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드는 종이꾸러미를 옆구리에 끼고 가벼운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나 경계하는 눈길로 줄곧 사방을 살펴보며 되도록 뒷거리와 좁은 빌딩 안뜰을 빠져나가 캐니 거리와 포스트 거리가 엇갈리는 곳에 이르자 곧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로 5번 거리 픽윅 스테이지 버스의 종점까지 갔다. 수하물예치소에 꾸러미를 맡기고 인환증을 봉투에 넣어 우표를 붙인 뒤 겉봉에 ‘M.F. 홀랜드’ 라는 이름과 샌프란시스코 우체국의 사서함 번호를 쓰고 봉하여 우체통에 넣었다. 그리고 버스 종점에서 다른 택시를 타고 알렉산드리아 호텔로 달렸다.

 

12호 C의 방으로 올라가 문을 노크했다. 두 번째로 두드리자 문이 열리고 반짝이는 노란 가운을 입은 자그마한 금발 소녀가 나타났다. 파리한 얼굴이 생기가 없고, 두 손으로 안쪽 손잡이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헐떡이듯 말했다.

 

“스페이드 씨세요?”

 

“그렇습니다.”

 

스페이드는 쓰러지려는 소녀를 허둥지둥 붙잡았다.

 

소녀는 스페이드의 품에서 몸을 활처럼 구부리고 머리를 뒤로 발딱 젖혔으므로 짧은 금발이 머리에서 거꾸로 늘어졌다. 가느다란 목이 턱 끝에서 가슴에 걸쳐 뚜렷이 곡선을 그렸다.

 

스페이드는 등을 떠받치고 있는 팔을 위쪽으로 뻗고 몸을 굽혀 다른 한 팔을 무릎 밑으로 넣었다. 그러나 그때 소녀는 몸을 뒤틀어 저항하며 조금 움직거리는 입술 사이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싫어요! 엄마…”

 

스페이드는 그녀를 걷게 했다. 문을 발로 닫고 그녀를 부축하며 녹색 카페트가 깔린 방 안을 벽에서 벽까지 오가게 했다. 한쪽 손을 작은 몸의 옆구리로 넣고 다른 쪽 손으로는 그녀의 한쪽 팔을 잡아 앞으로 고꾸라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고 옆으로 휘청거리면 부축하며 앞을 향해 걷게 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몸무게를 비틀거리는 다리에 주게 하려고 애썼다.

 

두 사람은 방 안을 몇 번이나 오갔다. 소녀의 걸음이 휘청거려도 스페이드는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 균형을 잡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없었으며 눈이 감겨 있었다. 스페이드는 불쾌한 얼굴로 경계하는 눈길을 사방으로 보내고 있었다.

 

스페이드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옳지, 그렇게 걸어요.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옳지. 하나, 둘, 셋, 넷, 오른쪽으로 돌아요.”

 

소녀를 흔들며 벽 있는 곳에서 방향을 바꾸게 했다.

 

“자아, 다시 한 번 되돌아가오. 하나, 둘, 셋, 넷. 머리를 똑바로 들고. 옳지, 됐어.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다시 한 번 돌아요.”

 

다시 소녀를 흔들었다.

 

“좋아, 그렇지. 어서 걸어요, 어서. 하나, 둘, 셋, 넷. 자아, 빙 돌고…”

 

아까보다 더 힘껏 뒤흔들었다. 발걸음을 빨리 떼어놓았다.

 

“잘하는군, 잘해!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서두르오. 하나, 둘, 셋…”

 

소녀는 몸을 떨며 꿀꺽 소리내어 침을 삼켰다. 스페이드는 그녀의 팔과 옆구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귀에 입을 바싹 대었다.

 

“잘하는군. 잘해. 하나, 둘, 셋, 넷. 좀더 빨리, 좀더 빨리, 좀더 빨리. 그렇지, 걸어요, 걸어, 자꾸 걸어. 들고, 내리고, 들고, 내리고. 잘해. 자아, 빙 돌고.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약을 먹였나? 나에게 먹였던 그 사람?”

