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유성룡
일본군도 서울을 그리 쉽게 점령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강력한 방어막이 펼쳐져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선조실록》은 “일본군의 기병 두어 명이 한강 남쪽 언덕에 도착해 헤엄쳐 건너는 시늉을 하자 우리 장수들은 얼굴빛을 잃고 부하들에게 말의 안장을 얹도록 명하니 군사들이 다 붕괴했다” 고 전한다. 도성 수비책임자들은 성을 버리고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흥인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도 선뜻 들어오지 못했다. 유인작전으로 생각한 것이다. 먼저 십여 명의 군사를 입성시킨 뒤에도 수십 번을 탐지했다. 도성을 이렇게 버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수십 번을 탐지한 끝에 군병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서울에 무혈입성했다. 궁궐은 이미 백성들이 다 불태웠으므로 일본군 지휘부는 종묘에 자리를 잡았다.
개성에 있던 선조는 일본군의 서울 입성 소식을 듣고는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선조실록》 25년 5월 3일
상이 일렀다.
“여기에 머물 수는 없다.”
윤두수가 아뢰었다.
“오늘은 미처 떠날 수 없으니 내일 조용히 거둥하소서.”
“오늘 떠나 금교에 가서 자려고 한다.”
“밤에 떠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겁을 먹으면 뜻밖의 변이 생길 지도 모릅니다. 내일 일찍 떠나셔야 합니다.”
“다른 말 하지 말고 속히 출발하라.”
일본군이 개성 코앞까지 오기라도 한 것처럼 포시(오후 3~4시)에 개성부를 황급히 떠난 선조의 어가는 밤중에 금교역에 도착했다. 이튿날 선조는 날이 밝자마자 금교역을 출발해 흥의역을 거쳐 저녁에 보산관에 도착했다. 선조는 곧바로 평양으로 도주할 것을 의논했다.
《선조실록》 25년 5월 3일
이헌국이 아뢰었다.
“해가 바야흐로 길어지니, 안성을 지나 용천에서 자고 내일 황주에서 자면 모레는 평양에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길을 가기에만 힘쓰시고 음식을 드시지 않으신다면 옥체가 상할까 염려됩니다.”
윤두수가 아뢰었다.
“난을 당하면 임금은 마땅히 진려해야 하고 신하는 마땅히 사직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성상께서 요동으로 건너가실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면 신들이 어찌 감히 치첩(성가퀴)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천안(임금의 얼굴)이 초췌함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걱정스럽습니다.”
상이 일렀다.
“여기서 용천이 얼마나 남았는가?”
선조의 귀에 싸우자는 말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뇌리에는 오직 빨리 북쪽으로 도망가려는 생각이 꽉 차 있었다. 이때 선조는 윤두수에게 “적병이 얼마나 되는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 라고도 물었다. 선조는 나름의 정보망을 갖고 있었는데, 비빈들과 그 가족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선조는 공포에 떠는 비빈들에게 들은 정보로 전란에 대처한 셈이다.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안전이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신하들이 계속 자신을 따라주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5월 6일 황주에 도착해 어가를 따른 신하들에게 가자(加資=자급을 높여줌)했다.
다음 날 평양에 도착한 선조는 가장 먼저 사간원 사간 윤승훈, 사간원 정언 정사신, 사헌부 지평 남근을 체직시켰다. 자신의 가마를 빨리 따라오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신 김공량을 처벌하라는 대간의 주장은 거절했다.
“초목 한 그루도 함부로 죽이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지금 천인(賤人) 하나가 마치 나라를 그르친 것처럼 하는데 지나치지 않은가. 내가 평소에 심장병이 있어 지금에 와서는 뼈만 남아 부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어찌 중도를 넘은 논의에 급급하겠는가. 짐작해서 하라.”
평양에 도착하자 선조는 안정을 되찾았다. 일본군이 평양까지 급히 추격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진교를 내렸다.
“어선(御膳=임금에게 진공하는 음식)은 생물(生物)로 할 것이며 수량도 풍족하게 하라. 동궁 이하도 다 이 예에 따르도록 하라.”
