집어넣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때묻은 버선 위로 그녀의 날씬한 다리가 조금 드러나 있었다.
양반이 화를 버럭 냈다.
“이리 오라니까!”
소연이 고개를 간신히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으리, 이러시면 안 됩니…”
“에이! 이것이…”
소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반이 소연에게 달려들었다. 사내의 눈이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채지연은, 사내의 눈빛이 이토록 뜨거운 것이 과연 자기를 극중인물인 소연으로 생각한 까닭인지 아니면 본래의 채지연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나으리, 제발…”
사내는 억센 힘으로 소연을 강제로 끌어안아 눕혔다. 사내의 손이 소연의 옷고름을 거칠게 잡아뜯었다. 소연의 저고리 앞섶이 풀어헤쳐지며 눈부신 그녀의 살결이 드러났다.
조명이 살짝 어두워졌다.
“캇!”
연출 PD가 둥글게 말아 쥔 대본을 힘차게 허공으로 내리쳤다.
“자, 수고들 하셨습니다… 다음 장면은 삼십 분 후에 시작하겠습니다.”
사내와 소연이 일어섰다. 사내는 어딘가 좀 아쉬운 감정을 감추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수고했어요. 지연 씨… 이따 봅시다.”
채지연이 말없이 생긋 웃었다. 사내와 몸을 끌어안았을 때 사내의 아랫도리가 딱딱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채지연은 분장실에서 탤런트 동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모두들 오유미의 사고소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즐겁고 유쾌한 농담들이 오갔을 터이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야기는 결국 자동차의 평소 관리 점검 쪽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때, 분장실 문이 왈칵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모두들 깜짝 놀란 얼굴로 입구를 쳐다보았다. 거기엔 한 소년이 웃으며 서 있었다. 얼굴엔 검댕이 곳곳에 묻어 있었고 한 손에는 싸구려 슬리퍼가 몇 개 들려 있었다.
한 신인 탤런트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난 또 누구라고… 야! 여자 분장실에 이렇게 노크도 없이 들어오면 어떡해?”
소년은 그녀의 노여워하는 기색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생글거리며 말했다.
“아이, 누나도… 내가 언제 노크하며 다녔어요?”
소년은 구두닦이였다.
그는 평소에도 스스럼없이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구두를 찍으러 다녔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 밝았으며 하는 짓이 귀여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방송국 사람들은 소년을 좋아했다.
“구두 닦어…”
마지막 음절을 길게 늘여 외친 소년이 이 사람 저 사람 사이를 거리낌없이 다니며 그들의 발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방에 있는 모든 여자들은 조선시대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 이런 전부 짚세기 아니면 헝겊 신발뿐이네…”
여자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신인 탤런트가 그것보라는 듯이 말했다.
“얘! 조선시대에 무슨 구두닦이가 필요하니?”
소년이 울상이 되었다.
“그럼 난 어떻게 해요?”
그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나이 든 탤런트 한유림이 동정하는 빛으로 말했다.
“으이그… 난 왜 이런 때 가만있질 못하지? 얘, 이리와봐.”
소년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 앞에 다가가자, 옆에 놓인 쇼핑백에서 구두를 꺼내어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잘 닦아와야 해?”
“고맙습니다. 다른 분은 안 계세요?”
여자들의 반응이 없자 소년은 돌연 채지연에게 다가와 애원하는 조로 말했다.
“누나, 광을 멋지게 내드릴 테니까 구두 좀 닦으세요. 네?”
채지연이 화장대 밑에 놓인 자기 신발을 쳐다보고 말했다.
“음, 아직 괜찮은데… 다음에 닦을게…”
“어디 좀 봐요.”
소년이 막무가내로 신발을 집어 들었다. 예쁜 꽃술이 달린 초록빛의 굽 높은 하이힐이었다.
“이것 좀 봐요. 광이 별로 나지 않잖아요. 닦아가지고 올게요.”
채지연이 뭐라 말릴 사이도 없이 소년이 하이힐을 든 채로 냅다 뛰었다.
