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타의 매
스페이드가 브리짓 오쇼네시를 에피의 집으로 데려다주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전화 벨이 울렸다.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네, 스페이드입니다. …듣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누구십니까? …개트맨 씨로군요? 네, 좋습니다. …그럼, 지금 - 빠를 수록 좋겠지요. 12호 C …알았습니다. 네, 15분쯤이면… 알았습니다.”
스페이드는 그대로 전화기 옆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담배를 말기 시작했다. 입이 만족스러운 듯 V자형으로 꽉 다물어져 있었다.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고 담배를 마는 손가락 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눈에는 개운치 않은 생각이 감돌고 있었다.
이때 불쑥 문이 열리고 아이버가 들어왔다.
“아이버!”
갑자기 그의 얼굴표정이 상냥해지고 목소리도 밝아졌다. 아이버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부탁해요, 샘! 나를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장갑을 낀 작은 손에 검은 테를 두른 손수건을 들고 문 바로 안쪽에 서서 빨갛게 부어오른 겁먹은 눈길로 스페이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 일어나지도 않았다.
“아아, 괜찮소. 그런 건 잊어버렸소.”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샘! 당신한테 경찰을 보낸 건 나였어요. 나는 질투심에 머리가 멍해져서 마침내 경찰에 전화를 걸어 그곳에 가면 마일즈 살해범의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어요.”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했소?”
“생각한 게 아니라 머리가 멍하여 내 정신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당신을 곯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덕분에 혼났소.”
스페이드는 팔을 돌려 그녀의 몸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걱정할 것 없소. 그리고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이제 다시 하지 말구려.”
그녀는 약속했다.
“절대로 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어젯밤 굉장히 냉담했어요. 차갑고 매정하고, 나를 눈 위의 혹처럼 여겼어요. 꼭 알려주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일부러 찾아가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알려주다니, 뭘?”
“필에 대한 거예요. 필은 당신과 내가 애인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마일즈가 그에게 내가 이혼하고 싶어한다는 걸 이야기했던 모양이에요. 물론 그때는 이혼의 이유까지는 몰랐을 거예요. 그런데 요즘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마일즈가 이혼을 승낙해 주지 않자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아니, 우리라기보다 당신이 자기 동생을 죽였다고요. 그는 나에게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어제는 기어코 경찰을 찾아가 그 말을 했어요.”
스페이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수고했소. 그래서 당신은 그 사실을 나에게 알리려고 달려왔었군. 그런데 내가 바빠서 머리끝까지 화를 내어 필 아처의 소동을 거든 셈이 되었군.”
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나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줄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그건 사실이 아니오. 나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큰일이오. 그때 마일즈가 죽은 뒤 댄디 경감이 당신 집에 갔었소? 아니면 누군가 다른 경찰이 가지 않았소?”
“아니오.”
아이버는 놀란 듯 눈과 입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틀림없이 찾아갈 거요. 당신이 여기 와 있는 것을 누가 보면 좋지 않을 텐데… 경찰에 전화를 걸 때 이름을 댔소?”
“천만에요! 나는 다만 곧 당신 아파트로 가면 살인사건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만 말했어요.”
“어디서 전화를 걸었소?”
“당신 아파트 근처에 있는 약국에서요. 난 정말…”
스페이드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명랑하게 말했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군.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오. 자아, 빨리 집으로 돌아가 경찰의 물음에 대답할 말을 생각해 두오. 그들이 틀림없이 찾아갈 테니까. 그때는 ‘모른다’ 라는 한 마디로 버티는 게 가장 좋을 거요.”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먼저 시드 와이즈를 만나두는 게 좋을까?”
스페이드는 그녀의 몸에서 팔을 풀고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뒤에 세 줄 가량 뭐라고 써넣어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시드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괜찮을 거요. 대강 이야기라면.”
그는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마일즈가 살해된 날 밤 당신은 어디에 있었소?”
“집에요.”
그녀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스페이드는 히죽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정말이에요.”
그녀는 주장했다.
“그렇지 않을 텐데. 하지만 당신이 꾸며놓은 각본이라면 상관없소. 아무튼 시드를 만나보구려. 이 다음 모퉁이 핑크 색 건물이오. 827호.”
아이버의 파란 눈이 살피듯 스페이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물었다.
“어째서 내가 집에 없었다고 생각하지요?”
“그냥 우연히 알게 된 거요.”
“하지만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아이버의 입술이 일그러지고 노여움으로 눈이 어두워졌다.
“에피 필라인이 그렇게 말했군요. 그녀는 오자마자 내 옷을 살펴보고 사방을 둘러보았어요. 그녀는 나를 싫어해요, 샘. 나는 난처하게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해낼 여자예요. 그걸 아셔야 해요. 어째서 그런 아이의 말만 믿지요?”