평양성에서 선조는 군사체계를 재점검해야 했다. 그러나 선조는 조선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했고 장수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런 증거 중 하나가 애꿎은 부원수 신각을 처벌한 일이다. 5월 18일 비변사는, “오늘날의 폐단은 장사(壯士)가 많지 않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율이 엄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라면서 부원수 신각이 도원수 김명원의 지시를 어겼으니 “군법을 엄하게 보임으로써 기율을 엄숙하게 해야 한다” 고 계청했다. 전시의 군법은 참형이 상형이었다. 김공량의 처벌을 주청하는 상소에 대해서는 “초목 한 그루도 함부로 죽이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라고 반대하던 선조는 무장을 죽이자는 이 주청을 선뜻 허락했다.
《징비록》
신각이 처음에는 김명원을 따라가 부원수가 되었으나 한강 싸움에서 패전하자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갔는데, 때마침 함경도 병사(兵使) 이혼의 군사가 도착했다. 신각은 양 군사를 합쳐 서울에서 나와 민가를 노략질하는 적을 맞아 쳐부수었으니, 왜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처음의 승전이므로 사람들은 모두 뛰면서 좋아했다. … 우상 유홍이 임금에게 신각을 급히 베어 죽이기를 청하여 선전관이 이미 떠났는데, 신각이 전투에 이겼다는 보고가 올라왔으므로, 조정에서 사람을 뒤쫓아 보내 중지시키려 했으나 미처 도착하기 전에 신각은 죽고 말았다. 신각은 비록 무인이지만 본디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었다. … 아무런 죄도 없이 죽었고 또 90세 된 늙은 어머니가 살아 있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원통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성룡이 도체찰사였으면 방지할 수 있는 비극이었다. 조선 장수들의 고질병은 적군을 두려워해 떨면서도 아군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것이었다. 김명원의 잘못된 보고 때문에 부원수 신각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김명원의 지휘권을 일부 박탈했다. 지사 한응인에게 군사 3천 명으로 임진강을 지키라고 명하면서 도원수 김명원의 지시를 받지 말라고 한 것이다. 임진강 방어전은 지휘권이 둘도 나뉜 상태에서 치러야 했으므로 혼란은 예견된 것이었다. 한응인이 거느린 군사들은 여진족과 여러 차례 싸워본 실전경험이 많은 군사들이었다. 군사들이 한응인에게 적군의 형세를 살핀 다음 싸우자고 건의하자 한응인은 군사들이 나가지 않는다고 서너 명을 목 베어 죽였다. 지휘권이 없는 김명원은 제어할 수 없었다. 이일이나 신립 · 김명원 · 한응인 모두 휘하 군사 목 베는 데는 천부의 맹장이었다. 장수의 칼은 적을 베라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모르는 용장(庸將)들이기도 했다.
《징비록》
별장 유극량은 경험이 많고 싸움에 익숙하기 때문에 경솔히 나아가지 말자고 힘써 진언하자 신할이 그의 목을 베려고 했다.
“내가 머리털을 묶어 상투를 짰을 때부터 군인이 되었는데 어찌 죽기를 피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나라 일을 그르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한 유극량은 분개하며 자신에게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뛰쳐나가 먼저 임진강을 건넜다. 우리 군사가 이미 험난한 곳으로 들어가자 적은 날쌘 군사를 산 뒤에 매복시켜 두었다가 한꺼번에 일어나 공격하니 우리 군대는 모두 패전해 달아났다. 유극량은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앉으면서 말했다.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다.”
그는 활을 당겨 적군 몇 사람을 쏘아 죽인 다음에 적병에게 살해되었으며, 신할도 전사했다.
군사들은 달아나 강 언덕까지 왔으나 건너지는 못하고 바위 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강물에 뛰어드니 마치 바람 속에 어지럽게 떨어지는 잎사귀 같았다. 미처 강에 몸을 던지지 못한 군사는 적군이 뒤에서 쫓아와 긴 칼로 내려찍으니 모두 엎드려 칼만 받을 뿐이었다.