 

눈꺼풀이 한순간 위로 올라가 무딘 금갈색 눈이 보였다. 소녀는 가까스로 “그래요.” 하고 말했으나 말 끝이 잘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또 걷기 시작했다. 스페이드와 나란히 걷느라 그녀의 걸음은 종종걸음에 가까웠다. 스페이드는 노란 비단 가운 위로 그녀의 몸을 두드리기도 하고 쓰다듬기도 하며 계속 말을 시키면서 경계하는 눈초리로 줄곧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빙 돌고. 됐소, 됐어. 하나, 둘, 셋, 넷. 턱을 들고, 그래, 그렇지, 그렇게 해야지. 하나, 둘…”

 

그녀의 눈꺼풀이 다시 조금 위로 올라가 눈이 힘없이 옆으로 움직였다.

 

“그래, 됐소.”

 

스페이드는 그때까지의 단조로움을 깨고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크게 뜨오, 크게 - 더 크게!”

 

그는 소녀를 흔들었다. 소녀는 항의하듯 신음 소리를 냈으나 눈꺼풀이 아까보다 더 크게 떠졌다. 그러나 눈에는 아직 생기가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소녀의 볼에 대여섯 번 연달아 따귀를 갈겼다. 소녀는 또 신음 소리를 내며 스페이드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스페이드는 소녀를 꼭 끌어안고 나란히 서서 다시 벽에서 벽으로 걷게 했다.

 

“서면 안 돼.”

 

그는 거친 목소리로 명령하고 나서 물었다.

 

“너는 누구지?”

 

“리어 개트맨.”

 

불분명한 목소리였으나 이번에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의 딸?”

 

“그래요.”

 

이번에는 말 끝까지 또렷했다.

 

“브리짓은 어디 있나?”

 

소녀는 스페이드의 품에서 발작을 일으킨 듯이 몸을 뒤틀며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으려고 했다. 스페이드는 재빨리 손을 빼냈다. 손등에 4, 5센티미터 가량의 긁힌 상처가 빨갛게 나 있었다.

 

“무슨 짓이야!”

 

그는 다시 한 번 소리치며 그 핀을 소녀의 눈앞에 내밀어 보였다.

 

핀을 보자 소녀는 훌쩍훌쩍 울며 가운을 벌렸다. 속에 입고 있는 크림 빛 잠옷을 헤치고 왼쪽 유방 밑을 내보였다. 새하얀 살갗에 핀으로 긁고 찌른 가는 줄과 작은 반점이 빨갛게 뒤섞여 있었다.

 

“자면 안 될 것 같아… 당신이 올 때까지… 걸어다니고… 꼭 온다고 그 사람이 말했기 때문에…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소녀는 비틀거렸다. 스페이드는 소녀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아, 걷자!”

 

소녀는 스페이드의 팔을 뿌리치고 다시 한번 그와 마주서려고 몸부림쳤다.

 

“잠깐… 이야기하겠어요. …아이, 졸려… 살려줘요…”

 

“브리짓 말인가?”

 

“네… 데리고 갔어요… 배, 밸링겜… 앤초 26번지… 빨리 서둘리 않으면…”

 

머리가 어깨 위로 떨어졌다. 스페이드는 그 머리를 힘껏 들어올렸다.

 

“네… 윌머… 카이로.”

 

몸부림치며 눈두덩을 실룩거렸으나 눈은 뜨이지 않았다.

 

“…그녀를 죽일 거에요.”

 

머리가 또 힘없이 떨어졌다. 또다시 들어올렸다.

 

“재코비를 쏜 게 누구지?”

 

소녀에게는 이 질문이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머리를 들고 눈을 뜨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소녀는 입 속으로 우물거렸다.

 

“빨리… 그녀…”

 

스페이드는 소녀를 난폭하게 흔들었다.

 

“의사가 올 때까지 자면 안 돼.”

 

공포가 소녀의 눈을 뜨게 했다. 그 순간만은 공포가 소녀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구름을 몰아냈다.

 

“안 돼요, 안 돼요!”

