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
여의도 태양빌딩 6층에 자리한 수기획 사무실은 그날따라 많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수기획 소속 연예인들이 주된 손님들이었지만 그 밖에도 스타를 꿈꾸는 탤런트 지망생들, 가수에게 곡을 써주는 작곡자들이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그들은 모두 이기수와 손을 잡게 되면 출세가 보장되리라는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직원인 미스 최는 손님들에게 커피를 타주기에 정신이 없었고, 사무실 운영과 경리를 총괄하는 김 부장은 정신없이 밀려드는 손님들과 일일이 말상대를 해야 했다.
이따금씩 걸려오는 전화는 미스 최보다 나이가 좀더 어린 미스 홍이 컴퓨터로 자료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메모를 해가며 처리하고 있었다.
이기수는 마침 한창 선풍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수기획 소속의 헤비메탈 그룹 <피닉스>의 공연 문제로 관계자들을 만나러 가고 없었다.
미스 최는 키가 작고 뚱뚱했지만 수더분한 인상과 붙임성 있는 행동거지로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하긴 그녀의 그런 외모는 이곳을 드나드는 여자 연예인들에게 쓸데없는 우월감을 심어주기에 알맞은 것도 사실이었다.
미스 최가 커피잔을 손님 탁자에 내려 놓았을 때, 문을 밀치며 검은색의 싸구려 비닐가방을 든 한 사나이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들어왔다.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회색 모자에 후줄근한 회색 작업복을 입은 그는 검정색의 굵은 안경테를 걸치고 있어서 보기에도 맹해 보였다.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과 손님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일제히 작업복 차림의 그를 쳐다보았다. 시끄럽던 사무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들의 눈에는, 연예기획 사무실에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의 그가 마치 시골서 갓 올라온 촌사람처럼 보였다. 회색 작업복 차림의 사나이는 꺼벙한 모습으로 사무실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사무실 내부는 각종 행사 포스터와 스타들의 대형 브로마이드로 꽉 차 있었다.
세상에 별 희한한 것을 다 본다는 듯 사방을 둘러보며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 머뭇거렸다. 보다못한 미스 최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저씨?”
그제야 정신이 든 듯한 얼굴로 작업복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약간 혀가 짧은 목소리였다.
“아… 네, 저 저는 전화 수 수 수리회사에서 나 나왔는데요…”
마음 착한 미스 최가 더듬거리는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저씨, 여기는 고장난 전화기도 없고 또 오시라고 연락한 일도 없어요.”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 그게 아 아 아니라요…”
잠시 호기심을 가지고 작업복 사나이를 쳐다보던 손님들과 미스 최를 제외한 직원들은 별일이 아닌 듯싶자, 각자 자기들의 이야기와 일에 다시 열중했다. 사무실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미스 최가 다시금 이 불쌍하게 뵈는 사나이에게 안쓰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뭐죠?”
“예… 다 다름이… 아니고 저 저 저희 회사는… 저 전화 수리뿐이 아니고 매 매달 전화기와 커 커 컴퓨터를 청소해 드 드리고 있습니다.”
그의 말투는, 그의 의지가 더듬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데 반해 혀가 말을 듣지 않아 더욱 더듬거리는 것 같아서 더 애처롭게 들렸다.
“전화를 청소해요?”
이상한 일이라는 듯 미스 최가 작업복의 사나이를 올려다보았다. 작업복이 더듬거리는 소리로 수줍은 듯이 말했다.
“예… 매 매 매달 전화선로도 저 점검해 드리고… 아 아울러서… 전화기를 처 처 처 청소해 드립니다. 아 아 아시다시피… 저 전화기는 여 여러 사람이 고 고 공동으로 쓰는 것이라서… 하 항상 세균에 오 오 오 오염되어 있어서…”
지루하게 계속되는 작업복의 더듬거림을 더 이상 참지 못한 미스 최가 작업복이 말하려는 의도를 알겠다는 투로 말했다.
“아,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사장님이 안 계셔서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미안하지만 다음에 한 번 더 들러주시겠어요?”
