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다음날 아침 귓볼에 묻은 탤컴파우더 가루를 닦아내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으로 가서 열어보니 청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갈색 리넨 옷을 입고 피망 색깔의 스카프를 둘렀지만 귀고리나 모자는 하지 않고 있었다. 약간 창백해 보이기는 했지만 누가 아래층으로 내던진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약간 망설이듯 살짝 미소지었다.
“여기 와서 귀찮게 해드리면 안 되겠지요, 말로우 씨. 아직 아침식사 전이실 테니까요. 그렇지만 사무실로 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고 개인적인 문제로 전화하는 것을 싫어하거든요.”
“그러시겠죠. 들어오십시오, 웨이드 부인.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녀는 거실로 들어와서 아무것도 보지 않고 침대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무릎 위에 가방을 받듯하게 놓고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약간 새침한 표정이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베니션블라인드를 올린 뒤 그녀 앞의 칵테일테이블 위에 놓인 더러운 재떨이를 치웠다.
“고맙습니다. 블랙커피로 부탁해요. 설탕 없이요.”
나는 부엌으로 가서 녹색 금속 쟁반 위에 종이 냅킨을 깔았다. 마치 플라스틱 옷깃처럼 값싸 보였다. 나는 냅킨을 구겨버리고서는 작은 삼각 냅킨과 세트로 된, 가장자리 장식이 달린 냅킨을 꺼내왔다. 대부분의 가구처럼 이 집에 딸린 것이었다. 나는 데저트로즈(미국산 도자기 식기 브랜드) 커피잔 두 개를 꺼내서 커피를 채운 뒤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그녀는 한 모금 맛보고는 말했다.
“커피 맛이 아주 좋네요. 커피를 잘 끊이시나 봐요.”
“지난번에 어떤 사람하고 커피를 마신 직후에는 감옥에 갔었죠.”
나는 말했다.
“내가 감옥에 갔었다는 얘기는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웨이드 부인.”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그 사람이 탈출하도록 도와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계셨다면서요. 그렇죠?”
“경찰이 그렇게 말하진 않더군요. 그 친구 방에 있던 메모지에 제 전화번호가 쓰인 걸 발견했답니다. 경찰이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대답하지 않았죠. 아마도 물어본 방식이 싫어서였을 겁니다. 이런 얘기는 관심 없으시겠죠.”
그녀는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뒤로 기댄 뒤 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권했다.
“저는 담배 피우지 않아요. 고맙습니다. 물론 관심 있어요. 우리 이웃 주민 중 한 분이 레녹스 부부를 안다더군요. 그 사람이 정신이 나갔던 것이 틀림없어요. 듣기로는 그럴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나는 불도그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고 불을 붙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말했다.
“그랬겠죠. 전쟁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거든요. 그렇지만 그 친구는 죽었고 이제 모두 끝난 일입니다. 그리고 부인께서 그런 얘기나 하려고 온 건 아닐 것 같습니다만.”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그 사람은 말로우 씨의 친구셨다면서요. 틀림없이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계시겠죠. 그리고 말로우 씨는 아주 심지가 굳은 분처럼 보이시는데요.”
나는 파이프에 담배를 쟁여넣고 다시 불을 붙였다. 나는 그렇게 하면서 천천히 시간을 두고 파이프 너머로 그녀를 잘 훑어보았다.
“보십시오, 웨이드 부인.”
나는 마침내 말했다.
“내 의견을 알아 뭐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매일 일어나는걸요. 가장 범죄를 저지를 것 같지 않은 인물이, 가장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는 합니다. 친절한 노부인이 온가족을 독살하기도 하죠. 단정한 젊은이들이 연쇄 강도 사건을 벌이며 총질을 하기도 하고. 20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오점 하나 없이 깨끗한 은행 지배인이, 알고 보니 오랫동안 횡령을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행복할 것 같은 성공적인 유명 작가가 술에 취해서 아내를 병원에 입원시킬 만큼 때리기도 하고.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라도 왜 그렇게 되는 지는 꿈에도 모르는 겁니다.”
