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타의 매
벨트 달린 녹색 크레이프 실크 드레스를 입은 원덜리는 콜로네트 아파트 1001호의 문을 열었다.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왼쪽 가르마를 탄 검붉은 머리를 오른쪽 관자놀이 쪽으로 빗어내렸는데 조금 흩어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스페이드는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스페이드의 미소에 이끌려 그녀의 얼굴에도 살짝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제비꽃빛에 가까운 푸른 눈은 불안한 표정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녀는 머리를 숙여보이며 머뭇머뭇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스페이드 씨.”
그녀는 열려 있는 부엌과 욕실문은 지나 크림 빛과 붉은 빛으로 꾸민 거실로 스페이드를 안내하며 마구 어질러져 있는 데 대해 사과했다.
“모든 게 엉망이에요, 아직 짐도 다 풀지 못했거든요.”
원덜리는 스페이드의 모자를 받아서 테이블에 놓고 호두나무로 만든 긴 의자에 앉았다.
스페이드는 타원형 등받이가 달린 비단의자에 그녀와 마주보고 앉았다. 그녀는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한동안 눈길을 떨어뜨리고 있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스페이드 씨, 오늘은 굉장히 무서운 고백을 해야겠어요.”
스페이드는 정중한 미소를 지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눈을 내리뜬 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어제 한 말은 모두 꾸며낸 거예요.”
그녀는 더듬더듬 말하며 겁먹은 눈으로 스페이드를 올려다 보았다. 스페이드는 가볍게 말을 받았다.
“아아, 그것 말입니까? 우리도 당신 이야기를 그대로 다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슬픔과 공포가 가득찬 여자의 눈에 다시 당혹한 빛이 떠올랐다.
“그보다도 우리는 당신의 2백 달러를 믿은 거지요.”
“무슨 뜻이지요?”
그녀는 스페이드의 말을 못 알아들은 듯싶었다.
“당신이 진실을 말한 거라면 지불한 금액이 너무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의 일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 많은 돈이었으니까요.”
그는 상냥하게 설명했다. 원덜리의 눈이 밝아졌다. 그녀는 긴 의자에서 엉덩이를 조금 들어 고쳐 앉더니 스커트를 잘 매만지고 몸을 앞으로 내밀며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당신은 나를 위해…”
스페이드는 손바닥을 위로 하고 한쪽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이마에 험상궂은 주름이 잡혔으나 입매는 미소짓고 있었다.
“그것은 일 나름이지요. 그건 그렇고, 대체 당신 이름은 어느 쪽입니까, 원덜리입니까, 르블랑입니까?”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실은 오쇼네시에요. 브리짓 오쇼네시.”
“그럼 오쇼네시 양, 이렇게 살인사건이 한꺼번에 두 번씩 일어나면,”
스페이드의 말에 그녀는 흠칫 놀랐다.
“세상은 흥분하고 경찰은 과단성있는 행동으로 나오기 마련이지요. 따라서 누가 맡든 다루기 힘들고 돈드는 사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페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자기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이야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고 눈에는 필사적인 빛이 떠올랐다.
“스페이드 씨,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어젯밤 사건은 내 책임일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히스테리를 일으킬 듯이 떨리고 있었다. 스페이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한 당신에게 책임은 없습니다. 당신은 새스비가 위험한 사람임을 경고해 주었으니까요. 물론 동생의 일이며 그밖에 거짓말을 많이 했지만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므로 당신 책임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는 처진 어깨를 움츠렸다.
“고맙습니다.”
원덜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일생을 두고 자신을 책망하게 될 거예요. 아처 씨는 어제, 그처럼 기운차고 늠름했는데…”
그녀는 한쪽 손을 목에 대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스페이드는 명령하듯 말했다.
“그는 자기 일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일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운이 나빴던 거지요.”
“그분은… 결혼을 하셨나요?”
“그렇소. 생명보험이 1만 달러, 아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그를 싫어했습니다.”
“어머나, 그런 말씀 하시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스페이드는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는 팔목시계를 흘끔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긴 의자에 앉은 여자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스페이드의 말투는 밝았지만 맺고 끊음이 분명했다.
“밖에는 수많은 경찰관과 지방검사 조무래기와 신문기자들이 떼지어 코를 벌름거리며 이 근처를 휩쓸며 다니고 있습니다. 당신은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당신의 힘으로 그런 여러 가지 일에서 나를 구해주셨으면 해요.”
원덜리의 목소리는 가냘프고 떨리는 듯했다. 그녀는 스페이드의 소매를 살짝 만지며 말을 이었다.