작업복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는 패배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체념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꺼져가는 듯한 한숨을 쉬고 나서 작업복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했다.
“예… 아 아 알겠습니다.”
그가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잠깐만요.”
미스 최가 그를 불러 세웠다.
연민의 정과 모성본능이 그녀의 내부로부터 강하게 솟구쳤다. 미스 최는 할 수만 있다면, 이 불쌍한 작업복의 사나이에게 무언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멍청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쳐다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부끄러운 듯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했다.
“저… 더우신데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하고 가세요.”
“고 고맙습니다… 그 그렇지 않아도 모 목이…”
미스 최는 생긋 웃으며 냉장고에서 차가운 오렌지 쥬스를 꺼내어 컵에 따라 그에게 내밀었다.
작업복은 기대했던 냉수가 아닌 오렌지 쥬스를 받아들자, 보잘것없는 자신이 과분한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아니 이, 비싼 것을…”
쥬스를 받아드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아껴 먹듯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마셨다. 그것을 보는 미스 최의 마음이 한편으로는 저려오면서 또 한편으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흘렀다.
쥬스를 마시다 말고 작업복이 미스 최 얼굴을 감사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말했다.
“저, 아 아 아가씨… 이 있잖아요… 사 사실 저는… 처 처 첫달은 무 무료로 서비스 해 해 해드리고 이 있거든요… 그래서요… 이번에는 제 제가 그냥 해드릴 테니까요… 사 사장님께 자 잘 말씀드려서 다 다음달부터라도 돈을 내시면 되는데요…”
그 말을 듣자, 미스 최는 사무실 운영을 총괄하는 김 부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김 부장도 이미 작업복 사나이를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거, 한 달에 얼마씩이오?”
작업복은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듯 안경 속의 눈이 빛났다. 작업복이 미스 최를 돌아보며 물었다.
“예, 여 여기 있는 커 커 컴퓨터와 저 전화기가 모 모두 며 몇 대죠?”
“음, 컴퓨터는 저기 있는 것 한 대뿐이고 전화는 모두 세 대에요. 아니 참, 사장실에 있는 두 대까지 합하면 모두 다섯 대네요.”
작업복이 조금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 그럼… 커 컴퓨터 한 대에 사… 삼천 원, 저 전화 한 대에 이 이천 원씩, 다 다섯 대면?… 하 하 한 달에 마 만삼천 원입니다… 만삼천 원.”
김 부장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거만한 투로 말했다.
“거 뭐, 얼마 되지도 않는구만. 그럼 일단 한번 해보지. 그 정도면 사장님께 허락을 받을 것도 없구만…”
“가 감사합니다.”
작업복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해졌다. 덩달아 미스 최의 얼굴도 무슨 큰 짐을 벗은 양 밝아졌다.
김 부장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작업복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비스라고 한 것 확실한 거지?”
“무 물론입니다.”
작업복은 대답이 끝나는 즉시, 혹시라도 그 동안 김 부장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검은 비닐가방에서 도구들을 꺼냈다. 회로점검에 쓰이는 테스터, 청소에 필요한 융으로 된 걸레와 솔, 찌든 때를 벗겨낼 알콜계통의 약품병 하나 그리고 왁스, 수화기에 뿌릴 분무식 향수 등이었다.
그는 사무실의 전화들의 선로를 일일이 점검하고 나서 컴퓨터와 전화기들은 묵은 때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부지런하고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40분 후, 마지막으로 사장실에 있는 두 대의 전화들을 청소한 작업복은 사장실 문을 공손하게 닫았다.
작업복이 모든 일련의 작업을 마치고 자신의 도구들을 챙겼다. 그러고 나서 마치 청소를 끝낸 학생이 선생님께 검사받는 모습으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서 미스 최에게 말했다. 자신의 일에 대한 그녀의 평가가 어떨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이 이제 다 끄 끄 끝났습니다.”
전화기들은 새것처럼 반들반들한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다.
“정말 아주 깨끗해졌네요!”
미스 최가 감탄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 그럼… 아 아 안녕히 계십시오.”