이렇게 임진강 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김명원과 한응인이 행재소에 돌아왔으나 조정에서는 이일을 문책하지도 않았다” 라고 적고 있다. 군율은 백성들이나 일반 병사, 또는 군관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최고 지휘관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6월 1일 선조는 유성룡에게 풍원 부원군을 제수했다. 명나라 사신과 장수들을 접대하라는 뜻이었다.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명나라는 최세신과 임세록을 차관(특별한 임무를 띤 임시관원)으로 삼아 평양으로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전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한 달이 채 안 돼서 도성이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군이 평양 근처까지 나타났다는 소식도 마찬가지였다. 유성룡이 만나보니 임세록이 알고자 하는 진짜 정보는 따로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앞잡이가 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본군이 이렇게 빨리 북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유성룡은 임세록을 데리고 대동강이 보이는 연광정에 올랐다. 일본군 한 명이 대동강 동쪽 숲속에서 나와서 이리저리 살피더니 잠시 후 두세 명이 더 나와 주위를 살폈다.
“저것이 왜병의 척후입니다.”
임세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병의 숫자가 어찌 저렇게 적을 수 있겠소.”
“많은 군사는 뒤에 있고 몇 명만 먼저 와서 정탐하는 것입니다. 척후병의 숫자만 보고서 왜병을 깔본다면 반드시 적군의 꾀에 빠질 겁니다.”
그제야 유성룡의 말을 사실로 믿은 임세록은 빨리 자문(중국과 왕래하는 공문서)을 써달라고 요청해 가지고 돌아갔다. 자문은 물론 구원병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군의 대동강 출현을 목격한 임세록의 보고는 힘을 발휘할 것이 틀림없었다. 구원병을 보내지 않으면 자칫 명나라가 싸움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임진강이 무너지면서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평양에서 안정을 되찾은 선조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동량의 《기재사초》는 임진년 6월 1일조에 “임진강의 방어가 무너져서 사태가 점점 급박하여서 상이 묘당에 명하여 거취를 의론케 하였다” 라고 쓰고 있다. 평양을 버리고 다시 도주할 계획을 세우라고 명했다는 말이다. 유성룡이 또다시 반대했다.
“오늘날 사세는 먼젓번 서울에 있을 때와는 다릅니다. 서울은 군사와 백성이 모두 무너져서 지키려야 지킬 수가 없었지만, 평양성은 앞이 강물에 막혀 있고 민심도 자못 안정되어 있으며, 또 중원과도 가깝습니다. 만약 며칠만 더 굳게 지킨다면 반드시 명나라 군사가 와서 구원할 것이니, 그 힘을 빌어서 적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이곳으로부터 의주까지 다시 지킬 만한 땅이 없으니, 형세가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서인 좌상 윤두수도 유성룡의 사수론을 지지했다. 그러나 선조가 피난길에 나선다는 소문이 돌면서 평양은 이미 혼란에 빠져 들고 있었다. 평양 사람들이 너도나도 도주해 성안이 텅 비었다. 당황한 선조는 세자 광해군에게 백성들을 설득하라고 명했다. 광해군이 대동관의 문에 나가서 부로(父老)들에게 평양성을 굳게 지키겠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선조의 육성을 요구했다.
“동궁마마의 말씀만 듣고는 백성들이 마음으로 믿지 않으니 반드시 성상께서 친히 타이르는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이튿날 선조는 하는 수 없이 같은 장소에 나가서 승지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선조실록》 6월 2일조는 “이날 상이 함구문으로 거둥하여 평양의 부로와 군민들을 소집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겠다는 뜻을 유시했다” 라고 전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부로들이 달아난 사람들을 불렀다. 《징비록》은 “그들이 각기 나누어 산골에 숨어 있던 늙은이, 어린이와 남녀, 자제(子弟)들을 불러 모아 성에 들어오니 성안이 가득 찼다” 고 전하고 있다. 선조의 평양성 사수 발언에 백성들이 모여든 것이다.
그러나 6월 8일 일본군 선봉이 대동강 가의 재송정 앞에 병사를 주둔시키자 다시 선조가 도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재신 노직 등이 선왕들의 위판을 모시고 성문을 빠져나가는 것이 목도되면서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신주를 옮기는 것은 국왕 파천의 신호였다. 성안에 있던 이속(吏屬)과 백성들이 들고 있어섰다. 백성들은 벼슬아치들을 꾸짖었다.