“어머! 얘…”
채지연이 뛰어가는 소년을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문 쪽을 향해 외쳤다.
“빨리 가져와야 해!”
“알았어요!”
소년의 목소리가 복도에서 울려 퍼졌다.
소년은 뛰다시피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방송국을 나온 소년은 코너를 돌아 골목길에 서자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러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얇은 점퍼 차림의 사내가 다가왔다.
사내는 소년에게서 초록빛 하이힐을 받아들고 무언가 확인하는 듯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지갑에서 빳빳한 만 원자리 한 장을 꺼내 소년에게 쥐어주었다. 소년의 입이 헤 벌어졌다.
선글라스의 사내가 하이힐을 들고 한 옆에 세워져 있는 밴트럭으로 들어갔다.
5분 후 선글라스의 사내가 다시 나와 하이힐을 소년에게 돌려주었다. 소년은, 유명한 구두회사에서 나온 이 디자인 전문가가 시장조사를 위해 자신에게 만 원씩이나 희사한 것에 감사하고는 활짝 웃는 낯으로 뛰어갔다. 순수입이었다.
30분 후, 어느 때보다도 공들여 닦은 듯한 채지연의 초록색 하이힐이 본래 주인에게로 돌려졌다. 오른쪽 구두굽의 무게가 1g쯤 더 나갈 것이었지만,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예민한 채지연은 아니었다.
방에는 긴 타원형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둘레를 따라 회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정례 회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회원들은 모두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회장은 절제된 동작으로 회원들을 한 번 둘러본 후 거침없이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회원들이 따라 앉았다.
어딘지 모르게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회장은 회색 양복차림이었으며, 남들을 압도하는 매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빈자리를 발견하고 회장이 말했다.
“하라스는?”
아트람이 황급히 대답했다.
“하라스는 지금 파리에서 활동 중입니다. 거기서 대단한 호평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노미스는 잘 되어가고 있겠지?”
머리가 면도로 밀어져 있어 파랗게 빛나고 있는 노미스가 대답했다.
“네, 며칠 후면 공연입니다. 하지만 그 성과에 대해서는 저 자신조차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 아무래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는 미미하겠지. 그러나 우리들의 사업은 단순한 이익에 급급하는 그런 것이 아니야. 모두들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들의 사업은 그보다도 먼 미래를 바라다보고 천천히 전진해 가는 것이야. 아니 그다지 그렇게 먼 미래의 일이 아닐지 몰라.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이지… 아트람은 노미스를 측면에서 지원해 주어야 돼.”
아트람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회장이 다른 회원을 쳐다보고 말했다.
“나호, 그대가 추진하고 있는 일본과의 합작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대머리의 50대 사내가 대답했다.
“아직까지 커다란 문제는 없습니다만, 몇몇 경제부 수뇌에서 이견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에쿨이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회장이 다시 말했다.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였다.
“페소가 없으니 아쉽기는 하구만… 에쿨은 나호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겠어.”
‘페소’ 란 20층의 자기 아파트 창문에서 뛰어내린, 한때 회원이었던 사람의 암호명이었다. 페소란 이름이 나오자 새삼스레 회원들의 가슴속에 공포감이 일렁였다.
에쿨이 신속히 대답했다.
“명령대로 진력을 다하겠습니다.”
회장은 페소의 뒤를 이어 이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루앞을 바라다보았다.
“루앞, 아이람과 그 의원과의 관계는 잘 되어가고 있겠지?”
루앞이라고 불리운 자가 대답했다.
“네, 아마 지금은 아이람이 없으면 그는 미치고 말 것입니다.”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내가 그를 만날 때가 된 것 같군…”
“아이람에게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그리고 사모트 건은 어떻게 되었지?”
루앞이 자랑스레 말했다.