 

소녀는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빠가… 죽일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녀를 위해서… 내가 한 일… 아빠에게 들켜요… 자면… 다 나아요… 내일 아침이 되면…”

 

스페이드는 다시 한 번 소녀를 흔들었다.

 

“틀림없지요, 자면 낫지요?”

 

“그렇지.”

 

머리가 또 툭 떨어졌다.

 

“침대는 어디 있지?”

 

소녀는 손을 들려고 했으나 그 노력도 그녀에게는 힘겨운 듯 카페트를 가리키는 게 고작이었다. 지쳐버린 아이처럼 한숨을 크게 쉬더니 온몸의 힘이 쑥 빠져 늘어져버렸다.

 

스페이드는 빠져들 것 같은 소녀를 건져내듯 안아서 쉽게 가슴 위까지 들어올려 세 개의 문 중 가장 가까운 문 앞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를 힘껏 돌리고 발로 문을 열었다. 복도가 나왔다. 문이 열려 있는 욕실 앞을 지나자 침실로 연결되었다. 욕실을 들여다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그녀를 침실로 안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에 띄는 옷가지며 화장대 위의 물건으로 보아 그곳은 남자의 방인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소녀를 안은 채 녹색 카페트가 깔린 방으로 나와 이전에는 반대쪽 문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도 복도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욕실 앞을 지나자 다른 침실이 나왔는데, 그곳에 놓인 물건으로 보아 여자의 방임을 알 수 있었다. 침대 시트를 젖히고 소녀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슬리퍼를 벗기고 몸을 조금 들어올려 노란 가운도 벗긴 다음 머리 밑에 베개를 넣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는 그 방에 있는 두 개의 창문을 다 열자 창문을 등지고 서서 잠든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숨소리가 힘겨워 보였으나 흐트러져 있지는 않았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입을 꾹 다문 채 방 안을 둘러보았다. 황혼이 밀려와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어두워지는 빛 속에서 한 5분쯤 서 있더니 이윽고 그는 축 처진 두툼한 어깨를 초조한 듯이 흔들며 바깥문은 잠그지 않고 방을 나갔다.

 

스페이드는 파우엘 거리 퍼시픽 전신전화회사의 서비스 센터로 가서 더븐포트 2020번을 불렀다.

 

“구급병원 부탁합니다. …여보세요, 알렉산드리아 호텔 12호 C에 수면제를 먹고 잠든 소녀가 있습니다. …네, 누구든 와서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알렉산드리아 호텔의 후퍼라는 사람입니다.”

 

스페이드는 수화기를 놓고 소리내어 웃었다. 이어서 다른 번호를 대었다.

 

“여어, 프랭크요? 나 샘 스페이드요. 입 무거운 운전기사를 딸려서 차 한 대 보내주시오. 지금 곧. 반도 끝까지 갔다 오고 싶어서 그러오. 두 시간쯤이면 되겠지… 그거면 충분하오. 엘리스 거리 존의 가게에 있을 테니 되도록 빨리 부탁하오.”

 

이어서 다른 번호 - 자기 사무실 번호를 대고 한동안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말없이 있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

 

존의 가게로 가서 급사에게 촙(야채와 고기를 섞어 만든 중국식 요리)과 베이크 포테이토(구운 감자)와 얇게 썬 토마토를 서둘러 주문하여 급히 먹어치운 다음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체크 무늬 모자를 삐뚜름히 쓴 파란 눈에 명랑하고 늠름한 얼굴의 키작은 젊은이가 그의 테이블로 다가와서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스페이드 씨. 가솔린도 가득찼고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좋소.”

 

스페이드는 커피를 다 마신 다음 작은 젊은이와 함께 그곳을 나왔다.

 

“밸링겜의 앤초라는 곳을 아시오? 앤초 시인지 거리인지 모르겠소만.”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있다면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가보기로 합시다.”

 

스페이드는 검은 캐딜락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다.

 

“26번지요. 빠를수록 좋소. 그러나 느닷없이 현관 앞으로 밀고 들어가지는 마시오.”

 

“알았습니다.”

 

기사는 말없이 대여섯 블록쯤 달리다가 물었다.

