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타의 매
스페이드가 윗몸을 일으켰을 때는 훤히 먼동이 터오기 시작하여 밤의 어둠이 뽀얀 아침안개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브리짓 오쇼네시가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스페이드는 소리나자 않도록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침실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그는 욕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자고 있는 오쇼네시의 옷을 조사하였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납작한 놋쇠열쇠를 꺼내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콜로네트 아파트로 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 가져온 열쇠로 문을 열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담하게 곧장 들어갔으므로 누가 보든 수상하게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움직였으므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자 전등을 모두 켜고 방 안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과 굵은 손가락이 서두르지도 꾸물거리지도 망설이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익숙하고 착실한 솜씨로 차근차근 움직여 온 방을 탐색하고 음미하여 검사해 나갔다. 서랍, 그릇장, 벽장, 상자, 가방, 트렁크 - 잠겨 있든 열려 있든 - 모조리 열어젖히고 그 속을 눈과 손가락으로 조사했다. 한 벌 한 벌 옷마다 불룩한 곳이 없나 손으로 더듬어 확인하고 누른 손가락 사이에서 종이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귀를 기울였다. 침대 이부자리도 모조리 벗겨보았다. 융단 밑도, 가구 아래쪽도 들여다보았다. 창문의 블라인드도 끌어내려 그 속에 감춰진 게 없는지 살펴보았다.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바깥에 매달아 놓은 게 없는지 조사했다. 화장대 위 파우더와 크림통은 포크로 휘저어보았다. 향수 뿌리개와 병은 환한 불빛에 비춰보았다. 접시며 냄비며 식료품, 그밖의 그릇도 조사했다. 신문지를 펴고 쓰레기가 든 통조림통도 비워보았다. 욕실 변기뚜껑을 열고 물을 뺀 뒤 속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욕조, 세면대, 개수대, 세탁통, 그리고 배수통에 달려 있는 쇠망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살펴보고 확인했다.
그러나 검은 새는 나타나지 않았다. 검은 새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을 듯한 것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만 1주일 전에 브리짓 오쇼네시가 한 달분 아파트 방값을 지불한 영수증이 나왔을 뿐이었다. 단 한 가지 수사의 속도를 늦출 만큼 관심을 끈 것은 잠긴 화장대 서랍에서 나온 고운 색깔의 보석상자 속에 아주 훌륭한 보석들이 한웅큼이 넘도록 들어 있는 점이었다.
일이 끝나자 스페이드는 커피를 끓여마셨다. 그리고 부엌 창문을 열고 주머니칼로 걸쇠 끝에 칼자국을 낸 다음 비상층계 위에 있는 그 창문을 열어 둔 채 거실로 돌아가 긴의자 위의 모자와 코트를 집어들었다. 들어왔을 때와 같은 요령으로 밖으로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잠이 덜 깬 남자가 추위에 떨면서 가게문을 여는 식료품 가게에 들러 오렌지와 달걀, 그리고 롤 빵과 버터와 크림을 샀다.
스페이드는 소리없이 살짝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가 채 현관을 닫기도 전에 브리짓 오쇼네시가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구세요?”
“스페이드 씨가 아침식사 재료를 사왔습니다!”
“어머나, 놀랐잖아요?”
나갈 때 닫아두었던 침실문이 열려 있었다. 그녀는 덜덜 떨며 침대가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 손은 베개 밑에 들어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스페이드는 식료품이 든 봉투를 부엌 식탁 위에 놓고 침실로 돌아왔다. 그는 그녀와 나란히 침대에 걸터앉아 매끄러운 어깨에 키스했다.
“그 꼬마녀석이 아직도 지키고 있는지 확인해 보러 나간 길에 아침식사거리를 사왔소.”
“아직 있나요?”
“아니.”
오쇼네시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잠이 깨보니 당신이 없잖아요. 그런데 발자국 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어요.”
스페이드는 그녀의 붉은 머리털을 밑에서부터 손가락으로 쓸어올려주었다.
“미안하오. 돌아올 때까지 자고 있을 줄 알았지. 당신은 그 권총을 밤새도록 베개 밑에 넣어두었소?”
“아니에요. 당신도 아시잖아요. 지금 너무 놀라 달려가서 가져온 거예요.”
스페이드는 아침식사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납작한 놋쇠 열쇠를 살짝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 도로 넣어두었다.
