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성
레이몽드는 귀를 기울였다. 또다시 두 번 그 소리가 들렸다. 하도 희미한 소리여서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이몽드는 침대에서 가만히 일어났다. 고요한 한밤중, 휘영청 밝은 달이 정원의 잔디와 숲을 고요히 비추고 있고, 옛 수도원의 허물어진 폐허가 처량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그 위를 산들바람이 감돌아, 나뭇가지의 어린 잎새들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때, 또 갑자기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그 여자의 침실 아래 층 서쪽 끝에 있는 객실에서 난 소리 같았다. 레이몽드는 씩씩하고 마음이 굳센 아가씨였으나, 몸이 오싹해짐은 어쩔 수 없었다.
“레이몽드… 레이몽드…”
옆 방에서 레이몽드를 부르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 왔다. 레이몽드가 잠옷 바람으로 더듬더듬 그 방으로 가니, 사촌 동생 쉬잔이 와락 품안에 안겨 왔다.
“레이몽드 언니… 언니도 들었어?”
“응, 너 자지 않고 있었니?”
“개 짖는 소리에 깻나 봐… 깬 지 꽤 됐어…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
“4시쯤 되었을 거야.”
“저 소리 들려? 누가 객실을 걷고 있어…”
“걱정마. 삼촌이 아래층에 계시니까…”
“하지만 걱정이 돼. 아빠는 객실 바로 옆방에서 주무시고 계시잖아?”
“다발 씨도 거기 계신걸.”
“그분은 저 반대쪽 끝에 계시잖아. 그러니 아무 소리도 못 들을거야.”
두 아가씨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람을 부를까? 고함을 지를까?
그러나, 그들은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도 무서워서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러자 창가에 있던 쉬잔이 소리를 죽여 중얼거렸다.
“저것 봐… 연못가에 남자 하나가…”
과연 한 사나이가 뛰어가고 있었다. 그는 큼직한 물건 하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가는데, 그것이 뭔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는 담장에 뚫린 조그만 샛문으로 사라져 버렸다. 두 아가씨가 창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다리 하나가 2층에 닿도록 세워져 있었다. 한 줄기의 불빛이 발코니를 비추고 있었다. 그러자, 또 한 사나이가 역시 무엇인가를 들고서 그 발코니를 건너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더니, 조금 전의 사나이와 똑같은 길로 달아나 버렸다.
쉬잔은 질겁을 하고 맥이 풀려, 주저앉으면서 중얼거렸다.
“사람을 불러, 도와달라고!”
“누가 오겠니? 삼촌이? 또 다른 악당이 있어서 삼촌께 덤벼들면 어떡하라고?”
“하인을 불러요. 언니 방의 벨은 하인들 방과 통하지 않아…?”
“그래, 그래… 그게 좋은 생각이구나. 얼른 와 주면 좋으련만!”
레이몽드는 침대 옆의 벨을 찾아서 눌렀다. 두 아가씨는 기다렸다. 사방이 쥐죽은 듯이 고요하여 무서워졌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방 아래층에서 맞붙어 싸우는 소리, 가구 넘어 지는 소리, 고함 소리, 무시무시한 신음소리, 목이 졸려 캑캑거리는 소리 따위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레이몽드는 복도로 뛰어나갔다.
“싫어, 싫어, 언니, 가지마! 나 혼자 무서워!”
쉬잔이 말렸으나 레이몽드는 쏜살같이 층층대를 뛰어내려 객실의 큰 문 앞까지 와서는 멈칫 서 버렸다. 쉬잔도 비틀비틀 뒤따라와, 레이몽드 옆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들 앞쪽 서너발짝쯤 떨어진 곳에, 한 사나이가 플래시를 들고 서 있었다. 그 사나이는 두 아가씨 쪽으로 플래시를 들이대어 눈부시게 하면서, 한참 동안 얼굴들을 들여다보더니, 태연스럽게 모자를 집어 쓰고, 종이 조각 하나와 밀짚 두 개를 주워 들고, 양탄자 위의 발자국을 지워 버리고는,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두 아가씨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레이몽드보다 먼저 큰 객실 옆의 작은 침실로 뛰어들어간 쉬잔은, 너무나도 끔찍스러운 광경에 그만 질겁을 해 버렸다. 두 사나이가 방바닥에 죽은 듯이 나란히 쓰러져 있는 것이 달빛 아래 보였던 것이다.
“아빠, 아빠! 웬일이세요…”
쉬잔은 미친 듯이 외쳤다. 잠시 후, 제브르 백작은 몸을 움직이더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라. 다치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다발은? 살아있냐? 단도는, 단도는…?”
이 때 하인들이 촛불을 들고 와서 보니, 백작 옆에 쓰러져 있는 사나이는 백작의 심복 비서인 장 다발이었다. 그의 얼굴은 벌써 새파랗게 죽은 빛이었다. 레이몽드는 객실로 달려가 총 한 자루를 집어들고 발코니로 나왔다. 아까의 그 사나이는 아직 멀리 달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레이몽드는, 허물어진 수도원의 옆을 따라 달아나는 사나이를 발견했다.
레이몽드는 총을 겨냥하여 쏘았다. 사나이는 쓰러졌다.
“맞았다. 맞았어! 내가 가서 잡겠다!”
하인 하나가 소리쳤다.
“안 돼, 빅토르. 다시 일어났어… 얼른 샛문으로 뛰어가서 거길 지켜라. 거기밖에는 달아날 구멍이 없으니까.”
빅토르는 잽싸게 달려갔다. 악당은 다시 쓰러졌다가, 풀 속을 기어가고 있었다. 레이몽드는 또 한 명의 하인을 불렀다.
“알베르, 넌 여기서 지켜 보고 있어.”
레이몽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총을 집어들고 나가려 했다. 그러자 알베르가 말했다.
“가지 마세요. 아가씨…”
“염려 말아. 아직 한 방 남아 있어. 그 놈이 만약에 움직이면…”
레이몽드는 단호히 말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알베르는 레이몽드가 폐허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창가에서 외쳤다.
“그놈은 아케이드 뒤로 갔습니다. 이젠 안 보입니다. 조심하세요. 아가씨!”
레이몽드는 옛 수도원을 따라 돌아갔으므로, 알베르에게는 레이몽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는 페허 쪽을 줄곧 지켜 보면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도둑놈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아케이드를 향해 똑 바로 달려갔다. 30발짝쯤 떨어진 곳에 빅토르와 레이몽드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 됐나?”
“못 잡았어.” 하고 빅토르는 대답했다.
“샛문은?”
“난 지금 거기서 오는 길이야. 여기 열쇠가 있지 않아?”
“하지만… 틀림없이…”
“이건 독 안의 쥐야… 10분이면 잡히고 만다. 이 도둑놈은…”
총 소리에 잠을 깬 소작인과 그의 아들이 농장에서 달려왔다. 농장 건물은 꽤 멀었지만, 담장 안에 있었다. 두 부자는 오는 길에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모두들 빈틈없이 뒤졌다. 숲도 덤불도 샅샅이 뒤졌다. 예배당의 문은 꼭 닫혀 있었고, 유리창은 하나도 깨진 데가 없었다. 수도원을 뺑뺑 돌면서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모두가 헛수고였다. 단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었다. 도둑이 레이몽드의 총을 맞고 쓰러진 바로 그 자리에서, 자동차 운전사가 쓰는 주황색 가죽 모자 하나를 주운 것이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