“스페이드 씨, 그 사람들은 나를 알고 있을까요?”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누가 냄새를 맡기 전에 나는 당신을 만나고 싶었던 겁니다.”
“만일 내가 당신을 찾아가 그런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경찰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의심하겠지요. 내가 지금까지 경찰을 속여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알릴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필요하다면 그들을 잠재우는 거짓말을 우리 손으로 꾸며댈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은 설마 내가 그… 살인사건에… 관련되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스페이드는 싱긋 웃었다.
“정말 그것을 물어본다면서 깜박 잊었군요. 무슨 관계가 있었습니까?”
“아니오, 없어요.”
“그럼 됐습니다. 이제 경찰에는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그녀는 긴 의자 속에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치 물끄러미 쳐다보는 스페이드의 눈길을 피하려는 듯 짙은 속눈썹에 쌓인 눈을 깜박였다. 몸집까지도 갑자기 여위어 자그마해 보였으며 어린 소녀처럼 풀죽어 있었다.
“경찰은 꼭 나를 알아낼 필요가 있을까요, 스페이드 씨? 경찰의 심문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지금은 까닭을 말씀드릴 수 없지만, 나를 좀 감싸주실 수 없겠어요?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심문을 받을 수가 없어요. 죽어버리는 게 나아요. 스페이드 씨, 부탁이에요. 도와주시겠어요?”
“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선 모든 사정을 다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을 듣자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스페이드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꼭 움켜쥔 두 손 위에서 파랗게 질려 긴장과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원덜리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소리쳤다.
“나는 지금까지 결코 떳떳한 생활을 해온 여자가 아니에요. 나쁜 여자였어요. 당신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나쁜 여자였어요. 그러나 마음 속까지 나쁜 여자는 아니에요. 내 얼굴을 보세요, 스페이드 씨. 내가 마음 속까지 나쁜 여자는 아니라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러면 나를 조금은 믿어주실 수 있겠지요? 무서워요. 나는 아무도 없는 외톨이로, 당신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없어요. 물론 내가 당신을 믿지 않는 한 당신에게 믿어달라고 부탁할 권리는 없겠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을 믿고 있어요. 하지만 사정을 이야기할 수는 없답니다. 지금은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요. 좀 더 시간이 지난 뒤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하겠어요. 난 무서워요, 스페이드 씨, 당신에게 털어 놓아야 하는 것이 두려워요.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마음으로는 믿고 있어요. 하지만 내게는 아무도 없어요. 전에는 플로이드를 믿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스페이드 씨, 날 살려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어제도 말씀드렸지요. 당신이 구해주리라고 믿지 않았다면 오늘 이처럼 당신에게 연락하는 대신 어디로 도망쳤을 거예요. 달리 구해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무릎을 꿇겠어요? 이렇게 부탁하는 방법이 옳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발 너그럽게 보아주세요, 스페이드 씨. 그리고 꾸짖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강하고 지혜와 용기가 있는 분이에요. 나에게 그 힘과 지혜와 용기를 조금만 나눠주세요. 스페이드 씨, 나를 구해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이처럼 난처한 처지에서 만일 당신이 구해주시지 않는다면 달리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까닭도 이야기하지 않고 무턱대고 살려달라고 부탁할 권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러나 역시 부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화내지 마세요, 스페이드 씨. 나를 살려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제발 구해주세요.”
이 긴 대사를 외는 동안 거의 숨을 죽이고서 듣고 있던 스페이드는 다문 입술 사이로 ‘휴우’ 긴 한숨을 내쉬어 폐를 텅 비게 했다.
“뭐 그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런데 당신은 아주 잘하는군요. 아주 잘합니다. 특히 그 눈과 ‘화내지 마세요, 스페이드 씨’ 하고 말할 때의 떨리는 목소리는 아주 훌륭합니다!”
원덜리는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괴로운 듯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으나 머리를 똑바로 들고 스페이드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는 수 없지요. 나는 그런 여자예요. 하지만… 아아! 나는 정말 당신의 도움이 필요했던 거예요. 아니, 지금도 필요해요. 거짓이 있었다면 내 말하는 방법에 있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내용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었어요.”
그녀는 똑바로 쳐다보던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당신이 믿어주시지 않는 것도 다 내 탓이에요.”
“이번엔 시끄럽게 되겠군요.”