“여자들이란 골치아프군.”
스페이드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서 서두르는 게 좋을 거요. 아이버. 덕분에 나는 약속시간에 늦게 되었소. 아무튼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구려. 그러나 내가 당신이라면 시드에게 사실을 털어놓는가 아니면 입을 다물고 있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할 거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대신 엉터리 이야기는 꾸며대지 말란 말이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샘.”
아이버는 여전히 항의하듯 말했다.
“바보 같은 말은 그만두오. 아이버!”
스페이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이버는 발 끝으로 서서 그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내밀어 속삭였다.
“나를 믿지 않으세요?”
“믿을 수 없소.”
“그럼, 내가 한 일도 용서해 주시지 않았군요?”
스페이드는 머리를 숙여 그녀의 입에 키스하며 말했다.
“용서해 주었소. 이제 됐으니 빨리 가보오.”
그녀는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와이즈 시에게 같이 가주시지 않겠어요?”
“안 되오. 가봐야 방해만 될 테니까.”
스페이드는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자기 몸에서 떼어내 그녀의 한쪽 손목을 잡고 장갑과 소맷부리 사이에 키스했다. 그는 두 손을 여자의 어깨에 얹고 문 쪽으로 방향을 돌린 다음 슬쩍 밀며 명령했다.
“자아, 어서 가보구려!”
알렉산드리아 호텔 C의 마호가니 문을 열어준 것은 스페이드가 벨비디어 호텔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눈 그 젊은이였다. 스페이드는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여어!”
젊은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비켜섰다.
스페이드가 안으로 들어서자 한 뚱뚱한 사나이가 맞아들였다. 굉장히 살찐 사나이였다. 볼도 입술도 턱도 고깃덩어리가 알뿌리처럼 불룩불룩 핑크빛으로 부풀어 올랐으며, 가슴과 배가 하나로 이어져 커다란 달걀 같은 모습이었는데, 거기서 팔과 다리가 원뿔처럼 늘어져 있었다. 스페이드를 맞아들이려고 걸을 때마다 그 모든 알뿌리들이 일단 불쑥 튀어올라왔다가는 부르르 떨리며 하나하나 따로따로 가라앉았다. 그 모습은 마치 금방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대롱 끝에 매달린 비누방울 같았다. 둘레의 살이 부풀어올라 조그맣게 보이는 눈은 검은빛으로 반짝였다. 커다란 머리에는 검은 곱슬머리가 드문드문 달라붙어 있었다. 앞단을 어슷하게 자른 검은 컷어웨이(윗옷 앞자락을 뒤쪽으로 어슷하게 재단한 것)의 윗옷에 검은 조끼, 검은 새틴 에스코트 넥타이에 분홍빛도는 넥타이핀, 회색 우스팃 줄무늬 바지, 검은 에나멜 구두 - 이것이 그 사나이의 몸차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스페이드 씨.”
사나이는 목을 죄는 듯한 목소리로 감격한 것처럼 말하며 불가사리같이 생긴 통통한 분홍빛 손을 내밀었다. 스페이드는 그 손을 잡으며 싱긋 미소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개트맨 씨.”
뚱뚱한 사나이는 스페이드의 손을 잡은 채 옆으로 나란히 서더니 다른 손으로 스페이드의 팔꿈치를 떠받치며 녹색 카페트 위를 걸어 테이블 옆에 놓인 녹색 벨벳 의자 쪽으로 안내했다. 테이블에는 사이펀과 술잔과 조니 워커 병이 놓인 쟁반과 콜로너스 델 리츠의 잎담배 상자와 두 종류의 신문과 작은 활석(滑石)상자가 놓여 있었다.
스페이드는 녹색 의자에 앉았다. 뚱뚱한 사나이는 두 개의 술잔에 위스키와 소다수를 따랐다. 젊은이는 어디론지 모습을 감췄다. 세 면의 벽에 달린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스페이드의 뒤쪽 벽 - 문이 없는 벽 - 에는 창문이 두 개 있어 그곳으로 기얼리 거리가 내다보였다.
뚱뚱한 사나이는 잔을 들어 스페이드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아, 한잔 합시다! 나는 이런 때 술을 마시면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지요.”
스페이드는 잔을 받더니 미소지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뚱뚱한 사나이는 창문 쪽으로 잔을 들어올려 비춰보았다. 그는 잔 속에서 거품이 이는 것을 보자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아, 건배합시다! 툭 털어놓고 이야기하여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두 사람은 잔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뚱뚱한 사나이는 스페이드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당신은 말수가 적은 편입니까?”
