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강렬한 박해에 직면하여서조차도 이단들이 특히 아리우스주의가 그렇게 강렬하게 예수의 유한성과 인간성을 강조한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중 누군가가 그처럼 끈질기게 고수한 전제에 관해 필연적으로 어떤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그 하마디 문서들 제외하면 그들이 어떤 혈통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어떤 증거는 휠씬 더 적다. 물론 나그 하마디 문서와 유사한 문서들, 즉 족보들과 공문서들이 존재했었을 가능성은 있다. 지독하게 악랄한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러한 증거를 가지기 두려워했을 것이며 그런 증거를 영원히 숨기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로마가 성공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단들은 예수의 가족과 약 4세기 후에 세계사에 등장한 메르빙 왕조 사이의 관련성에 관해서는 아무런 결정적인 확증도 제시해주지 않았다. 그러한 확증을 위해서는 다른 것, 즉 메로밍 왕조의 왕들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야 한다. 언뜻 볼 때 그 증거는 자체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미 메로베의 전설적인 출생, 즉 두 아버지의 아들이며, 그 두 아버지 중 하나는 바다를 건너 온 신비한 수중생물이라는 전설을 생각해 보았으며, 이 기묘한 우화는 어떤 왕조적 동맹 또는 결혼을 반영하며, 동시에 감추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것의 상징은 시사적이긴 하였지만 거의 결정적이지는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클로비스와 로마교회 사이의 협정은 우리의 각본에 있어서 대단히 의미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협정 자체는 구체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메로빙 왕조의 혈통에는 신성하고 기적적이며 신적인 본성이 인정되긴 하였지만 이 피가 실제로 예수의 피였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명백하게 진술되지 않았다.

 

어떤 결정적인 증거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연구를 더 진행해야 한다. 우리는 실재적인 증거를 가지는 단편들을 가려내어 이 증거들로 하나의 일관성있는 형태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먼저 메로빙 왕조에는 어떤 독특한 유대교적 영향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확실히 메로빙 왕조의 왕들은 반셈족이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로마 교회의 계속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토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대하여 관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동조하기까지 했다. 혼합 결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많은 유대인들 특히 남부에 있는 유대인들은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인 노예들과 하인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메로빙 왕조의 군주들을 위한 행정관들과 고위 장관들이었다. 대체로 유대교에 대한 메로빙 왕조의 태도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의 서구역사에 있어서 그 유례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메로빙 왕조의 왕들 자신은 그들의 기적적인 힘이 주로 그들의 머리털에서 주어진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머리털을 자르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삼손이 그 한 회원이었던 구약성서의 나실인들의 입장과 같았다.

 

예수도 나실인 이었음을 암시하는 많은 증거가 있다. 초대 기독교 작가들과 현대의 학자들은 모두 그의 형제 야고보는 논란의 여지없이 나실인이었다는데 동의하였다.

 

메로빙 왕조의 왕가(家) 및 그 왕조와 관련된 왕실에는 대단히 많은 수의 특수하게 유대교적인 이름들이 있었다. 이리하여 577년에는 클로타이르 2세의 한 형제가 삼손으로 이름 지어졌다. 그후의 르 레비트(le Levite) 는 브잘롱(Besalon)의 백작이자 제로나(Gerona)의 주교였다.

 

루시용(Roussillon)의 한 백작은 솔로몬이라는 이름이었으며 또다른 솔로몬은 브리타니(Brittany)의 왕이 되었다. 엘리자샤르(Elisachar)라는 수도원장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엘르아잘」과 「나사로」의 별명이다. 그리고 메로베(Merovee)라는 이름은 중동지방에서 유래된 명칭인 것처럼 보인다.

 

유대교적 이름들은 메르빙 왕조와 비지고트 사이의 왕조적 결혼을 통하여 점점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러한 이름들은 비지고트의 귀족과 왕족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소위 많은 「비지고트」 가족들이 사실은 유대교적 가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역사가들이 「고트(Goth)」와 「유대(Jew)」라는 말을 빈번하게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곤 했다는 사실에 의해 더 확증된다.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국경지역들에는 즉 메로빙 왕조와 카롤링 왕조 시대에 셉티마니아로 알려졌던 지역에는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지역은 「고티」 또는 「고티아」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따라서 그 지역의 유대인 거주자들은 「Goths」 라고 불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고의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 오류이다. 이러한 오류 때문에 유대인들은 특수한 성명에 의하지 않고는 구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고베르의 장인은 베라라는 셈족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베라의 누이는 레위라는 가족의 한 사람과 결혼했다.

