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성
판사는 촛불을 들고 내려갔다. 제브르 백작이 뒤를 따랐다. 보트를레도 사다리를 디뎠다. 그가 내려가면서 기계적으로 세어 보니, 사다리에는 18개의 단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촛불이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지하실을 그의 눈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땅바닥에 내려가 보니, 고약한 냄새 - 썩은 냄새가 났다.
그러자 갑자기, 떨리는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뭔가요? 왜 그러시지요?”
“보트를레군…” 하고, 피욜 씨는 더듬거렸다. 그는 너무나도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판사님, 침착하시지요.”
“보트를레군, 저기에…”
“뭔가요?”
“저… 제단에서 떨어진 돌 밑에 뭐가 있어… 돌을 밀었더니 손에 닿지 않겠나… 오, 끔찍스러워라!”
“어디 있습니까?”
“이 쪽에… 냄새가 나지 않나? 옳지, 거기… 그것 봐…”
그는 촛불을 들어 땅바닥에 누워있는 물체를 살며시 비추었다.
“아앗!”
보트를레는 질겁을 하며 외쳤다. 세 사람은 얼른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반쯤 벌거벗은 시체가 끔찍스럽게 뒹굴고 있었다. 몰랑몰랑하고 푸르스름한 살이, 군데군데 찢겨진 옷 사이로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머리였다. 아까 떨어진 돌덩어리로 으깨진 그 머리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어 있었다.
보트를레는 얼른 바깥으로 나왔다. 조금 후에 피욜 씨가 올라와서 그에게 말했다.
“참으로 수고가 많았네, 보트를레 군. 숨은 곳을 발견한 것 외에도, 두 가지 점에서 자네 판단이 옳았다는 걸 알았네. 첫째, 레이몽드 양이 쏜 사나이는, 자네가 처음부터 말한 대로, 확실히 아르센 뤼팽이었어. 다음에, 그가 확실히 에티엔 드 보드레라는 이름으로 파리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어. 셔어츠에 E.V에라는 머리글자가 있었거든.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은데. 어떤가?”
보트를레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자네는 내 말을 안 듣고 있나?”
“아니요. 듣고 있습니다.”
피욜 씨는 계속해서, 시체가 뤼팽임에 틀림없음을 증명하려고 들었으나, 보트를레는 건성으로만 듣고 있었다. 거기에 백작이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하나는, 이튿날 셜록 홈즈가 이 곳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리는 편지였다.
“잘 됐다! 가니마르 형사부장도 오고, 이건 재미있겠는걸.” 하고, 피욜 씨는 유쾌한 듯이 외쳤다. 그러고는 또 한 통의 편지를 읽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더욱더 잘 됐어. 이 양반들이 와도 별로 할 일이 없겠는걸. 보트를레군, 오늘 아침에, 바위 위에서 어부가 젊은 여자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디에프에서 알려왔군 그래.”
보트를레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시체라고요…?”
“젊은 여자의 시체래… 상처투성이여서, 오른팔의 부어오른 피부에 금팔찌가 박혀 있지 않았더라면, 신원도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적혀 있어. 그런데 레이몽드 양은 오른팔에 금팔찌를 끼고 있었거든. 그러니 이건 분명히 백작님의 불쌍한 조카따님에 틀림없어. 어떻게 생각하나, 보트를레 군?”
“글쎄요… 저로선, 모든 것이 맞아들어갑니다. 모든 사실이, 제가 처음부터 생각했던 가정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난 잘 모르겠는데.”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나 하십시오. 저는 4시나 5시쯤에 돌아오겠습니다. 학교는 할 수 없지요. 밤 12시 기차로 가지요 뭐.”
보트를레는 자전거를 집어 타고 떠나갔다.
디에프에 도착한 그는 [라 비지]신문사에 들러, 최근 2주일 동안의 신문을 조사했다. 그런 뒤에, 거기서 1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앙베르뫼 마을로 달려가, 면장과 사제 신부와 지서장을 만났다. 성당의 종이 3시를 쳤다 그의 조사는 끝나 있었다.
그는 신바람이 나서, 노래를 부르면서 되돌아왔다. 바다에서 불어 오는 거센 바람을 가슴에 담뿍 받으면서, 힘차게 페달을 밟고 있었다.
앙브뤼메지가 보였다. 그는 저택으로 총하는 비탈길을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길을 가로질러, 가로수에서 가로수로 줄 하나가 처져 있는 것이 별안간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보트를레의 자전거는 줄에 걸려 사정 없이 넘어져 뒹굴고 말았다. 요행히 돌더미에 부딪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보트를레의 머리통은 박살이 날 뻔했다.
보트를레는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난 뒤에 무릎 살갗이 벗겨지고 여기저기 멍든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펴보았다. 오른쪽으로 조그만 숲이 이어져 있었으니, 범인은 그리로 달아났음에 틀림없었다. 그는 줄을 풀었다. 그런데, 줄이 매어져 있던 왼쪽 나무에 쪽지 하나가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는 그 것을 펴 보았다.