나는 이 말에 그녀가 파르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부인은 입술을 꼭 모으고 눈살을 찌푸리는 게 고작이었다.
“하워드 스펜서가 그런 얘기를 안 하는 게 좋았을 뻔했네요.”
그녀가 말했다.
“내 잘못이에요. 그이와 충분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 이후로 술에 취한 남자를 말리려고 해봤자 허사라는 것을 배웠죠. 물론 그 정도 사리분별은 있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생각하시겠지만.”
“분명 말만으로는 말릴 수가 없죠.”
나는 말했다.
“운이 좋고 힘이 세다면, 가끔은 자해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을 말릴 수는 있을 겁니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하죠.”
그녀는 조용히 커피잔과 받침을 들었다. 손은 그녀의 다른 부분과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손톱은 아름답게 다듬어 윤을 낸 뒤 아주 엷은 색으로만 살짝 발라져 있었다.
“하워드가 이번에는 제 남편을 못 만났다는 얘기를 했나요?”
“네.”
그녀는 커피를 다 마신 뒤 잔을 조심스럽게 쟁반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스푼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나서는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유는 말 안 했겠죠. 이유를 몰랐을 테니까요. 난 하워드를 아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는 관리자 타입으로 모든 일을 떠맡으려고 해요. 자기가 아주 실무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기다렸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재빨리 나를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주 부드럽게 그녀가 말했다.
“남편은 사흘 동안이나 실종 상태예요. 전 그이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남편을 찾아서 집으로 데려와달라는 부탁을 드리려고 여기 온 거예요. 아, 전에도 그런 일은 있었어요. 한번은 포틀랜드까지 줄곧 차를 몰고 가서 호텔에서 앓아누웠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게 해줄 의사를 불러야만 했었죠. 어떻게 그렇게 멀리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갈 수 있었는지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사흘 동안이나 끼니를 걸렀거든요. 또 한번은 롱비치에 있는 증기탕에 있었던 적도 있어요. 스웨덴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강도 높은 장세척 요법을 병행하는 곳이었죠. 마지막으로 실종되었을 때 있었던 곳은 아주 작은 시립 요양소 같은 곳이었는데 분명 별로 평판이 좋지 않은 곳일 거예요. 그 일이 있었던 지 3주도 안 됐어요. 남편은 나한테 그곳 이름이나 위치를 알려 주지 않으려 했고 단지 치료를 받아서 괜찮아졌다고만 했어요. 그렇지만 곧 죽을 것처럼 창백했고 쇠약해져 있었죠. 난 남편을 집으로 데리고 온 남자를 흘깃 봐두었죠. 키가 크고 젊은 남자로 무대나 컬러 뮤지컬 영화에서나 볼 만한, 지나치게 공들인 카우보이 의상 같은 것을 입고 있더군요. 그 남자는 로저를 진입로에 내려주고서는 차를 빼서 즉시 떠나버렸어요.”
“관광용 목장에서 일했나 보죠. 이런 얌전한 카우보이들은 가진 돈을 한 푼도 남김없이 그렇게 환상적인 의상을 사는 데 쓰니까요. 여자들이 그에 미치죠. 그런 데 쓰자고 그런 친구들이 거기 있는 것이지만.”
부인은 가방을 열고 접은 종이를 하나 꺼냈다.
“5백 달러 수표를 가지고 왔어요, 말로우 씨. 이 정도면 선금이 될까요?”
그녀는 접은 수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수표를 바라만 보고 손을 대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초조해하시죠?”
나는 물었다.
“남편이 사흘 동안 실종되었다고 하셨죠. 한 사람을 정신 차리게 해서 음식까지 먹이려면 사나흘 정도 걸립니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이번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는 겁니까?”