 

물론 이름들과 머리카락에 대한 신비주의적 태도만 가지고는 메로빙 왕조와 유대교 사이의 관련을 확정 지을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더 설득력있는 또 다른 증거 단편이 있었다. 메로빙 왕조는 튜튼적 종족법을 고수한 튜튼 족인 프랑크인들의 왕조였다.

 

5세기 말에 이 법은 로마적인 체계로 성문화되어 샐릭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샐릭법은 궁극적으로 튜튼적 종족법이었으며 로마의 기독교가 서구에 등장하기 이전에 작성되었다. 그후 몇 세기 동안 그 법은 로마적인 체계로 성문화되어 샐릭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몇세기 동안 그법은 계속해 서 로마에 의해 전파된 교회법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중세기 전반에 걸쳐 그 법은 신성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세속법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무렵에 독일의 농부들과 기사들은 교회에 대한 그들의 불평에 있어서 전통적인 샐릭법을 무시한 루터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샐릭법의 한 전체 부분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제목 45, 「De Mirrantibus」로 계속해서 학자들과 주석가들을 혼란시켜 왔으며 끊임없는 법적 논쟁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여러 규정들 및 유랑인들이 정착하여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상황에 관한 조항들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단원이다. 그것에 관해 흥미있는 것은 그것이 원래는 튜튼적 법이 아니라는 것과 작가들은 그것이 샐릭법에 포함되어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상한 가정을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 비로소 샐릭법의 이 단원이 유대교적 법에서 직접 기원되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것은 탈무드에 있는 한 단원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따라서 샐릭법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법으로부터 직접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것이 샐릭법을 법전화하도록 후원한 르빙 왕조의 왕들이 순히 유대교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적 본문들을 접하기도 했었음을 암시해 주고있다.

 

그러한 단편들은 자극적이긴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가정을 위해서는 빈약하게 지지해 주었을 뿐이다. 즉 예수로부터 이어진 혈통이 프랑스 남부에 존재했었으며 이 혈통은 메르빙 왕조의 왕들과 결혼했다는 것과 메르빙 왕조는 결국 부분적으로는 유대교적이 되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메르빙 왕조 세대는 우리의 가정을 위해 어떤 결정적인 증거도 제시해 주지 못했지만 그 바로 다음 왕조의 시대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해 주었다. 이러한 「소급 증거」에 의하여 우리의 가정은 갑자기 타당성이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메르빙 왕조의 혈통이 가롤링 왕조의 왕들에 의해 폐위된 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 바 있다. 그, 탐구 과정에서 우리는 150년 동안 프랑스의 남부에 존재했던 자치공국을 만났었다. 그 공국의 가장 유명한 통치자는 귀염 드 겔론느였다.

 

귀염 드는 그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영웅들 중 하나였다. 그는 또한 볼프람 폰 에센바하에 의 씌어진 빌레할룸의 주인공이기도 하였으며 성배가족과 관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놀랍고 흥미있는 증거를 발견한 것은 귀염과 그의 배경에서 였다.

 

전성기의 귀염 드 겔론느의 영 토에는 스페인 북동부, 피레네, 그리고 셉티마니아로 알려져 있는 프랑스 남부지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역에는 오랫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6세기와 7세기에 이들은 아리우스적 기독교를 지지하는 비지고트 군주들과 대단히 진심어린 관계를 맺고있었다. 사실 이러한 관계는 너무나 밀접하여 혼합 결혼이 통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고트」라는 단어와 「유대」라는 말이 종종 상호 대치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711년경에는 셉티마니아와 스페인 북동부에 있는 유대인들의 상황이 크게 악화되었다. 그 무렵 다고베르 2세가 살해되었으며 그의 가문은 렌느 르 샤토를 포함하여 그 주변 지역인 라제로 은신하였다. 그리고 메로빙 왕조와 같은 계열이 아직도 명목상으로는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유일한 실제적인 권력은 카롤링 왕조의 침략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의 재가와 지지를 얻어 그들 자신의 왕조를 수집하는데 착수했다. 그 무렵에는 또한 비지고트인들도 로마기독교로 전향했었으며 그들 영토 내에 있는 유대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었다. 따라서 비지고트 스페인이 711년에 무어인들에 의해 침략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 침략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슬람교의 통치하에서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번성하였다.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너그러웠으며 때로는 그들에게 코르도바, 그라나다, 그리고 톨레도와 같은 피정복 도시들의 행정장관직을 부여하기도 했다. 유대의 상업과 무역은 조장되었으며 새로운 번영을 누렸다. 유대교적 사상은 이슬람교의 사상과병존하였으며 그 둘은 서로를 보완해 주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무어인 수도였던 코르도바를 포함한 마을들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8세기 초에 무어인들은 피레네를 가로질러 셉티마니아로 갔다. 그리고 720년부터 759년까지 다고베르의 손자와 증손자는 계속 라제에 비밀리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셉티마니아는 이슬람교의 수중에 있었다. 셉티마니아는 자치적인 무어인의 공국이 되었다. 그 공국은 나르본을 수도로 가지고 있었으며 코르도바의 왕족에 대해서는 단지 명목상으로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르본으로부터 무어인들은 계속 북진하여 리용과 같은 프랑스 영토 깊숙한 곳에 있는 도시들도 정복했다.