 

“함께 일하시던 분이 죽었다면서요. 스페이드 씨?”

 

“그렇소.”

 

운전수는 동정하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정말 힘든 직업이군요.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편한지…”

 

“그러나 택시 기사도 불사신은 아니잖소.”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늠름해보이는 기사는 양보했다.

 

“하지만 역시 죽을 때가 되면 굉장히 허둥대겠지요?”

 

스페이드가 우두커니 앞을 쳐다 본 채 무슨 말을 물어도 건성으로 대답하자 마침내 기사도 묻지 않게 되었다.

 

운전수는 밸링겜의 약국에서 앤초 거리로 가는 길을 물었다. 10분 뒤 어두운 거리모퉁이에 자동차를 멈추고 라이트를 끈 다음 앞쪽을 거리켰다.

 

“저쪽입니다. 저쪽일 겁니다. 아마 세 번째나 네 번째 집이겠지요.”

 

“알았소.”

 

스페이드는 자동차에서 내렸다.

 

“엔진은 끄지 마시오. 급히 도망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거리를 가로질러 맞은 쪽으로 건너갔다. 저만큼 앞쪽에 가로등이 하나 둥그러니 켜져 있었다. 거리 양쪽에는 한 블록에 대여섯 채의 집이 늘어서 있어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흐릿한 불빛이 어둠 속 여기 저기에 떠올라 있었다. 높이 걸린 가느다란 달이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등불처럼 차갑고 약한 불빛을 내뿜어 주었다. 거리 반대쪽에 있는 한 집에서 활짝 열린 창문으로 라디오 소리가 나른하게 울려나왔다.

 

모퉁이로부터 두 번째 집 앞에서 스페이드는 걸음을 멈췄다. 양 쪽 담에 비해 유난히 커보이는 문기둥 한쪽에 둘레의 흐릿한 빛을 받아 파르스름한 금속판으로 된 2와 6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네모진 흰 카드가 그 숫자 위에 못박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팔 집. 세놓음’ 이라고 씌어 있었다. 두 문기둥 사이에는 대문이 없었다. 스페이드는 콘크리트 길을 걸어 건물 옆으로 갔다. 그리고는 현관 베란다 밑에 한동안 서 있었다.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안은 캄캄했다. 입구문에도 네모진 흰 카드가 못박혀 있었다.

 

스페이드는 문 앞까지 올라가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의 유리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눈길을 가로막는 커튼 같은 것은 없었으나 안이 캄캄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두 개의 창문으로 들여다보았다. 양쪽 다 문과 마찬가지로 커튼은 쳐져 있지 않았으나 안이 캄캄했다. 열어보려고 했지만 잠겨 있었다. 문도 열어 보려고 했으나 역시 잠겨 있었다.

 

그는 베란다를 떠나 사정을 잘 모르는 발 밑의 땅바닥에 신경을 쓰며 잡초 사이를 빠져나가 집 뒤로 돌아갔다. 옆으로 난 창문은 모두 높아서 손이 닿지 않았다. 뒷문도, 그리고 손이 닿는 단 하나뿐인 뒤 창문도 잠겨 있었다.

 

스페이드는 다시 문기둥으로 돌아와 라이터 불을 두 손으로 감싸며 ‘팔집’ 이라고 씌어진 카드 앞으로 바싹 갖다댔다. 그 카드에는 산 마테오 시 부동산 소개업자의 이름과 주소가 인쇄되어 있고, 그 옆에 파란 색연필로 ‘열쇠는 31번지에’ 라고 씌어 있었다.

 

스페이드는 자동차로 되돌아가 기사에게 물었다.

 

“손전등 있소?”

 

“네.”

 

기사는 손전등을 건네주었다.

 

“좀 거들어드릴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스페이드는 자동차에 올라탔다.

 

“31번지로 가주시오. 라이트는 켜도 좋소.”

 

31번지는 26번지 반대쪽으로 조금 간 곳에 있는 네모진 회색 집이었다. 아래층 창문에 불빛이 환했다. 스페이드는 현관 베란다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 열 너덧 살쯤 된 검은 머리의 소녀가 문을 열었다. 스페이드는 머리를 숙이고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26번지의 열쇠를 빌리고 싶은데…”

 

“아빠를 불러오겠어요.”

