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S의 사극 드라마 <여명>의 촬영장은 분주했다. <여명>은 당초 예상과는 달리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어 관계자들과 광고주들을 기쁘게 하였다.

 

문영환이 촬영장에 들어섰다. 그의 짧고 굵은 목에는 카메라와 녹음기가 걸려 있었다.

 

촬영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바닥에는 메인 콘트롤러에 연결된 수많은 마이크 케이블과 카메라 케이블, 동력 케이블 등이 복잡하게 이리저리 얽혀 있어 그로 하여금 어지럼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카메라 스텝들은 이리저리 위치를 옮겨가며 최적의 구도를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고, 오디오 담당 스탭은 카디오이드 마이크를 들고 음향상태를 점검했다. 소품 담당 스탭들이 정해진 위치에 소품을 정리해 놓느라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문영환은 연출 PD를 찾아내어 자기가 방문한 목적을 대강 얘기했다. PD는 아주 바빴지만 귀찮은 표정을 짓지 않고 환대해 주었다. 문 기자를 홀대할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문영환은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제각기 너무도 분주하여 문영환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인지라 이따금씩 돌아다니는 연기자들의 옷차림은 모두 한복 차림이었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갓을 쓴 차림에 필터담배를 피워대는 엑스트라의 폼이 어쩐지 우스꽝스러웠다. 촬영장은 흡사 과거와 현대가 함께 공존하는 타임터널의 공간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문영환은 PD가 가르쳐준 장소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채지연은 나무 그늘 밑에 대충 칸막이를 쳐서 마련된 임시 분장실 간이의자에서 7, 8명의 다른 여자 연기자들과 함께 걸터앉아, 분장사에게서 맥스 팩터사 제품의 컬러 TV용 립스틱인 <모이스트 립 루즈 TV #2 스페셜>을 이용하여 입술화장을 받고 있었다.

 

칸막이는 한 쪽이 터진 ㄷ자형이었기 때문에 문영환은 주저 없이 그리로 들어갔다. 분장을 하던 여자들은 난데없는 불청객의 출현으로 흠칫 놀랐다.

 

“안녕들 하십니까?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 미안합니다.”

 

문영환이 웃음기 머금은 싱글거리는 얼굴로 인사를 하자, 그제서야 한 쪽 켠에서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던, 나이가 제법 든 중견 탤런트 한유림이 그를 알아보고 아는체를 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한 새한 스포츠 신문사 문 기자 아니우? 여기까지 다 오구, 웬일이유? 설마 나를 취재하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

 

문 기자가 자기를 취재하러 왔으면 하는 속마음을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이 밴 목소리였다.

 

한유림.


20년 전쯤 그녀가 처음 브라운관에 데뷔했을 때, 장안이 온통 그녀의 미모에 대하여 화제를 올렸을 만큼 한때는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던 그녀였지만, 세월은 그녀를 그 찬란한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게 하지 않았다. 두 번의 이혼과정에서 겪은 그녀의 상처는 지나간 세월과 함께 이제는 아물어가고 있었지만 주름살이 패이고 살이 오른 얼굴에서 그녀의 처녀적 옛모습을 기대하기란 무리였다. 이제는 그나마 그 동안에 쌓아온 연기력을 바탕으로 근근이 조역을 맡아 활동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연예인의 인기란 그렇게 아침 이슬처럼 스러지는 것일까?

 

“아, 누님이시군요.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오늘은 누구를 단독으로 취재하러 온 게 아니라 이 TV 드라마가 요즘 매우 인기를 얻어가고 있기에 찾아온 것이죠. 이번 기회에 전반적인 취재를 해서 드라마 특집기사를 꾸며볼 생각입니다. 물론 개별적인 인터뷰도 해야죠. 누님은 물론이구요.”

 

문영환이 한유림에게 누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친근감을 표시하며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자 그녀의 표정이 일순 환해졌다. 취재 소스에게 친근함을 보이는 것이 문영환의 수칙이었다.

 

한유림이 말했다.