 

무어인들의 진군은 궁정장관이자 샤를르마뉴의 조부인 샤를르마르털에 의해 저지되었다. 샤를르는 무어인들을 나르본으로 몰아 내었으며 그 다음에는 그곳마저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무어인들과 유대인들에 의해 공동으로 방어된 나르본은 난공불락 이었다. 그리하여 샤를르는 주변에있는 지방을 파괴함으로써 그의 욕구불만을 해소했다.

 

752년경 샤를르의 아들 페팽은 지방 귀족들과 동맹을 맺어 셉티마니아를 완전히 자기의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나르본은 7년 동안에 걸친 페팽 군대의 포위공격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저항했다. 페팽, 그의 위치를 굳히는 것이 가장 긴급한 마당에 있어서 그 도시는 페팽측에서 볼 때 하나의 가시였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메르빙 왕조의 왕좌를 찬탈한 책임에 대단히 민감해 있었다. 합법적인 자격을 확립하기 위해 그는 메르빙 왕조의 남은 혈족들과 동맹을 가장했다. 그의 대관식을 준비할 때 성서적인 기름붓는 의식을 넣어 특색있게 하였다.

 

그때 교회는 왕을 즉위시키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기름붓는 것은 그 프랑크 군주국이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유대교적 군주국의 복사판이었음을(실제로 그 군주국의 계승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암시하고자 하는 고의적인 시도였다. 이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극히 흥미있다. 왜 찬탈자 페팽이 성서적 모형에 의하여 자신을 합법화하고자 했는가? 그가 폐위시켰던 왕조, 즉 메로빙 왕조는 정확하게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합법화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페팽은 두 개의 문제에 직면했다. 즉 나르본의 계속적인 저항과 성서적 전례를 언급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왕권을 합법적으로 확립하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콜럼비아 대학의 아더 즈커맨(Arthur Zuckerman) 교수가 설명했듯이 그는 759년에 나르본의 유대인들과 협정함으로써 그 두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결심했다.

 

이 협정에 따르면 페팽은 성서적 계승에 대한 그의 요구를 위해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또한 무어인들에 대하여 싸울때 유애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 보답으로 그는 셉티마니아의 유대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하나의 공국과 하나의 왕을 허락했을 것이다.

 

759년에 나르본에 있는 유대인들은 갑자기 그 도시의 이슬람 수비대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살해했으며 성문을 포위 공격하는 프랑크인들에게 열어주었다. 잠시 후 유대인들은 페팽을 그들의 정규적인 군주로 인정하였으며 합법적인 정서적 계승에 대한 그의 요구를 승인했다.

 

한편 페팽도 그의 계약을 지켰다. 768년에 셉티마니아에는 하나의 공국이 세워졌는데 그 공국은 명목상으로는 페팽에게 충성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독립된 나라였다. 하나의 통치자가 그 유대인들의 왕으로서 공식적으로 취임했다. 그 이야기에서 보면 그는 애메리(Aymery)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록들에 따르면 그는 프랑크의 귀족으로 인정되자 데오도리쿠스 또는 티에피라는 이름을 취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데오도리쿠스느 귀염 드 겔론느의 아버지였다. 그는 페팽과 바그다드의 칼리프에 의해 「다윗 왕가의 씨」로서 인정되었다.

 

우리가 이미 조사해 보았듯이 현대의 학자들은 데오도리쿠스의 출신과 배경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는 메르빙 왕조의 후손이었다. 즈커맨에 따르면 바그다드 출신이었다고 한다. 즉 바벨론 포로기 이후 바벨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바그다드 출신의 그 왕은 데오도리쿠스르르 축성하기 위해 바그다드에서 왔는데 그 후의 기록들이 그 두 사람을 혼동했을 수도 있다. 즈커맨 교수는 「서방의 왕들」은 동방의 왕들보다 더 「순수한 혈통」이었다는 묘한 주장을 하고 있다.

