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
깜찍하게 머리를 묶은 채지연은 쥬스를 깡통째로 마신 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으음, 이 맛! 너무너무 최고예요!”
채지연은 희열에 젖은 뇌쇄적인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여러분도 이 새로운 맛을 즐겨보세요! 호호호…”
채지연은 입을 가리고 깔깔 웃어댔다.
오유미는 신경질적으로 리모컨을 눌러 TV 채널을 바꾸었다. CF에서 채지연의 얼굴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얄미운 계집애…’
오유미는 리모컨을 내동댕이치며 차갑게 내뱉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오유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어딜 가나 톱스타로서의 유명세를 치러야 했다. 아무 식당이나 들어설라치면 식당 주인을 비롯하여 종업원들에게까지 사인을 해주어야 했고 그 대가로 그들은 음식값을 받지 않았다.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한테 향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좋았고 또한 그러한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는 상황이 급변했음을 그녀는 피부로 느껴야 했다. 새로 연예계에 입문한 무서운 신인들이 그녀의 톱스타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특히 채지연은 어찌된 셈인지 번번이 자신이 거의 캐스팅 되었다고 생각되는 여러 드라마에서 막판에 자신을 제치고 주연으로 발탁되곤 하였다. 이번의 경우는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드라마 <여명>에서 자신이 주인공으로 결정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거기다 담당 PD도 자신에게 그러한 언질을 주었었다. 그러나 마지막 뚜껑을 여는 순간 그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막판에 또 채지연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던 것이었다.
점점 드라마에 출연하는 횟수가 줄어들자 거리에 나서도 인기가 전만 못하다는 것을 금세 느끼게 되었다.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CF 출연 요청이 뚝 끊겼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은 심각한 위협이었다. 연예인에게 있어 CF란 인기도의 바로미터일 뿐만 아니라 단 한 번의 촬영으로 TV 드라마에서 받는 수입의 몇십 배를 받아낼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이제 자신이 가졌던 톱스타의 위치를 채지연이 대신 누리고 있었다. 물론 스타의 세대교체에 대하여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아직 너무 젊었고 스타가 되기 위해 고생했던 그 시절을 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상에 올라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자신이 이렇게 갑작스레 찬밥 신세가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매니저가 무능력해서인지 모르는 일이었다.
‘머저리 같은 놈…’
오유미는 매니저의 번쩍거리는 대머리를 생각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채지연의 매니저 이기수 같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처지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될 리 없다고 생각하였다. 문득 이기수가 자신의 매니저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동안 애써 모아두었던 돈이 차츰차츰 바닥나고 있었다. 수입이 줄었다고 해서 여지껏 자신이 누려왔던 여러 가지 호사를 일시에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작년에 사두었던 은회색 벤츠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은회색 육중한 몸집의 벤츠 850S는 성공한 그녀의 상징이었다.
또 한편으로 연예인들은, 한창 인기가 있을 때 싸구려 차를 타고 다니면 절약정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다가도, 인기도 돈도 없을 때 싸구려 차를 타고 다니면 이번에는 ‘저 친구 궁상떨고 있는 걸 보니 이제 완전히 한물갔구만…’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풍토가 그녀에게 벤츠를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즘 사귀고 있는 김인성이란 인물이 상오식품회사 사장의 아들인지라 그를 통해서 아버지 회사의 식품 광고 CF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미 유부남이어서 그와의 결혼은 현재로선 꿈꿀 수 없는 처지였지만 그와 적당히 엔조이 하면서 그를 이용해 상오식품 전속모델 자리를 따낼 계산이 그녀에게 있었다. 그렇게 되면 더불어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조만간 다시 오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화장대로 가서 정성 들여 꼼꼼히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이기수 매니저와의 약속이 있었다. 그녀는 이기수 매니저가 왜 자기를 만나자고 했을까를 곰곰히 생각하여 보았지만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유를 물어보았으나 이기수는 그저 좋은 일이라고만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 좋은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지난번 자신이, 연예계에서 공포의 기자로 소문난 문영환에게 전화한 일을 아는 것은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확신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채지연의 매니저 이기수를 만나는 것에 조금도 거리낄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전화상의 이기수 매니저 목소리는 친근감에 싸인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였기 때문에 그녀는 혹시 자신을 이기수 사단으로 영입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추론해 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제의를 해온다면 기꺼이 응할 생각이었다. 물론 조금 빼는 척은 하겠지만…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좀더 섹시해 보이는 옷이 좋겠는데… 좋아, 팔소매가 없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으면 되겠지? 화려한 원색의 팔찌를 몇 개쯤 치렁치렁 매달고 말이야…’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며 이기수가 자신의 매니저가 된다면 아직 십 년은 더 톱스타로서 군림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에 빠졌다. 거울 속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약속장소는 여의도의 이기수 사무실이었다. 오유미가 들어서자 사무실 여직원은 미리 사전에 귀띔이 있었는지 곧바로 그녀를 사장실로 안내했다.