“너희들이 평일에는 나라의 녹(祿)만 도적질해 먹다가 나라 일을 그르치더니, 이제 백성들을 이렇게 속인단 말이냐?”
백성들은 길을 가로막고 재신들을 걷어찼다. 《징비록》은 이때 “신주가 길바닥에 떨어졌다” 라고 전한다. 선왕의 신주가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백성들에게 선왕의 신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길가에 모인 장정들은 물론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 분기가 탱천해 머리털을 곤두세우고 외쳐댔다.
“성을 버리고 도망칠 것 같으면, 왜 우리들을 속여 성안으로 불러들여 적의 손에 어육(魚肉)이 되게 한단 말이냐?”
선조는 신주를 따라 나가려고 했으나 백성들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떠나지 못했다. 연광정에 있던 유성룡은 선조가 행궁으로 사용하는 대동관으로 달려갔다.
《징비록》
궁문에 이르니 난민이 거리에 가득한데, 모두 팔뚝을 걷어붙이고, 칼이나 몽둥이를 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후려침이 몹시 소란스럽고 북적거려서 제지할 수 없었다. 문 안의 조당에 있던 여러 재신들은 모두 얼굴빛이 변하여 뜰 가운데 서 있었다. 나는 난민들이 궁문에 들어올까 걱정이 되어 문 밖 층계 위에 나가 서서 그중에 나이 많고 수염 많은 사람을 손짓해서 부르니 그가 곧 다가왔다.
그는 평양 지방의 관리였다. 유성룡은 그 사람을 타일렀다.
“그대들이 힘을 다하여 이 성을 지키면서 임금께서 성 밖으로 나가지 않기를 원하고 있으니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가득하다. 그런데 난을 일으켜 궁문을 소란하게 하다니 대단히 놀랄 만한 일이다. 조정에서도 지금껏 이 성을 굳게 지키기로 계청했고 임금께서도 이미 허락하셨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야단스러운가? 그대의 모양을 보건대 식견 있는 사람 같으니 여러 사람들을 타일러 물러가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장차 중한 죄를 범하게 될 테니 그때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즉시 몽둥이를 버리고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소민(小民)들은 나라에서 이 성을 버리려 한다는 말만 듣고 분개해 이렇게 망동한 것인데, 지금 이런 말씀을 들으니 소인의 가슴속이 시원해집니다.”
그는 난을 일으킨 무리들을 손을 휘둘러 헤쳐버렸다.
이무렵 일본군은 대동강까지 진출했으나 더 이상 북상하지 못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하면서 제해권을 장악해 갔기 때문이다. 선조가 평양에 도착한 5월 6일 이후만 해도 조선 수군은 6월 2일 당포, 6월 5일 당항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당항포 해전에서만 적선 26척을 격침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군수품 보급에 문제가 생긴 일본군이 북상을 주저한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중전 의인왕후 박씨를 먼저 함경도로 보냈다. 자신이 따라갈 생각이었다. 중전의 피난길은 순조롭지 못했다. 역시 난민들 때문이었다.
《선조실록》 25년 6월 10일
중전이 함흥으로 가기 위하여 궁속(宮屬)들이 먼저 나가자, 평양 군민들이 난을 일으켜 몽둥이로 궁비(宮婢)를 쳐 말 아래로 떨어뜨렸으며, 호조판서 홍여순은 길에서 난병에게 맞아 등을 다쳐 부축을 받고 돌아왔다. 거리마다 칼과 창이 삼엄하게 벌여 있고 고함이 땅에 진동하였는데 모두 대가가 성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 풍원 부원군 유성룡이 전에도 성을 지키자는 계책을 고수하여 삼사(三司)와 서로 다투었는데 이때에도 여러 신하들과 상 앞으로 바로 들어갔다. 상이 궁전(활)을 차고 뜰 가운데에서 산보하며 승여(가마)가 준비되었다는 보고를 기다리다가, 유성룡 등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전상으로 올라가 앉으니, 유성룡과 승지 이곽, 봉교 기자헌 등이 입시하였다.