그녀는 ‘엔 큐바’ 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며 욕실에서 나왔다.
“침대는 내가 정리할까요?”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소. 달걀이 다 익으려면 2, 3분쯤 더 있어야 하니까.”
그녀가 부엌으로 돌아왔을 때는 식탁 위에 두 사람의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전날 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했다. 이윽고 스페이드가 식사를 하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 새 말이오.”
오쇼네시는 포크를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입을 오므려 뾰죽이 내밀었다.
“그 많은 말 중에서 하필이면 오늘 아침에도 또 그 말을 꺼내다니 당신도 너무 하시는군요. 싫어요, 난 절대로 말하지 않겠어요.”
“당신이란 여자는 정말 고집불통이군.”
스페이드는 슬픈 듯이 말하며 롤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스페이드와 브리짓 오쇼네시가 길 건너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 앞으로 갔을 때도 미행하던 젊은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택시를 뒤쫓는 자동차도 없었다. 택시가 콜로네트 아파트에 이르렀을 때도 건물 근처에는 그 젊은이는 물론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브리짓 오쇼네시는 스페이드를 따라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런 시간에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동반자도 없이 돌아오는 꼴은 정말 보기 흉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오늘 밤에 저녁식사를 같이하지 않겠소?”
“좋아요.”
두 사람은 키스했다. 그녀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스페이드는 택시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벨비디어 호텔로.”
호텔에 닿았을 때 그는 로비에서 어젯밤 그를 뒤쫓았던 젊은이를 보았다. 엘리베이터가 잘 보이는 긴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프런트에 가서 물으니 카이로는 외출중이라고 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에 빛나는 노란 점이 뛰기 시작했다.
“고맙소.”
그는 조그만 목소리로 직원에게 말하고 그곳을 떠났다.
어슬렁어슬렁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가 보이는 긴의자로 다가갔다. 스페이드는 신문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 바로 옆 - 30센티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젊은이는 신문에서 얼굴을 들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그는 아직 20살도 안 된 것 같았다. 몸집에 어울리게 얼굴 생김은 오동통하니 균형이 잡혀 있었다. 피붓빛도 깨끗했다. 볼에는 핏기가 없고 수염도 거의 나지 않았으므로 얼굴이 더 희게 보였다. 옷은 새것도 아니고 고급품도 아니었지만 세련되게 입었으므로 아주 남자다운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스페이드는 썬 담배를 구부린 갈색 종이에 놓으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는 어디 갔소?”
젊은이는 재빨리 반응을 보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는 듯 일부러 느린 동작으로 신문을 내려놓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바짝 올라간 긴 속눈썹 밑에서 작은 연갈색 눈이 스페이드의 가슴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젊은 얼굴에 어울리는 아무 색깔 없는 침착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소.”
스페이드의 손은 담배말기에 바빴다.
“누구요?”
“자네 형.”
연갈색 눈이 스페이드의 가슴을 기어올라가 붉은 갈색 넥타이의 매듭 언저리에서 멎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누굴 놀리는 거요?”
“놀리게 되면 미리 말해 주지.”
스페이드는 담배를 핥으며 조용히 미소 띤 얼굴을 돌렸다.
“자네는 뉴욕에서 왔지?”
젊은이는 스페이드의 넥타이를 쳐다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스페이드는 상대방이 그렇다고 대답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럿이서 몰려온 모양이지?”
젊은이는 한동안 스페이드의 넥타이를 바라보다가 신문을 들고 눈길을 그 위로 돌렸다.
“저쪽으로 가시오!”
스페이드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긴의자에 천천히 등을 기대며 태평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네들은 어차피 나와 이야기를 나눠야 해. 그렇지 않고서는 결말이 안 날걸. 내가 그러더라고 G에게 말하게.”
젊은이는 신문을 아래로 홱 내리더니 차가운 연갈색 눈으로 스페이드의 넥타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작은 두 손을 펴서 배 위에 갖다대며 말했다.
“언제까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일 작정이오? 그렇다면 쉽게 끝나지 않을걸.”
그 목소리는 낮고 억양이 없었지만 위협적인 데가 있었다.
“저쪽으로 가라고 했잖소!”
스페이드는 안경 쓴 키 작은 사나이와 다리가 긴 금발의 여자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런 대사는 뉴욕 7번 거리에서라면 통하겠지. 그러나 미안하게도 여긴 뉴욕이 아닐세. 샌프란시스코는 내 고장이야.”