“아닙니다. 말이 많은 편입니다.”
스페이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뚱뚱한 사나이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거 참, 잘됐군요! 나는 말수가 적은 사람은 믿지 않는답니다. 그런 사람은 으레 당치도 않을 때 엉뚱한 말을 지껄이기 마련이지요. 말이라는 것은 여느 때 연습해 두지 않으면 잘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사나이는 술잔 너머로 밝은 미소를 던졌다.
“그런 점으로 보니 우리는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는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고 나서 스페이드에게 담배상자를 내밀었다.
“어떻습니까, 한대 피우시지요.”
스페이드는 한 개비 꺼내 끝을 자르고 불을 붙였다. 그동안 뚱뚱한 사나이는 녹색 벨벳 의자를 끌어다 적당한 거리에 놓고 스페이드와 마주앉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이 닿는 곳에 스탠드 식 재떨이를 갖다놓았다. 그런 다음 테이블에서 자기 잔을 가져오고 담배상자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의자에 앉았다. 불룩불룩한 알뿌리들이 진동을 멈추고 잠잠해졌다. 일단 자리를 잡고 앉자 사나이는 기분좋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대화하기를 좋아합니다.”
“좋지요. 그럼, 검은 새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요?”
뚱뚱한 사나이는 소리내어 웃었다. 웃는 데 따라 얼굴의 알뿌리들이 아래위로 크게 흔들렸다.
“하시겠습니까? 그럼, 합시다.”
사나이는 자문자답하며 핑크 빛 얼굴을 기쁜 듯이 빛냈다.
“당신은 나하고 배짱이 맞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타입인가 봅니다. 에둘러 말하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검은 새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요?’ 라니 말입니다. 좋습니다. 이야기합시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럼, 새에 대해 말하겠는데, 그 전에 한 가지 - 공연한 짓인지도 모르지만 - 내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 처음부터 오해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당신은 오쇼네시의 대리인으로 오신 겁니까?”
스페이드는 뚱뚱한 사나이의 머리 위로 어슷한 깃털장식처럼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눈살을 찌푸리고 담배끝의 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니 이윽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없군요. 아직 확실치 않으니까요.”
그는 눈길을 들어 상대방의 얼굴을 보았으나 이마에 주름은 없었다.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지요.”
“어떻게 나오다니요?”
스페이드는 고개를 내둘렀다.
“그걸 알면 내가 오쇼네시 양의 대리인인지 아닌지 대답할 수 있겠지요.”
뚱뚱한 사나이는 꿀꺽 술 한 모금을 마셨다.
“카이로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다는 말씀입니까?”
“글쎄요…”
스페이드의 대답은 어느 쪽으로나 받아들일 수 있는 애매한 것이었다.
그도 꿀꺽 술을 마셨다. 뚱뚱한 사나이는 그 불룩한 배가 허용하는 한 윗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미소와 쉰 목소리에는 애교가 넘쳐흘렀다.
“그러니까 당신 두 사람 중 어느 쪽 대리인이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군요.”
“그렇게 볼 수 있지요.”
“두 사람 중 어느 쪽이든 한 사람의 대리인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뚱뚱한 사나이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의 쉰 목소리가 속삭이듯 낮아졌다.
“그 밖에 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지요.”
스페이드는 담배 끝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뚱뚱한 사나이는 다시 의자에 몸을 묻더니 축 늘어지며 만족한 듯 긴 한숨을 쉬었다.
“훌륭합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나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답니다. 그런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부정하는 것이 그 사람의 진실이라면 그런 자는 더욱 믿을 수가 없지요. 그런 사람은 바보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거역하는 큰 바보입니다.”
스페이드는 연기를 내뿜으며 예의바르게 조용히 귀기울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겠지요. 그럼, 이제 검은 새 이야기로 옮겨갑시다.”
뚱뚱한 사나이는 상냥한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합시다.”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으므로 온 얼굴의 군살이 한곳으로 모여들어 검게 빛나는 눈동자로 겨우 눈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었다.
“스페이드 씨, 당신은 그 검은 새가 얼마만큼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아니오.”
사나이는 다시 몸을 내밀더니 퉁퉁한 핑크 빛 손을 스페이드의 의자팔걸에에 걸쳤다.
“그렇다면 만일 내가 그 값을 이야기한다면 - 아니, 그 반값이라도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아마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스페이드는 웃었다.
“비록 그렇게 생각했다 해도 입 밖에 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성이 꺼려진다면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말해 주십시오. 평가는 내 쪽에서 내릴 테니까요.”
