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아침은 찬란했다.

 

플라타너스의 짙푸른 잎사귀 사이로 보도 위에 떨어지는 샛노란 아침 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상큼했다. 간밤에 내렸던 비로 인해 모처럼 서울의 하늘은 먼지 한 점 없는 파아란 빛으로 단장되었고, 간간이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작년에 완공된 새한 스포츠 신문사의 육중하고 으리으리한 27층 사옥의 벽면은 온통 칼라유리로 치장되어 아름다운 파란 하늘을 그 벽면에 가득 담아 반사시키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화폭이었다.

 

그 거대한 화폭 12층의 한 모서리 휴게실에서 송지훈 기자가 창밖으로 개미처럼 움직이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무심히 내려다보다가 생각난 듯 전자수첩을 꺼내고는 소파에 앉아 오늘의 일정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막 취재회의를 끝낸 뒤였다.

 

전자수첩을 두드려대자 연녹색 직사각형의 작은 모니터에 오늘의 일정이 출력되었다. 일정은 별로 많지 않았다.

 

1. MBS방송국 연예프로 담당 김근철 PD와 점심약속 11:10 방송국에 전화.


… 개편되는 쇼프로그램 성격과 연출상의 포인트를 물어봐야겠군. 보나마나 또 십대들을 대상으로 한 시끄러운 구성이겠지 뭐… 이번에 신설되는 쇼에 기용되는 MC는 누구일까? 아마 더블 캐스트겠지?

 

2. 영화배우 이상희 인터뷰 약속 : 압구정동 보령 APT. 135동 701호 오후 3시경 방문.


… 그녀의 신상명세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여배우 중에서 제일 큰 사이즈의 가슴을 가지고 있으니 한동안은 조잡한 에로물에서 히트하겠는걸…

 

3. 신인 가수 오대철 인터뷰 : 청담동 에스쁘리 호텔 커피숍 저녁 6:00


… 요즘 젊은 가수들은 생명력이 너무 짧아. 이 친구의 인기는 얼마나 갈까?

 

“송기자, 자 여기 커피 한잔하지…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지훈은 그가 누군지 잘 알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문영환 기자였다.

 

문영환은 지훈보다 5년 먼저 입사한 선배기자였다.

 

“아, 문 선배님이군요. 오늘 일정을 검토하느라고요…”

 

불룩 나온 배에 땅딸막한 작은 키의 그가 자판기에서 뽑아온 들쩍지근한 커피를 들이밀고는 지훈 앞에 앉았다. 지훈이 커피를 받아 들며 그를 바라다보았다.

 

주먹코에 검은테 안경, 인상 좋은 쌍꺼풀을 가진 문영환은 일견 어수룩해 보이는 외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특유의 어수룩해 보임을 무기로 연예가에 떠도는 하찮은 풍문은 물론이고 쓸 만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고 종합하여 추론하는 데 있어서도 가히 천재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기자가 지닐 수 있는 최대의 재능 즉, 타고난 열정과 부지런함이 그에게 있었다.

 

연예인들은 대중들의 인기가 곧 그들의 생명이기 때문에 자신의 인기관리에 유리하다고 생각되면 기자에게 모든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거나 오히려 부풀려서 말하기 마련이지만,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실은 극구 부인하기 일쑤였다. 그러한 사실이 틀림이 없는데도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다가 급기야는 기자를 상대로 고소사태까지 벌이는 일도 왕왕 있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악연만이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연예인과 연예담당 기자들은 공생관계라고도 볼 수 있었다. 연예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대중매체에 좋든 나쁘든 자주 언급되어야만 인기가 유지되고, 연예담당 기자들은 연예인이 없으면 아예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으니까…

 

문영환은 타고난 부지런함과 추리력으로 애송이 기자 시절부터 특종을 여럿 건졌었다. 유부녀인 가수 정누리와 개그맨 김봉선의 밀애사건을 처음으로 특종보도한 것도 바로 그였다. 그것은 아주 하찮은 정보 몇 가지를 조합하여 추리해 낸 뒤 발로 뛰어다녀 확인 보도한 것으로 그의 천부적 재능이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 특종보도 이후 문영환은 연예계에서는 알아주는 물건이 되었다. 뒤가 켕기는 연예인들이 그를 슬슬 피했지만 그의 정보 수집력과 끈질김에는 당할 수 없었다. 한 번 그의 집요한 추적에 걸리면 그것을 피할 방도는 없었다.