이때 유성룡이 선조에게 “원하옵건대 상께서는 이곳에 머물러 계시고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지 마소서” 라고 만류했다. ‘서쪽으로 행행하지 말라’ 는 말은 요동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선조의 마음은 이미 조선을 떠나 있었다. 그는 좌상 윤두수와 순찰사를 겸임하고 있는 이조판서 이원익에게 평양성 사수를 명하고 6월 11일 영변을 향해 떠났다. 여차하면 요동으로 도주하려는 심산이었다.
11일 밤을 숙천에서 보낸 선조는 다음 날 안주를 거쳐 영변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비가 내렸다. 선조는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영변으로 향했다. 북도로 향하던 왕비 일행은 함경도로 가지 못했다. 가등청정 군이 함경도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세자 광해군을 영변에 남겨 국사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명하고 회의를 주재했다. 선조가 참석하는 어전회의에서 적을 물리칠 방안이 논의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모든 논의의 초점은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에 맞춰졌다. 선조의 목적지는 초지일관 요동이었다.
“당초에 일찍이 요동으로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항상 왜적이 앞에서 나타난 뒤에는 피해 가기 어렵다고 말하곤 하였다.”
자신이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투였다. 영의정 최흥원이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명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대하자 이렇게 답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갈 것이다.”
요동으로 도망가려는 선조에게도 논리는 있었다.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피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남국이 멸망당한 후 중국에 입조하자 병사를 보내 안남국을 회복시킨 적이 있다. 나도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요동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선조 자신이 전쟁 수행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신하들은 선조가 평양성을 떠난 것이 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평양성은 사수가 가능한 성이기 때문이다.
선조는 도주했지만 평양성의 신하들은 성을 사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선조가 도주한 그날 평양성에 남은 윤두수와 이원익은 밤중에 평안도 출신 김진에게 토병(평안도 군사) 백여 명을 인솔하고 대동강을 건너가 공격하라고 명했다. 김진이 토병을 이끌고 도강했을 때 적군들은 한창 자고 있었다. 조선군이 역습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경계병도 세워놓지 않았기 때문에 김진 등이 급습하지 속수무책이었다. 김진은 일본군 수백여 명을 삽시간에 사살하고 말 133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귀환하는데 배가 빨리 도착하지 않아 추격하는 일본 군사에게 공격당해 토병 30여 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비록 아군의 손실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큰 승전이었다. 조선군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확산되었다.
평양성에 남은 유성룡이 차관으로 파견된 명나라 도지휘 동양정을 만난 결과를 보고한 것도 평양성 사수의 희망을 크게 했다.
“명나라 사람이 한참 동안 바라보고서, ‘만약 이 정도라면 우리 군사가 한번 오면 왜적들을 섬멸할 수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신이 역관을 통해 다시 그들에게, ‘왜적들은 온갖 간사한 꾀를 다 내는데 강의 상류와 하류에는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이 없지 않으므로 병사들을 나누어 수비하다보니 힘이 분산되는 게 걱정이다. 명나라 군사가 오는 것이야말로 한 시각이 급하니, 대인은 급히 귀국하여 출병할 시기를 앞당기라’ 하였습니다. … 만약 수일만 지탱하여 명나라 병사가 들어오면 왜적들을 물리칠 가망이 없지 않습니다.”
6월 14일 명나라 차관 동양정의 패문 내용이 알려지면서 평양성에 남은 사람들은 성을 사수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명나라 군이 내일 압록강에 도착해서 모레는 강을 건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며칠만 더 버티면 명군이 평양성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도주 중인 조정은 전혀 다른 문제로 시끄러웠다. 선조가 전날 밤 비망기를 내려 광해군에게 내선(왕위를 물려줌)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선조의 내선 비망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을 세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요동으로 도주하기 위해서였다. 신하들은 평양성 사수 대책에 힘쏟는 대신 선조를 청대해 전교의 명을 거두어달라고 요청하는 데 힘써야 했다. 영의정 최흥원이 청대해 전교를 거두어달라고 요청한 그날 《선조실록》은 “상이 마침내 요동으로 건너갈 계획을 결정하고 선전관을 보내 중전을 맞아 돌아오도록 하였다” 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날 밤 평양성 전투가 있었다.
