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
정유년(1597년) 7월 8일에 14만여 병력으로 재침을 시작한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남해안을 따라 하동 방면으로 전라도로 진입하고, 우군은 낙동강을 건너 합천, 거창을 거쳐 전주로 진입하도록 하였다. 8월 7일 일본 우군의 일대인 나베시마 휘하의 1만 2천여 병력은 의령과 삼가를 거쳐 성주 방면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이 때 상주 진관에 속한 9개 군의 군사를 거느리고 금오산성을 지키고 있던 상주 목사 정기룡에게 이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정기룡은 급히 군사 3천여 명을 이끌고 고령으로 진출하여 방어진을 쳤다.
8월 15일 밤 정기룡은 척후장 이희춘과 황치원으로 하여금 병력 4백 명을 이끌고 적정을 정찰하게 하였다. 이들은 정찰 도중 일본군 수색대와 조우하였는데, 격전 끝에 백여 명을 사살하고 돌아왔다.
다음 날 새벽 정기룡은 전병력을 출동시켜 일본군 주력부대의 주둔지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용담천가에 진을 치고 있어서 강물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정기룡은 일본군을 유인하기로 하고 이동현 양편에 복병을 배치한 다음 퇴각하는 것처럼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러자 일본군이 전력으로 추격해 왔다. 일본군이 이동현 밑에 다다랐을 때 정기룡 군은 일제히 반격을 가했다. 일본군이 당황하여 흩어지자 복병들이 이들을 포위했다. 정기룡 군은 포위망을 압축하며 공격을 계속했다. 달아나는 일본군은 예비대가 추격하여 사살하였다.
이리하여 포위망에 빠진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살아 달아난 일본군은 천 명을 넘지 못하였다.
● 망국의 위기
1597년 8월 일본군 좌군(左軍)은 부산, 웅천, 안골포 등 해안기지에서 남해안을 따라 이동을 개시하여 고성→사천→하동을 거쳐 8월 7일에 구례를 점령함으로써 우군(右軍)보다 앞서 전라도에 진입하였다. 이 때 일본의 수군도 하동에서 섬진강을 거쳐 구례로 진출하였다. 일본군이 구례를 점령하고 남원으로 북상하고 있을 때 남원성에는 명의 동정군 부총병 양원이 3천여 병력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다. 양원은 6월 중순부터 7월 하순까지 성벽을 증축하고 총안(銃眼)과 포안(砲眼)을 증설하는 등 방어시설 보강에 주력하였다.
8월 들어 일본군 5만여 명이 남원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양원은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유격장 진우충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전라병사 이복남에게도 조선군의 증원을 요청하여 이복남과 구레 현감 이원춘 등이 병력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남원성으로 들어왔다. 구례에서 북상한 일본 좌군(左軍)은 다시 부대를 2대로 나뉘어 1대는 남원성 서쪽에서, 1대는 남원성 동북쪽으로 진출했다.
8월 12일에 남원 교외에 진영을 설치한 일본군은 정찰대를 파견하여 남원성의 방어태세를 확인했다. 8월 13일 일본군은 성 외각을 포위하고 소수 병력으로 조총 사격을 가해 왔다. 이에 조명 연합군은 승자총통과 진천뢰 등을 발사하여 이들을 격퇴했다. 양원은 성 주위에 마름쇠를 대량으로 매설하고 4대문 밖의 석교를 제거하여 일본군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
14일부터 일본군은 공성 기구를 제작하고 참호를 메꾸는 등 본격적인 공격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총공세가 임박해짐에 따라 양원은 전주의 진우충에게 두 차례나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전우충은 전주성을 비울 수 없다는 핑계로 증원요청을 거부했다. 양원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기대하지 못한 채, 대규모 병력의 일본군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었다.
16일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공격해 왔다. 남원성 동남쪽에 높은 누각을 만들어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조총 사격을 가하여 방어군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사이에 또 다른 일대는 성 밖의 해자를 메꾸고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올라 왔다. 조명 연합군이 필사적인 저항을 하였으나 이날 밤 일본군은 명군이 지키고 있던 서문과 남문을 돌파하여 성 안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이어서 동문을 점령하고 북문을 수비하고 있던 조선군을 포위하였다. 북문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은 효과적인 방어를 하였으나 성 안에 진입한 일본군에 의해 배후공격을 받게 되었고 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춘 이하 제장들은 최후의 순간이 되자 스스로 화약고에 불을 질려 자폭함으로써 장렬히 산화했다.