 

그런 한편 문영환은 후배기자들에게는 아주 잘해주었다. 가끔씩은 특종을 일부러 후배에게 넘겨주기도 했기 때문에 그들에겐 인기 있는 선배기자였다. 문영환은 특히 지훈에게 잘 대해주었다. 둘이 같은 대학 출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서로가 인간적으로 끌렸기 때문이었다.

 

지훈은 그런 문영환을 존경했고 자신도 그러한 기자가 되리라 다짐하곤 했다.

 

지훈이 커피를 훌훌 불어가며 말했다.

 

“선배님, 요즘 바쁘신가봐요. 자주 뵐 수가 없으니 말예요. 어디 좋은 특종감이 있는 모양이지요?”

 

“글쎄… 한 가지가 있긴 한데… 아직 확실치는 않아… 좀더 있으면 대충이라도 윤곽이 잡히겠지… 그런데 자네는 어때?”

 

지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저야 뭐 늘 그렇지요. 요즘은 일상적인 취재가 전부지요. 좋은 정보 좀 있으면 알려주세요. 한턱 크게 낼 테니… 부장님은 특종 특종 하시지만 그게 어디 쉬워야 말이지요. 사람들보고 일부러 일을 저질러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요즘 같아서는 대포기사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에요. 문 선배님, 어디 좋은 정보가 없을까요?”

 

지훈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문영환을 쳐다보았다. 지훈은 작년 말에 어느 중견 탤런트의 극비 이혼을 특종으로 뽑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문영환의 귀띔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영환은 오른손을 턱에 가져가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흐음, 그렇다면… 저기, 저쪽은 어때?… 영화배우 이주영 말이야… 걔 요즘 일본에 사는 어느 교포와 극비리에 사귄다는 소문이 있던데… 작년 일본에서 현지 로케했을 때부터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소문이야.”

 

지훈이 눈을 크게 뜨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그거 금시초문인데요.”

 

역시 문영환은 언제나 빨랐다.

 

“전화국을 한번 조사해봐. 국제 통화료가 얼마나 나오는지, 그리고 또 일본 쪽 전화번호는 몇 번인지 말이야. 번호를 알아내고 동경지사를 통해 한 번 알아보면 대충 윤곽이 잡힐 게 아니겠어? 그런 다음 확실하게 증거를 들고 집에 쳐들어가서 ‘다 알고 있으니 솔직하게 얘기하시오’ 하면 지가 별 수 있겠어?”

 

전화통화를 조사하는 것은 문영환 기자의 기본적인 업무였다. 보통 다른 연예부 기자들이 연예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만을 가지고 기사를 작성하는 데 비해, 문영환은 연예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다만 참고로 할 뿐 어디까지나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는 철저한 프로의식을 가지고 있는 기자였다.

 

지훈은 진심으로 문영환이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한번 조사해 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선배님께서 아까 말씀하신 사건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요? 확실치 않다고 하신 것 말이예요. 누구 얘기죠?”

 

“아아, 그거?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라서…”

 

“뭔데 그래요? 선배님 제가 입이 무겁다는 건 알고 계시잖아요?”

 

문영환은 종이컵을 휴지통에 버리고는 담배를 찾았다. 기회를 놓칠세라 지훈이 잽싸게 담배를 꺼내어 문영환에게 주고 불까지 붙여주었다.

 

하지만 문영환은 흔들리지 않았다. 원래 자신이 취재하는 내용이 활자화되어서 공표되기까지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두는 성격 때문에 <크레믈린>이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는 문영환이었다.

 

그는 지훈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음 순간 언제그랬나 싶게 표정을 홱 바꾸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 안 돼!”

 

내용이 궁금했지만 문영환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아는 지훈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뭐. 곧 알게 되겠죠… 하여튼 건투를 빕니다, 문 선배님!”

 

문영환이 허공으로 담배연기를 날려버리고 나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 문화부 강 기자와는 잘 되어가나?”

 

지훈과 문화부 강수미 기자와는 이제 막 연인이라고 불릴 만한 사이로 발전되고 있었다.