스페이드는 얼굴을 붉히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원덜리는 테이블 쪽으로 가서 스페이드의 모자를 집어들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와 스페이드 앞에 섰다. 그러나 모자를 건네주지는 않고 가져가려면 가져가라는 듯이 손에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얼굴은 창백하고 여위어 보였다.
“어젯밤에는 어떻게 된 겁니까?”
스페이드는 모자를 보면서 물었다.
“플로이드가 9시쯤 호텔로 왔기에 우리는 산책을 나갔어요. 아처 씨의 눈에 띄도록 일부러 끌어낸 거예요. 분명 기얼리 거리라고 생각되는데, 우리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춤을 추고 12시 30분쯤 호텔로 돌아왔어요. 그는 현관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어요. 나는 현관 안쪽에 서서 아처 씨가 거리 저쪽으로 플로이드를 뒤쫓는 걸 보고 있었지요.”
“비탈길을 내려가 마케트 거리 쪽으로 말입니까?”
“네.”
“부슈 거리와 스톡턴 거리가 마주치는 언저리에서 아처가 총을 맞았는데, 두 사람이 무엇 하러 그쪽으로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플로이드가 묵고 있는 숙소 가까이가 아닌가요?”
“아닙니다. 당신 호텔에서 자기 호텔로 갈 생각이었다면, 그곳은 그 길에서 10블록도 넘게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 두 사람이 가버린 뒤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곧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리고 오늘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가 신문의 큰 표제가 눈에 띄어 읽어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전에 보아두었던 전세차가 있는 유니언 스퀘어로 가서 차 한 대를 빌어 짐을 가지러 호텔로 돌아왔지요. 어제 외출한 동안 방을 수색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급히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어제 오후에 이곳을 보아두었거든요. 나는 곧 이리로 옮겨와 당신 사무실로 전화를 건 거예요.”
“세인트 마크 호텔의 방을 수색당했다고요?”
스페이드가 물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 당시 사무실을 찾아간 동안에. 이 사실은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말하자면 거기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달라는 뜻입니까?”
원덜리는 거북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이드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들고 있던 모자를 조금 움직였다. 스페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얼굴 앞에서 그렇게 모자를 흔들지 마시오.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잖소?”
그녀는 후회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모자를 테이블 위에 놓고 다시 그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스페이드는 말했다.
“나는 까닭도 묻지 않고 당신을 믿는 데 대해서는 그다지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사정을 알아야지 전혀 모르고서야 당신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테면 그 플로이드 새스비라는 사나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려주어야만…”
“나는 그 사람을 동양에서 만났어요.”
원덜리는 두 사람 사이의 긴 의자 시트 위에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8자 같은 무늬를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지난 주일 홍콩에서 이리로 왔는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나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하고서… 내가 자기만을 의지하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나를 배신했어요.”
“당신을 배신했다니, 어떻게?”
그녀는 머리를 내저으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스페이드는 천천히 얼굴을 찡그렸다.
“허면 그를 왜 미행하도록 부탁한 겁니까?”
“그 사람이 나 몰래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는 자기가 묵고 있는 호텔도 나에게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그가 숨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구와 만나고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가 아처를 죽인 겁니까?”
그녀는 깜짝 놀란 듯이 스페이드를 올려다보았다.
“네, 그럴 거에요.”
“새스비는 루가 권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아처는 루가로 맞은 게 아닙니다.”
“플로이드는 코트 주머니에 리볼버(자동권총)를 넣고 다녔어요.”
“당신이 보았습니까?”
“네, 자주 보았어요. 플로이드는 늘 그것을 가지고 다녔어요. 어젯밤에는 못 보았지만, 코트를 입을 때는 꼭 그것을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왜 두 개씩이나 가지고 다녔지요?”
“그걸로 생활하다시피 했으니까요. 홍콩에서 들은 소문인데, 그는 미국에 못 있게 된 어느 도박꾼의 보디가드로서 함께 동양으로 흘러 들어간 거래요. 그 뒤 얼마 안 되어 그 도박꾼이 모습을 감췄는데 그 까닭을 아는 사람은 플로이드뿐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게 사실인지는 나도 몰랐어요. 다만 플로이드가 늘 엄중히 무장하고 다녔으며, 잘 때는 반드시 침대 가장자리에 신문지를 잔뜩 뭉쳐서 깔아놓아 아무도 소리내지 않고 들어올 수 없게 해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아주 근사한 남자친구를 두었었군요.”
“그런 사람이 아니면 나를 구해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물론 그 사람이 충실하다 여기고 하는 말이지만.”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그래요?”