명군은 이 전투에서 동문을 지키던 중군 이신방, 남문의 천총 장표, 서문의 천총 모승선이 전사하였으며, 부총병 양원만이 50여 기를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하였을 뿐 3천여 명의 명군과 조선군이 이 전투에서 전멸하였다.
남원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8월 19일에 전주로 진격하였다.
이 무렵 전주성을 지키고 있던 전주 부윤 박경신과 명의 유격장 진우충은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로 달아나 버렸다. 따라서 일본군은 전주성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일본군의 우군(右軍)도 좌군이 남원성을 함락시킬 무렵에는 황석산성을 유린한 뒤에 전주로 들어와 좌군과 합류하였다. 전라도 진출에 성공한 일본군은 전주에서 다시 좌우군의 역할을 재조정하여 우군은 계속 북진하여 충청도 지방을 점령하고 좌군은 전라도 지방의 점령상태를 고착시키면서 해로를 차단하여 조선군 각 부대의 상호 연결을 봉쇄하기로 하였다.
전라도를 석권한 일본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충청도로 진입, 9월 3일에 공주를 무혈 점령한 뒤 연기-청주를 거쳐 천안으로 북상하였다. 그리고 병력의 일부는 진산→금산→옥천→회덕→문의를 거쳐 청주로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9월 중순까지 충청도의 중요한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일본군이 8월 중순에 남원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하자 동정군 총 지휘관 마귀는 부총병 해생과 유격장 마귀, 우백영, 참장 양등산 등으로 하여금 기병 2천 기를 이끌고 9월 5일에 한성을 출발하도록 한 다음 동시에 유격장 파새가 지휘하는 기병 2천 기를 증파하여 이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부총병 해생은 급속 행군으로 9월 7일 새벽에 직산 남쪽 1km 지점의 삼거리에 이르러 부근 야산에 진지를 편성했다.
이 무렵 일본군 우군(右軍) 선봉장인 구로다(黑田長政)군의 선발대가 본대에 앞서 천안을 통과하여 북상하고 있었다. 이들은 직산 부근에 이르러 명군을 발견하고 선제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에 맞서 명군도 포격으로 대항하여 양군 사이에 백병전을 벌어졌다. 구로다는 천안의 본대를 급히 출동시켜 명군에 대응하였다.
오후에는 파새의 기병 2천여 기가 도착하여 전투에 참가했다. 명군은 부대를 삼등분하여 일본군을 협공하였다. 명군 4천 기병과 일본군 5천 보병이 혼전을 벌이는 가운데 일단의 기병부대가 일본군에 증원되어 쌍방의 병력이 증원되어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조총 사격과 함께 장검을 휘두르며 명군 진영으로 돌진하였으며, 명군은 기병의 기동력을 활용하여 좌충우돌하면서 일본군을 사살했다. 6차례의 대접전 끝에 명군의 기병이 일본군이 보병을 격퇴시켰다.
직산 전투의 성패에 대해선 논란이 많은 편으로 명군이나 일본군 모두 확실하게 승리했다고 말하기 힘든 면이 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 전투 이후 경기도 진입을 포기하고 추풍령과 조령을 거쳐 경상도로 남하하거나 금강을 거쳐 전라도로 남하 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행위로 인해 직산 전투의 승리를 명군이 했다고는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정유재란 개시 이전 일본군의 전략은 임진전쟁 때와 달리 조선 전국을 점령하기 보다는 남부 일대만을 전략적 목표안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명군 주력 부대의 남하가 확인되자 기존 전략대로 남해안 일대를 장기적으로 점령하기 위해 후퇴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 13척의 판옥선, 나라를 구하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하자 조정은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전쟁이 터진 이후로 조선 수군만큼 가장 확실한 전공을 세운 군대는 없었다. 나섰다 하면 승전보를 울리던 조선 수군이 한 번의 싸움으로 모두 도륙이 났으니 애초에 전란을 극복할 계책이라고는 1할로 가지고 있지 않았던 조정이 암흑으로 빠져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조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대신들에게 “그대들은 어찌 말이 없는가? 이대로 있으면 왜적이 저절로 물러난단 말인가” 하며 호통을 쳤지만 조정의 그 많은 관리들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나서 전황은 조선쪽에 너무도 불리하게 돌아갔다. 임진난 때에는 각지에서 의병과 승병이 봉기하여 그나마 왜적에게 타격을 주어 진격을 더디게 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정유재란이 발발한 이후로는 아무도 나서 나라를 구하려는 자가 없었다. 이는 백성들 사이에서 용력이 있다고 몸을 일으키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선조가 땅에 떨어진 권위와 권좌에 대한 불안감으로 공을 세운 여러 의병장들에게 역모를 씌워 죽였으며 통제사 이순신 마저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죄목을 붙여 잡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인해 수군이 괴멸되어 전라도가 쑥밭이 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당시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일본군의 길잡이를 한 것이 조선의 백성들이었다는 이야기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의 여론이 선조를 비롯한 벼슬아치들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도망다니기 바빴던 간신들이 나라를 구한 공신들을 되려 탄압하는 상황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정신나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조정은 그제서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허둥거렸으나 전란중에도 당파싸움만을 일삼던 그들에게 왜적을 물리칠 계책 따위는 없었다.