 

“아직은 뭐 그저 그렇죠.”

 

“잘해봐, 이 친구야. 강 가지가 정말 자네에게 이 사람이다 싶으면 전력으로 다가서서 잡아야 하는 거야. 나중에 날아간 뒤에 후회 말고…”

 

문영환은 손으로 나비가 날아가는 흉내를 내 보였다.

 

“그게 어디 제 마음대로 되는 겁니까? 운명이 알아서 하겠죠.”

 

지훈이 다소 체념한 듯 소극적인 어투로 말하자 문영환이 큰소리로 나무랐다.

 

“운명이란 자기 손으로 만들어가는 거야.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그 값을 해야지, 운명 탓으로만 돌리고 있으면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어. 어찌보면 간단한 거야, 세상은… 열정! 그리고 신념만 있으면 불가능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구!”

 

당당하고 확신에 찬 문영환의 힘찬 목소리는 지훈을 주눅들게 했다. 그럴 때의 문영환의 모습은 절대로 어수룩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쯤이야 누구라도 아는 얘기이지만…”

 

변명처럼 지훈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문영환이 그런 지훈의 나약함을 안쓰러운 듯이 바라보다 담배를 비벼 끄면서 시계를 흘낏 쳐다보았다.

 

“가야 될 시간이군. 나 이만 갈게. 나중에 또 보세.”

 

문영환은 벌떡 일어서더니 지훈이 인사할 새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지훈은 일어나려다가 문영환의 활기차게 걸어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다시 앉았다.

 

‘문 선배가 또 틀림없이 뭔가 특종을 엮어내는군. 하여튼 알아줘야 해, 문선배 실력은… 그런데 이주영이라고?’

 

지훈은 볼륨 있는 몸매의 육체파 여배우 이주영을 떠올렸다. 그 육감적인 도톰한 입술이 웃고 있었다. 이주영의 애인이라면 누구인지 굉장한 행운아임에는 틀림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이주영과의 관계는 언제부터였는지, 어떤 계기에서였는지 밝혀내는 것이 지훈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 될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많은 남성팬들은 이제부터 몸살을 앓을 것이었다.

 

지훈은 벌써 큼지막하게 뽑은 자신의 특종 머릿기사를 상상하고 있었다.

 

‘이주영 극비리에 열애 중! 상대는 재일교포… 아니, 그것은 별로 좋은 제목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좀더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니까…’

 

지훈은 쿡 웃었다. 이제 겨우 정보를 들었을 뿐 아직 아무런 자료도 확보하지 못한 처지에 그런 것까지 생각하는 자신이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현실이 될 것이었다.

 

문 선배의 귀띔은 언제나 거의 틀림없었으므로…

 

어쨌든 문 선배가 예의 실력을 발휘하여 또 한 번 특종이라는 대어를 낚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지훈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지훈은 수미에게 퇴근 후에 만나 오랜만에 데이트나 하자고 전화를 걸어볼까 하고 일어섰다.

 

‘수미…’

 

왠지 소년처럼 설레어옴을 느꼈다. 전화를 거는 지훈의 가슴에는 그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문영환은 신문사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어 구파발 쪽으로 향했다. TV 드라마 야외녹화가 송추 근처에서 있을 예정이었다. 문영환이 노리는 오늘의 목표가 그곳에 있었고, 날씨가 매우 좋았으므로 녹화예정이 취소되기는 만무하였다.

 

스포츠카 스타일의 문영환의 차는 이미 길이 들 대로 들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시내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문영환의 일에 대한 열정을 말해주듯 2년도 채 되지 않아서 주행 미터계는 8만km를 넘어서고 있었다.

 

상쾌한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기분 좋게 간지럽혀 주었다. 그는 이번 일에 확신을 가졌다. 요는 그것을 어떻게 확인하고 어떻게 요리하느냐 하는 일만 남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번 일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아무런 확신이 없었다.

 

열흘쯤 전이었을까…

 

신문사로 한 통의 전화가 문영환에게 걸려왔다. 그것이 이 일의 시작이었다.

 

“문 기자님이세요?”

 

20대 초반인 듯한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예, 제가 문영환입니다만…”

 

“저… 정보를 하나 드리려고 전화했어요.”

 

“정보라니요?”