작업복은 기쁜 얼굴로 꾸벅 절을 하고는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밝은 모습으로 나가는 사나이의 뒷모습을 바라다본 미스 최는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그래도 무언가 선행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그제야 깨달은 듯 미스 최가 혼자말처럼 말했다.
“아니, 저 사람. 명함도 주지 않고 그냥 가버렸네? 명함이 없으면 하다못해 스티커라도 주고 가야 다음에 연락이라도 하지. 장사를 어떻게 하는 거야?”
김 부장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어휴, 요즘 같은 세상에 저래 가지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지? 정말 맹하기 짝이 없군. 아직 장가도 가지 못한 게 틀림없어.”
그와 말상대를 하던 손님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짚신도 다 짝이 있다고… 그 사람 혀가 조금 짧고 약간 더듬을 뿐이지 다른 데는 멀쩡하던데. 특히 밤일은 아주 잘할 것 같지 않아?”
손님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미스 최를 쳐다보곤 큰소리로 다시 말했다.
“어이! 미스 최! 아까 그 사람 어때? 사람은 좋아보이던데, 시집갈 생각 없어? 노처녀로 늙지 말고…”
미스 최의 살찐 얼굴이 순간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 허리를 곧게 펴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전 아무한테나 시집 안 가요!”
손님이 껄껄대며 웃는 소리가 사무실 밖에까지 퍼졌다.
작업복 사나이는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 <내려감> 단추를 눌렀다. 문이 닫히자 엘리베이터는 기분 좋은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가 흘렀다. 그는 갑갑한지 굵은 뿔테안경을 벗었다. 뱀눈이 웃고 있었다.
사무실 안은 단출한 장식이었으며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적당한 쿠션의 격자무늬 카펫이 깔려 있었고, 벽에 놓인 책꽂이에는 엔사이클로피디아 브리태니카 전권을 비롯한 원서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어 사무실이라기보다는 학자의 서재처럼 보였다.
이기수는 푹신한 검정색 가죽소파에 앉아서, 자신과 응접탁자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반백의 머리를 한 초로의 신사를 바라다 보았다.
신사의 눈은 아주 이지적으로 보였으며 몸의 어디에서도 허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시원한 에어컨이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이 더운 여름날에도 완벽한 정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회색 싱글 차림에 고급스런 프렌치 타이, 희고 빳빳한 칼라의 와이셔츠… 반짝반짝 윤이 나서 거울처럼 비쳐보이는 듯한 광택의 고급 구두… 그야말로 한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초로의 신사가 말했다. 세련된 도회적인 음성이었다.
“아무튼 <피닉스>는 곤란합니다!”
헤비메탈 그룹 <피닉스>는 4인조로 구성된 록밴드였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나 삽시간에 이 땅의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피닉스는 데뷔할 때까지 그들의 존재를 완전히 비밀에 부쳐 왔기 때문에 6개월 전쯤 그들이 세상에 첫선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었다. 첫째는 그들의 음악 실력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들의 파격적인 무대 매너 때문이었다.
영웅에 대한 모방심리가 강한 청소년들은 그들의 복장을 흉내내고 싶어했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남대문이나 동대문의 옷 도매상가의 몇몇 상인들이 눈치 빠른 상혼을 발휘하여 그 즉시 피닉스 스타일의 옷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그 옷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그럼으로 해서 청소년들의 모방심리 욕구를 충실히 만족시켜 주었다. 한 번 유행의 바람이 불어대기 시작하자 유행에 뒤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수많은 청소년들이 이에 가세하여 헤비메탈 그룹 <피닉스>는 이제 가수들로서 음악적 명성뿐만 아니라 이 땅의 사회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유행현상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능력 있고 수완 좋은 그들의 매니저 이기수의 숨은 활약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의 선풍적 인기에는 남과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들은 우선 남들과 다른 스테이지 매너를 지니고 있었다. 기존의 다른 록그룹이나 댄스그룹들이 소녀적 취향에 편승하듯 화려하고 호화로운 매너를 지향했다고 본다면 이들의 발상은 애초에 달랐다.