뚱뚱한 사나이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건 무리한 일입니다.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그는 강한 인상을 주려는 듯 잠시 말을 끊었다.
“이것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물건이니까요.”
그가 다시 웃자 알뿌리 근육이 얼굴에서 이리저리 밀리듯 움직였다. 그는 갑자기 웃음을 그쳤다. 두툼한 입술이 웃을 때의 모스 그대로 멍청히 벌려져 있었다. 근시인 것 같은 진지한 눈이 스페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당신은 이것이 어떤 물건인지 모르신단 말입니까?”
쉰 목소리가 놀란 나머지 기어들어갔다. 스페이드는 손에 든 담배로 그런 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 가볍게 말했다.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터무니없는 값을 붙이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정체를 모를 뿐입니다.”
“그 여자가 말하지 않던가요?”
“오쇼네시 양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주 귀여운 여자지요.”
“글쎄요. 하지만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뚱뚱한 사나이의 눈이 부푼 핑크 빛 살 속에서 번쩍 검은빛을 뿜었다. 사나이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알고 있을 텐데… 카이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주 교활한 사람이더군요. 사고 싶어하면서도 네가 모르는 일을 내가 말할 줄 아느냐는 태도입니다.”
뚱뚱한 사나이는 혀 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카이로는 얼마에 사겠다던가요?”
“1만 달러.”
뚱뚱한 사나이는 경멸하듯 웃었다.
“겨우 1만! 그것도 파운드가 아니라 달러로! 정말 어이없는 그리스 녀석이로군! 흐음, 그래. 당신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만일 그것을 넘겨줄 수 있게 되면 1만 달러를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아아, 만일? 아주 그럴 듯한 말을 하셨군요.”
사나이의 이마가 꿈틀꿈틀 움직이자 분명치 않은 세로 주름이 생겼다.
“그들은 알고 있을 텐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스페이드를 보았다.
“어떻습니까, 그 새가 어떤 건지 두 사람은 알고 있는 것 같던가요? 당신은 어떻게 느꼈습니까?”
스페이드는 솔직히 고백했다.
“글쎄요,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만난 지 며칠 안 되었으니까요. 카이로는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모른다고 했지만 그건 틀림없이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요.”
사나이는 지금 마음이 다른 데 쏠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머리를 긁었다. 이마에 빨간 줄무늬가 생길 정도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의자의 치수와 그의 몸 부피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불안스럽게 움직거렸다.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갑자기 번쩍 뜨며 스페이드에게 말했다.
“어쩌면 모를지도 모릅니다.”
부풀어오른 핑크 빛 얼굴에서 차츰 걱정스러운 듯한 찡그린 표정이 사라지고 곧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만일 모른다면… 만일 그 두 사람이 정말 모른다면 알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나 혼자인 셈이 됩니다!”
스페이드는 입술을 꼭 다물고 굳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이곳에 오기를 잘한 모양이군요.”
뚱뚱한 사나이도 미소를 지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애매했다. 행복해하던 표정이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경계의 빛이 감돌았다. 그 얼굴은 자기 생각과 스페이드의 생각 사이에서 일부러 내세운 경계의 눈초리로 미소를 띤 가면이었다. 사나이의 눈은 스페이드의 눈길을 피하며 스페이드의 팔꿈치 옆에 있는 잔으로 옮겨갔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니 당신 잔이 비었군요!”
뚱뚱한 사나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잔과 사이펀과 위스키 병을 달그락거리며 두 사람 몫의 술을 만들었다.
의자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던 스페이드는 뚱뚱한 사나이가 다가와 허풍스럽게 허리를 굽히며 농담 비슷이 “자아, 백약(百藥)보다 낫다니 한잔!” 하고 잔을 내미는 순간 벌떡 일어났다.
그는 뚱뚱한 사나이 앞으로 다가가 위에서 상대방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이 험하게 번쩍였다. 그는 잔을 들어올리며 도전하는 듯한 목소리로 신중하게 말했다.
“건배! 속을 툭 털어놓고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뚱뚱한 사나이는 목구멍 속으로 껄껄 웃었다. 두 사람은 마셨다. 뚱뚱한 사나이는 자리에 앉았다. 잔을 배 앞에서 두 손으로 받쳐들고 웃으면서 스페이드를 올려다 보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두 사람 모두 새의 정체를 정확히 모른다면, 이 넓은 세계에서 그것을 아는 사람은 이 캐스퍼 개트맨 하나 뿐입니다.”
“좋습니다.”
스페이드는 두 다리를 크게 벌린 채 한쪽 손은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른 쪽 손에는 잔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 이야기해 준다면 알고 있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이 되겠지요.”