담배연기를 힘껏 빨아들였다 내뱉자 연푸른 구름이 길게 깔렸다.
“그래, 그는 어디 있나?”
젊은이는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짧은 말을 내뱉었다.
“그런 식으로 입을 놀렸다간 앞니가 부러질 줄 알아!”
스페이드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으며 얼굴은 가면처럼 무표정 했다.
“이 고장에서 발을 붙이고 싶거든 좀더 얌전하게 굴어!”
젊은이는 아까처럼 짧은 말을 되뇌었다.
스페이드는 긴의자 옆 키 큰 돌항아리 속에 담배를 던져넣고 손을 들어 아까부터 담배가게 한쪽구석에 서 있는 사나이에게 신호를 보냈다.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보통몸집에 보통키의 중년사나이였다. 동그랗고 파리한 얼굴과 아담한 몸집에 단정한 검은색 옷차림이었다.
그 사나이가 다가오며 말했다.
“잘 있었나, 샘!”
“여어, 루크!”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루크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마일즈가 큰 변을 당했더군.”
“굉장한 재난이었지.”
스페이드는 머리를 크게 내두르며 긴의자 옆에 앉아 있는 젊은이를 가리켰다.
“대체 자네는 호텔에서 어쩌자고 로비에 이런 풋내기를 드나들게 하나? 자아, 보게, 총으로 옷이 불룩하지 않나?”
“정말인가?”
루크는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날카로운 갈색 눈으로 흘끗 젊은이를 살펴보며 나무라듯 물었다.
“무슨 일로 왔소?”
젊은이는 일어섰다. 스페이드도 일어섰다. 젊은이는 두 사람의 넥타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루크의 넥타이는 검은색이었다. 젊은이는 마치 선생 앞에 선 초등학교 학생처럼 보였다. 루크가 말했다.
“자아, 용건이 없으면 썩 나가게, 그리고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게!”
“어디 두고 보자!”
젊은이는 호텔에서 나갔다. 두 사람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스페이드는 모자를 벗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호텔 전속탐정이 물었다.
“뭔가, 저 젊은이는?”
“글쎄… 나도 우연히 만났을 뿐일세. 그건 그렇고. 635호 조엘 카이로라는 손님을 아나?”
“아아, 그 사람!”
호텔 전속탐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며칠이나 묵었지?”
“나흘, 오늘로 닷새째일세.”
“어떤가?”
“전혀 모르겠네. 뭐 이렇다할 특징은 없는 것 같네. 얼굴이 좀 마름에 들지 않지만.”
“어젯밤에 돌아왔었는지 조사해 줄 수 있겠나?”
“알아보지.”
호텔 탐정은 프런트로 갔다. 스페이드가 긴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노라니까 그가 돌아왔다.
“돌아오지 않았다네.”
루크가 보고했다.
“자기 방에서 자지 않았다는군.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 뭐…”
“여보게 감추지 말게. 나는 절대로 남에게 말하지 않네. 다만 만일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묻는 걸세. 계산을 잘못하게 되면 큰일이니까.”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네.”
스페이드는 보증했다.
“사실은 지금 그 사람의 부탁으로 조그만 일을하고 있는 중일세. 만일 눈치가 이상하면 곧 알려주지.”
“부탁하네. 뭣하면 나도 눈여겨보아줄까?”
“고맙네, 루크, 그것도 좋겠지. 아무튼 요즘은 일을 부탁하러 오는 이들이 어디 사는 말뼈다귀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엘리베이터 문 위의 시계가 11시 21분을 가리켰을 때 조엘 카이로가 밖에서 들어왔다. 이마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몇 시간이나 계속 입고 돌아다닌 듯 옷이 후줄근해보였다. 얼굴도 지치고 입과 눈꺼풀도 축 늘어져 있었다.
스페이드가 프런트 앞에서 카이로를 맞았다. 그는 가볍게 말했다.
“안녕하시오, 카이로 씨…”
카이로는 지친 몸을 똑바로 세웠다. 늘어져 있던 얼굴표정이 다시 긴장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스페이드가 다시 말했다.
“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으로 갑시다.”
카이로는 턱을 치켜들었다.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시오. 나는 더 이상 당신과 비밀회담을 계속할 기력이 없습니다. 무례하게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솔직한 심정입니다.”