 

“탤런트 채지연에 관한 것이에요.”

 

또 누군가가 장난을 치는군, 하고 문영환은 생각했다. 청초한 이미지의 채지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시계는 결혼예물로 아내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김 PD와의 약속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보를 주신다니 고맙긴 하지만 전화 주시는 분은 누구신가요?”

 

짜증을 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꼭 말해야 하나요? 정 그러시다면 다른 곳에 정보를 주어야겠군요.”

 

문영환은 무례한 그 목소리에 전화를 끊어버릴까 하다가 자신을 자제하기로 마음먹고 부드럽게 상대를 다독거렸다.

 

“쓸데없이 장난을 치는 전화들이 가끔씩 있어서 그러니 양해해 주세요.”

 

그 여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음… 채지연 씨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팬이에요. 이번 일로 채지연 씨에게 너무나 실망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전화 드리게 됐어요.”

 

‘이 여잔 팬이 아니야. 거짓말을 하고 있어…’

 

문영환은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좀 바쁘니까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좋아요. 간단히 말씀드리지요. 그러나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을 해주셔야겠어요.”

 

“약속이오?”

 

문영환은 어이가 없었다. 괜한 시간낭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들었다. 시계의 초침은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네, 이것을 조사하신 다음에는 꼭 신문지상에 발표하신다는 약속을요.”

 

문영환은 누구인지 참으로 당돌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보를 끝까지 듣기 전까지는 참아야 한다고 자신에게 다시 한 번 타일렀다.

 

“그거야 충분히 그럴 가치만 있다면야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것이 우리 기자들의…”

 

여자가 문영환의 말을 도중에 끊고 못을 박았다.

 

“약속하시는 거죠?”

 

문영환은 자존심을 포기하기로 했다.

 

“좋아요, 약속하지요. 그럼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볼까요?”

 

문영환은 약속시간에 조금 늦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메모할 준비를 했다.

 

“음… 채지연 씨에게 남자가 생겼어요.”

 

“아니 그 정도야 이십대 청춘남녀에게 흔히 있는 일 아닙니까? 그런 정도로 기사를 쓸 수는 없습니다.”

 

문영환은 기대 이하인 여자의 말에 실망해서 톡 쏘는 목소리로 내뱉듯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이미 깊은 관계예요. 갈 데까지 다 갔단 말이예요.”

 

갑자기 전화기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톤이 높아졌다.

 

“더구나 상대방 남자는 사십대의 유부남이란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유부남?’

 

그는 메모지에 유부남이라고 끼적거렸다.

 

“말하자면 불륜관계라고요, 불륜!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심각한 도덕성의 문제란 말이에요.”

 

여자는 흥분한 듯 빠르게 지껄였다.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불륜관계?’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채지연이라면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스타가 아니던가?… 그러나 사실여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지금 흥분에 떨고 있는 이 여자는 고의성 음해를 일삼는 그런 족속인지도 모르니까.

 

문영환은 흥분한 상대의 목소리에 맞춰 차분히 대꾸했다.

 

“좋습니다. 채지연 씨가 유부남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 이거죠? 그렇다면 그 유부남은 누굽니까?”

 

문영환의 말에 여자는 일순 당황한 것 같았다.

 

“그,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지금 전화주시는 분의 남편이라도 되시는가요?”

 

“……”

 

문영환은 메모지에 남편이라고 쓴 뒤 그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그게 사실인지 어떻게 증명하죠?”

 

“내가 봤어요. 직접 보았다구요. 청담동 에스쁘리 호텔에서 둘이 아주 다정하게 꼭 붙어서 객실로 들어가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이에요. 남들이 전혀 누구인지 몰라볼 정도로 차리고 있었지만 전 알아볼 수 있었다구요.”

 

문영환은 다시 청담동 에스쁘리 호텔이라고 적어 넣었다.

 

“그래요? 그러나 설사 채지연 씨라 하더라도 호텔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들 두 사람이 다른 어떤 용무로 만났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새벽 한 시에 그 짓말고 다른 무슨 용무가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요?”

 

“그래요? 새벽 한 시라… 그럼 당신은 그 시간에 거긴 왜 있었죠?”

 

“그런 것은 알 필요 없어요!”

 

딸칵!