 

소녀는 안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아빠!”

 

대머리에 짙은 수염이 난 불그레한 얼굴의 뚱뚱한 사나이가 한쪽 손에 신문을 들고 나타났다.

 

“26번지의 열쇠를 빌렸으면 합니다만…”

 

스페이드가 말했다. 사나이는 수상한 표정을 지었다.

 

“전기를 끊어서 아무것도 안 보일 겁니다.”

 

스페이드는 주머니를 두드려보였다.

 

“손전등이 있습니다.”

 

뚱뚱한 사나이는 점점 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불안한 듯 헛기침을 하며 손에 든 신문을 구깃구깃 구겼다. 스페이드는 직업용 명함을 꺼내 사나이에게 보이고 다시 주머니에 넣은 다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에 숨겨둔 물건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순간 뚱뚱한 사나이의 얼굴과 목소리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는 곧 검은 꼬리표와 빨간 꼬리표가 달린 놋쇠 열쇠를 가지고 돌아왔다. 자동차 옆을 지날 때 스페이드가 기사에게 눈짓을 했으므로 그도 따라왔다.

 

“최근에 누군가 이 집을 보러 온 사람이 있었습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요 2, 3개월 동안 열쇠를 빌리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뚱뚱한 사나이는 열쇠를 들고 용감하게 앞장섰으나 세 사람이 현관 앞에 이르자 스페이드에게 열쇠를 내밀며 얼버무리듯 말했다.

 

“이것으로 여시지요.”

 

그리고 그는 옆으로 비켜섰다.

 

스페이드는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하고 캄캄했다. 손전등을 켜지 않은 채 왼손에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운전기사가 바로 뒤따라 들어가고 조금 떨어져 뚱뚱한 사나이가 쫓아들어왔다. 세 사람은 집안을 아래에서 위까지 샅샅이 뒤졌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살폈으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자 이번에는 공공연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집은 분명 빈 집이었다. 요 몇 주일 동안 사람이 들어온 듯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정말 고맙소.”

 

스페이드는 알렉산드리아 호텔 앞에서 자동차를 내렸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 프런트로 가자 고지식해 보이는 키큰 젊은 사나이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스페이드 씨.”

 

“안녕하시오.”

 

스페이드는 젊은이를 프런트 끝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

 

“12호 C의 개트맨 일행 말인데, 지금 있소?”

 

“아니, 없습니다.”

 

젊은 사나이는 흘끗 스페이드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는 옆을 둘러보고 잠깐 망설이더니 이윽고 스페이드 쪽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오늘 밤 그들에게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스페이드 씨. 누군가가 구급병원에 전화를 걸어 그 방에 소녀가 있다고 말했다나 봅니다.”

 

“그런데 없었단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녁에 일찌감치 모두들 나갔으니까요.”

 

“흐음… 누가 장난을 친 모양이군. 정말 고맙소.”

 

스페이드는 전화 박스로 가서 번호를 댔다.

 

“여보세요. …필라인 부인이십니까? …에피 양, 있습니까? …네, 부탁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아, 예쁜이인가? 무슨 소식 없었소? …그거 참, 잘됐군! 잠깐만 기다리고 있구려, 20분 뒤 그 쪽으로 갈 테니. …알았소.”

 

 

스페이드는 30분 뒤 9번 거리의 2층 벽돌집 벨을 누르고 있었다. 에피 필라인이 문을 열었다. 남자아이 같은 얼굴이 지친 듯했으나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들어오세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엄마가 뭐라고 하시더라도 상냥하게 대해주세요, 샘. 굉장히 화가 나셨어요.”

 

스페이드는 걱정 말라는 듯 웃어보이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피는 스페이드의 팔에 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오쇼네시 양은?”

 

스페이드는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만났소. 감쪽같이 속았잖아. 전화의 목소리가 분명 그 여자인 것 같았소?”

 

“네.”