‘세 번째의, 그리고 마지막 경고!’
그는 저택으로 돌아와, 판사가 정해 놓고 일하는 1층의 방으로 갔다. 피욜 씨는 서기 앞에 앉아서 뭔가 쓰고 있다가, 서기를 내보낸 뒤에 소리쳤다.
“아니, 어떻게 된 건가? 보트를레군? 손이 피투성이가 아닌가?”
“별 것 아닙니다… 다만, 자전거가 이 줄에 걸려서 한바탕 굴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줄이 이 집 세탁장의 빨랫줄이라는 걸 아셔야만 하겠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을라고!”
“저는 여기서도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겁니다. 누군가가 여기서도 줄곧 저를 지켜 보고 저의 얘기도 엿듣고 있는 겁니다.”
“정말 그럴까?”
“틀림없습니다. 그게 어떤 놈인지, 판사님께서 찾아 내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저로선 약속했던 설명이나 해드리고 끝장을 내야겠습니다. 제게는 지금, 시시각각으로 위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글세, 그것 참…”
“쳇! 두고 보십시오, 곧 아시게 될 겁니다. 아무튼 서둘러야겠습니다. 우선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곧 정리해 버려야겠습니다. 크비용 반장님이 주워서 판사님께 드린 그 종이 조각에 관해서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으셨겠지요?”
“절대로 아무한테도. 하지만, 그런 것에 무슨 가치가 있겠나?”
“있고말고요. 그런데 무슨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아직까진 그 쪽지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보트르레는 갑자기 말을 끊고 판사의 손을 자기의 손으로 꼭 누르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쉿!… 누가 엿듣고 있어요… 밖에서…”
모래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보트를레가 창가로 달려가 내다보았다.
“벌써 사라져 버렸어요… 그러나 꽃밭이 짓밟혔을걸요…”
그는 창을 닫고 돌아와 앉았다.
“보십시오. 적은 이제 조심조차도 않게 되었습니다… 놈들도 시간이 촉박하다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둘러야 합니다.”
그는 그 종이 조각을 탁자에 펴 놓았다.
“이 종이엔 점과 숫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네 째 줄은 지금 문제가 안 되는 것 같고, 그 밖의 줄엔 5이상의 숫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다섯 개의 홑소리글자를 알파벳 순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결과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a.a..e..e.a.
.a..a…e.e. .e.oi.e..e.
.ou..e.o…e..e.o..e
ai.ui..e ..eu.e
“보시다시피, 이것만 가지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걸 푸는 열쇠는 매우 쉽고도 어렵습니다. 쉽다는 건, 홑소리를 숫자로 바꿔 놓고, 닿소리를 점으로 바꿔 놓기만 했을 테니까요. 그러니 매우 어렵긴 하겠지만, 불가능하지야 않겠지요.”
“꽤 어렵다는 건 사실이야.”
“그럼 풀어 봅시다. 둘째 줄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둘째 부분에서 점을 닿소리로 바꿔 놓고 보면, demoiselles(아가씨들)이란 낱말 밖엔 그럴사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쉬잔과 레이몽드의 두 아가씨일까?”
“틀림없습니다.”
“그 밖엔 모르겠지?”
“아니요. 마지막 줄의 한 가운데가 끊겨 있는 것을 실마리로 하여, 같은 식으로 알맞은 말을 찾아보면, 당연히 aigulle(바늘·첨탑)란 낱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옳아… aigulle란 낱말임에 틀림없구먼…”
“이젠 마지막의 낱말인데, 처음의 두 글자가 닿소리라는 점에서 생각해 보면, 여기에 알맞은 낱말은 네 개가 있습니다. 즉, fleuve(강), preuve(증거), pleure(운다), 그리고 creuse(속이 빈, 구멍 뚫린)입니다. 처음의 세 개는 aiguille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 마지막의 creuse를 취합니다.”
“그러면 aiguille creuse(구멍 뚫린 바늘, 속이 빈 첨탑)란 말이 되는군. 자네의 해석이 옳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그게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나?”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더 두고 봐야겠지요… 이 aiguille creuse라는 수수께끼같은 말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그보다도 더 주의하고 있는 건, 이 종이의 재료입니다. 지금도 이런 양피지를 만들어 내고 있을까요? 게다가 이 네 겹으로 접은 데가 헐어 있는 점이며…., 특히 윗면에는 이렇게 빨간 봉랍의 자국이 있어요…”
이 때 보트를레는 얼른 말을 끊었다. 서기 브레두가 문을 열고, 검찰 총장이 갑자기 방문했다고 알렸기 때문이다.
“경찰 총장님께서 이 앞을 지나가시다가, 잠깐 한 마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서, 대문 앞에서 뵈었으면 하십니다.”