“네, 아주 잘 처리됐습니다. 생중계는 물론이고 TV 중계료로 3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 아주 잘했군. 역시 루앞은 앞으로 우리의 큰 일꾼이 될 거야… 그러나 더욱더 분발해야 돼… 문화 쪽에서는, 동아시아 라인 중에서 우리가 제일 뒤처진단 말씀이야…”
동아시아 라인이란 한국, 일본, 홍콩, 타이완, 타이를 모두 함께 부르는 말이었다.
“더욱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장이 회원들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회원들의 머리 속을 하나하나 꿰뚫고 있었다.
“더 보고할 것이 있나?”
회원들이 침묵했다. 회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루앞! 나에게 더 보고할 것이 있을 텐데?”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이람이 실수하여 신문기자가 쫓아다니고 있는 사실을 부정할 텐가?”
루앞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배어나왔다.
“네, 아 아닙니다…”
“그 동안에 왜 보고하지 않았지?”
“그 그건… 제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아이람을 보호하고 싶어서였나?”
회장의 목소리는 커져 있었다.
루앞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사정없이 몰아대는 회장에게 그는 반감을 느끼고 있었다. 회장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갑자기!
회장은 오른손을 뻗어서 허공 속의 가상의 무엇인가를 꽉 움켜 쥐고 조르는 시늉을 하였다.
‘슉!’
음산한 기운이 그 손으로부터 강렬하게 뻗어 나왔다. 그러자, 회장으로부터 4m쯤 떨어져 앉아 있는 루앞의 목에는, 누군가가 실제로 그의 목을 조르고 있기라도 하는 양, 두 개의 움푹 패여진 자국이 나타났다.
당황한 루앞은 두 손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가 보이지 않는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으나, 보이지 않는 그 힘은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것이었다.
루앞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가면서 고통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회장은 허공을 움켜쥔 자신의 손을 옆으로 돌리면서 천천히 비툴었다.
그에 따라 루앞의 얼굴도 같은 방향으로 비틀어지며 일그러져서, 실핏줄이 터질 것만 같은 두 눈이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루앞은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회장은 손에 힘을 더욱 가하면서 위쪽으로 조금 들어올렸다. 180cm나 되는 거구인 루앞의 몸이, 고개가 옆으로 꺾여진 채 공중으로 천천히 솟아올랐다. 치켜 오르던 그의 몸이 허공 2m쯤에서 멈추었다.
회원들의 얼굴이 공포로 인해 창백해졌다. 루앞의 얼굴은 푸르뎅뎅한 검은빛으로 변해갔으며, 혀가 입사이로 빠져나와 말려 올라갔다. 침이 입 밖으로 흉측하게 흘렀고 그의 발은 허공에서 애처롭게 버둥거렸다.
루앞은, 회장이 지닌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그의 힘을…
루앞의 눈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허연 눈자위만이 남아 있었다. 그의 시야에서는 회색 불꽃이 춤추고 있었다. 점차로 그의 버둥거림이 흐느적거리며 느려졌다. 코에서 끈끈하고 시뻘건 액체가 터져나와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
루앞은 진정한 죽음의 공포가 무엇인지 비로소 느끼고 있었다.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려오며 바짓가랑이에서 진한 액체가 흘러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회원들은 전율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회장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서 힘을 거두었다.
순간, 공중에 치켜 올려졌던 루앞의 거대한 몸뚱아리가 쿵 소리를 내며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했다. 회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자신이 그 끔찍스러운 고통을 당하기라도 한 듯한 얼굴들이었다. 루앞은 바닥에 엎드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루앞! 일어서라!”
정신이 몽롱한 루앞의 귀에 추상 같은 회장의 말이 들려왔다. 이제 루앞에게는, 회장의 말은 어떤 말이든 더 이상 생각해 볼 여지 없는 지고의 명령이었다.
루앞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쓰며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켜 세워 일어섰다.
“좋다, 루앞! 과거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
그 말에는, 앞으로 한 번 더 불복종의 의사가 비쳐진다면 루앞의 목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엄한 경고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 기자는 어떻게 할 작정이었지?”