“어젯밤 일 때문이오?”
스페이드는 머리와 두 손으로 초조한 듯한 시늉을 해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잖소? 그 정도는 당신도 알텐데. 당신이 그 여자와 싸울 경우 어느 쪽에서 건 싸움이든 나는 여자 편을 들 수밖에 없소. 그 새가 어디 있는지 나도 모르고 당신도 모르오. 알고 있는 것은 그녀뿐이오. 그렇다면 그녀와 손을 잡지 않는 한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소.”
카이로는 잠깐 망설이더니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은 언제나 병명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는 모양이군요.”
스페이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벙어리가 되란 말이오? 아무튼 여기서 이야기할 수 있겠군.”
스페이드는 로비의 긴의자로 카이로를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이 앉자 그는 말했다.
“댄디 경감에게 끌려 경찰서까지 갔었소?”
“그렇소.”
“오랫동안 깨묻던가요?”
“조금 전까지. 내 기분은 전혀 생각해 주지 않더군요.”
카이로의 얼굴과 목소리에 고통과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이 일에 대해 그리스 총영사와 변호사와 의논하여 꼭 문제를 일으키겠습니다.”
“어떻게 되나 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그래, 경찰에서는 무엇을 말했소?”
카이로의 얼굴에 점잔뺀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젯밤 당신이 주장한 말을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갑자기 미소가 사라졌다.
“좀더 앞뒤가 맞는 각본으로 꾸며주셨더라면 좋았을걸 그랬습니다그려. 몇 번이나 되풀이하다 보니 어쩐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페이드는 놀리듯 히죽 웃었다.
“하긴 그렇군요. 그러나 그 바보 같은 점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거요. 그럼, 꼬리를 잡히지는 않았겠군요?”
“문제 없습니다. 내가 털어놓을 것 같습니까, 스페이드 씨?”
스페이드는 두 사람 사이의 가죽 시트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한 번쯤 더 경감이 물고 늘어질지도 모르니 끝까지 그 바보 같은 수법으로 밀고 나가야 할 거요. 그렇게 하면 문제 없소.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더라도 신경쓸 것은 없소. 오히려 너무 앞뒤가 잘 맞았다면 우리 모두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을 거요.”
스페이드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밤새도록 시달렸으니 졸리겠군. 그럼, 또 봅시다.”
스페이드가 사무실 바깥방으로 들어가자 에피 필라인이 전화에 대고 “아니오. 아직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참이었다. 스페이드는 머리를 내저었다.
“네. 나오시면 그리로 전화하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큰 소리로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침부터 벌써 세 번째예요.”
스페이드는 화가 난 듯이 신음 소리를 냈다. 에피 필라인은 갈색 눈을 안쪽 방으로 돌렸다.
“당신의 오쇼네시 여사가 기다리고 있어요. 9시 조금 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스페이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보이고 나서 물었다.
“그밖에는?”
“폴하우스 씨에게서 전화가 왔었어요. 전하라는 말은 없었어요.”
“그럼, 그에게 전화 좀 걸어주오.”
“그리고 G에게서도 전화가 왔었어요.”
스페이드의 눈이 번쩍 빛났다.
“누구?”
“G래요. 그렇게만 말하던데요. 안 계신다고 하자 그럼 나오시거든 전갈을 받은 G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전하고 또 다음에 전화하겠다면서 끊었어요.”
에피는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스페이드는 뭔가 좋아하는 것을 맛보고 있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고맙소. 그럼, 톰 폴하우스에게 전화 좀 부탁하오.”
그는 안쪽 문을 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브리짓 오쇼네시의 옷차림은 처음에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와 똑같았다. 그녀는 책상옆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의 옆으로 달려왔다.
“누군가가 내 방에 들어왔어요! 구석구석 다 뒤져서 엉망이 되었어요.”
스페이드는 아주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져간 건 없었소?”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너무 무서워서 방 안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곧 이리로 달려왔어요. 역시 당신은 그 젊은 사람에게 미행당했던 거예요. 틀림없어요.”
스페이드는 머리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소.”
그는 주머니에서 저녁신문 첫판을 꺼내 펴보았다.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도망친 강도’ 라는 표제가 붙은 2단짜리 기사가 있었다.