스페이드는 둘째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잡고 음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미간의 주름이 깊이 잡혀 양쪽 눈썹이 거의 맞닿으려고 했다.
“난처하다고 자꾸 말하는데, 대체 당신은 어느 정도 궁지에 몰려 있습니까?”
“최악의 상태에요.”
그녀는 대답했다.
“생명의 위험입니까?”
“나는 영웅적인 여자가 아니니 죽음보다 더 나쁜 건 없겠지요.”
“그럼, 역시 생명의 위험이군요?”
“네. 그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일이에요. 만일 당신이 구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녀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스페이드는 입에서 손가락을 떼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대체 당신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까?”
그는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공기로 기적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당신은 일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새스비를 죽인 건 누구입니까?”
“몰라요.”
그녀는 구겨진 손수건을 입에 대고 대답했다.
“당신의 적이오? 아니면 그 사람의 적이오?”
“모르겠어요. 그 사람의 적일거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아니, 모르겠어요.”
“새스비는 어떤 방법으로 당신을 구해줄 작정이었지요? 왜 그를 홍콩에서 이리로 데려왔지요?”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없이 머리를 내저었다. 여윈 얼굴이 가엾으리만큼 완고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스페이드는 의자에서 일어나 두 손을 윗옷주머니에 넣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거칠게 말했다.
“이렇게 되면 절망적이군. 나로서는 어떻게 해줄 수가 없소. 대체 당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나는 전혀 모르니까요. 아니, 그것조차 의문이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스페이드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테이블로 모자를 집으러 갔다. 그녀는 얼굴을 숙인 채 질식한 것 같은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저어… 제발 경찰에는 가지 말아주세요.”
스페이드는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경찰에 갈거요! 경찰은 오늘 새벽 4시부터 나를 뒤쫓고 있소.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실 거요. 무엇 때문에 그런 고생을 했는지 아시오? 나라면 당신을 살릴 수 있다는 어리석은 망상 때문이었소.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있소. 이제 나도 그만두겠소.”
그는 모자를 머리에 올려놓고 힘껏 잡아 내렸다.
“경찰에 가지 말아달라고? 갈 필요도 없소. 그냥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해도 그들이 우르르 몰려올 테니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모두 이야기할 테니 당신은 하늘에 운명을 맡기고 스스로 해보시오.”
원덜리는 긴 의자에서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무릎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입 가장자리와 아래턱의 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며 공포에 질린 얼굴을 쳐들고 말했다.
“잘 참아주셨어요. 그리고 나 같은 것을 살려주시려고 애쓰셨어요. 그러나 이젠 끝났어요. 헛일이에요.”
그녀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여러 가지로 고마웠어요. 나는 나 스스로의 운명에 모든 걸 맡겨 보겠어요.”
스페이드는 또 목구멍에서 짐승 같은 신음 소리를 내며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신은 지금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소?”
이 질문이 그녀를 놀라게 한 듯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5백 달러쯤 남았어요.”
“그걸 나에게 주시오.”
원덜리는 한순간 머뭇거리며 겁먹은 눈으로 스페이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입과 눈썹과 두 손과 어깨로 화가 난 듯한 시늉을 해 보였다.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뒤 돈다발을 들고 나왔다. 스페이드는 그녀에게서 그 돈을 받아들고 세어보았다.
“4백 달러밖에 안 되는군.”
“생활비로 조금 남겨뒀어요.”
그녀는 가슴에 손을 대고 고분고분 변명했다.
“더 없소?”
“네.”
“돈이 될만한 게 있을텐데…”
“반지 몇 개 하고 보석류가 조금 있어요.”
“생활비는 그것을 잡히면 되겠군. 리미디얼 가게가 가장 좋을 거요. 미션 거리와 5번 거리 모퉁이에 있소.”
그는 한쪽 손을 내밀었다.
원덜리는 호소하듯 스페이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노란빛 도는 회색 눈은 엄격하여 받아들일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한 손을 드레스의 목으로 집어 넣더니 가늘게 만 지폐를 꺼내 기다리고 있는 스페이드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는 지폐의 주름을 펴서 세었다. 20달러 지폐가 넉 장, 10달러 지폐가 넉 장, 5달러 지폐가 한 장. 그는 그 중에서 10달러 지폐 두 장과 5달러 지폐를 그녀에게 되돌려주고 나머지는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나가서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보겠소. 되도록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올 작정이오. 그 때는 벨을 네 번 울리겠소. 길게, 짧게, 길게, 짧게. 그러면 나인 줄 아시오. 지금은 혼자 나갈 테니까.”