 

“지연이 같은 주연급들만 인터뷰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럼요. 오늘은 신인 탤런트들도 모두 인터뷰할 겁니다. 여기 계신 모두를요. 여러분뿐만 아니고 남자 연기자들도 마찬가지구요. 또 촬영 스탭들도 인터뷰할 겁니다. 이 드라마의 인기비결을 총체적으로 밝혀볼 생각이니까요.”

 

물론 문영환의 목표는 채지연이었지만 처음부터 불쑥 그렇게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렇게 한다면 다른 연기자들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시샘은 자기나 채지연에게 모두 불리하게 작용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 취재라고 둘러댄 것이었다.

 

적당히 취재를 하는 척하다가 기회를 보아서 채지연과 둘만이 남았을 때 문제의 핵심을 파고든다는 계산이 서 있었다.

 

“자, 그럼 누님부터 시작해 볼까요?”

 

문영환은 간이의자를 끌어다가 앉고서 두툼한 기자용 붉은색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인터뷰는 이리저리 목적 없이 계속되었다. 풋내기 신인 탤런트들은 자기들도 드디어 인터뷰를 한다는 생각에 가슴속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드라마에서의 자기 역할에 대한 포부와 열정을 열심히 말해댔지만, 문영환은 애초에 그들에게는 관심이 조금도 없었다. 그저 건성건성 묻고 적당히 끼적거리는 흉내나 낼 뿐이었다.

 

나이 든 중견 탤런트들도 후배들 앞이라 태연한 척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인터뷰를 하기 때문인지라 흥분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요즘 한창 인기를 얻어서 자주 브라운관에 얼굴을 내비치는, 문자 그대로 스타대열에 서 있는 한두 명만이 별 감동없이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아직 채지연의 차례는 오지 않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야 누구보다도 먼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문영환은 서두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여기서 모두 나갈 때를 기다리면서 천천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인터뷰를 끝낸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임시 분장실을 빠져 나갔다.

 

앳된 신인 탤런트를 인터뷰하며 슬쩍 곁눈질로 채지연을 살펴보니 그녀는 분장을 받으면서도 대본을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분장이 거의 끝나가는 그녀의 옆모습은 너무도 고혹적이었다. 립스틱으로 적당히 붉은 입술은 남자라면 누구라도 훔치고 싶을 만큼 육감적이었다.

문영환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하긴 저런 여자라면 국회의원이 아니라 누구라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이제 채지연의 차례였다. 때맞추어 그녀의 분장도 끝나 있었다. 아직 주위에는 분장사를 비롯해 몇 명이 남아 있었다. 문영환이 채지연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했다.

 

“새한 신문사 문영환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채지연이 샐쭉 웃으며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대본은 그대로 손에 들고 있었다.

 

“앞으로 잘 봐주세요. 문 기자님 명성은 이미 선배언니들에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어요. 아주 무서운 분이라던데 이렇게 직접 뵈니 꼭 그렇게 무섭게 생기시진 않으셨네요. 아주 좋은 오빠처럼 느껴지네요.”

 

귀여움이 섞인 맑은 목소리였다.

 

“웬만한 연기자들치고 제가 여지껏 만나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채지연 씨와는 인연이 없었던가 봅니다.”

 

문영환은 두꺼운 안경렌즈 너머로 채지연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천박하지 않은 육감적인 매력이 그녀의 입술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남자라는 동물이라면…

 

문영환은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려 수첩으로 이동시켰다. 아주 짧은 순간 그는 자신이 기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가슴이 울렁거려 왔다.

 

‘정말 미치도록 예쁘군. TV에서 볼 때완 전혀 다른데…’

 

정말 그랬다. 채지연은 청순한 이미지의 연기자로 특히나 슬픈 눈의 표정연기가 일품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직접 보니 그녀는 청순함 이상의 성적인 매력이 도처에서 흘러 넘치고 있었다.

 

박 의원과의 깊은 관계가 그녀에게 성적인 매력을 발산케 하는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얼핏 생각했다. 하긴 그걸 확인하느라고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지만…

 

문영환이 자세를 고쳐잡고 앉아 녹음기를 켜고 난 다음 의례적인 것부터 물어가기 시작했다.