“그이는 더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말로우 씨. 이런 식으로 하다간 그인 죽을 거예요.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어요. 너무 걱정이 된답니다. 걱정되는 것 이상이에요. 두려울 지경이죠. 이건 부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우리는 결혼한 지 5년이 되었어요. 전에도 술을 마시긴 했지만 정신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뭔가 잘못되었어요. 남편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지난밤에는 한숨도 못 잤답니다.”
“남편이 왜 술을 마시는지 짚이는 점은?”
보랏빛 눈이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는 약간 연약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무기력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면…”
그녀는 마침내 거의 속삭이듯이 말했다.
“남자는 아내에게 정이 떨어지기도 하잖아요.”
“난 그저 아마추어 심리학자일 뿐입니다, 웨이드 부인. 하지만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자질을 약간 갖출 필요가 있죠. 제가 볼 때 남편분은 지금 쓰고 있는 종류의 작품에 정이 떨어진 것 같은데요.”
“그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모든 작가들이 그런 기간이 있을 것 같기는 해요. 남편이 지금 작업하고 있는 책을 끝마칠 수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지만 그이는 집세를 내기 위해 소설을 끝마쳐야 할 필요가 없는걸요. 그 정도로는 이유가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신이 멀쩡할 때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녀는 미소지었다.
“글쎄요. 나는 약간 편견이 있겠죠. 나는 그이가 정말로 아주 멋진 사람이라 생각해요.”
“술을 마셨을 때는 어떤 사람인가요?”
“끔찍하죠. 똑똑하고 냉정하고 잔인해져요. 남편은 자기가 심술궂게 굴 때만 재치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했어요.”
“폭력 얘기는 안 하시는군요.”
그녀는 황갈색 눈썹을 치켜세웠다.
“한 번뿐이었어요, 말로우 씨. 그리고 그 얘기는 너무 부풀려진 거예요. 난 하워드 스펜서에게 말한 적이 없어요. 로저가 자기입으로 말했죠.”
나는 일어서서 방 안을 걸어다녔다. 더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벌써 더웠다. 나는 창문 한쪽 블라인드를 내려서 햇빛을 가렸다. 그런 다음 솔직하게 말했다.
“남편분을 어제 오후 인물연감에서 찾아봤습니다. 나이는 마흔둘, 부인과의 결혼이 초혼이고 자녀는 없더군요. 뉴잉글랜드 출신의 집안으로 앤도버(메사추세츠 주 보스턴 북쪽의 도시로 가장 유명한 대학예비학교가 있음)와 프린스턴을 나왔고요. 참전한 적이 있고 기록도 훌륭하더군요. 섹스와 칼싸움이 질펀한 역사소설을 열두 권 썼고 모두 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죠. 돈이야 넘칠 만큼 많이 벌었을 겁니다. 만약 아내에게 정떨어졌다면 그렇다고 말하고 이혼을 요구할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여자와 놀아나고 있다면 부인도 알았을 거고. 어쨌거나 자기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술에 취할 필요는 없었을 테죠. 부인과 결혼한 지 5년이 되었다면 결혼 당시에는 서른일곱 살이었겠군요. 그때까지 여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을 대부분 알았을 겁니다. 대부분이라고 해야겠죠. 여자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내가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듯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무슨 근거로 그랬는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하워드 스펜서가 암시한 바에 따르면, 로저 웨이드에게 생긴 문제는 뭔가 부인이 남편과 결혼하기도 전 아주 오래 전에 생긴 일이 다시 남편을 사로잡아, 참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괴롭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펜서는 협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로저가 누군가에게 큰돈을 주었는지를 내가 알고 있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그런 것은 모르겠어요. 나는 그이의 돈 관리에는 관여하지 않아요. 그이는 나 모르게 많은 돈을 썼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럼 좋습니다. 웨이드 씨를 잘 모르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 사람이 협박에 어떻게 대처했을지 별로 추측할 수가 없습니다. 괄괄한 성격이었다면, 누군가의 목을 잡아 비틀었을 수도 있겠죠. 그 비밀이 뭐가 되었건 간에, 사회적, 직업적 지위를 손상시키거나 극단적인 경우에 경찰과 연관된다면 돈을 냈겠죠. 당분간만이라도. 그렇지만 이런 사실을 안다고 별로 득 될 것은 없습니다. 부인은 남편을 찾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걱정이 되고, 단순히 걱정되는 것 이상입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남편분을 찾으면 될까요. 돈은 필요없습니다, 웨이드 부인. 어쨌거나 지금은 필요없어요.”