그들은 한마디로 거칠었으며, 원색적이었다. 기존의 문화를 거부하는 듯한 원초적인 대담한 의상, 폭력적이고 두려움 없는 공격적인 제스처, 누구를 의식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억압된 성의 표출 묘사 행위 등 모든 것이 파격적이었다.
그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 이성적인 포장으로 그럴듯하게 둘러싼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폭력과 섹스의 욕구, 그리고 잠재되어진 공포에의 갈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높은 수준의 록음악과 스테이지에서의 파격성을 통해 거칠고 폭력적이며, 원초적인 성을 교묘하게 표출시킴으로써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의 영혼에 별다른 장애 없이 파고들 수 있었다.
청소년들은 그들의 공연을 보면서, 그 동안 숨겨져 왔던 자신들의 내면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무의식중에 알게 되었으며, 짧은 순간이나마 사회적 일탈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피닉스의 공연을 통하여,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어떤 원초적인 욕구에 대한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누리는 인기의 원천이었다.
헤비메탈 그룹 <피닉스> - 그들은 20세부터 24세까지의 청년 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각자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각자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들의 헤어스타일이나 의상도 그들이 표방하는 자유개성주의에 걸맞게 통일되어 있지 않았고, 제멋대로였다.
기타리스트이자 리드 보컬인 김준영은 훤칠한 키와 서구적인 마스크, 빨려 들어갈 듯한 두 눈에다 길다란 퍼머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어서 마치 서양 동화 속의 왕자와 같은 모습으로 뭇 여학생들의 가슴을 애태우고 있었다.
음악 실력에 있어서도 그는 훌륭한 기타 솜씨와 함께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3옥타브가 넘는 음역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김준영은 천부의 그 목소리를 이용해서, 때로는 더할 나위 없이 호소력 짙은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때로는 광포하기까지 한 뜨겁고 강한 톤의 고음으로 팬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룹의 리더 격인 폭발적인 파워드러머인 곽철후는 땅딸막한 키였지만 빡빡 깎은 스킨헤드에 누더기같이 찢어진 옷을 즐겨 입었다. 아니 입었다기보다는 걸쳤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었다.
피닉스 그룹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그는 공연 중 곧잘 흥분하여 툭하면 특유의 누더기 같은 옷을 벗어 던지곤 했는데, 그럴 때의 그의 상반신은 보디빌더처럼 우람하여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세컨드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는 정호태라든지 베이스를 담당하는 길찬열 등도 각기 펑크 스타일의 울긋불긋한 염색머리에 금빛 머리띠를 묶는다든지, 검은 가죽 옷에 은빛 체인이나 요란스런 금속제의 목걸이들을 목에 감거나 하여 그들 나름대로 색깔을 뚜렷이 구분하여 주고 있었다.
나이 든 기성세대들이 이런 괴상한 헤비메탈 그룹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피닉스를 싫어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피닉스를 싫어하면 할수록 반발심리에서인지 피닉스에 대한 청소년들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만 갔다.
일견 보기에 피닉스는, 구성원 각자가 제멋대로의 스타일을 추구하여 통일성이 없는 이상한 그룹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매니저인 이기수와 피닉스 전담 코디네이터가 치밀하게 계산해 낸 고도의 문화적 연출전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극과 극의 스타일을 대립시키고, 색상을 대비시켜 피닉스의 모든 구성원들을 하나하나 빛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여러 문화와 스타일을 하나로 융합시켜, 개성있는 구성원 모두가 조화된 하나의 강력한 사운드를 만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청소년들에게는 이제 피닉스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들만의 진정한 영웅들이었다. 피닉스는 자신들을 대표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으며 자신드르이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자신의 이야기였고 기성세대에 반항하고픈 자신들의 목소리였다.
요즘 한창 10대의 청소년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피닉스의 곡 중에서 ‘나를 따르라’ 라는 곡은 그룹의 리더인 드러머 곽철후가 만들고 싱어 김준영이 부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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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보면 무슨 신흥종교의 교리 같기도 한 이 노래의 가사는 입시와 사회적 순응에 대한 무의식적 억압에 시달려온 이 땅의 많은 청소년들을 열광케 했다.