 

“요즘 매우 바쁘신데… 많은 드라마에 겹치기로 출연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디어디 출연하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이 드라마하고 아침에 방영하는 <눈물 속의 찬가>라는 드라마 그리고 얼마 전 방영이 끝난 특집 드라마 <한나의 비밀>뿐이죠. 그 외로 퀴즈 프로그램이나 오락프로에 자주 나간 것이 전부예요. 어디에건 PD님들이 부르면 나가야지요. 뭐 별수 있나요? 그 밖에 CF에도 자주 얼굴을 내미니까 너무 많이 나온다는 생각이 드실 만도 하실 거예요.”

 

‘그런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어. 정말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너와 박 의원과의 관계야.’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십니까?”

 

“글쎄… 뭐, 매니저님이 잘 알아서 관리해 주시겠지만 이 드라마가 끝나는 대로 당분간은 조용히 쉴 생각이에요. 인기관리면에서도 그렇고… 그 동안 너무 바빴기 때문에 좀 지친 감도 들어 쉬고 싶은 생각도 있구요.”

 

‘박성화는 유부남이야. 그와 결혼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나?’

 

“결혼계획 같은 것은 아직 없으십니까?”

 

“결혼요? 아직은 너무 이르지 않은가요? 글쎄 아직까지 결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서른을 넘기지야 않겠죠.”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구? 그럼 박성화 의원과의 사이는 심심풀이라는 거냐? 이제 그만 솔직히 털어 놓는 게 어때?’

 

“애인은 있으시겠죠? 발표는 하지 않을 테니 저한테 살짝 가르쳐주세요.”

 

문영환이 아주 다정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하자 채지연도 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러죠. 제 애인은 바로 우리 집에서 저랑 같이 살아요. 한번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 그럼 언제라도 보실 수 있으니가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채지연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후훗… 좋아요. 속 시원히 말씀드리죠. 나이는 두 살, 이름은 ‘랄프’ 죠. 아주 영리한 푸들이에요. 전에 방영된 <외계인 랄프>에서 이름을 땄어요. 우리는 서로 얼마나 사랑한다구요. 어쨌든 랄프도 숫놈은 숫놈이니까요, 호호호. 어머나, 죄송해요. 제가 장난이 너무 심했나요?”

 

“허허… 참…”

 

문영환은 어이가 없어 같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순간 문영환은 이제껏 가지고 있던 확신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대중들의 우상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철없고 티없는, 이제 겨우 스물세 살 먹은 아가씨가 유부남과 놀아난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아서였다.

 

‘역시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일까? 그 전화는 역시 모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좋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지요. 지연 양은 재작년에 미국에 6개월 정도 갔다 오셨는데 무슨 목적이었던가요?”

 

문영환은 왠지 자신감이 없어졌다.

 

“정확하게는 7개월하고 보름 정도예요. 샌프란시스코에 사시는 친척 한 분이 초청을 해주셔서 갔었지요. 마침 또 연기에 대한 공부도 하고 싶기도 해서 샌프란시스코 드라마 센터에서 연기수업을 잠깐이나마 받았지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현재의 연기자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문영환은 그녀가 말하는 내용을 수첩에 대충대충 적어 나갔다.

 

“7개월 보름, 샌프란시스코, 친척… 샌프란시스코 드라마 센터에서 연기수업… 그전에는, 그러니까 미국에 가시기 전에는 주로 무슨 일을 하셨나요? 물론 잠시 모델활동을 하신 것은 아는데…”

 

그녀의 표정이 극히 짧은 순간 잠시 어두워졌다가 금세 원상태로 돌아왔다. 문영환은 그런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학교에 다녔구… ㅈ대학이에요. 그러다 과(科)가 적성에 맞지 않아 결국은 2학년 때 자퇴하고 말았어요. 생물학과였는데… 제가 왜 그 과를 선택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제 적성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합격하려고 눈치작전을 폈던 것이었겠죠.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학교는 역시 졸업해 두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겠죠? 후후후… 지금 제가 한 말은 기사에서 빼주세요.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하던가요?…”

 

그녀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먼 곳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추억에 잠겨 꿈꾸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말씀대로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미국에 가기 전에는 잠시 모델생활을 했던 적이 있었어요.”