그녀는 다시 가방 속에 손을 넣어 노란 종이 두 장을 꺼냈다. 이면지인 듯한 종이로, 반으로 접혀 있었고 그중 한 장은 구겨져 있었다. 부인은 종이를 편 다음 내게 건네주었다.
“하나는 그이 책상에서 발견한 거예요. 밤 늦게 썼거나 새벽 이른 시간에 쓴 것 같아요. 남편이 술을 마시고 있는 줄 알았고 2층에 올라오지 않은 것도 알았죠. 2시쯤 되어 남편이 괜찮은가, 비교적 괜찮은가 보러 내려갔었어요. 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소파에 누워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남편은 사라지고 없었어요. 다른 종이는 휴지통에, 더 정확히 말하면 휴지통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어요. 그래서 안으로 떨어지지 않은 거죠.”
나는 우선 구겨지지 않은 종이를 보았다. 타자기로 짧은 문단 하나를 쳐놓은 종이로 더이상의 내용은 없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지도 않으며 더이상 내가 사랑하고 싶은 이도 없다. - 로저(F. 스콧 피츠제럴드) 웨이드
추신 : 그렇기 때문에 나는 <라스트 타이쿤(스콧이 쓴 미완성 유고로 후에 해롤드 핀터가 각색하여 1976년 엘리아 카잔이 영화로 만들었다)>을 마칠 수 없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웨이드 부인?”
“괜히 분위기 잡는 거죠. 남편은 언제나 스콧 피츠제럴드(《위대한 개츠비》를 쓴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의 대단한 팬이었거든요. 남편은 항상, 약물 중독자였던 콜리지 이후로는 피츠제럴드가 최고의 술꾼작가라고 말하고는 했어요. 이 타자 친 것을 보세요, 말로우 씨. 깨끗하고 오타 하나 없어요.”
“봤습니다. 취하면 자기 이름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죠.”
나는 구겨진 종이를 펴보았다. 오타나 떨림 하나 없이 더 깨끗하게 타자로 친 글이었다. 이번 내용은 이러했다.
난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 V 박사.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당신만이 내 편이지.
내가 여전히 그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까 부인이 입을 열었다.
“이 V 박사라는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모르겠어요. V 로 시작하는 성을 가진 의사는 한 명도 모르거든요. 로저가 마지막에 갔던 곳의 의사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 카우보이가 남편을 언제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까? 남편이 이름 같은 것 얘기 안 하던가요? 심지어 장소라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요. 나는 전화번호부를 찾아보았어요. 성이 V로 시작하는 의사들은 한 다스 정도 있더군요. 어쩌면 성이 아닐지도 모르죠.”
“정식 의사가 아닐 가능성도 상당히 높습니다. 그러면 항상 손쉽게 쓸 수 있는 현금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떠오르게 되죠. 합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수표를 받을지도 모르지만 돌팔이 의사라면 그렇지 않죠. 증거가 될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그런 돌팔이들은 그렇게 싸지가 않아요. 그 집에서 숙식했다면 가격은 더 뛰죠. 주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녀는 당황한 것 같았다.
“주사요?”
“온갖 수상한 의사들은 고객에게 마약을 놓는 법이죠. 환자를 다루기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요. 환자들을 한 열두어 시간 정도 재워놓고 환자들이 깨어나면 점잖게 대해주는 거죠. 하지만 면허 없이 진정제를 사용하면 정부에서 숙식을 제공받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가격이 정말로 뛰는 겁니다.”