결국 무능한 조정이 방책이라고 내놓은 것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7월 22일 다시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지를 내린 선조는 “지난날 과인의 묘책이 어질지 못하여 그대를 백의종군케 해서 오늘날 이런 패전의 욕됨을 입은 것이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그대는 부디 충의를 굳건히 하여 다시 나라를 구해주기 바란다” 고 이순신에게 매달렸다. 임금을 기만했다는 죄명을 씌워 그를 죽이려던 선조는 결국 스스로의 정당하지 못한 처사를 인정한 꼴이었다.
7년 동안 전쟁을 지휘하면서 얻은 병과 투옥되어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극도로 몸이 망가진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함도 없고, 병사도 없는 수군 최고사령관이 된 것이다. 당시 교지를 받은 이순신을 따라나선 군관과 장졸이 모두 십수 명에 불과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쇠약해져 몸을 추스릴 여유도 없던 이순신은 장흥 회령포에서 9척의 함선과 120여 명의 수군을 수습하고 진도 동북쪽 벽파진에서 3척을 더 수습하여 모두 12척의 함선을 재정비했다. 다 쓰러져가는 전력을 주워담아 그럭저럭 한 번의 해전을 치를 준비를 하던 이순신은 추석날 저녁 조정으로부터 수군을 폐지하고 육전에 참가하라는 명을 받았다. 칠천량 참패의 충격이 그만큼 큰 탓이다. 이때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산도가’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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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시작된 이후로 도움을 주기는커녕 힘들여 모은 기력을 쏙쏙 빼먹기만 했던 조정은 전열을 정비하던 이순신의 기운을 이런식으로 빼놓았다. 여기서 이순신은 수군폐지론을 잠재우는 희대의 명장계를 올리게 된다.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로 싸운다면 능히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하는 것은 적이 오히려 바라는 바로서, 적은 서해를 돌아 쉽게 한강까지 진격할 것인즉,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의 숫자는 적으나 신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으므로 감히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1000여 척이 넘는 일본의 대함대가 서해를 노리고 있는 마당에 고작 판옥선 12척을 가지고 싸움에 나서겠다는 이순신의 이런 대담무쌍한 발언은 사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군이 바다에서 일본군을 막지 못하면 자기 고을 지키기에도 버거운 육군이 왜적을 맞아 싸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싸움이란 동수가 되어도 그 승패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일인데, 적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전력으로 맞서겠다고 나선 이순신은 결과적으로 이 최악의 상황에서 압도적 열세를 극복하고 아군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일방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와서도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군신으로 이순신이 추앙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훗날 조선 후기의 성군으로 대접받는 정조도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조선이 명운을 이어온 것은 온전히 이순신의 공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과 병장기를 모아 세력을 모으는데 전력을 다했다. 적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을 다니며 병사를 모으고 군량과 무기를 줍고 다녔다. 일본군은 임진년 1차 전쟁과 마찬가지로 수륙 병진 전략을 채택하였는데, 남해를 돌아 서해로 북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량 해협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견내량이 뚫린 상황이었기에 이순신은 도도(藤堂高虎), 가토(加藤嘉明), 와키자카(脇板安治) 등이 지휘하는 일본수군의 산발적인 공격을 받으면서도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아니, 호응하여 맞서 싸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군은 함선 330여 척을 거느리고 9월 7일에 해남반도의 어란포에 정박했다. 이들은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의 명량수로를 통과하여 서해안으로 진출, 북상하는 육군을 호응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 실제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폭도 좁았고, 그 중에서도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울돌목으로 한꺼번에 밀려와 서해로 빠져 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급조류가 형성되는 사나운 바다였다. 지금도 웬만한 배가 아니면 이 급류를 거꾸로 거슬러 가는 것이 힘들다 하니 인력으로 가동되는 당시의 전함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울돌목에서 형성되는 물살의 또 다른 특징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로 인해 급조류로 흐르던 물살이 암초에 부딪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친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바로 이곳 울돌목에 조선의 운명을 걸었다. 그는 좁은 울돌목을 틀어막고 일본의 대군을 상대할 작전을 세웠다. 이순신이 얼마나 치밀하고 무서운 전략가인지는 이 명량싸움의 절묘한 용병술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그는 적을 울돌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5km 떨어진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15일간이나 적과 술래잡기를 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이순신의 12척의 함대가 회령포를 떠난 것은 8월 20일이다. 24일 어란포로 옮겨 4일간 정박하였다. 28일에는 적의 척후선으로 보이는 전함 8척이 공격해 왔다가 이순신이 선두에서 반격하자 도주하였으나 이순신은 애써 나아가 쫓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서쪽으로 점점 이동했다.