 

여자의 앙칼진 소리를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문영환은 메모지를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채지연… 불륜… 유부남… 청담동 에스쁘리 호텔…’

 

전화를 한 여자는 누구였을까? 어디서 꼭 들어보기라도 한 듯한 목소리였다. 어디서였을까? 언제인지 어디서인지 몰라도 확실히 들어보았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것이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자신이 말한 대로 채지연을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팬이었을까? 아니면 기사가 나감으로 해서 채지연이 입게 될 치명적 손상으로 이득이 가는 어떤 사람일까? 아니면 단순한 장난전화?

 

신문지상에 발표할 것을 단호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팬의 단순한 장난 같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신문사를 상대로 장난을 하는지 모함을 하는지 모를 일이지만 사실의 진위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상 그것은 아직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진실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 이후 문영환은 바빠졌다. 확신은 서지 않았지만 그의 육감은 무언가 특종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채지연 정도의 톱스타라면 사생활이나 경력은 이미 발가벗긴 것처럼 백일하에 드러나 있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녀의 경우에는 베일에 싸인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자신도 채지연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 이 천하의 문영환이가…

 

그는 톱스타 채지연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었나 하는 연예부 기자로서의 자책감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그만큼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자기를 비롯한 늑대 같은 연예부 기자들의 집요한 공격을 어떻게 피해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녀의 매니저 이기수의 호방한 모습이 생각났다.

 

이기수.

 

채지연의 매니저 이름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따 <수 기획>이란 매니지먼트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흔히 존경과 질시를 함께 담아 말하는 <스타의 산실> 이기수 사단의 주인공.

 

43살인 그를, 연전에 그의 휘하 다른 가수의 취재 건으로 해서 문영환은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180cm가 넘는 근육질의 몸에다가 길게 기른 장발에 콧수염까지 기르고 다녀 터프가이로 보이는 그는 미국에 유학까지 한, 연예계에서는 보기 드문 실력파였다. 해외통이면서도 국내 연예 비지니스계에서 뛰어난 수완을 보여 연예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채지연뿐만 아니라 탤런트, 가수, 코미디언 등 걸출한 여러 분야의 스타들을 거느리고 이 시대의 대중문화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스타들을 발굴해 내고 또 그들을 키우는 데 있어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언제나 스타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스타 지망생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그의 휘하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돈은 별 문제가 아니었으며 타고난 스타로서의 재능과 엄격한 그의 명령에 따를 수 있는 극소수의 몇 명만이 그의 휘하에 들어가는 행운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인기가 있었고 그가 운영하는 연예 매니지먼트 <수 기획>은 스타 사관학교라고까지 불릴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 일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서 생각해 볼 때, 휘하 스타들을 엄격하게 통제해 온 이기수 매니저 특유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이 일을 분명히 알고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직간접으로 관여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문영환은 자신에게 제보한 전화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떠나서, 기사 가치로서도 채지연의 베일에 가려진 사생활을 조사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는 채지연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그녀의 원래 이름이 박정미인 것을 알았다.

 

 

문영환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청담동 에스쁘리 호텔이었다. 호텔 매니저나 벨보이를 구슬러보아도 그들에게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이 일부러 사실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문영환은 일반적인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문제의 40대 남자를 찾기 위해 일단 채지연의 아파트 전화통화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의 경험에 비추어보아서는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한 작업이었으며 때로는 큰 효과가 있었다.

 

전화국에 비치된 전화 통화대장을 뒤져 최근 두 달 사이에 그녀가 통화했던 대상을 빠짐없이 체크했다. 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누구라도 이해가 갈 만한 대상들뿐이었다.

 

그녀의 매니저, 여러 프로그램의 TV 연출 PD들, CM 제작 감독, 기타 탤런트 등등 의심이 갈 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전화 속의 그녀가 말한 40대의 남자란 찾을 수 없었다.

 

그들 중의 한 명이었을까? 하고 의심하여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 마음먹었을 때 문득, 채지연에게 휴대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영환 자신도 가지고 다닐 정도로 대중화되어 있는 휴대폰을 채지연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었다.