 

문영환이 그런 그녀를 여지없이 현실 속으로 끌어내렸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곧바로 이기수 사단에 합류했는데 무슨 연고라도 있었습니까? 스타 지망생이라면 누구나가 동경하는 이기수 사단이고 보면 들어가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요.”

 

문영환이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 그거요?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연극영화과에 손문숙 교수님이라고 계셨어요. 개인적으로 그분과 친했는데 귀국하자마자 인사드리러 갔더니 손 교수님께서 이 매니저님을 소개해 주시더군요. 이 매니저님과 아주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그래서 간단한 연기 테스트와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는데 저를 괜찮게 보셨는지 그 자리에서 오케이를 하시더군요. 그렇게 된 것이지요.”

 

문영환이 수첩에 ‘ㅈ대학 연영과 교수 손문숙이 이기수에게 소개’ 라고 쓰고 나서 말했다.

 

“그렇군요. 행운이 뒤따랐군요. 이후 놀라운 속도로 인기정상을 숨 가쁘게 달려오셨는데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우선 무엇보다도 저를 아껴주시는 팬들의 덕분이겠죠? 그 다음은 매니저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저 자신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매니저님이 돌보아주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문영환이 느끼는 매니저에 대한 채지연의 신뢰는 상상 이상이었다. 대부분의 인기 연예인들이 자신의 매니저와의 갈등을 이기지 못해 갈라서는 예가 허다한 현실에서는 더욱 그랬다. 과연 이기수의 스타 관리능력은 놀라웠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기수가 가진 능력의 극히 일부라는 것을 문영환은 당연히 깨달을 수 없었다.

 

촬영 준비가 그제야 끝났는지 밖에서 연기자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시 분장실 안에 있던 연기자들이 그 소리에 모두 밖으로 나갔다. 분장사도 촬영하는 것을 지켜보려는 듯 그들을 따라 나갔다. 분장실 안에는 문영환과 채지연 둘뿐이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촬영이 시작되려는 것 같아요.”

 

채지연이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

 

“자, 잠깐만요. 채지연 씨,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문영환이 황급히 그녀를 제지하며 따라 일어섰다.

 

“마지막 질문이란 뭐죠?”

 

나가려다 말고 고개를 돌리고, 그녀는 미소를 머금으며 애교가 듬뿍 어린 눈길을 문영환에게 건넸다. 마치 이제 그만 놓아 달라는 듯이…

문영환은 그녀의 그런 애교 어린 표정을 무시하고 여지껏 지녔던 웃음기 머금었던 얼굴 표정을 갑자기 엄숙하게 바꾼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박성화 의원과는 어떤 사이죠?”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아주 짧은 동안 채지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문영환은 그녀의 그런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눈과 문영환의 안경 너머의 시선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부딪쳤다.

 

잠시 둘 사이에 숨막힐 듯한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마도 채지연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으리라.

 

먼저 긴장을 깨뜨린 것은 채지연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누구라고요?”

 

“박, 성, 화 국회의원!”

 

문영환은 또박또박 끊어서 아주 분명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박성화 국회의원요? 아니 그분은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날리신 분 아녜요? 국회의원이라면 이런 촬영장이 아닌 국회에 가서 찾아봐야 되지 않겠어요?”

 

채지연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게 여전히 부드러웠다. 말을 마치자 그녀는 문영환을 안에 둔 채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가다 우뚝 선 그녀가 문영환을 향해 뒤돌아보며 예의 예교가 듬뿍 섞인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박성화 의원… 잘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만약에 총각이라면 저 좀 소개시켜 주세요. 총각 국회의원이라면 결혼을 생각해 볼 수도 있으니까요. 숫총각 국회의원이라면 더욱 좋구요. 호호호…”

 

말을 마친 그녀는 깔깔대며 문영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영환은 일어서 있다가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천천히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문영환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담배 한 대를 아주 맛있게 피워댔다.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는 듯이…

 

그의 얼굴에 승리자의 만족한 미소가 흘렀다.