“수학적으로는 그렇지요.”
뚱뚱한 사나이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윽고 온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할 것인지 아닌지 아직 분명치 않습니다.”
“농담은 그만둡시다!”
스페이드는 꾹 참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 정체를 알고 있고 나는 그것이 있는 장소를 알고 있소. 그래서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게 아니오?”
“그렇군요. 그런데 대체 그게 어디 있습니까?”
스페이드는 이 질문을 무시했다. 뚱뚱한 사나이는 입을 꾹 다물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머리를 조금 왼쪽으로 기울였다.
“이것 보십시오.”
사나이는 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나보고는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라고 하면서 당신은 말할 수 없다니, 이거 어디 공평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나와서는 이야기가 안 됩니다.”
스페이드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험악해졌다. 그는 화난 목소리로 재빨리 나지막하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빨리 생각을 달리하는 게 좋을걸! 아까도 당신 부하에게 나와 이야기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될 거라고 말했소. 이번에는 당신에게 말해 두지. 지금 나에게 말하겠소, 아니면 깨끗이 이 일에서 손을 떼겠소? 둘 중 하나를 택하시오. 무슨 속셈에서 내 시간을 빼앗은 거요? 당신들의 비밀 따위는 내 알 바 아니오! 내 말하겠는데, 은행금고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소! 당신 같은 사람이 없어도 이 일은 문제없이 해낼 수 있소. 당신도 나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면 당신 혼자 해낼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소. 이곳은 샌프란시스코요. 자아, 나하고 겨루겠소. 아니면 손을 떼겠소? 어느 쪽이오? 오늘 안으로 결정하시오.”
스페이드는 홱 돌아서자 화난 김에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집어던졌다. 술잔이 테이블에 부딪쳐 산산조각났다. 술과 반짝이는 유리조각이 테이블과 바닥에 흩어졌다. 스페이드는 그것을 보지도 않고 홱 몸을 돌려 다시 뚱뚱한 사나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스페이드와 마찬가지로 뚱뚱한 사나이도 술잔의 운명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입을 다물고 눈썹을 치켜올리며 머리를 왼쪽으로 갸우뚱한 채 스페이드가 고함치는 동안 내내 핑크 빛 얼굴에 온화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지금도 그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스페이드는 여전히 격렬한 말투로 소리쳤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는…”
스페이드의 왼쪽에 있는 문이 열렸다. 아까 그를 맞아들인 그 젊은이가 들어왔다. 그는 문을 닫자 두 손을 옆구리에 대고 문 앞에 서서 스페이드를 노려보았다. 커다랗게 부릅뜬 큰 눈동자가 음침하게 내다보고 있었다. 그 눈길은 스페이드의 몸을 어깨에서 무릎까지 훑어내려가더니 다시 재빨리 위로 더듬어 올라가 갈색 윗옷 가슴주머니에서 비어져나는 갈색 테를 두른 손수건 위에서 멎었다.
“또 한 가지 있소.”
스페이드는 젊은이를 노려보며 되뇌었다.
“당신이 결정짓는 동안 저 애송이를 쫓아내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릴 테니까. 꼴도 보기 싫소! 보기만 해도 울화통이 터진단 말이오. 조금이라도 내 일을 방해했다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옥에 떨어질 거요. 아무 소리 못하게 죽여버릴 테니까!”
젊은이는 입술을 뒤틀며 어두운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눈도 들지 않았고 입도 벌리지 않았다. 뚱뚱한 사나이가 점잖게 말했다.
“정말 당신은 화를 꽤 잘 내는구려.”
“화를 잘 낸다고?”
스페이드는 정신나간 듯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방을 가로질러 모자를 놓아둔 의자 앞으로 가더니 얼른 집어 머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긴 팔을 뻗어 굵은 둘째손가락으로 뚱뚱한 사나이의 배를 가리켰다. 이윽고 그의 고함 소리가 옆방에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잘 생각해 두시오. 시간은 5시 30분까지요. 그때까지 손을 댈 것인가 뗄 것인가 결정해 두시오.”
스페이드는 팔을 내린 다음에도 한동안 뚱뚱한 사나이의 온화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젊은이의 얼굴을 잠깐 노려본 뒤 아까 들어왔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스페이드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다시 거칠게 소리쳤다.
“알겠소? 5시 30분이오.”
젊은이는 스페이드의 가슴에 눈길을 못박은 채 벨비디어 호텔 로비에서 그에게 두 번이나 퍼부었던 상스러운 욕을 되뇌었다. 목소리는 작았으나 울림이 날카로웠다. 방에서 나가자 스페이드는 문을 쾅 닫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