 

만일 은밀한 통화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팬들이나 기자에게 공개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집 전화보다는 아직은 번호가 알려지지 않은 휴대폰을 이용할 확률이 클 것이고 또한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많은 다른 연예인들도 꼭 필요한 몇몇 상대에게만 휴대폰의 번호를 가르쳐주고 집 전화는 팬들의 성화를 피해 아예 코드를 뽑아놓기 일쑤였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도 있었다. 휴대폰의 전화번호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채지연이란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는 휴대용 전화 가입자가 셋이나 있었지만 탤런트 채지연하고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의 본명인 박정미를 찾아보았지만 가입된 일곱 명 모두 다른 인물들이었다. 가명이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가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가입자 주소를 근거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피를 말리는 지루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끈기와 오기로 그 지루한 작업을 계속했다.

 

성과가 있었다. 그녀는 허윤숙이란 가명으로 가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계속 조사하다 보니, 상식적으로는 그녀와 관계가 없을 듯한 이상한 전화번호가 하나 있었다. 그것 역시 휴대폰 전화번호였는데 두 달 사이에 열 몇 번의 통화를 한 것으로 그 가입자는 박성화로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박성화의 전화통화를 체크해 보았다. 그랬더니 채지연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 것이 스무 통이 넘었다.

 

문영환은 쾌재를 불렀다. 이번 일은 너무 쉽게 풀려간다고 생각했다.

 

박성화란 인물에 대해 조사해 보니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정말로 여자의 제보대로 유부남이었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박성화의 신분이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국회의원과 탤런트?

 

이거야말로 빅뉴스, 특종 중의 특종이 아닐 수 없었다.

 

박성화 국회의원이라면 문영환도 웬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 청문회로 온 나라 안이 온통 시끄러울 때 그는 뉴스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그는 논리정연한 날카로운 질문으로 뻔뻔스런 답변자들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게 했던 것이다.

 

그 이후 답변자들을 공격하는 데서 보여준 그의 준엄한 얼굴은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지게 되었고, 그를 국회로 내보낸 그의 지역구민들은 그를 자신들의 자랑으로 여겼다. 그렇게 국민적 스타로 부상한 이후에도,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인 연출이었겠지만, 그는 어디에서건 겸손한 행동을 보임으로써 이미 차세대를 겨냥할 수 있는 유력한 인사 중의 한 명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긴 그렇다고 해도 정말 채지연과 깊은 사이인지는 더 두고 볼 일이었지만 스타 국회의원과 인기 탤런트가 다른 어떤 업무적인 용무로 그렇게 많은 통화가 오갔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또 그게 사실이라면 이 문제는 상당히 조심스레 다루어질 필요가 있음을 기자의 본능으로 느꼈다.

 

문영환은 정치부 기자들에게 의뢰하여 박 의원의 신상에 대해 약간의 일반적인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박성화
나이: 48세. 3선 지역구 여당의원. 당내 중진으로 국회 상공위 위원장.
현 ㅈ시 지구당 위원장. 현 성천 건설 대표이사.
ㅇ대학 경제학과 졸업. ROTC장교로 임관 후 서부전선 근무. 중위로 제대.
20대부터 국회에 도전. 2번의 낙선 후 3번째 도전 끝에 36살의 나이로 국회에 입성.

머리회전이 빠르고 대인관계가 원만함. 깨끗하고 참신한 이미지로 지역구민이나 국민에게 신망이 두터움. 특히 청문회 이후 그는 범국민적인 인기를 모은 바 있음. 부친이 경영하는 건축 및 중기(重機)사업을 도와 어느 정도 재력가로 성공. 아직 당내 어느 계파에도 속해 있지 않으나 야심가로 알려져 있고 당내 중간 보스의 위치로 휘하에 소장파 의원들을 규합하고 있음. 현재 부인 이명희 여사와 슬하에 1남 2녀가 있고 부인과의 사이는 비교적 원만함.

 

 

벌써 해가 중천에 다다르고 있었고 문영환의 차는 어느덧 목적지 야외 촬영장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바람이 뜨거웠다.

문영환은 어쩐지 동료기자가 준 박성화의 신상 명세표에서 읽은 마지막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부인과의 사이는 비교적 원만함…’

 

비교적 원만함이라고… 어떤 사이가 비교적 원만함 사이일까?… 원만한 사이란 건 무엇이고, 비교란 대체 누구와 비교한다는 말일까?…

 

문득, 문영환은 어쩐지 이번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