 

채지연… 이제 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

 

문영환이 채지연에게서 기대한 확인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기타(Guitar)가 울려대는 우울한 b마이너 화음의 알페지오로 그 곡은 시작되고 있었다. 네 번에 걸친 기타의 알페지오에 이어 부드럽고 따스한 잉글리쉬 호른의 끈적끈적한 흐느낌이 스트링의 차분한 화음을 배경으로 홀 안을 가득 메워가도 있었다. <호아킨 로드리고>의 기타 협주곡 <아랑훼즈> 2악장 아다지오가 아련한 환상을 만드는 순간이었다.

 

양재동의 어느 한적한 레스토랑 <칸타빌레>에는 로드리고의 음악과 함께 초저녁의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초저녁이라고는 하지만 벌써 8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다지 손님은 많지 않았다. 지훈은 의자에 엉덩이를 깊게 묻어놓고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대형 JVC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열중하고 있었다. 잉글리쉬 호른이 흐느끼던 그 유명한 멜로디를 이제 기타가 이어받아서 맑고 영롱한 음색으로 시간의 공간을 채색하고 있었다.

 

… 누가 연주하는 걸까? 쥴리안 브림이 연주하는 것일까? 아니야, 투명한 음빛과 중후한 무게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서 나르시스 예페스가 연주하는 것이 분명해.

 

감색 커튼이 늘어진 유리창 밖으로 빗방울이 부딪치고 있었다. 빗방울은 유리창에 매달려 있다가 한참 후 중력의 유혹에 못 이긴 듯 주르르 선을 그으며 떨어졌다.

 

그때 수미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접으며 홀 안으로 들어섰다. 노란 불빛 조명 아래에 비친, 그녀의 뒤로 묶은 생머리는 더없이 싱그러웠다. 그녀는 홀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에 눈을 지그시 감고 팔짱을 끼고 앉아 음악에 열중해 있는 지훈을 발견하고 조용히 그 앞에 가서 앉았다.

 

음악은 이제 카덴짜로 접어들고 있었고 지훈은 수미가 자리에 앉은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음악이 가져다주는 환상의 세계에 몰두하고 있었다.

 

수미는 미소를 머금고 지훈의 그런 얼굴을 가만히 바라다보았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 조용히 해달라고 주문했다. 웨이터가 말없이 고개를 꾸벅이고 가버렸다.

 

어느덧 기타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듯 빠르고 격렬한 알페지오로 카덴짜의 클라이막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지훈은 음악에 모은 것을 내맡기고 있었다. 미간을 찡그려가며 다른 모든 감각기관은 닫아두고 오로지 청감각만을 허용하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기타소리에만 마음을 열어두었다.

 

마침내 스트링의 단발적인 피찌카토와 모든 에너지를 응축한 듯한 <라스게아도>가 교차하는 것을 정점으로, 그 유명한 멜로디가 폭발적인 뚜띠(Tutti: 모든 악기가 한꺼번에 연주하는 부분)의 모르테시모로 장엄하게 울려 퍼져 나왔다.

 

지훈의 눈을 감은 얼굴에 황홀하고도 만족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차오르는 감동으로 인해 그의 눈이 씰룩거렸다.

 

수미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와 겨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쿡쿡 웃어버리고 말았다. 지훈이 눈을 떴다. 어딘가 아쉬운 표정이었다.

 

“어? 수미… 언제 왔어?”

 

“좀 전에… 지훈 씨가 너무 음악에 심취해 있기에 가만히 있었는데 누가 온지도 모르는 지훈 씨 표정이 너무나 진지하고 심각해서 왠지 웃음이 쿡하고 터져 나와버렸어요. 미안해요. 음악감상을 방해해서…”

 

“아니, 괜찮아. 마침 이제 거의 끝나가는 참이었으니까.”