루앞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사실은… 그를 없애기보다는 포섭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연예계에서 아주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일원이 되면 얻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알겠다, 루앞. 그대로 시행해! 하지만 만약 그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수 없이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회장은 말을 마치고 나자마자 일어섰다. 회원들은 그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 일어서서 기립자세로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회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루앞은 너무나도 공포에 질려 있던 터라 자신의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름의 진한 황금빛 햇빛 한 자락이 책상 모서리에 달라붙어 쉬고 있었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태양이 서쪽을 향하여 차츰차츰 떨어져감에 따라 쉬고 있던 햇빛 자락은 서서히 기쁘게 몰아쉬던 정열의 숨소리를 거두며 아래쪽으로 무너져가고 있었다.
박성화 의원은 얼굴을 찡그린 채로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무선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체격에, 알맞게 살집이 오른 그의 얼굴은 전형적인 정치가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전화를 받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그의 얼굴은 낭패한 표정이었다.
‘기자가 찾아올지 모른다고?’
의원이 수화기에 대고 짜증나는 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그러도록 하지…”
의원의 머리 속에 복잡한 계산이 순식간에 행해졌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해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윤기 있는 20대 여인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의원님을 만나보시길 원하는 분이 한 분 계셔요. 의원님께서도 그분을 만나게 되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왜냐하면 그분은 의원님을 여러모로 돕고 싶어하시니까요… 의원님을 도와드릴 만한 역량을 가지고 계신 분이세요.”
“나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인물이라? 내가 아는 인물인가?”
“글쎄, 그렇진 않을 거에요… 하지만 제가 보증하죠… 의원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죠…”
의원이 역정을 냈다.
“도대체 누군데 그래?”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분이 신신당부를 하셨거든요…”
의원은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존재였다.
“알겠어… 그럼 한번 만남을 주선해 보라구… 나를 도와주겠다는데 손해볼 거야 없겠지… 그건 그렇고 아까 말한 기자건 말인데… 앞으로는 우리의 만남도 당분간은 자제해야겠어. 물론 지연이도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도 조심하고…”
“그것은 조금도 염려 마세요. 그 기자에 대하여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어요… 다만 그 동안만 조심하자는 것뿐이니까요.”
의원이 다짐하듯 말했다.
“알겠어… 하지만 조심해야 돼… 우리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져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나에게나 지연이에게 모두… 그러니까, 절대 의심받을 만한 행동은 하지 않도록 하고… 당분간은 이 전화도 사용하지 말도록 해… 꼭 연락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시키도록 하라구… 믿을 만한 사람으로… 그것도 지연이와는 관계가 없을 듯한 사람으로 말이야…”
“네… 그렇게 할게요…”
수화기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불안한 듯한 가냘픈 떨림의 소리였다.
“저… 의원님… 저를 사랑하시나요?”
의원이 가슴이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빠르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럼, 그것은 지연이도 잘 알잖아?”
“그렇긴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변한다 하더라도 저의 의원님께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다만… 의원님이 저 때문에 괴로어하신다거나 정치적으로 어떤 타격을 입게 되신다면 저는 견딜 수 없을 거예요. 저는 기꺼이 의원님을 위해 언제든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지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의원이 긴 한숨을 지었다. 그녀를 달래야 했다.
“알겠어. 지연이의 나에 대한 마음을… 하지만 그렇게까지 가진 않을 거야… 내 어떤 일이 있어도 지연이를 지키고 말 거야. 내 말 알겠지?”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수화기의 목소리가 조금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고마워요… 하잘것없는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의원이 마음속으로 외쳐댔다.
‘아니야, 지연은 절대로 하잘것없는 여자가 아니야…’
의원은 그녀와의 첫밤을 생각해냈다. 하이얀 침대보에 그녀의 선홍빛 피가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그때의 당혹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후회해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내란 동물에게는 크나큰 기쁨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의원은 멍하니 앉아 채지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물기가 촉촉히 배어 있는 커다란 눈망울이 선정적이었다.