9월 2일 칠천량 해전 후로 전쟁 공포증에 시달리던 경상우수사 배설이 탈영하였다.
9월 7일 어란포에 배치되어 있던 척후선으로부터 적함 55척이 집결 중에 있으며 그중 13척이 출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날 오후 13척의 일본전함이 습격해 왔으나 조선 수군의 반격을 받고 도주하였다.
이순신은 벽파진 근해를 유령처럼 떠돌면서 적의 주력함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의 패잔선 13척이 명량해협의 울돌목을 방어할 목적임을 알게 되었고 울돌목의 거친 급류를 이용하여 단숨에 조선수군을 밀어부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때에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복귀를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조선수군이 단 13척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따름이다.
어란진에 집결한 적함 300여 척이 16일에 해협으로 진입할 것으로 확신한 조선수군은 14일 밤, 해남 우수영 앞바다로 이동했다. 결전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는 마당에 이순신에게 주어진 것은 판옥선 13척과 협선 32척이었다.
전투를 하루 앞둔 15일 전날 밤, 이순신은 휘하의 모든 장졸들을 모아놓고 결사항전의 뜻을 세웠다.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를 위한 한 목숨이 무엇이 아까울 것인가.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예로부터 병법에 이르기를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 하였으며, 한 사람이 좁은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 명의 적도 두렵게 한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싸움에 앞서 비장한 결의를 밝힌 이순신은 16일 아침 적함 300여 척이 접근하고 있다는 척후선의 연락이 받고는 13척의 전선을 울돌목으로 이동시켜 일자진을 세웠다. 13척만으로 수백척의 적을 막겠다는 그의 각오가 실천에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12시쯤 일본군 전함 300여 척이 해협에 나타났다. 2백여 척은 입구에 대기하고 전투선 130여 척이 해협 안으로 돌진해 왔다. 이순신은 대장선을 독려하여 선두로 나아가, 일본 수군과 단독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나머지 배들은 일본 수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는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해 뒤로 물러났다. 이순신의 기함만이 홀로 적함대에 둘러싸여 사생결단으로 싸우고 있던 참이었다.
명량해협을 둘러싼 이 대결에서는 피난을 가던 수많은 백성들이 산어귀로 모여들어 조선수군을 응원했고, 이순신의 대장선이 외롭게 분전하다 적에게 둘러싸이자 통곡이 터졌다. 또한 여인들이 모여 강강술래를 하며 이순신의 조선함대를 응원했다.
일본 수군은 당장이라도 조선 수군을 요절낼 것처럼 덤벼들었으나 이순신 기함의 맹렬한 저항을 받고 주춤거렸다. 어떤 사료에 따르면 이 명량싸움에서 이순신이 수중에 철쇄를 장치하여 일본 전함을 걸리게 했다는 설도 있다.
몇시간 동안 홀로 고군분투하던 이순신의 대장선은 뒤로 한참이나 물러나 있는 조선 수군에게 싸움을 독려했고 통제사의 초요기(싸움을 독려하는 명령기)를 본 중군장 첨사 김응함과 거제도 현령 안위가 뒤늦게 적진으로 돌격했다. 또한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멀리 1km나 물러나 있던 전라 우수사 김억추의 다른 전함들도 그제서야 모두 달려와 공격에 가담했다.
또다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조선의 운명을 건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일본 수군은 선봉에 선 전함들이 하나 둘 깨어지면서 서서히 위축되었다. 그 사이 오후 1시가 넘으면서 조류가 남해안의 일본군 쪽으로 흐리기 시작했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해진 일본 수군은 좁은 해협을 일렬로 가로막고 번갈아 포격을 가하는 조선 수군에게 여지없이 박살났다. 이때에 일본의 돌격장 임무를 맡았던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전사했는데 그는 사천포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하고 죽은 미치유키의 동생으로 그 역시 이 명량싸움에서 이순신에게 패하여 목이 잘렸다. 결국 두 형제가 모두 이순신에게 참패하여 목없는 귀신이 된 것이다.