 

스페이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가짜였소.”

 

에피는 스페이드를 밝은 거실로 안내한 다음 한숨을 쉬며 소파 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지친 얼굴에 미소를 띠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스페이드는 그 옆에 앉았다.

 

“모든 일이 잘 되었소? 꾸러미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겠지?”

 

“네, 전혀. 당신이 하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은 전화내용이 그 일과 관계되는 것이라 당신이 급히 나간 줄 아는 모양이에요.”

 

“댄디 경감도 왔었소?”

 

“아니오, 호프와 오거,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두세 명 왔어요. 서장님과 만났어요.”

 

“경찰서로 끌고 갔었소?”

 

“네, 그래요. 경찰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물었지만 다 틀에 박힌 질문이었어요.”

 

“그거 다행이군.”

 

그러나 스페이드는 두 손을 비비며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니 이번에 나를 만나면 아마 골치아프게 물어대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경감과 브라이언 검사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경찰 말고 누군가 아는 사람이 왔었소?”

 

에피는 앉은 자세를 고쳤다.

 

“네. 그 젊은 사나이 - 개트맨의 심부름을 왔던 사람 말이에요 - 가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경찰이 바깥문을 활짝 열어놓았기 때문에 복도에 서 있는 게 보였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겠지?”

 

“물론이지요. 말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나는 모르는 체했어요. 그랬더니 어느새 없어졌어요.”

 

스페이드는 싱긋 미소지었다.

 

“경찰이 한 발 먼저 와 에피가 운이 좋았군.”

 

“왜요?”

 

“그놈은 악당이오. 그 젊은이는 무서운 놈이야. 그래, 죽은 사람은 재코비였소?”

 

“네.”

 

스페이드는 에피의 두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제 그만 돌아가봐야지. 당신도 쉬는 게 좋겠소. 굉장히 피로해 보이는군.”

 

그녀도 일어섰다.

 

“샘, 대체…”

 

스페이드는 그녀의 입을 한쪽 손으로 막았다.

 

“그건 월요일에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이쯤하고 도망쳐야겠소. 당신 어머님께 붙잡혔다간 큰일이니까. 틀림없이 어린양을 흙투성이로 만들었다고 꾸중들을 거요.”

 

 

스페이드가 아파트에 닿은 것은 밤 12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열쇠를 현관 열쇠구멍에 꽂자 뒷거리 쪽에서 자박자박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열쇠를 그대로 둔 채 뒤돌아 보았다. 브리짓 오쇼네시가 돌층계를 뛰어올라왔다. 그녀는 느닷없이 두 손을 벌려 스페이드에게 기대며 숨이 찬 듯 헐떡거렸다.

 

“아아, 영원히 돌아오시지 않는 줄 알았어요.”

 

초췌한 얼굴이 무섭게 흐트러져 있고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와들와들 떨며 있었다.

 

스페이드는 한쪽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며 다른 손으로 열쇠를 더듬어 문을 열자 그녀를 끌어안듯이 하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띄엄띄엄 말했다.

 

“네. 거리 - 저쪽 집 - 문 앞에서.”

 

“괜찮겠소? 안고 갈까?”

 

스페이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어딘가… 앉을 수 있는… 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스페이드의 방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 그의 방 앞에 이르렀다. 그가 열쇠를 돌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헐떡이며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서 있었다. 스페이드는 복도 불을 켰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스페이드는 문을 닫고 다시 여자의 몸을 안듯이 하여 거실 쪽으로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이 거실로 막 들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거실 전등이 환하게 켜졌다.

 

오쇼네시는 소리를 지르며 스페이드에게 매달렸다. 거실문 바로 안쪽에 뚱뚱이 개트맨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윌머가 뒤쪽 부엌에서 나왔다. 검은 쌍권총이 그의 작은 손 안에서 유난히 커보였다. 카이로가 욕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도 권총을 들고 있었다.

 

개트맨이 입을 열었다.

 

“자아, 보시다시피 이제 다 모인 것 같군요. 그럼, 안으로 들어가 자리잡고 앉아 천천히 쉬어가며 이야기하기로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