문득 의원은 지난 주, 청담동 강변의 특급호텔 <에스쁘리> 스위트 룸에서 가졌던 그녀와의 격렬한 정사를 생각했다. 그녀와의 관계는 언제나처럼 쾌락의 극치였다. 그녀는 헌신적이었고 정열적인 몸짓으로, 자신을 남성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 때의 지연이는, TV에서 천진한 표정연기로 뭇 남성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순진무구형 탤런트 채지연이 아니었다. 때로는 대담하고 뇌쇄적인 표정으로, 때로는 섬세한 신음소리로 자신을 기쁨의 열락으로 몰아가게 해주었다.
그녀는 남자를 기쁘게 해줄 줄 아는 천성의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와의 행위는 음악적이었다. 격렬한 리듬이, 고요한 멜로디가 그녀의 몸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것은 실제로 이 세상에 ‘명기(名器)’ 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원에게 실증해 주었다.
최초의 수줍고 어색했던 몇 밤이 지난 이후 그녀의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자신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의원에게 젊음을 느끼게 해주었고, 신선한 생기를 불어주었다.
의원의 아내 이명희는, 섹스에 관하여는 거의 불감증에 가가워 의원은 단 한 번도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내의 반응은 늘 무료한 것이었다. 또한 아내는 자신에게 어떤 한도 이상은 서비스하기를 거부하곤 했다.
의원은 전에 자신의 친구들이 간혹 바람을 피우다 들통이 나서 아내들에게 곤욕 치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을 비웃곤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처지와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지연이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치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여지껏 평생을 걸려 이룩한 정치생명을 희생해야만 한다면?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의원이 채지연을 처음 만난 것은 세 달쯤 전 어느 호텔에서 열린 파티장에서였다. 그것은 평범한 사교모임이거나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형식상의 이유는 미국의 한 상원의원을 환영하는 행사였지만, 그런 행사는 으레 국내 굴지의 재벌급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이 오가며 어떻게 서로를 이용할까 하고 궁리하면서 정보를 교환하고 상대방이 얼마짜리인지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지 서로를 탐색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들을 만나 인사했고 담소를 나누었으며 그때마다 쉴새없이 머리를 회전시켜야 했다. 웃음 속에서도 긴장을 늦출 만한 여유는 없었다. 정치적인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는 실제로 적을 많이 만들지 않는 부드러운 성격이어서 누구에게나 환영받았다.
그가 잠시 자리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채지연!
그녀가 자신을 향해 누군가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의원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찰나적으로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정치가의 본능이었다.
그는 속이 불편해졌다. 마흔여덟이나 된 나이에 그런 묘한 충격적인 감정이 생긴다는 것이 왠지 쑥스러웠다. 그는 몇 번인가 TV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적당히 등과 가슴이 패인 파티용 이브닝 드레스는 짙은 감청색이었는데 아주 자그마한 보석들이 달려 있어서 파격적으로 말려올려진 머리모양과 함께 독특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주고 있었다.
드라마나 CF에서의 청순한 이미지가 아닌 농염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누구인지 모를 대머리와 무엇인가를 속닥거리면서 의원 옆을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아! 그때 그녀에게서 풍기는 그 신선한 향기란…
의원은 지나가는 여인의 모습을 슬쩍 곁눈으로 쳐다보다가 마구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감지하고는 자신의 지위와 목표를 상기했다.
그렇다!
자신은 시정잡배가 아니었다. 국민이 직접 손으로 뽑아준 국회의원이었다. 그 지위와 그에 따른 특권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또한 거기에 부과된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도덕적인 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그녀나 의원 자신이나 사람들이 입방아찧어대기 좋아하는 대상들이 아닌가?
국회의원과 미모의 탤런트… 좋은 가십거리가 될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이제껏 순간적이나마 지녔던 감정을 훌훌 털어버렸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마흔여덟의 나이에 그러한 소년 같은 감정을 잠시나마 가졌던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해 버리고 창밖을 통해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 저만치 갔던 대머리가 돌아와 인사를 했다.