선봉을 맡은 적장의 머리까지 대장선에 내걸리게 되자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로 치솟았고 반대로 일본 수군은 겁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하여 그 공포심에 젖어있던 일본군은 단 13척으로 자신들의 대함대를 막아서는 이순신의 가공할 전투력에 결국 꼬리를 내리고 만 것이다.
급격한 조류의 변화와 조선 전함들의 맹렬한 화포공격을 견디지 못한 일본 수군은 앞을 다투어 퇴각을 시작했지만 급류에 말려 자기들끼리 부딪치면서 서로 깨어졌다. 일본군은 선봉에 섰던 31척의 전함이 수장되었고, 반파되어 전함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배가 100여 척에 이르렀다. 일본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격침된 전함의 사망자만 최소 3,500명으로 추산되며, 그외 달아나다가 부숴진 배의 사망자만 해도 최소 1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조선 수군의 피해는 이순신의 기함에 탔던 수군 사상자가 전사 2명, 부상 3명으로 총 5명이다.
세계해전사에 두 번 다시 존재하지 않을 대결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의 명량대첩은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의 최고 백미로 기록될 만큼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승전보를 울린 명승부로 기억된다. 결국 조선 수군을 칠천량에서 격파하고 서해진출을 노린 일본군은 이순신으로 인해 또 다시 대륙정벌의 야욕이 꺾이게 되었다. 칠천량 해전이 조선을 공황상태에 빠뜨렸다면 이 명량대첩은 일본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 싸움의 참패 소식을 전해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병사하고 만다.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 장군은 ‘싸움하던 바다에 그대로 머물고 싶었으나 외롭게 있는 것이 득이 될게 없어 당사도로 옮겼다. 이번 싸움은 참으로 천행이었다’ 라고 적고 있다. 명량대첩은 그야말로 조선의 운명을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시킨 싸움이었다.
● 철수를 준비하는 일본
진주성과 남원성을 공파함으로써 전라도를 장악하고 충청도로 북상하던 일본군은 직산 전투에서 기세가 꺾여 진로를 남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로 후퇴한 일본군 우군(右軍)은 양산, 기장, 서생포 등지에서 장기 주둔 태세에 들어갔다.
한편, 충청도로 진격하다가 전라도로 이동한 좌군(左軍)은 은진, 여산, 금구, 정읍을 거쳐 남하를 거듭하다가, 10월에 남원으로 들어가 장기 주둔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명군이 남원에 대한 압박을 본격화하고 명랑해전 이후 재건된 조선 수군이 전라도 남해안 지역을 장악함에 따라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되자 조선수군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고 탈출하기 쉬운 순천과 사천, 고성, 창원, 김해 등지로 이동, 분산하여 주둔하였다. 이렇게 전라, 경상도의 해안과 도서지역으로 남하한 일본군은 1597년 10월부터 주둔지를 중심으로 성곽을 신축 혹은 보수하여 장기 주둔할 준비에 들어갔다.
초기 승승장군하던 일본군이 기세가 꺾이고 남해안을 중심으로 방어체제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반대로 조명연합군이 공세로 돌아섰다.
조명 연합군은 1597년 11월에 울산의 도산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12월 4일에 제독 마귀군의 선봉부대에 이어 8일까지 총 36,000여 명의 명군이 울산성으로 진군하였고, 조선군도 11,500여 명이 합류하였다. 전투준비를 끝마친 조명 연합군은 12월 24일 새벽 도산성을 동·서·북 삼면으로 포위한 채 공격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성 안의 일본군이 격렬히 저항을 하였고, 태화강 어구에는 일본수군 2~30여 척이 지원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조명연합군은 적극적인 공성작전을 하지 못하여 쉽사리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전투가 장기화 됨에 따라 혹한과 함께 27일부터 비까지 내려 야영 중인 조명 연합군을 괴롭게 하였다.
12월 29일 도원수 권율의 화공작전이 실패한 이후 전투는 해를 넘겨 1598년 1월 2일까지 전황은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포위가 장기화 됨에 따라 성 안의 일본군은 군량과 식수 등이 바닥나 아사자가 생기는 비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도산성을 지원하기 위해 양산, 부산, 순천 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수륙 양면으로 울산지역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명군의 경리 양호는 이러한 일본군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적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도산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1월 4일부터 총 공세를 가하였으나,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양측의 사상자만 늘어갔다. 양호는 퇴로가 차단될 우려로 인해 전군을 경주로 철수시킴으로써 도산성에 대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장기간의 포위로 아사직전까지 사태가 발생하였고, 1,20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포로가 되는 손실을 입었다.