방 한가운데 서서 멍하니 파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지켜보는 여자를 남겨둔 채 스페이드는 밖으로 나갔다.
스페이드는 입구문에 ‘와이즈 메리컨&와이즈’ 라고 씌어진 곳으로 들어갔다. 접수구에 앉은 붉은 머리의 아가씨가 말했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스페이드 씨?”
“잘 있었소? 시드는 있소?”
스페이드가 옆에 서서 그녀의 동그란 어깨에 손을 얹자 그녀는 플럭을 꽂고 인터폰을 향해 앉았다.
“와이즈 씨, 스페이드 씨가 오셨습니다.”
그녀는 스페이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서 들어가보세요.”
스페이드는 고맙다는 표시로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가 놓고 접수구를 가로질러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젖빛 유리를 끼운 문이 있는 막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올리브 및 피부의 자그마한 사나이가 산더미처럼 서류가 쌓인 지나치게 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드문드문 난 검은 머리에 비듬이 유난히 눈에 띄었으며, 갸름한 얼굴에는 지친 모습이 엿보였다.
작은 사나이는 스페이드를 보자 불꺼진 잎담배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리로 의자를 끌고 오게. 어젯밤에는 마일즈가 그런 꼴을 당하고…”
지친 얼굴에도, 얼마쯤 날카로운 목소리에도 전혀 감정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스페이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헛기침을 했다.
“실은 그 일로 찾아왔는데… 아무래도 이번 사건에는 검시관을 상대로 한바탕 싸워야 할 것 같네, 시드. 어떤가, 나도 신부나 변호사처럼 직업의 신성함을 내세워 의뢰인의 비밀과 신원을 비밀로 해둘수 있을까?”
시드 와이즈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안 될 거야 없지. 검시법정은 공판정과 다르니까. 아무튼 해보는 걸세. 자네는 지금까지 그보다 더한 일을 해내고도 무사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번엔 댄디가 끈질기게 물고늘어져 좀 성가시게 될 듯하네. 시드, 모자를 쓰게. 같이 가서 손쓸 필요가 있는 사람을 만나줘야겠네. 모든 일은 완전한 게 제일이니까.”
시드 와이즈는 책상 위의 서류더미를 보며 신음 소리를 냈다. 이윽고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의 칸막이장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참 골치 아픈 사람이로군, 자네는.”
와이즈는 모자걸이에서 모자를 벗겼다.
스페이드는 그날 오후 5시 10분이 지나서 자기 사무실로 돌아왔다. 에피 필라인이 스페이드의 책상 앞에 앉아 타임즈를 읽고 있었다. 스페이드는 그 책상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소?”
“아니오. 어머나, 마치 카나리아라도 삼킨 듯한 얼굴이군요!”
스페이드는 만족한 듯이 싱긋 웃어보였다.
“이제 우리에게도 운이 트인 것 같소. 그전부터 생각한 일이지만, 마일즈가 어디 가서 죽게 되면 좀더 행운이 올 것 같았거든. 내 이름으로 꽃이라도 보내주지 않겠소?”
“벌써 보냈어요.”
“에피, 당신은 정말 훌륭한 천사요. 오늘 일을 어떻게 생각하지, 이른바 여자의 직감으로 보면?”
“무슨 말이지요?”
“당신의 직감으로는 원덜리 양을 어떻게 생각하느냔 말이오?”
“나는 그 여자 편이에요.”
에피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름이 너무 많아. 원덜리, 르블랑, 그런가하면 본명은 오쇼네시라…”
스페이드는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그 여자라면 전화번호부에 있는 이름을 다가지고 있다 해도 상관없어요. 그 아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도 알겠지요?”
스페이드는 에피를 향해 졸린 듯한 눈을 깜박여보이며 소리죽여 웃었다.
“글쎄… 아무튼 그녀는 사흘 동안에 7백 달러를 내놓았지.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분명 좋은 사람이오.”
에피 필라인은 의자 속에서 고쳐앉으며 말했다.
“샘, 만일 그녀가 곤란한 처지에 있는데 못 본 체하거나 그것을 이용하여 돈을 뜯어낸다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일생 동안 당신을 존경하지 않을 거예요.”
스페이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그 찡그린 얼굴도 부자연스러웠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연 순간 복도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온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에피가 곧 일어나서 바깥방으로 나갔다. 스페이드는 모자를 벗고 자기 의자에 앉았다. 에피가 ‘조엘 카이로’ 라고 적힌 명함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말했다.