평양성의 도원수 김명원은 야음을 틈타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고언백에게 날쌘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공격하라고 명했다. 고언백은 부벽루 아래 능라도 나루로 강을 건넜다. 그런데 공격 시간에 차질이 생겼다. 원래의 공격 시간은 삼경(오후 11시~오전 1시)이었으나 강을 건널 무렵 이미 먼동이 트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아직 장막 속에서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급습했다. 평안도 토병 임욱경이 앞장서 싸우다 전사하기도 했으나 조선군은 적병 여럿을 전사시키고 3백여 필의 말도 빼앗았다.
소란에 잠이 깬 일본군이 반격에 나서자 조선군은 강 쪽으로 퇴각했는데, 후송을 맡은 뱃사람들이 적군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강가에 배를 대지 않았다. 많은 군사들은 강물에 빠져 죽었고, 이 지역 지리를 잘 아는 토병들은 물이 얕은 왕성탄으로 건넜다. 그런데 이를 본 일본군은 왕성탄은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깊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저녁 일본군 본대는 드디어 대동강을 건넜다.
일본군 본대의 대동강 도하를 목도한 장수들은 평양성 사수를 포기했다. 윤두수와 김명원은 성안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병기와 화포를 풍월루 연못 속으로 가라앉혔다. 이튿날 일본군은 모란봉에 올라 성이 텅 빈 것을 확인하고 무혈입성했다. 6월 15일이었다. 평양성을 빼앗긴 것도 문제지만 평양성 결전에 대비해 여러 고을에서 모아다놓은 10만 석의 곡식이 일본군 수중으로 들어간 것도 큰 문제였다. 보급품 부족에 허덕이던 일본군으로서는 망외(望外)의 소득이었다.
6월 중순 들어 명나라 장수들이 몇백 명씩 군사들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원군이었다. 그러나 명군 또한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조도사 홍세공의 6월 20일자 치계에 “장수들의 기율이 엄중하지 않고, 또 군마들이 민가에 마구 뛰어드니 백성들이 놀라 흩어져 성안이 온통 비었습니다” 라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명나라 군사들의 접대를 맡은 유성룡은 군량 마련이 큰 걱정이었다. 그렇잖아도 행패가 심한 명군이 식량까지 제때 공급받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명군에게 식량을 공급해야 했다.
유성룡이 《징비록》에 “임금의 행차가 평양을 떠나온 후로는 인심이 무너져서 지나는 곳마다 난민들이 곧바로 창고에 들어가서 곡물을 약탈하니 순안 · 숙천 · 안주 · 영변 · 박천 등의 고을 창고가 차례로 약탈당했다” 라고 쓴 것처럼 대부분의 창고는 약탈당한 뒤였다. 심지어 “박천에서 출발할 때 조신의 짐바리를 노략질한 마을 도적들이 있었다” 는 내용이 실록에 기록될 정도였다. 선조는 6월 15일 박천을 떠나 이튿날 가산에 도착했다. 선조는 가산에서 정주를 거쳐 요동으로 북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가산이 승부처라고 생각했다. 평양 아래 대동강이 흐르는 것처럼 가산 아래 청천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6월 16일 유성룡은 선조에게 가산을 결전 장소로 삼자고 말했다.
《선조실록》 25년 6월 16일
유성룡이 아뢰었다.
“청천강 가에서 한번 결전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가산 군수 심신겸은 ‘본군에는 군량이 5백~6백 석이 있으나 정주에는 전혀 없다’ 고 말했습니다.”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정주에 군량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의주에는 홍세공을 보냈는데 준비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2천 군사가 왕래하는 군량도 준비할 수 없단 말인가?”
정철 등이 아뢰었다.
“박천과 영변에는 저축된 군량이 조금 있다고 합니다.”
상이 일렀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군신들이 일을 해보려는 뜻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른 것이다.”