“이거 박 의원님이 아니십니까? 저는 제일전자 사장 최달호입니다. 일전에 청문회 때 대단하셨지요. 그걸 모르는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어주며 저만치 서 있던 그녀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최달호라고 자신을 소개한 대머리가 다시 말했다.
“앞으로 크게 되실 의원님이신데… 잘 부탁드립니다… 음… 그리고 이 아가씨는 TV에서 우리 회사 세탁기를 선전하는 채지연 양이지요. 요즘 미스 채 덕분에 매출이 삼십 퍼센트나 올라 미스 채의 인기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미스 채! 인사드리지…”
채지연이 꾸벅 절을 했다. 그녀의 굴곡진 풍만한 가슴이 이브닝 드레스 사이로 살짝 드러나 보였다.
“안녕하세요? 채지연이라고 합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의원의 손은 자석에라도 끌린 듯이 그녀의 앙증맞고 작은 손을 자기도 모르게 잡고 있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의원은 자신이 그녀에게 빠져드는 것이 내심 두려웠지만 한 번 불붙기 시작한 욕망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채지연도 은근히 그것을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그것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최초로, 남의 눈을 피해 호텔에 들기까지에는 2주일이란 시간이 걸렸다. 처음 그들이 호텔방에 들어섰을 때, 들어올 때와는 달리 채지연은 약간의 저항을 해댔다.
의원이 그것이 여자들의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반항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행위가 끝나고 구겨진 하이얀 침대보에 점점이 뿌려진 선홍빛 핏자욱은 그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사실 그녀와의 행위를 고급 창녀와의 관계쯤으로 치부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자 연예인들 중에 그런 애들이 있다는 것을 동료의원으로부터 은밀히 듣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침대보 위의 선홍색은 그의 예상을 넘어서 있었다. 그것은 좋지 않은 징후였다.
채지연은 얼굴을 무릎에 맞대고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한참을 울었다.
“나쁜 사람!”
난감해 하며 계면쩍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물고 있는 의원에게 채지연이 눈물을 닦으며 내뱉은 단 한마디의 말이었다.
그녀는 의원에게 ‘책임져라’, ‘난 이제 어떻게 하느냐’ 따위의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의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가 미리 준비해 간 거액의 수표를 내밀자, 그녀는 정중하게 그러나 도도하게 말했다.
“돈이라면 저에게도 충분히 있어요.”
그 말은 의원의 마음을 더욱 흔들어놓았다.
그날 이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원했다. 그녀의 수줍었던 최초의 나날들이 지나갔다. 그날들은 의원의 리드로 이루어졌다. 의원에게는 상큼한 날들이었으며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또 남자로서의 순간들을 가슴 뿌듯이 느끼게 되는 나날들이었다.
학생은 빨리 배웠고 무엇보다고 그에게 헌신적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고, 오로지 그의 따스한 품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의원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의 사랑이 이토록 한 남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 속에 있을 때 그는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욕망에 충실한 게걸스러운 남자일 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초보자가 아니었다. 아니 이제는 의원이 초보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그녀의 테크닉은 훌륭했으며, 더욱이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의원에게 있어서는 거부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쾌락의 극치에 다가서면 설수록 무엇인지 모를 막연한 두려움이 그를 감쌌다. 그러면 그럴수록 의원은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의 야들야들한 살속을 탐닉해 왔던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
‘새한 스포츠 기자가 냄새를 맡았다…’
그녀에게서 오늘 걸려온 전화는 그가 가져왔던 막연한 두려움이 무엇인지 확연히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애써 외면해 온 사실이었다. 만약 이 일이 공표되면 청문회 스타로서 명성을 떨쳤던 자신은 하루아침에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몰락해 버릴 것이고, 그와 함께 그가 품어왔던 원대한 꿈은 물거품처럼 사그러지게 될 것이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직 기자가 확실한 증거를 못 잡았다고 하지만 만에 하나,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의원의 뇌리에 순간 섬뜩한 생각이 지나갔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살인!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어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아무리 자신이 부도덕하다 할지라도 사람의 생명까지 뺏어가면서 자신의 비밀을 지킬 수는 없었다. 그는 적어도 이 나라의 신망받는 국회의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돈으로 매수하는 것은 어떨까? 이 세상에 돈처럼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것은 없었다. 의원에게 있어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에너지의 총합적인 형태이면서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이고도 실제적인 원천이었다.