 

말과는 달리 여전히 아쉬운 표정으로 지훈은 수미를 쳐다보았다. 빗방울이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수미의 눈이 갈색 안경테 너머로 웃고 있었다. 사각의 그 안경테는 수미를 차가운 이성만을 지닌 도도한 여자로 보이게 하였지만, 렌즈 너머의 맑은 두 눈은 그녀만의 포근함을 지니고 있다는 걸 지훈은 잘 알고 있었다.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질 못하는 꾸밈 없는 솔직함이 그녀에게 있었고 청결함과 순수함이 있었다.

 

지훈은 그런 그녀가 좋았다.

 

수미는 지훈과 입사동기였다. 그들은 입사시험을 치르는 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우연인지 그들의 번호가 앞뒤로 붙은 연번호여서 시험을 치를 때 앞뒤로 앉아야 했고, 그러한 관계는 면접시험을 치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처음엔 서로 경쟁자라는 의식 때문에 경계의 눈초리를 감출 수 없어 불편하였지만 면접시험 때까지 오는 동안에는 합격을 위해 서로에게 격려의 말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되어 있었다. 최종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자신은 물론 수미의 번호를 확인하게 되었고 합격자 명단에서 수미의 번호를 본 순간 왠지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훈의 학번은 수미보다 3년 먼저였지만 졸업연도는 같을 수밖에 없었다. 3년은 지훈이 군대에서 단기 하사관으로 복무한 기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지훈은 특수부대인 UDT출신이었다. 고생스러웠지만 그런대로 남자로서 멋진 나날이었다고 지훈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신문사에서 그들은 자주 만나게 되었다. 물론 부서가 달랐기 때문에 항상 같이 지낼 수는 없었지만 서로 자주 만나려고 무의식중 애썼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되면 그들은 서로에게 유용한 정보도 교환하였다.

 

예를 들자면, 신문사 근처의 어느 음식점이 비빔밥을 잘한다더라 하는 시시콜콜한 것에서부터 기자가 갖추어야 할 매너, 정보원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내는 다양한 방법, 기사 작성요령, 어느 선배는 차분한 성격이고 어느 부장은 불 같은 성격이니까 조심하라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화제는 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선가 지훈은 그녀를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워낙 처음부터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왔기에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새삼스레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기가 쑥스러웠다.

 

그렇기도 해도 지금은 눈빛만으로도 서로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럴 필요가 없는지도 몰랐다.

 

“지훈 씨, 이것 좀 봐요.”

 

수미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조그마한 가방에서 종이조각을 꺼냈다.

 

“그게 뭔데?”

 

지훈이 담뱃재를 재떨이에 떨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의 앙증맞은 손에 들려진 두 장의 적갈색 종이조각을 쳐다보았다.

 

“공연 티켓이에요. 전위 예술가 천래성의 공연이에요. 저녁 일곱 시 반인데 일요일이에요. 시간이 있다면 같이 가요.”

 

지훈이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어쩐지 <전위예술>이라고 하면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듯 느껴지는 그였다.

 

“전위 예술가?”

 

“그래요, 아마 재미있을 거예요. 물론 나는 문화부 기자로서 취재하러 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수미는 티켓을 탁자에다 내려놓았다.

 

“전위 예술가의 공연이라…”

 

지훈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수미… 솔직히 난 전위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굳이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한다면 좀더 다른 의미로 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을 한다는 자신의 의식이야 나무랄 수 없는 훌륭한 생각이고, 또 그런 자신의 예술행위를 집에서 혼자 한다면야 누가 뭐라고 하겠어?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의식수준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까 갈등이 생긴다 이말씀이야… 솔직히 어떻게 보면 예술을 사칭한 사기극인 듯도 하고 말이야…”

 

수미가 일단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수 있겠군요. 그러니까 사실… 지훈 씨는 관객의 의식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전위공연 또는 자칭 예술가를 공격하고 싶은 것이겠죠?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어떻게?”

 

“행위 예술가… 전위 예술가들은 우리들과 같은 보통 사람이에요. 다만 그들은 관객에게 일상을 벗어난 다른 차원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뿐이에요. 아니… 다른 차원이라기보다는 무어랄까… 일반인들이 일상에서 경험하고 사고하는 것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일상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녀는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얘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그들은 용감해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터운 인습의 벽을 두려움 없이 깨뜨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니까요.”