한편 조명연합군 역시 명군 전사자가 1,000여 명, 부상사 3,000여 명에 달했고, 조선군 역시 전사자만 300여 명, 부상자가 900여 명에 달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도산성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으며, 지휘관들 역시 전쟁의 조속한 종결과 철군을 원하게 되었다.
조명연합군의 중로군은 사천 지역의 시마즈(島津義弘)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성주에서 고령을 거쳐 9월 18일에 진주로 향했다.
이 때 일본군은 사천 신성(新城)에 본진 1만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그 외각인 남강 남안의 망진채와 영충재, 그리고 사천 쪽의 곤양채 등에 1천여 명을 배치시켜 놓았으며 사천성에는 2천여 병력을 배치하고 1만여 병력으로 사천 신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중로군의 선봉대가 9월 19일에 진주에 도착하여 남강에 배치된 일본군을 공격하자 일본군은 퇴각하여 곤양채로 들어갔다.
20일에 명군 중로군 본대가 남강을 도하하여 망진채와 영춘재를 점령하고 사천성과 사천신성으로 육박하여 공세를 취하였다. 이 상황을 보고 받은 시마즈는 곤양채, 망진채, 영춘재의 병력을 철수시켜 사천성에 투입하였다. 동정군이 사천성과 사천 신상에 압박을 가하자 시마즈는 사천성을 포기하더라도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켜 조명연합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 병력을 사천신성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사천성의 일본군이 철수 준비를 하고 있던 28일 밤에,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조선군이 사천성을 포위하고 야습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성 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병력손실을 입고 간신히 사천 신성으로 들어갔다.
조명연합군은 사천성을 점령하고 10월 1일에 사천 신성을 공격했다. 연합군은 불량기포와 벽력포 등으로 집중 사격을 한 다음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시마즈 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명군의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사고가 발생했다. 명군의 포진에서 불량기포가 오발하여 폭발한 것이다. 명군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본 시마즈는 전병력을 출동시켜 명군을 공격했다.
명군은 와해되어 진주 쪽으로 패주하여 남강을 도하하다가 다수의 익사자를 내고 삼가→합천을 거쳐 성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3천여 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사천신성의 시마즈 군은 철군명령에 따라 그 해 11월 16일에 부산으로 철수하였다.
조 · 명연합군의 공격목표인 왜교성은 여수반도 우측 광양만에 연해 있는 왜성이었다. 여기에는 고니시가 거느리는 1만 4천여 병력 주둔하고 있으면서 남해도의 소오(宗義智)군, 사천의 시마즈 군과 연결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왜교성을 공격하게 된 서로군은 1598년 9월 중순에 조선군 1만여 명을 포함한 3만 6천여 명의 육군과 함선 1천여 척으로 편성된 조명연합함대의 수로군이 합동작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9월 19일에 순천에 도착한 명군의 유정은 곧 3면으로 왜교성을 포위하고 이 이튿날부터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수로군은 9월 18일에 조선 수군 진영이 있는 나로도를 출발하여 20일에 광양만의 송도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여기에서 고니시 군의 해상탈출로를 봉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경상우수군이 노량 수로를 봉쇄하고 있는 동안 조명연합함대의 주력은 광야만을 타고 들어가 왜교성에 접근하여 포격으로 서로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륙 양면의 합동작전으로도 왜교성에 대한 공격은 쉽지 않았다. 유정은 지구전을 계획하고 22일부터 29일까지 공격을 중지시키고 공성 기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운제, 비루, 포차 등 공성기구가 어느정도 마련되어 10월 2일, 서로군은 수로군과 합동작전으로 총공세를 폈다. 그러나 서로군이 공성장비를 운반하여 성벽에 근접시키려하자 일본군은 화력을 집중하여 장비들을 파괴하였다.
수로군도 육군과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조선 수군이 앞장서서 육전대로 공성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조선 수군의 사도첨사 황세득을 포함하여 다수의 병사들이 사상을 당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이튿날인 3일에도 수군이 합동작전을 위해 왜교성 부근에 상륙하였으나 유정군의 위약으로 인해 명군의 대소 전함 23척이 일본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파괴되는 손실을 당하였다.