그 기자가 과연 자신의 제안에 응할 것인가? 그리고 영원히 입을 다물어줄 것인가?
결론은 빨리 그에게 주어졌다. 기자라는 직분에 비추어 자신의 양심에 한 점 오점은 남기게 되겠지만 그 기자는 같은 남자로서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순순히 제안을 따를 것이었다.
딱 한 번 눈을 감는다면 유망한 정치가와 탤런트를 동시에 살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수천만 원 아니 억대의 돈이 굴러 들어온다면 도대체 누가 감히 그 화려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그 기자의 진짜 목적은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녀석은 너무도 악랄하고 교활한 놈이 틀림없겠지만 애초의 목적이 돈이었으니 만큼, 일을 처리하기는 쉬울 것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나 지연이를 위해서나 그 정도의 돈은 기꺼이 희사할 용의가 의원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그 문영환이라고 하는 기자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지금은 무엇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할 수도 있는 그에게 제안을 한다거나 하여 섣불리 그 기자를 자극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었다.
의원은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문득, 조금 전에 받았던 전화기 너머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그것은 조금도 염려 마세요. 그 기자에 대하여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어요…’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고? 지연이 그 기자에 대하여 생각해 둔 것이란?
그것은 아마도 채지연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서는 말한 것이리라… 그래… 그것은 ‘매수’ 라는 좀 비열한 방법이 될 것이었다.
만약에 지연이 지금 그 기자를 매수하는 방법을 강구 중이거나 진행 중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드는 비용은 모두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의원은 다시 채지연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좀 전에 자신의 입으로 앞으로는 전화를 사용하지 말자는 약속을 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채지연은 자신에게 연락할 일이 있었다. 그녀는,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를 도와주겠다고 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그 시간과 장소를 알려줄 것이었다.
물론 국회의원에게 있어서는, 투표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만, 지연이 말한 그 사람은 그런 일반적인 선거인이 아닌 알짜배기 거물임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돈 많은 재벌이거나 아니면 큼직한 정치적 배경이 있는…
의원은 순간 세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첫째는, 그만한 역량을 가진 사람은 국내에 몇 안 될 것이었고 그들은 모두 자신이 적어도 알고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굳이 자신에게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둘째는, 그만한 역량을 가진 숨겨진 인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자신을 어떠한 방법으로 도울 것이며 왜 자신을 도우려는가 하는 점이었다. 여기서는 ‘왜?’ 가 더욱 중요했다.
어디서건 마찬가지이겠지만 정치세계에서는 공짜란 없었다. 이 세상에는 공짜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정치란 모든 것이 거래였으며 그 원칙은 대내외적으로 똑같이 적용되었다. 국제적으로도, 여당과 야당의 사이에서도, 당내에서도, 기업가에게서 음성적으로 정치인에게 건네지는 파이프라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맨 위의 대통령인 당총재나 맨 아래의 초선 국회의원, 아니 그 밑의 비서관에게 이르기까지 그 원칙은 언제나 똑같이 적용되었다.
정치가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감각이 바로 그 거래의 이면에 숨겨진 진면목을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때로는 실리를, 또 때로는 명분을, 또 때로는 양자를 적절히 균형 있게 취하여 거래해 가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었다. 정치가란 그러한 거래의 균형감각을 얼마만큼 잘 발달시키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대정치가>란 정치거래의 귀재를 기분 좋게 일컫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박성화 의원은 천부적으로 동물적인 거래감각이 있었다. 그가 현재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 것은, 물론 청문회에서 성가를 드높이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것에 힘입은 바 있지만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당내외의 수많은 거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왔기도 한 때문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준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가 ‘이제부터 거래를 틉시다.’ 라고 말한다는 것을…
그것은 자신이 그만큼 높은 상품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만약에 그가 자신에게 좋은 조건을 내놓는다면 그는 주저 없이 ‘거래’ 를 틀 생각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의문은, 또 하나의 ‘왜?’ 였다.