 

수미는 어떤 면에서 문영환 선배와 닮아 있었다. 거침없이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 줄 아는…

 

지훈이 말이 없자 그녀가 계속 말했다.

 

“말하자면 전위 예술가들은 이 시대의 문화적 선구자가 아닐까요? 보통 사람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아이 낳고 하는 일상의 틀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평범한 경험을 깨뜨린다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모든 사람이 앞으로만 달릴 때 뒤로 달리는 사람도 있어야 재미나잖아요. 우린 그저 그런 공연을 보면서 이 숨막히는 일상에서 잠시나마 탈출하면 되는 것 아니에요?”

 

수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훈이 반격할 구실을 찾은 듯 재빠르게 물었다.

 

“아니, 그럼 지금 나와 이렇게 같이 앉아 있는 것도 숨막히는 일상이라는 거야?”

 

말투와는 달리 그렇게 묻는 지훈의 얼굴에는 그녀에 대한 다정함이 듬뿍 배어 있었다. 수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지 뭐… 어떤 사람이라도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 호호호…”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웃는 수미를 보며 지훈도 따라서 웃었다. 웃는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기쁨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자자, 이제 그런 예술 이야기는 그만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지?”

 

지훈이 새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후우하고 뱉어냈다.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할까?”

 

수미가 양손으로 턱을 괴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얘긴데요?”

 

담배연기로 만든 둥근 도우넛 하나가 허공에 피어 올랐다.

 

“전위예술 하니까 생각이 났어. 내가 2학년쯤인가 대학 다닐 때의 일인데… 하루는 연극을 하는 친구 녀석이 강의실로 가고 있는 나를 불러 세우더니만 연극공연 티켓을 몇 장 주는 거야. 자기들이 연극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꼭 좀 와서 참석해 달라고 말이야. 자기가 연출한 최초의 작품이라구… 평생 꼭 기억에 남는 연극이 될 거라며 아주 자신에 차서 얘기하는 거야.”

 

수미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연극을 하는 친구가 있었군요.”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문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취미 삼아 학교에서 서클활동으로 하는 거였지.”

 

“친한 친구였어요?”

 

수미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빛내며 물어왔다. 지훈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억제했다.

 

“그 친구는 다른 학과 친구였는데… 뭐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그래서 과친구를 꼬드겨 여러 명이서 공연장인 학교 문화관을 찾아갔어. 그 연극 제목이 뭐였는지 알아?”

 

지훈은 히이하고 웃었다.

 

“관객모독이었어.”

 

“관객모독?”

 

“교정에는 여기저기 포스터가 나붙고 문화관 현관에는 누가 가져다놓았는지 공연 축하 리본이 달린 대형 꽃바구니까지 있더군. 아주 그럴듯했어. 그런데 결과가 어땠는지 알아? 그날 나는 같이 간 과친구들에게 술과 저녁을 사야 했어. 자기들을 꼬드겨 그런 형편없는 연극을 보게 해서 그야말로 모독당하게 했다고 말이야.”

 

“아니, 왜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그녀가 묻자 그가 참으로 어이없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연시간은 여섯 시였는데 무슨 일인지 일곱 시가 다 되어도 무대 막은 올라가지 않았어. 중간중간, 닫힌 무대 막 사이로 양복을 쭉 빼입은 녀석이 나와서 사정이 생겨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는데 그 양복 입은 녀석이 바로 그 친구였어. 관객들이 술렁거리고 하나 둘씩 빠져 나가도 우리는 참고 앉아 있었지. 배고픈 것도 참아가면서 말이야… 그러더니 일곱 시가 훨씬 지나서 무대 막이 올라가는 거야… 우리는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하고 다들 생각했지. 우리는 기대감에 차서 무대를 바라다보았어…”

 