“이상한 사람이에요.”
“좋아, 들어오라고 해요.”
스페이드가 말했다.
조엘 카이로는 보통키에 뼈대가 가늘고 가무잡잡한 사나이였다. 머리는 검고 윤기가 있었다. 그 얼굴모습으로 보아 분명 레반트 인(동부 지중해인)이었다. 짙은 녹색 넥타이 위에서 네 개의 직사각형 다이아몬드로 둘러싸인 네모난 루비가 반짝였다. 좁은 어깨에 꼭 맞는 검은 윗옷이 얼마쯤 부푼 허리 위에서 조금 벌어져보였다. 바지는 최신 유행보다는 조금 좁아 오동통한 넓적다리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가죽단화 윗부분은 황금색 각반으로 덮여 있었다. 그는 세무 가죽장갑을 낀 한쪽 손에 검은 중산모를 들고, 뛰는 듯한 걸음걸이로 스페이드를 향해 다가왔다. 그가 다가옴에 따라 시프레 향기가 풍겨왔다.
스페이드는 손님에게 머리를 가볍게 숙여보이고 이어서 머리를 의자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앉으시지요, 카이로 씨.”
카이로는 모자를 가슴에 대고 공손히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날카롭고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카이로는 의자에 앉았다. 발 끝을 모아 단정히 앉더니 무릎에 모자를 올려놓고 노란 장갑을 벗기 시작했다. 스페이드는 의자 속에서 몸을 뒤로 젖히며 물었다.
“용건이 무엇입니까, 카이로 씨?”
상냥하지만 무관심한 말투며 의자에서 몸을 뒤로 젖히는 것 등 어제 브리짓 오쇼네시와 처음 이야기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카이로는 모자를 뒤집더니 그 속에 장갑을 넣어 옆책상 끝에 올려놓았다. 왼손 둘째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에서 다이아몬드가 반짝였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도 역시 가장자리를 다이아몬드로 두른 넥타이핀과 조화된 루비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두 손은 부드럽고 손질이 잘되어 있었다. 손이 크지는 않으나 퉁퉁하여 어딘지 모르게 보기 흉했다. 그는 두 손바닥을 소리나게 비비대며 말을 꺼냈다.
“처음 뵙겠습니다만, 당신 친구의 불행한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스페이드 씨, 상관없다면 여쭤보겠는데, 그 불행한 사건과 조금 뒤에 일어난 새스비라는 사나이의 죽음 사이에 신문이 보도한 것처럼 뭔가… 저어, 관계가 있습니까?”
스페이드는 노골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이로는 일어나서 머리를 숙여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더니 책상 모서리에 두 손을 엎어서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스페이드 씨, 내가 실례를 무릎쓰고 이런 질문을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닙니다. 실은 저어, 어떤… 어떤 장식품이… 뭐랄까, 잘못하여 남의 손에 들어갔는데, 되찾고 싶습니다. 그래서 꼭 당신 힘을 빌려고 찾아온 겁니다.”
스페이드는 듣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눈썹을 치켜올리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카이로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서 했다.
“그 장식품이란 작은 조각품인데… 검은 새의 조각입니다.”
스페이드는 정중한 관심을 보이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찾아주시면 그 조각의 정당한 주인을 대신하여 5천 달러를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카이로는 책상 모서리에서 한쪽 손을 들고 손톱이 넓어 보기 흉한 둘째손가락으로 허공의 한 점을 어루만지는 듯한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나 저어, 뭐라고 할까요… 질문은 일체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손을 책상 위의 다른 손 옆으로 가져가며 사립탐정을 향해 웃어보였다.
“5천 달러라면 큰돈이로군요. 그건 꽤…”
그때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오.”
스페이드가 말하자 문이 빠끔히 열리고 에피 필라인의 머리와 어깨가 보였다. 그녀는 자그마한 검은 펠트 모자를 쓰고 회색 털가죽깃이 달린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할 일이 또 있나요?”
“아니, 이제 없소. 돌아가구려. 나갈 때 문을 잠그고 가주오, 에피.”
“그럼, 먼저 가겠어요.”
그녀는 문을 닫고 모습을 감췄다. 스페이드는 의자를 돌려 다시 카이로를 향해 앉았다.
“참 재미있는 조각이군요.”
에피 필라인이 나가고 복도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로는 미소를 떠올리며 안주머니에서 짧고 납작한 검은 권총을 꺼냈다.
“스페이드 씨, 죄송합니다만 손을 목덜미 뒤로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