“대스타가 오셨군. 어서 오시죠.”
가죽의자에서 일어나 웃음을 지으며 반기는 이기수의 옆에는 뜻밖에도 채지연이 선 채로 오유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유미의 얼굴이 본능적으로 순간 굳어졌다.
‘재수 없는 계집애 같으니…’
하지만 이런 데서 그녀의 감정을 솔직히 있는 그대로 표출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 선생님?”
“언니, 오랜만이에요. 그 동안 인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채지연이 오유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먼저 선수를 쳐 오유미의 자존심을 세워준 후, 의자를 빼내어서 자리에 앉게 하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선배대우를 깍듯이 하는 것이었다. 오유미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 선생님이 웬일이에요. 저를 다 뵙자고 하시고…”
“뭐 별일은 아니오. 요즘 유미 씨의 근황도 알고 싶고 해서 차나 같이 하자는 뜻이지요.”
오유미는 별일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 적이 실망한 빛을 감추지 못하였고 이기수는 그녀의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이기수는 오유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오유미가 갖고 있는 뇌파의 파장에 자신의 파장을 맞추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흔히 독심술이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미국에서 배운 것이었다.
미국은 그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 원천이었다. 그가 서서히 그녀의 파장에 다가가고 있을 때 여직원인 미스 최가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미스 최가 공손하게 커피를 내려놓는 사이, 곧 이어 이기수의 머리 속에 오유미의 생각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텔레비전의 화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스 최가 나갔다.
“유미 씨,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출연 섭외는 많이 들어오나요?”
이기수는 슬쩍 오유미의 아픈 곳을 정면으로 건드려보았다.
“그럼요. 요 얼마 전에 최중현 감독으로부터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는걸요. 하지만 제 바쁜 스케쥴 때문에 어떻게 할까 지금 고민 중이에요. 그리고 또, 상오식품회사의 CF 출연 건은 성사단계에 와 있구요.”
영화 이야기는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짐짓 꾸며낸 것이었고 CF 건도 제의만 받았을 뿐 아직 아무런 진행조차 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이기수는 오유미의 생각으로부터 그대로 전해 듣고 있었다.
‘그래?…’
이기수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그녀와의 대화를 어떠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지를 결정했다.
“그래요? 오유미 씨가 그렇게 바쁘시다니 제 제안이 소용이 없겠는걸요.”
“어떤 제안이신데요?”
오유미가 호기심과 기대감이 반반씩 섞인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사실 그 동안 오유미 씨를 주욱 지켜봤습니다만 요즘엔 능력 이상의 활동을 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래서…”
“그래서요?”
“만약에 오유미 씨만 좋다고 한다면 제가 여러모로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만…”
오유미는 이기수의 그 말에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어떤 도움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시죠?”
“글쎄요… 뭐랄까,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돼드릴 수가 있겠죠. 가령 예를 들자면 이번 가을철 개편되는 TV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아드리게 한다든가 하는…”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말씀 정말이세요?”
오유미는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리라고는 전혀 예상 밖이었으므로 뛸 듯이 기뻤다. 그래서 애당초 조금 빼는 제스처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입가에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럼 저의 매니저가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말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녀가 믿기지 않는 듯 반문했다.
“으음, 정말 제가 새로운 드라마에서 히로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거야 물론이지요. 제 능력을 믿지 않으시나요?”
…그렇다. 천하의 어떤 누구라도 이기수의 섭외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번번이 자신을 제치고 주연자리를 따내는 채지연만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잖은가 말이다. 그런 능력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 정확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그것은 알 바가 아니고 어쨌든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준 절호의 찬스인 것이다.