 

「서방의 왕들」은 메르빙 왕조의 왕들이 아니라면 누구였겠는가? 왜 메르빙 왕조의 한 개인이 유대인의 왕으로서, 즉 유대인 공국의 통치자요 「다윗 왕가의 씨」로서 인정되었는가? 메르빙 왕조의 왕들이 실제로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유대인이었음이 분명하다.

 

데오도리쿠서는 샤를르마뉴의 숙모이자 페팽의 누이인 알다(Alda)와 급히 결혼함으로써 페팽의 위치는 물론이고 자기의 위치도 더 확고히 했다. 그후 셉티마니아의 그 유대인 왕국은 번영을 누렸다. 그 왕국에는 카롤링 왕조의 군주들로부터 자유 보유권으로 보유된 부동산들이 증여되었다. 그 왕국은 또한 교황 스테파누스 3세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용적의 교회 부지도 주어졌다.

 

셉티마니아의 유대인들의 왕인 데오도리쿠스의 아들은 귀염 드 겔론느였는데 그는 바로셀로나의 백작, 툴루즈의 백작, 오베르뉴의 백작, 그리고 라제의 백작이란 칭호를 가지고있었다. 그의 부친처럼 귀염도 메로빙 왕조의 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족의 피를 받은 유대인이기도 했다. 그 왕족 혈통은 카롤링 왕가, 갈리프, 그리고 교황에 의하여 다윗 가라고 인정되었다.

 

그 후에 그것을 은폐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학문적 탐구는 귀염의 유대교가 논쟁의 여지가 없었음을 입증했다. 그가 오랑쥬의 제후 귀염으로서 나타나는 이야기들에서 조차도 그는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모두 능통하게 구사했다. 그의 방패 도안은 동방 왕들의 도안과 동일하였다.

 

즉 유다의 사자 다윗 가와 그 후의 예수가 속해 있던 지파가 그것이다. 그는 매부리 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 중에 조차도 그는 안실일과 장막절을 지키느라 애쓰고 있다. 즈커맨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포위와 함락을 원초적으로 기록한 그 역사가는 사건들을 유대교의 달력에 따라 기록하였다… 나르본 툴루즈의 공작이자 그 원정군의 지휘관이었던 윌리암은 유대교의 안식일들과 성일들을 엄격히 지켰다. 이런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는 루이 왕의 완전한 협력을 얻게 되었다.”

 

귀염 드 겔론느는 소위 「샤를르마뉴의 동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즉 그는 일반적 정식과 전승에 있어서 롤랑과 올리비에와 같은 그러한 전설적인 인물들과 동등한 권위있는 역사적 영웅이었다. 샤를르마뉴의 아들 루이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운 사람은 귀염이었다.

 

루이는 “윌리암… 나의 혈통은 당신의 혈통과 같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계열이 전혀 모호해 보이는 사람에게 주어진 언급임을 볼 때 대단히 이상한 언급이다.

 

동시에 귀염은 전사 이상의 인물이었다. 792년 직전에 그는 겔론느에 하나의 학술원을 창설하였으며 학자들을 초청하고 하나의 유명한 도서관을 만들었다. 겔론느는 곧 유대교적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교적」 플레제타니가 배출된 것은 그러한 학술원으로부터 였을 것이다. 그는 볼프람에 따르면 성배의 비밀을 프로방스의 가요에 한정시켰던 솔로몬 후손의 히브리 학자였다.

 

806년에 귀염은 실제 생활에서 물러나고 학교로 은둔하였는데 812년경 그는 죽고 후에 그 학교는 현재의 유명한 생 귀염 르 데세르(Saint Guillelm Ie Desert)라는 수도원으로 개조되었다. 그러나 귀염이 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겔론느는 유럽에서 막달라 마리아 숭배를 위한 곳으로 최초로 알려진 장소 중의 하나가 되었었는데 막달라 마리아 숭배는 여기서 유대인학교와 함께 매우 의미있는 듯이 융성되었다.

 

예수는 유대지파며 다윗의 왕가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배(계승 또는 왕가의 피)를 프랑스로 가져갔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8세기에는 프랑스 남부에서 유대임금으로 인정된 유대지파 다윗 왕가의 주권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적인 유대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메르빙 왕조였다. 볼프람 폰 에센바하의 시를 보면 그와 그의 가족은 성배와 관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