유성룡과 정철이 아뢰었다.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이곳에 모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가산에서 결전하자는 신하들에게 자신이 도주할 정주에 양식을 미리 마련해놓지 않았다고 ‘일을 해보려는 뜻이 없다’ 고 비판한 것이다. 이날 유성룡은 홍진과 함께 “흩어진 병졸 수천여 명을 거두어 명나라 병사와 함께 결전하여 다행히 승전하면 종묘사직이 다시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재차 결전을 촉구했다. 선조의 대답은 엉뚱했다.
“요동에 자문을 가지고 갈 사신을 미리 정하는 것이 좋겠다.”
요동으로 건너간 이후에 자신의 처우문제 등을 논의할 사신을 보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6월 16일 선조는 가산을 떠나 정주에 도착했는데, 《선조실록》은 “궁인 중에는 그냥 걸어서 간 사람도 있었다” 라고 전할 정도로 비참한 피난길이었다. 선조의 뇌리에는 빨리 조선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들어 있었다.
선조는 정주를 떠나 선천으로 가면서 유성룡에게 정주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했다. 이 상황을 유성룡은 《징비록》에 “나는 길가에 엎드려 임금의 행차가 성 밖으로 나가시는 것을 전송한 다음, 연훈루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라고 적어놓았다.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기 위해 분주하던 선조가 막상 유성룡은 요동 망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정주에 떨어뜨린 것이다.
곽산을 떠나 선천으로 가면서 곽산 군수 이경준이 호종하겠다고 주청하자 즉시 받아들이고, 대신 선전관 고희를 곽산군수로 삼았다. 고희가 눈물을 흘리면서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조가 곽산을 떠나면 곽산은 곧 백성들에 의해 무정부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경준은 호종하겠다고 자청한 것이고, 고희는 눈물을 흘리며 사양한 것이다. 유성룡을 정주에 남겨둔 것은 요동으로 가는 장애물을 제거한 셈이다.
《선조실록》 25년 6월 18일조는 “이때에 도로에 떠도는 말에, 왜적들이 반드시 대가(임금의 수레)를 뒤쫓아오고야 말 것이라고 하니, 대가가 지나간 여러 고을이 일제히 비고 난민들이 창고를 불사르며 약탈해 갔다” 라고 적고 있다. 국난 극복의 가장 큰 장애요소는 다름아닌 선조 자신이었다. 도망가는 선조와 약탈자로 변한 백성 사이에서 유성룡은 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유성룡 휘하에는 군관 6명과 중도에 모은 패잔병 19명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유성룡과 생사를 함께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선조가 버리고 떠난 정주는 치안 부재상태로 빠져들었다. 저녁 무렵 정주의 관곡 창고가 있는 남문 주변으로 수백 명의 난민들이 모여들었다. 유성룡은 약한 고리를 먼저 쳐서 기선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때 난민 10여 명이 성문으로 몰려들자 유성룡은 군관에게 19명의 병사를 모두 주어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10여 명의 난민들은 병사들이 쫓아오자 도주했으나 9명이 붙잡히고 말았다. 유성룡은 이들의 상투를 풀어 흩뜨리고 두 손을 뒤로 돌려 합쳐 묶은 다음 창고 옆 길가로 끌고가서 군사들에게 소리치게 했다.
“창고를 약탈하는 도적은 사로잡아 목을 베어 매달겠다.”
그제야 창고를 털려던 난민들이 서문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유성룡은 이들의 목을 베지 않았다. 백성들의 마음을 안돈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인인 정주 판관 김영일은 평양에서 도주해 처자를 바닷가에 옮겨두고 창고 곡식을 훔쳐 가족들에게 보내려고 했다. 유성룡은 그를 체포한 다음 꾸짖었다.
“너는 무장의 몸으로 싸움에 지고도 죽지 않았으니 그 죄가 목을 벨 만한데, 또 감히 관청 곡식을 훔쳐내는가?”
유성룡은 곤장 60대를 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군율을 세우지 않았다. 유성룡의 이런 조치 때문에 정주뿐만 아니라 용천 · 선천 · 철산의 관곡도 안전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