그것은 왜 미지의 그가 거래의 메신저로 채지연을 택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가 정치적인 인물이라든가 재벌 등의 인물이라면, 모르면 몰라도 채지연 같은 일개 여자 탤런트를 자신의 메신저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떤 부류의 사람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으로서는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질문이었다.
의원은 잠시 고개를 뒤로 젖혀 목의 피로를 풀었다. 우두둑하며 일곱 개의 경추뼈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고개를 바로하고 좌우로 돌려보았다. 조금 뻣뻣한 게 아무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음 순간 의원은 책상 위에서 무엇인가 은은한 빛을 내고 있는 물건을 보았다. 의원의 입이 미소로 조금 벌어졌다. 그것은 박성화 의원에게는 아주 기분 좋은 물건이었다.
황금빛의 따스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 그 물건은 스위스제의 명품 만년필 <몽블랑 다이너스티>였다.
그것은 몽블랑사가 작년 연말에 단 500개만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은 제품으로 그 하나하나마다 고유한 일련번호를 새겨넣어 희소가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20cm 정도 되는 길이를 가진 핸드메이드의 18k 골드의 외장은 두툼하면서도 풍만한 볼륨을 가지고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한화로 약 2백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이었지만 그것보다도 의원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은 그것을 보낸 이의 편지였다. 편지는 만년필 옆에 봉투째로 놓여 있었다.
그 편지는 만년필과 함께 이틀 전에 도착했는데 그것은 의원의 국민적 인기를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의원은 이미 몇 번씩이나 읽어서 내용을 훤히 알 수 있는 편지를 꺼내어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달필이었다.
존경하옵는 박성화 의원님께
이 더운 여름날 불철주야 국민을 위해 일하시느라 그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중략…
저희는 의원님께서 보여준 청문회에서의 그 모습을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 가증스러운 답변자들을 향해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따져가며 추궁하는 모습에 국민들 누구라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중략…
여기 보내는 만년필은 약소합니다만 의원님께 드리는 국민적 성원으로 생각하시고 기쁘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앞으로 의원님께서 대통령이 되셨을 때 이 만년필로 대통령직 수락서에 사인하여 주신다면 저뿐만 아니라 가문의 무한한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이제 제 나이 육십을 넘기고 있는 노인이지만 의원님께서 대통령이 되실 때까지는 언제까지고 살아 있을 작정입니다. 만약 제 평생에 의원님께서 대통령이 되신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또 얼마나 발전하겠습니까?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원하며 이만 줄입니다. - 부산에서 의원님의 열렬한 지지자 드림.
언제 읽어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성과를 획기적으로 높이게 해준 청문회 이후 수많은 선물들과 격려편지 그리고 감사편지들을 받았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편지를 본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청문회가 끝난 지 벌써 몇 년이 지난 후라서 이제는 그때의 열화 같던 인기는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없었고,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점차 희미해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시점이어서 의원의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또한 60세가 넘는 노인이면서도 박 의원 바로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있다니 의원의 마음은 감동으로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
그것은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품어온 일생의 꿈이었다.
의원은 만년필 뚜껑을 열어 메모지에 크고 힘찬 글씨체로 한글과 한문 두 가지를 적어 내려갔다. 몽블랑 다이너스티의 18k 펜촉은 너무도 매끄럽게 종이 위를 달리고 있었다.
박성화는 크고 만족한 미소로 자신이 써놓은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대통령… 박성화…
의원은 만년필 뚜껑을 조심스레 닫고 윗저고리 포켓에 찔러 넣었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을 물건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한잔 걸쳐야 할 것이었다. 채지연과도 당분간은 만난 수 없을 처지였으므로…
어디서 헤드폰을 쓴 누군가가 몽블랑 다이너스티의 뚜껑이 ‘짤칵’ 하고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