일부 가요 평론가들과 지식인들은 이 노래에 다분히 반사회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사회에 대한 일탈을 방조한다는 이유로 판금조치를 취할 것을 주장했으나 담당자들은 가사 내용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고, 또 곡의 완성도와 음악성이 높다는 이유로 그러한 주장을 무시했었다.
그 곡의 완성도와 음악성이 높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곡은 군데군데 실험적인 부분이 상당히 있었으며, 그 새로운 사운드는 기존의 록음악이나 댄스음악에 식상해 있던 팬들의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특히 그들의 연주기량은 놀랄만한 것이었고, 그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어느 평론가의 말대로 세게 무대에 내놔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기수의 오랜 준비 끝에 이루어진 야심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파격적인 그들의 무대 매너는 곧바로 TV 쪽에서 꺼려하는 이유가 되었다. 아무리 인기가 좋다 하더라도 담당자들의 판단에 우리나라 국민 정서에 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TV에 출연시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데뷔 초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TV 쪽에서 그들의 출연을 막아 왔었다.
그러나 이기수의 입장에서, 4인조 헤비메탈 그룹 <피닉스>의 TV 출연을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이기수는 바로 그 일 때문에 MBS 방송국의 방송출연 담당 이사 주양수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기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앉은 자리에서 주양수 이사에게 확실한 거부의사를 듣고보니 생각보다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자신이 여지껏 주양수에게 얘기한 것은 올림픽 공원에서 있을 피닉스의 야외공연 실황방송에 관해서였다.
이기수는 그 동안 주양수에게 수 차례 전화를 통하여 피닉스의 공연 실황을 생중계하는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진하여 왔으나, 주양수는 그때마다 번번이 애매하고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여 거절해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기수에게 있어서 주양수의 거부의사는 별로 중요한 사안은 아니었다.
이기수가 잠시 생각하더니 찌푸렸던 얼굴을 펴고 웃으며 말했다.
“주 이사님… 이렇게 직접 말씀을 들으니 속이 시원합니다만,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주양수가 꼿꼿한 자세로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내가 말했잖소. 아무튼 피닉스는 우리 MBS 방송에서는 안 된다고… 이제 더 이상 생각이고 뭐고 없소… 이 문제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말기로 합시다. 물론 이 사장이 직접 어렵게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내가 이렇게 야박하게 군 것에 대하여는 나도 사실 괴롭소. 서로 모르는 처지도 아니고…”
이기수는 주양수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계속 설득한다는 것은 시간낭비일 것이었다. 대신 그가 여지껏 수많은 PD들에게 사용했던 방식을 적용할 생각이었다.
이기수가 양손을 깍지끼고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 이사에게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주 이사님 말씀대로 사지요.”
주양수는 조금 놀랐다. 이렇게 순순히 이기수가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조금은 의외였다. 그는, 세간의 평을 들어볼 때 이기수가 한참 동안 자신을 괴롭힐 것이라고 예상했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기수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눈에 핏발이 가득했다. 주양수의 파장에 자기의 파장을 일치시키는 작업이었다.
잠시 후 이기수가 일어서더니 방안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주양수는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멍하니 탁상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기수가 음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주 이사님… 그럼 이제부터 계약에 들어가야지요?”
멍한 표정의 주양수가 고개를 끄덕거려 동의하고는 일어섰다.. 이어 책상서랍에서 서류를 꺼낸 그는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아 탁자 위에 서류들을 펼쳐놓았다.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서류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일련의 동작들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진행되었다. 모든 것이 끝난 후, 이기수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서류 한 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주 이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까지 후대해 주시다니요. 피닉스 공연은 성공적일 겁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이기수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주양수는 일어나서 이기수를 문밖까지 배웅했다.
10분 뒤, 그제야 정신이 든 주양수 이사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지…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했지?…”
문득, 탁자 위에 놓인 계약서류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직접 서명하고 도장까지 찍은 서류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읽어 내려가다가 주 이사는 자신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질렀다.
거기에는, 생방송 중계료란에 자신의 글씨로 선명하게 일금 3억 원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