“이상한데…” 하고, 피욜 씨가 중얼거렸다.
“어쨌든 가 보자, 보트를레군, 잠깐만 실례하겠네.”
판사는 나갔다. 그러자 서기는 문을 닫아 잠그고는,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뭘 하는 거요?”
보트를레는 깜짝 놀라 외쳤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얘기하기가 더 좋지 않겠나?” 하고, 브레두는 대꾸했다.
보트를레는 옆 방으로 통하는 다른 문쪽으로 뛰어갔다. 보트를레는 그 순간 알아챘던 것이다. 공범은 바로 판사의 서기, 브레두였던 것이다!
브레두는 쌀쌀하게 웃었다.
“여보게, 젊은 친구. 그 문의 열쇠도 내가 갖고 있다네.”
“그럼 창이 있다!”
“너무 늦었어.”
브레두는 권총을 쥐고 창 앞에 버텨 서면서 말했다. 빠져 나갈데라곤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도 대담하게 탈을 벗고 나오는 적에 대해서는 스스로 몸을 지키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보트를레는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불안으로 가슴을 죄면서 팔짱을 꼈다.
“좋아, 얼른 끝내 버리자.”
서기는 중얼거리면서 시계를 꺼냈다. 참으로 무섭게 생긴 사나이였다. 마치 거미의 몸처럼 길고도, 가는 다리에 팔은 커다랗고, 몸통은 크고 동그란데, 얼굴은 우락부락했다.
보트를레는 다리가 막 떨리고 휘청거려 앉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해 봐라, 뭐가 필요한지를…”
“그 종이다. 사흘 전부터 찾고 있는 중이다.”
“없다.”
“거짓말 마라. 내가 들어왔을 때, 지갑 속에 넣는 걸 봤다.”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우리를 귀찮게 굴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하란 말이다.”
그는 여전히 권총을 겨눈 채, 보트를레에게 다가왔다. 그 힘찬 말투, 매서운 눈, 쌀쌀한 미소, 보트를레는 몸이 오싹했다. 보트를레가 진짜 위험을 느껴 본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놈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또 다음엔?” 하고, 소년은 목멘 소리로 말했다.
“그 다음엔? 그뿐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브레두는 다시 입을 열었다.
“1분밖에 없다. 자, 결심해라. 서투른 수작 하지 말고… 어서 그 종이를 내놔.”
보트를레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그의 바로 눈앞에는 새카만 권총 구멍이 열려 있었다. 구부린 손가락이 방아쇠를 꼭 누르고 있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
“어서 그 종이를 내놔, 그렇잖으면…!”
브레두는 되풀이 했다.
“옛다!” 하고 보트를레는 외쳤다. 그가 지갑을 꺼내 서기에게 내밀자, 서기는 얼른 그것을 낚아챘다.
“좋았어! 너도 그만하면 됐다 좀 겁쟁이지만, 상식은 있군. 자, 그럼 이만 실례한다.”
그는 권총을 집어 넣고, 창의 자물쇠를 돌렸다. 이때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뛰어내리려다 말고, 지갑 속을 살펴보았다.
“이런 죽일 놈 같으니! 이 안엔 종이가 없잖아? 잘도 속였구나.”
그는 이를 갈면서 다시 방안으로 뛰어내렸다, 두 방이 총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보트를레가 권총을 쏘았던 것이다.
“빗나갔다, 애송아!” 하고, 브레두가 소리를 질렀다.
“손이 떨리고 있지 않나. 무서운 모양이지?”
그들은 맞붙어 방바닥 위를 뒹굴었다. 밖에서는 누군지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보트를레는 이내 상대방에게 깔려 꼼짝 못하게 되었다. 상대방의 손이 칼을 치켜들었다가 내리쳤다. 바로 그 순간, 보트를레는 어깨에 고통을 느끼며, 그의 손은 축 늘어졌다. 그는 상대방이 자기의 저고리 안 호주머니를 뒤져 그 종이를 꺼내 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그 사나이가 창을 뛰어 넘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여러 신문은, 앙브뤼메지의 저택에서 일어난 최근의 사건들-예배당의 속임수, 아르세느 뤼팽과 레이몽드양의 시체의 발견, 판사의 서기 보레두에 의한 보트를레의 부상 등을 보도하고, 다음의 두 뉴스도 실려 있었다.
그것은 가니마르의 행방 불명과 셜록 홈즈의 납치사건이었다. 홈즈는, 런던 한복판에서 대낮에, 도버행 기차를 타려고 하다가 납치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뤼팽의 일당은, 17세 소년의 놀라운 지혜로 한때 무너질 뻔했다가, 또다시 되살아나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뤼팽의 두 강적, 홈즈와 가니마르는 제거되었다. 보트를레는 싸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아무도 이러한 적과 싸우기란 불가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