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유성룡
선조 25년(1592, 임진년) 5월 1일.
임진나루 건너 동파관은 어수선했다. 아직도 어제 내린 비가 마르지 않아 질척했다. 빗속을 뚫고 모래재와 벽제역을 지나 한밤중에 겨우 동파관에 도착했다. 왜란이 발생한 지 20일도 채 되지 않아 임진강 북쪽까지 쫓겨온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이날의 동파관 정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이날 아침에 상이 대신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괴로운 모습으로 일렀다.
“이모(이산해)야 유모(유성룡)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꺼리거나 숨기지 말고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고 말하라.”
또 윤두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그에게 하문하니, 신하들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신립의 탄금대 패전 소식에 부랴부랴 도주 길에 오른 선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을 잃은 채 ‘이모야 유모야!’ 하던 선조가 대신들을 잇달아 부른 것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도주하자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신립이 패했다는 보고를 들은 선조는 조선은 이미 망한 것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했다. 선조가 도승지 이항복을 돌아보며 물었다.
“승지의 뜻은 어떠한가?”
“거가(임금의 수레)가 의주에 머물 만합니다. 만약 형세와 힘이 궁하여 팔도가 모두 함락된다면 바로 명나라에 가서 호소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로 가서’ 라는 말이 선조의 속뜻과 부합했다. 윤두수는 평안도가 아니라 함경도로 가자고 말했다.
“북도(함경도)는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며, 함흥과 경성은 모두 천연적 요새로 믿을 만하니 재를 넘어 북쪽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선조가 말을 받았다.
“승지의 말이 어떠한가?”
의주로 가는 방안을 논의하자는 것인데, 의주행은 곧 요동행을 뜻했다. 나라는 망해도 선조 자신은 살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선조의 뜻이 요동행에 있음이 분명해지면서 그대로 결정되려는 찰라, 말을 자르고 나서는 인물이 있었다. 좌의정 유성룡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1일
“안 됩니다. 대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상이 일렀다.
“내부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유성룡이 거듭 안 된다고 하였다.
내부란 중국에 가서 붙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이 요동내부책이다. 이 경우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이다. 유성룡은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생각했다. 국왕과 대신들이 나라를 버리고 도주하면 그것으로 조선은 멸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가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라고 단호하게 자른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전기였다. 이때 만일 선조와 대신들이 압록강을 건넜다면 조선은 이래저래 망했을 것이다. 일본이 차지하거나 명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일본과 명나라가 반씩 나누어 가졌을지도 모른다. 유성룡이 두 번씩이나 강력하게 만류했기에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려던 계획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이항복과 유성룡은 이 문제를 두고 논쟁했다.
이항복이 아뢰었다.
“신이 말한 것은 곧장 압록강을 건너자는 것이 아니라 극단의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유성룡과 반복하여 논쟁하는 도중에 유성룡이 말했다.
“지금 관동(강원도)과 관북(함경도) 등 여러 도가 그대로 있고 호남에서 충의로운 인사들이 곧 벌떼처럼 일어날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갑자기 논할 수 있겠는가.”
이항복은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유성룡이 물러나와 이항복을 책망하며 말했다.
“어떻게 경솔히 나라를 버리자는 의논을 내놓는가. 그대가 비록 길가에서 임금을 따라 죽더라도 궁녀나 내시의 충성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 한번 퍼지면 인심이 와해될 것이니 누가 수습할 수 있겠는가.”
이에 이항복이 사과했다.
《선조실록》도 유성룡의 질책에 “이항복이 사과하였다” 라고 전한다. 이항복은 서인, 유성룡은 남인이지만 이는 당파싸움이 아니었다. 이항복이나 유성룡 모두 당파보다는 국가를 앞세우는 인물들이었다. 이항복은 이후 여러 차례 유성룡을 옹호할 정도로 당파를 뛰어넘어 사고했다. 유성룡의 강력한 반대로 다시는 ‘압록강을 건너’ 운운하는 말은 나오지 못했다.
유성룡의 말대로 아직 반격할 기회는 있었다.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격퇴하면서 호남을 보호했고, 그런 호남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대가가 압록강을 건넜다면 끝장이었다. 임금과 대신들이 도망갔는데 누가 목숨 바쳐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군과 싸우겠는가?
그러나 유성룡은 이 일로 선조의 눈 밖에 난다. 선조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복을 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아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