수로군은 4일에 또다시 왜교성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유정의 비협조로 인해 실패하였다. 이때 유정은 이미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매수를 당한 상태여서 일본군을 공격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3일과 4일의 공격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서로군은 6일에 조선군을 우선 철수시키고 7일에는 명군 주력부대를 순천 서북방의 부유로 철수시켰다. 수로군도 9일 광양만에서 철수하여 12일에 나로도로 복귀하였다.
왜교성의 고니시 군은 철군명령에 따라 그 해 11월에 부산으로 철수 하였다.
1차 도산성 공격 작전이 실패한 이후 조명 연합군은 전군을 동로(東路), 중로(中路), 서로(西路)의 삼로군(三路軍)으로 재편하여 경상좌,우도 및 전라도에 각각 배치함과 동시에 도독 진린이 지휘하는 수군을 증파하여 조선 수군과 협력하여 일본 수군을 압박하도록 하였다.
1598년 8월까지 전력을 보강한 조명연합군은 총 6개군으로 군을 편성하여 울산, 사천, 순천 지역의 일본군을 동시에 공략한다는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아울러 수군을 동원하여 왜교성을 공격하는 서로군을 지원하는 한편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 중 동로군이 저번에 한 차례 실패를 하였던 도산성 탈환하는 임무를 맡고 출정하였다.
조명연합군이 한창 전력 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1598년 8월,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권력구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등 사대로(四大老) 중심의 집단 지도체제로 전환됨과 동시에 도요토미의 사망을 비밀에 붙인 채 8월 28일과 9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조선 출병군에게 철군 명령을 하달하였다.
1598년 9월 11일 명의 동로군 선봉장인 부총병 해생이 4,000여 명의 군을 이끌고 도산성에 접근하여 일본군 천여 명을 격파하고 도산 서북쪽 1.5Km의 학성산을 점령하는 한편, 김응서가 지휘하는 조선의 동로군이 동래로 진출한 설호신군과 함께 19일에 동래지역의 일본군을 몰아내어 울산-부산을 연결하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선발부대 등이 일본군을 압박해가는 한편, 21일 제독 마귀가 지휘하는 명의 동로군 본대 2만여 명이 도산 북쪽에 도착하여 22일부터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소부대를 미끼로 명군을 성 앞으로 유인한 뒤 대부대가 기습을 가했으나 명군은 기병을 투입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냄과 동시에 성 주위의 책성들을 소각시켜 버렸다. 기습이 실패한 일본군은 성 안에서 나오지 않고 조총 사격으로 조명연합군의 접근을 견제하였다.
또다시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됨을 우려한 조명연합군을 일본군을 유인해 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병력과 사기 모두에서 열세였던 일본군은 성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양군이 대치한 채 시간이 지체됨에 따라 조명연합군 내부에는 ‘부산에서 일본군의 지원병이 곧 도착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에 불안을 느낀 조명연합군은 29일부터 군량 등을 울산 북쪽 50리의 모화로 옮기고 이후 경주를 거쳐 10월 6일 영천으로 이동함으로써 2차 도산성 공격도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도산성의 가토군은 도요토미의 사망과 함께 내려진 철군 명령에 따라 그 해 11월 18일에 부산으로 철수하였다.
● 마지막 전쟁, 노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비밀리에 내려진 철수명령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준비를 하며 명나라 장수 유정에게 뇌물을 받치고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았다.
왜교성의 고니시는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한 다음 본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철수명령을 받았다. 이에 고니시는 유정과 휴전을 협상하여 고니시가 왜교성의 장비와 물자를 유정에게 인계하는 대신, 유정은 고니시의 철수를 안전하게 보장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진린은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제보하였다. 이로써 조명 수군은 왜교성에서 해로로 철수하는 고니시 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이를 격멸하기로 하고 선단 규모 500척의 연합 합대를 편성한 다음 11월 9일에 나로도에서 광양만으로 급진하였다.
일본군은 1598년 11월부터 전면적인 본국 철수 준비로 11일까지 거제도와 창선도로 집결하여 순차적으로 철수를 하려 했다. 왜교성의 고니시는 11월 13일에 그 선발대로 전함 10여 척을 출발시켰으나 이들은 장도 부근에서 조명연합함대에 쫓겨서 왜교성으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고니시는 명군 도독 진린을 매수하여 퇴로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이를 완강히 반대하였다.