새터 거리의 아파트에 혼자 사는 캐롤린 빌이라는 젊은 여자가 오늘 오전 4시쯤 침실을 돌아다니는 발자국 소리에 잠이 깨어 비명을 지르자 그 수상한 자는 도망쳤다. 그 뒤 알아보니 같은 아파트에 사는 다른 두 독신녀의 방에도 강도가 들었던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도둑맞은 것은 없었다.
“바로 그 아파트요, 내가 그 녀석을 따돌린 곳은… 빌딩 앞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왔지. 그래서 그는 혼자 사는 여자들을 노렸소. 그는 당신을 찾고 있었던 거요. 아마 당신이 가명으로 들어 있으리라 보고 현관 명찰에 여자 이름이 나와 있는 방만 뒤진 모양이군.”
스페이드는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당신 아파트를 지키고 있었잖아요. 우리가 그곳에 있는 동안 줄곧.”
오쇼네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스페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혼자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는 없소. 어쩌면 당신이 내 아파트에서 잘 것 같으니까 새터 거리로 달려갔는지도 모르오. 아무튼 가능성은 여러 가지 있지만, 나는 절대로 그 녀석을 콜로네트까지 끌고 가지 않았소.”
오쇼네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알려졌어요.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그렇군.”
스페이드는 그녀의 발 밑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면 카이로인지도 모르겠소. 어제 밤새도록 호텔을 비웠다가 조금 전에 돌아왔으니까. 그는 밤새도록 경찰서에서 시달렸다고 하오. 그러나 아무래도 수상해…”
그는 돌아서서 문을 열고 에피 필라인에게 소리쳤다.
“톰에게 아직 연결되지 않았소?”
“지금 안 계시대요. 조금 있다가 다시 걸어보겠어요.”
“고맙소, 에피.”
그는 문을 닫고 다시 브리짓 오쇼네시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어두운 눈으로 스페이드를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에 조를 만나러 가셨군요?”
“그렇소.”
“왜요?”
그녀는 망설이며 물었다.
“왜라니!”
스페이드는 싱긋 미소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번 일은 구름을 잡는 것 같은 사건임을 알아야 하오. 따라서 머리든 꼬리든 붙잡으려면 모든 연줄을 활용할 필요가 있소.”
그는 여자의 어깨를 감싸안고 자기 회전의자 앞으로 데리고 가 코끝에 가볍게 키스한 다음 의자에 앉혔다. 그 자신은 그 앞 책상에 걸터앉았다.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을 위해 어딘가에 새 거처를 마련해 줘야겠군.”
오쇼네시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스페이드는 넓적다리 옆의 책상을 가볍게 톡톡 치며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좋은 수가 있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잠깐만 기다려보오…”
그는 바깥방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에피 필라인이 그를 보자 전화기를 들려고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다시 한 번 걸어보겠어요.”
“아니, 나중에 걸어도 되오. 그보다 에피의 여성적 직감으로 보아 지금도 저 여자를 마돈나처럼 생각하오?”
에피 필라인은 얼굴을 번쩍 들었다.
“네, 지금도 믿고 있어요. 비록 어떤 사건에 말려들더라도 저 여자라면 틀림없어요. 묻고 싶은 건 그 점이지요?”
“맞았소, 바로 그 점이요. 그럼, 에피는 저 여자를 도와줄 용기가 있소?”
“어떻게 하면 되지요?”
“며칠 동안 여자를 숨겨주는 것.”
“우리집에요?”
“그렇지. 누군가 저 여자의 방을 덮쳤소. 이번 주일에 벌써 두 번째요. 그래서 혼자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당신이 도와주면 한시름놓을 텐데…”
에피 필라인은 몸을 내밀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위험한가요?”
“그렇게 생각하오.”
에피는 손톱으로 입술을 긁었다.
“아마, 우리 어머니가 까무러칠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든 설득하겠어요. 저 여자는 당신이 찾아낸 중요한 증인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둬야 할 사람이라고…”
“기특한 말만 하는군, 우리 이쁜이! 그럼, 지금 곧 데려가주겠소? 나는 저 여자에게서 열쇠를 받아 아파트로 가 필요한 물건을 챙겨올 테니까. 아니, 잠깐, 이곳에서 둘이 함께 나가는 것을 누가 보면 좋지 않으니 당신이 먼저 가오, 택시를 타고. 미행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오. 괜찮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조심하도록. 저 여자는 내가 조금 있다가 내보내지. 물론 뒤쫓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