“알겠어요. 로저는 아마도 몇백 달러는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항상 그 정도는 책상 속에 넣어두니까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변덕 때문이겠거니 해요. 지금은 서랍 안의 돈이 없어졌더군요.”
“알았습니다. V 박사라는 사람을 찾아보도록 하죠.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수표는 도로 넣으시죠, 웨이드 부인.”
“그렇지만 왜요? 당신은 이 돈을 받을 자격이…”
“나중에 받죠, 고맙습니다. 나중에 웨이드 씨에게서 받는 편이 낫겠습니다. 웨이드 씨는 제 일처리 방식을 좋아하지 않을는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이가 아프고 무력하다면…”
“그러면 주치의를 부르든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인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죠. 남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길 원치 않았단 거죠.”
그녀는 수표를 다시 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그녀는 아주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우리 주치의는 치료를 거부했어요.”
그녀는 비통하게 말했다.
“의사는 수백 명도 넘게 있습니다, 웨이드 부인. 어떤 의사라도 한 번 정도는 진료해 줄 겁니다. 대부분은 한동안 그의 곁에 있어주겠죠. 요새 의료계도 경쟁이 치열하니까요.”
“그래요. 아마도 말로우 씨 말이 옳겠죠.”
그녀는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 문을 열어주었다.
“부인이 직접 의사를 부를 수도 있었지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여자는 침착하게 나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눈 속에 눈물이 살짝 어린 것일지도 몰랐다. 아름다운 여자이고 오점 하나 없었다.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말로우 씨. 그이를 돕기 위해서라면 세상 어떤 일도 다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이가 어떤 남자인지도 알아요. 그이가 술을 마실 때마다 내가 의사를 불렀다면 남편과 오래 지내지 못했을 거예요. 다 큰 성인 남자를 목감기 걸린 어린애 취급할 수는 없잖아요.”
“남편이 술꾼이라면 그럴 수도 있죠. 더 자주 그래야만 할 겁니다.”
그녀는 내게 다가섰다. 그녀의 향수 냄새가 풍겼다. 내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무기로 뿌린 것도 아닌데. 여름날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편이 과거에 뭔가 수치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마치 단어 하나하나가 쓴맛이 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길게 끌면서 말했다.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말이죠. 내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그것을 내 손으로 직접 찾아내지는 않겠어요.”
“그렇지만 하워드 스펜서가 나를 고용해서 찾아내게 하는 건 괜찮단 말입니까?”
그녀는 아주 천천히 미소지었다.
“정말로 내가 당신이 하워드의 요청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를 배신하느니 차라리 감방에 간 당신 같은 남자가?”
“좋게 말해줘서 고맙긴 하지만, 내가 감방에 간 건 그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한참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고개를 끄덕인 뒤 작별 인사를 하고 삼나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았다. 최신형인 회색 재규어였다. 그녀는 차를 몰고 거리 끝까지 나갔다가 거기서 원형 도로를 돌아나왔다. 그녀는 언덕 아래로 내려가며 장갑 낀 손을 내 쪽으로 흔들어주었다. 작은 차는 모퉁이를 홱 돌아서 사라져버렸다.
집 정면 벽 앞에 붉은 협죽도 덤불이 하나 있었다. 그 속에서 파드득거리는 소리에 이어 새끼 지빠귀가 걱정스럽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빠귀가 높은 가지 위에 매달려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는 듯 날개를 파닥이는 것이 보였다. 벽 구석에 있는 사이프러스나무에서부터 경고하는 듯이 짧고 매섭게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들렸다. 지저귀는 소리는 즉시 멈췄고 작고 통통한 새는 잠잠해졌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새가 나는 연습을 하도록 놔두었다. 새들도 역시 배워햐 하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