지훈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웬걸… 조명이 환하게 비친 무대에는 수건을 머리에 쓴 서너 명의 아줌마들이 빗자루를 들고 무대를 청소하는 거야. 그것도 먼지가 관객석으로 풀풀 날리게 하면서… 조용해진 우리는 멍청하게도 연기를 너무 리얼하게 한다고 생각하고 계속 쳐다보았지… 잠시 후에 진짜 청소부 아저씨인지 아니면 청소부 연기를 하는 녀석인지는 몰라도…”

 

지훈은 말을 끊고 수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다. 지훈은 그녀의 붉은 입술이 오늘따라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싶은 욕망이 솟아올랐다. 가슴 한편이 저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담배는 손가락 가까이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허연 담뱃재가 죽은 누에 모양으로 볼품없이 매달려 있었다. 지훈은 담배를 재떨이에 가만히 놓았다. 물에 젖은 휴지가 깔려 있어 담배는 곧 치익 소리를 내며 꺼졌다.

 

“그래서요?”

 

수미가 재촉했다.

 

“응? 어디까지 했지?”

 

“아이, 청소부 아저씨인지…”

 

“아참, 그렇지. 청소부가 나오더니 관객들을 째려보는 것이 아니겠어? 그러더니 명령조로 이렇게 외치는 거야. ‘이봐, 학생들! 연극은 끝났어. 왜 아직도 안 가고 있어? 학생들이 빨리 가야 우리도 거기 객석 청소하고 집에 가지. 빨리들 돌어가.’ 하는 거야. 우리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생각했어. 이게 지금 연극의 일부인지 아니면 그 청소부 말대로 연극이 끝난 것인지 어안이 벙벙해서 있는데 막이 내리는 거야. 너무도 황당했지. 그것만 해도 괜찮겠는데 청소부하고 아줌마들이 무대에서 내려오더니 관객이 그냥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객석을 청소하기 시작하는 거야. 게다가 한술 더 떠서 그 청소부는 우리보고 ‘어이, 그쪽에 앉아 있는 학생들! 나가면서 바닥에 있는 휴지 좀 주워 갖고 나가.’ 하지 뭐야. 환장할 노릇이었지… 그 녀석이 우리를 기가 막히게 속인 거지. 그 녀석 얼마나 우쭐해 했을까? 하긴 그 녀석이 장담한 대로 평생 잊지 못할 연극이 되긴 했지만 말이야…”

 

수미는 아까부터 쿡쿡대고 웃고 있더니 그가 말을 마치자 입을 열었다.

 

“후후… 너무 재밌네요. 그리고 그건 지훈 씨가 속은 게 아니라 지훈 씨 친구의 완벽한 연출이 빚어낸 해프닝이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연극이란,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떤 감정을 유발시키는 것 아녜요? 그 감정에는 좋은 감정, 기쁜 감정도 있겠지만 슬픈 감정 또는 분노의 감정도 포함되잖아요. 그렇다고 본다면 그 연극은 <관객모독>이란 제목에 걸맞게 분노의 감정, 황당한 감정을 관객들에게서 훌륭하게 이끌어내었다고 볼 수 있잖아요. 너무너무 훌륭한 작품이네요. 후후…”

 

지훈은 씁쓰름한 웃음으로 동의했다.

 

“하긴 그렇기도 해…”

 

수미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집에 가야겠어요. 바래다주실 거죠?”

 

지훈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탐스러웠다. 갈증이 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본심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물론이지. 지금이 몇 시인데…”

 

그녀는 흡족한 미소로 일어서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럼 다음 주 천래성 공연에 함께 가는 것 약속하는 거죠?”

 

따라 일어서며 지훈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천래성의 공연이 <관객모독>수준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수미가 자신 있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재미있을 거예요. 약속 어기면 안 돼요. 지훈 씨의 소감도 관객평으로 쓸 테니까요.”

 

밖에는 아직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지훈이 우산을 펴들며 농담처럼 말했다.

 

“이렇게 비 내리는 외로운 밤에는 혼자 있기 정말 싫은데… 우리 오늘 밤 같이 지내는 것이 어떨까?”

 

수미가 말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훈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집에나 데려다줘요.”

 

“아얏! 농담이었어.”

 

두 연인들은 다정하게 한 우산을 같이 쓰고 빗속으로 사라졌다.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