“그럼 좋아요. 제가 새로운 드라마에서 주연이 된다면야 모든 것을 이 선생님 뜻대로 하기로 하죠. 그럼 계약은?”
성급한 목소리로 오유미가 물었다. 보통 매니저와 연예인 사이의 개런티에 관한 협약은 보통 2:8 정도였지만 그녀는 이기수와라면 3:7 정도라도 기꺼이 응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 우리 정식계약은 제가 유미 씨에게 새로 만들어지는 드라마에서 주연을 따드리고 난 이후에 하기로 하죠. 정식계약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부터 우린 한 식구가 된 셈이죠?”
…이게 정말이지 웬일이야! 기대했던 것 이상이야.
“그럼요!”
그녀는 너무도 기뻐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채지연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언니, 이제부터 우리 잘 지내봐요. 가끔씩 연기지도도 해주시구요.”
“그래, 그러자꾸나. 그 동안 우린 너무 소원하게 지냈지?”
오유미가 채지연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면서 샐쭉 웃어 보였다.
오유미는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일이 잘 풀려나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채지연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채지연하고도 한 식구가 된 셈이 아닌가? 지난번 자신이 청담동 에스쁘리 호텔에서 목격한 일이 새삼 떠올랐다.
그 일을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이기수의 눈이 반짝하는 것을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기수의 머리 속으로 오유미의 상념이 계속 흘러 들어왔다. 그 상념은 오유미와 어떤 남자와의 정사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숨겨진 욕망을 불태우려는 듯 땀을 흘리는 남자의 벌거벗은 모습이 이기수의 머리 속에 영화의 필름처럼 비쳐왔다. 벽에 걸린 둥근 모양의 벽시계가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윽고 오유미가 옷을 집어들기 시작하자 남자는 지갑을 꺼내 그녀에게 수표를 한 웅큼 집어주었다.
‘이 창녀 같은 계집…’
이기수는 오유미에게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오유미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도리도 알 필요도 없었다.
상념은 이기수에게 있어 그대로 영화의 장면처럼 계속되었다.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은 오유미가 문밖으로 나서려다가 멈칫했다. 사람들의 인기척 때문이었을까? 오유미는 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빠끔히 내다보면서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40대로 보이는 한 남자와 20대의 검은 선글라스를 쓴 여인이 벨보이의 안내를 받으며 자기 방 앞을 지나쳐갔다. 남자는 꽤 술에 취한 듯, 한 손을 여인의 어깨에 두르고 조금 비틀거렸다. 휙 지나치는 여인이 든 백이 어딘가 낯익었다.
오유미는 놀랐다. 남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모자를 푹 눌러쓰고 하얀 스카프 차림의 그 검은 선글라스를 쓴 여인은 믿을 수 없게도 분명 채지연이었다. 그것을 확인해 준 것은 바로 그녀의 하얀 백이었다. 네모꼴에 작은 금장식이 붙은 그 상아빛깔의 백은 언젠가 채지연과 같이 일본에 로케차 갔을 때 드라마의 배경에 맞게 백화점에서 오유미가 직접 골라준 바로 그 백이었던 것이다.
그때 아직 신인 티를 벗지 못하고 있던 채지연은 자신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 하얀 백은 정말 그녀의 분위기를 청초하게 보이게 해주었고 그 이후 채지연은 계속 승승장구하며 스타의 길을 달려왔다. 어쩌면 그 하얀 백을 골라주지 말았어야 했는지 모른다고 가끔씩 후회하고 있었던 차였기에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도 그녀는 그 백을 정확히 알아보았던 것이었다.
그녀의 가슴은 이상한 흥분에 휩싸였다. 왠지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음날 그녀는 새한 스포츠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
이기수는 그 밖에도 여러 상념을 불러들였지만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렇게 된 것이었군…’
이기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제 다 끝났다는 만족한 표정을 채지연에게 지어 보였다. 채지연이 미소로 답했다.