거제도와 창선도에는 철수하는 일본군 선단이 속속 집결하고 있었으나 조, 명 연합함대가 탈출로를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고니시는 사천 남쪽의 창선도에 집결하여 고니시군을 기다리고 있던 소오 군과 시마즈 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11월 14일 일본군은 사천의 요시히로 군을 주력으로 한 전함 300여 척으로 구원군 함대를 구성했다. 앞의 적(왜교성)은 바다가 얕고 적이 요새 속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공격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뒤로부터의 적을 맞아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사천군의 일본수군이 가장 빨리 왜교성으로 올 수 있는 수로는 남해도와 육지 사이 노량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이순신은 경상 우수사 이순신(동명이인)을 노량으로 발포 만호 소계남을 미조항으로 파견하여 일본 구원 함대의 내습을 경계했다.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이순신은 우선 그들의 구원부대를 격멸하기 위해 광양만에서 하동 앞바다로 이동 11월 18일인 밤에 노량 앞바다에서 일본군의 구원부대가 지나갈 길목을 차단하였다. 진린군도 죽도 부근에 진을 치고 이순신 군은 노량 남쪽 남해도의 관음포에 진을 친 다음 일본군 함대를 기다렸다.
18일 밤, 고니시 군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 군과 소오 군은 5백여 척의 함대를 편성하여 시마즈의 지휘하에 광양만으로 출발하였다.
11월 19일 새벽 4시쯤 어둠 속에서 대규모 일본함대가 노량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조명 연합군함대가 일본군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조선과 일본, 명나라 3국간의 7년 전쟁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이 막을 올렸다.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83척이었다. 2척은 명수군 제독 진린과 부총병 등자룡에게 빌려주었다.
조선 전함들이 새벽의 정적을 깨면서 일제 포격을 시작했고, 일본전함에서도 일제히 조총을 쏘며 응전해 왔다. 선봉인 명의 부총병 등자룡 군이 일본 함대의 좌우측면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등자룡 군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여 등자룡이 조선 수군으로부터 빌려 탄 판옥선에 불이 붙었고, 일본군 수병들이 갑판 위로 뛰어들어 등자룡 이하 명 수병을 전멸시켜 기선을 제압하고, 그 여세를 몰아 도독 진린의 대장선을 포위하였다. 이에 조선 함대가 명군을 지원하여 진린의 대장선을 구해 내고 화포 사격을 집중하였다.
조선군 전함 쪽의 1,000여 문의 각종 대,소 총통과 신기전 등이 불을 뿜을 때마다 일본 전함들은 불에 휩싸여 격침되었고 바다에 빠진 일본 수병들은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에 살아남지 못했다. 혼전 중에 시마즈 요시히로(대장)가 탄 기함을 발견한 조선 전함들이 이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일본군 일부가 필사적으로 판옥선으로 뛰어올라 백병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수병들은 갑판 아래로 들어간 후 다른 조선 전함쪽으로 접근시키며 화살을 퍼부어 일본수군들을 몰살시켰다.
오전 8시쯤 살아 남은 일본군 전함들이 노량 입구 쪽으로 오던 수로를 따라 필사의 도주를 시도하면서 지금까지 관전만 하던 명 수군이 포진한 죽도 앞으로 몰려 나갔다. 조선 수군 함대의 전 전함들이 패주하는 일본군 전함들을 뒤쫓아 일제히 추격전을 벌렸다. 기함이 선두로 나섰고, 이순신이 추격전을 독려했다. 순간 기함이 바싹 추격한 적함의 선미에 엎드려 있던 적의 조총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적의 총탄에 통제사 이순신이 피격됐다.
피격 사실을 숨긴 채 옆에 있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지휘를 하여 계속 추격했다.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일본함대의 후미가 노량해협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면서 대해전의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 외에도 명나라의 등자룡, 조선 수군의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등이 전사하였다. 그 외 일본함선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격침시켰으며 5백여 급의 수급을 베었으며 물에 빠져 죽은 수는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았다.
한편 요시히로의 함대가 조선수군에게 궤멸되고 있는 틈을 타 왜교성의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은 11월 20일 새벽 신성포에 숨겨 둔 500여 척의 전함을 타고 왜교성을 떠나 거제도로 달아났다. 일본군은 고니시군이 왜교성에서 빠져 나와 부산에 합류하자 11월 24일부터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각 부대가 철군을 개시하였다.
24일 : 가토, 구로다, 나베시마군
25일 : 모리. 이토군
26일 : 고니시, 시마즈, 고바야카와 군
이들 일본군은 쓰시마-이카를 거쳐 12월 중에 하카다에 상륙하여 철군을 완료하였다. 그리하여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전후 7년 동안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