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인생에는 몇 가지 수수께끼가 있는데, 그중 가장 석연치 않은 점은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그가 실각한 이유다. 북인 이이첨(李爾瞻)이 유성룡을 최초로 탄핵한 선조 31년(1598) 9월 말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사망해 8월 28일과 9월 5일에 이미 철군령이 내려진 후였다. 장장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려는 찰나였다. 7년 전쟁 동안 유성룡은 자타가 공인한 전란 극복의 선두였다. 임란 이듬해부터는 도체찰사에 영의정까지 겸임하고 전쟁을 이끌었다. 그런 그가 종전이 기정사실화되자마자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그가 탄핵당한 이유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를 위한 사신 길을 자청하지 않아서였다. 태조 이성계의 부친이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이라고 기록된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의 내용을 고쳐달라는 요청이 좋게변무인데, 태조 3년(1394) 처음 불거진 것으로 200년도 더 지난 사건이다. 전시 도체찰사이자 영의정이 탄핵당할 사건은 아니다. 공격하는 쪽에서도 이것으로는 설득력이 약하자 강화를 주창했다는 주화(主和) 혐의를 추가했다. 그러나 유성룡을 실각시킨 북인들이 편찬한 《선조실록》이나 그의 반대당파인 서인들이 작성한 《선조수정실록》그 어디에도 유성룡이 강화를 주장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유성룡은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도주하려 할 때 도성사수론을 주창하고, 선조가 평양을 버리려 할 때 평양결전론을 주창하고, 선조가 요동으로 도주하려 할 때 “대가(大駕)가 우리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라고 저지한 강경 주전론자다. 이런 유성룡에게 주화 혐의를 씌우고 이를 빌미로 실각시킨 데는 다른 배경이 있다.

 

선조도 그런 배경의 한 부분이다. 전쟁 기간 내내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는 종전되기 전에 유성룡을 제거해야 했다. 종전 후 선조의 권위는 끝없이 추락할 것인 반면 유성룡의 성가는 하늘을 찌를 것이기 때문이다. 선조는 탄핵을 유도해 그의 실각을 부추겼다. 그런데도 유성룡이 공격당하는 것을 방어해주는 벼슬아치들이 드물었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유성룡 인생의 핵심이다.

 

그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대동법이 그중 하나다.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 시범 실시했다가 100년 후인 숙종 34년(1708)에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대동법은 임란 때 유성룡이 작미법(作米法)이란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다. 고종 9년(1871) 대원군이 강행한 호포법(戶布法)도 마찬가지다. 호포법 실시 이후에야 양반들도 비로소 병역의무를 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束伍軍)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무를 지웠다. 그뿐 아니라 천민들도 종군(從軍)을 조건으로 면천(免賤)해주고 나아가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는 신분타파책을 실시했다.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을 침해하는 이런 정책들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심지어 유성룡이 창안한 훈련도감에서 훈련 중인 노비들을 주인들이 데려가는 행태까지 보였다. 나라는 망해도 사대부들의 계급적 특권은 침해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바로 여기에 유성룡의 실각을 둘러싼 의문의 해답이 있다. 유성룡의 이런 전시 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이 선조와 공모해 유성룡을 실각시킨 것이다. 그가 실각한 후 각종 개혁입법들이 무효화되었음은 물론이다.

 

유성룡이 실각한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은 공교롭게도 그가 천거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다. 이 마지막 해전은 안전한 철수를 요청하는 일본군에게 이순신이 “이 원수를 결코 놓아 보낼 수 없다” 고 거절해 벌어진 전투다.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은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서 적을 추격했다” 고 전한다. 《서애선생 연보》는 유성룡의 탄핵 소식을 들은 이순신이 “시국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이순신은 유성룡의 실각이 곧 자신에게 닥칠 미래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융복을 입은 이순신이 함대의 선두에서 북채를 들고 싸웠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였기에 자살설이 끊이지 않았다.

 

유성룡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본 군주는 정조다. 그는 《홍재전서》《일득록(日得錄)》 ‘인물’ 조에서 이렇게 말했다.

 

※ 저 헐뜯는 사람들을 고(故) 상신(相臣=유성룡)이 처한 시대에 처하게 하고 고 상신이 맡았던 일을 행하게 한다면 그런 무리 백 명이 있어도 어찌 감히 고 상신이 했던 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했겠는가. 옛날 당태종(唐太宗)이 이필(李泌)에 대해서, “이 사람의 정신은 몸보다 크다” 라고 말했는데 나 또한 서애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대게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우뚝 거인(巨人)의 뜻이 있었다.

 

전란 극복을 위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타파했고, 결국 그 때문에 불행한 종말을 맞이한 유성룡. 그의 인생을 기존 당파나 양반 사대부들의 시각이 아니라 역사의 보편적 시각으로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인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또한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