오유미가 매니저 건에 관한 구체적인 계약관계에 대하여 말하자, 이기수는 그런 것은 나중에 새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은 후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말을 했다. 그는 더 이상 오유미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오유미는 혼자 들떠서 커피를 다 마시고도 쉴새없이 지껄였다. 그녀의 화제는 무척 다양했지만 이기수와 채지연은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줄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떠들어대던 오유미는 자신이 너무 경박스럽게 군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라도 이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실에 사는 친구가 생각났다. 그녀는 잠실 쪽에 볼일이 있다면서 두 사람에게 인사하곤 수기획 사무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기분이 최고조로 올라 있었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주차장에서 은회색의 벤츠 850S에 올라탄 그녀는 시동을 걸었다. 아주 부드러운 엔진 소리가 그녀의 상쾌한 기분을 더해 주었다. 평소대로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그녀는 룸미러를 힐끗 쳐다보았다. 매력적인 자신의 모습이 직사각형의 룸미러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푸는 그녀의 동작은 힘이 넘쳐 흘렀다. 곧 이어 오토매틱 기어를 P에서 D로 바꾼 그녀가 가볍게 액셀레이터를 밟자 육중한 차체의 벤츠는 미끌어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오유미가 나가자 채지연은 이미 식어빠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떻던가요?”
찡그린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이 이기수가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오유미, 그년… 자신도 정부가 있으면서 남을 고자질하고 다니는 년이야. 그것도 돈까지 받는 창녀로서 말이야.”
채지연이 조금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그녀에게 주연자리를 만들어주실 작정이세요?”
“아니,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 그것은 마음을 읽기 위한 수단으로 그랬을 뿐이야. 주연자리? 주연자리 대신에 벌을 줄 생각이야. 자기 자신은 죄를 지으면서 남의 죄는 용서하지 못하는 파렴치한 인간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 법이니까…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만 해. 또 앞으로도 지연이 얘기를 떠들고 다닐지 모르니까.”
말을 마친 그는 웃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의 파장은 계속 오유미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그는 가슴을 풀어헤치고 짐승 모양의 펜던트를 꺼내어 옷 밖으로 삐죽이 나오게 하였다.
잘못 보았을까…
그 짐승의, 루비로 장식된 빨간 두 눈이 반짝했다. 이기수는 그것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더니 벽 쪽의 한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벽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시체에서나 볼 수 있는 초점 없는 눈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얼굴에서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방사되고 있었다. 그 무형의 힘 때문에 그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그 힘은 1m쯤 떨어져 앉아 있는 채지연에게도 분명히 느껴질 정도였다. 채지연은 놀라서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섰다.
같은 시각, 오유미는 여의도를 빠져 나와서 88대로를 타고 잠실 쪽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벤츠에서 뿜어나오는 강력한 힘에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도로 여건상 벤츠 850S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을 만큼 달려본 적은 없었지만, 그녀가 마음먹고서 달리기 시작하면 그녀의 차를 따라올 만한 성능을 보유한 차는 별로 많지 않았다. 속도계는 시속 120km를 넘어서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고속도로 외의 도로에서는 어디서라도 시속 100km를 넘지 않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너무도 기분이 좋은 날이었고, 한창 피서철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달리기에는 충분할 만큼 도로는 한산했다. 그녀는 핸들에 달려 있는 CD의 스위치를 눌렀다. 마이클 잭슨의 경쾌한 리듬이 켄우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새롭게 등장할 드라마에서 히로인이 되어 있는 것을 상상했다. 그것을 생각하고 있노라니 자신도 모르게 흥분이 되어 액셀레이터를 꾹 밟았다. 육중한 벤츠가 공기를 가르며 힘차게 앞으로 튕겨나갔다.
이기수가 뿜어내는 무형의 힘이 점점 강해졌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며 관자놀이 근처의 혈관이 불끈 솟아올라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강한 바람 같은 것이 그의 몸 주위에서 맴돌았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그가 앉은 의자가 부르르 떨리면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공중으로 조금씩 튀어올랐다가는 땅으로 떨어지는 동작을 되풀이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커피잔이 떨꺽 소리를 내며 요동을 쳤다. 그의 얼굴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핏발 선 두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혈관이 터져 시뻘건 피가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의자의 팔걸이를 꼭 잡은 억센 그의 두 손에서는 뼈와 근육들이 용솟음치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그의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흘렀다.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몸 전체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벤츠에 갑자기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핸들을 잡은 두 손이 우두두두 떨렸던 것이다. 오유미는 처음엔 그런 현상이 도로의 포장상태가 무언가 잘못되어 생긴 것으로 믿었으나 이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지껏 부드럽게 움직이던 엔진이 덜컹거리며 요란하면서도 고통스런 숨을 내쉬었기 때문이었다.
계기판을 얼핏 바라본 그녀는 무언가 중대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엔진 체크램프가 켜지고, RPM(분당 엔진 회전수)지수가 빨간색의 경고표시를 훨씬 넘어서 8000을 가리키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황급히 액셀레이터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나 브레이크가 파열되었는지 차에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이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머리털이 온통 쭈뼛하고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긴장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꽉 잡은 손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녀는 공포에 휩싸여서 비상 깜박이를 켰다. 다행히도 꿈벅꿈벅 조는 올빼미의 눈알처럼 깜박이 불이 들어와 그녀의 놀란 가슴을 조금 진정시켜 주었다.
그녀는 침착해라 침착해라 하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도로의 중앙 쪽 1차선으로 달리는 차를 오른편으로 이동시켜 4차선으로 가려고 마음먹었다. 최악의 경우 가드레일을 미끌러져가며 차례로 받아가면서 그 충격을 이용해 속도를 줄이고 핸드 브레이크를 잡아당겨서 멈추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오른손을 핸드 브레이크로 가져갔다.
이마의 땀구멍이 한꺼번에 열렸는지 땀이 얼굴 위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어 옆좌석에 팽개치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눈이 따가웠다. 다행스럽게 차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저만치 반포대교가 보였다. 벤츠는 4차선으로 서서히 접어들었다.
채지연은 이기수의 가슴에 매달린 짐승 모양의 펜던트에서 싸늘하고 음험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고 두려움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는 숨을 멈추었다.
그 순간!
이기수의 핏발 가득한 초점 없는 두 눈에서 형언할 수 없는, 두 줄기의 빛나는 붉은 그 무엇인가가 흘러나왔다. 에너지의 한 형태라고나 할지 그것은 붉은 빛무리였으나 스스로 공간 속에서 움직였다.
오유미는 차의 속도가 좀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만 유지한다면 이 아름답고 중후한 벤츠에 상처를 입히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재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눈에, 100m쯤 전방에 반포에서 진입하는 대형트럭이 들어왔다. 그녀는 당황해서 본능적으로 하이빔(상향 전조등)을 깜박이고 클랙슨을 마구 눌러댔다.
일순 트럭이 멈칫하는 것 같았으나 대형차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는지 그대로 진입로에서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기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머리칼은 태풍에 휘날리듯 세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몸은 의자와 함께 공중으로 튀어 솟아올랐고 그와 동시에, 스스로 움직이던 두 줄기의 그 붉은 빛무리는 그의 몸 주위를 몇 바퀴 맴돌다가 방향을 잃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순간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짐승의 처절한 울음소리 같은 무시무시한 괴성을 질러댔다.
“우~ 워어어어!”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류며 책들이 가랑잎처럼 날렸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핸들을 꺾는 그 순간, 환각처럼 두 줄기 붉은 빛무리가 차창을 뒤덮었다.
핸들은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벤츠는 몸부림치듯 요동치며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오유미는 눈앞에 다가오는 15톤 트럭의 육중한 적재함에 삐뚜름히 붙은 흙 묻은 넘버판을 보았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꼭 감아버렸다.
꽝!
귀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우면서도 둔중한 파열음이 들렸다. 에어백이 순간적으로 부풀어올라 그녀의 가냘픈 몸을 감쌌다. 벤츠의 아름답고도 육중한 자체가 트럭 밑부분을 파고 들어갔다.
뿌직!
트럭의 화물함은 벤츠의 앞 창을 부수고 계속 밀려 들어가 에어백을 찢고 그녀의 얼굴을 사정없이 갈기갈기 휘저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트럭에서 젊은 운전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뛰어내려 달려왔고 지나던 차들도 멈추어 섰다. 사람들이 사고차량으로 몰려왔다. 오유미의 귀에 꿈결처럼 아득하게 사람들이 외쳐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무형의 힘이 스르르 사라졌다. 세차게 휘날리던 그의 긴 머리칼도 이젠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감았던 눈을 조용히 떴다. 핏빛처럼 붉은 초점 없는 눈이 거기 있었다. 그때까지 한 쪽 구석에서 숨죽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채지연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굉장하군요! 당신… 아니, <루앞>…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었죠?”
그는 대답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탈진한 모습이었다.
채지연은 손수건을 가져다가 그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정성스레 닦아주며 다시 말했다.
“이제 문영환은 어떻게 처리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