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적병이 물러갔다. 이때 적군이 삼도를 짓밟아 지나는 곳마다 모든 집을 불사르고 백성을 죽였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을 잡으면 빠짐없이 코를 베어서 위엄을 보였기 때문에, 적병이 직산에 이르자 서울 사람들은 모두 도망쳐버렸다.
9월 초아흐레 날레, 내전(왕비)께서 적병을 피하여 서쪽으로 내려가셨다. 경리 양호, 제독 마귀는 서울에 있었는데, 평안도 군사 5천여 명과 황해도 · 경기도 군사 수천 명을 징발해와서 한강 여울을 나누어 지키게 하고 창고도 경비하여 지키도록 했다.
적군은 경기도의 경계에서 물러났다. 가등청정은 다시 울산에 진을 쳤으며, 평행장은 순천에 진을 쳤고, 심안돈오(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에 진을 쳐서, 그 선두와 후미가 7백~8백 리나 뻗쳤다.
이때 도성은 거의 지키지 못할 형세가 되어 조신들이 다투어 피란할 계책을 올렸는데, 지사 신잡*이 의견을 아뢰기를 “임금께서는 마땅히 영변으로 행차하옵소서. 신이 일찍이 병사(兵使)를 지낸 일이 있기 때문에 영변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사온데, 가장 걱정되는 것은 장(醬)이 없는 것이오니, 만약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어찌 용도에 댈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전해가며 비웃으면서 “신일에는 장을 담그지 않는다” 라고 했다. 한 대신이 조당에서 말하기를 “적군은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있으면 저절로 물러갈 것이니, 다만 임금님을 받들어 편안한 곳으로 모시고 갈 따름입니다” 하였다. 도원수 권율이 서울로 달려왔기에 임금께서 불러 보시고 대책을 물었더니, 권율은 아뢰기를 “당초에 임금께서 서울로 빨리 돌아오신 것은 적합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땅히 서방에 머물러 계시면서 적군의 형세가 어떠한지 살피셨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조금 후에 적군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권율이 경상도로 내려가자, 대간에서는 “권율은 꾀가 없고 겁이 많으니, 도원수를 시킬 수 없습니다” 라고 했으나 임금께서 청허하지 않으셨다.
☞ 신잡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6년(1583)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 · 지평 등을 거쳐 이조참판 ·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비변사 당상으로 활약했다. 선조37년(1604)에 호성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평천부원군으로 봉해졌다.
12월, 양 경리(양호)와 마 제독(마귀)이 기병과 보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내려가서 울산에 있는 적군의 진영을 쳤다.
이때 적의 장수 가등청정이 울산군 동쪽 바닷가 험준한 곳에 성을 쌓고 있었는데, 경리와 제독은 그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쳐들어갔다. 철갑으로 무장한 정예기병으로 달려가 쳤더니 적병은 쓰러지고 견디지 못했다. 명나라 군사가 적의 외책(외성)을 빼앗자 적병은 달아나 내성(內城)으로 들어갔는데, 명나라 군사들은 적병이 버리고 간 물건을 노획하는 데 정신이 팔려 곧바로 나가서 공격하지 않았다. 적병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서 명나라 군사는 공격해도 이기지 못했다. 여러 진영이 성 밑에 나누어서 진을 치고 포위한 지 13일이 지나도 적병은 나오지 않았다.
29일, 나는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서 경리와 제독을 만났다. 멀리서 적병의 진루를 바라보니 매우 고요하여 사람의 소리라곤 전혀 없었다. 성 위에는 여장(성 위에 쌓은 낮은 담)을 설치하지 않고 사면으로 빙 돌려 장랑을 만들어놓았는데, 지키는 군사는 모두 그 안에 있다가 밖의 군사가 성 밑에 이르면 총탄을 빗발처럼 마구 쏘았다. 날마다 교전하게 되어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의 시체가 성 밑에 쌓였다. 적군의 배가 서생포에서 구원하러 왔는데 물속에서 물오리나 기러기 떼처럼 줄을 지어 정박했다.
도산에는 물이 없어서 적병은 밤마다 성 밖으로 나와 물을 길었다. 경리가 김응서에게 일러 용사를 거느리고 성 밖 우물가에 매복해 있다가 매일 밤 백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적병은 굶주리고 지쳐서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성안에 양식이 떨어졌으니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으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하였다. 이때 일기가 몹시 춥고 비가 와서 군사들의 손발이 얼어 터졌는데, 조금 후에 적군이 육로로 내원하자 경리는 적군에게 공격당할까 두려워서 갑자기 군사를 돌이켰다.
정월, 명나라 장수들은 모두 중국 수도로 돌아가서 다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무술년(선조31년, 1598) 7월, 경리 양호가 파면되고 신임 경리 만세덕*이 그를 대신했다. 이때 군문(총병관) 형개의 참모관이었던 병부주사 정응태*가, 양호가 황제를 속이고 일을 실패토록 한 20여 가지 죄를 탄핵하여 황제에게 보고함으로써 양호는 드디어 파면되어 돌아갔다.
☞ 만세덕 : 명나라 사람으로 병법을 알고 기사를 잘하여 서영병비첨사를 거쳐 우포정에 승진되었다. 선조31년(1598)에 첨도어사로서 양호를 대신하여 경리가 되어 조선에 와서 전공을 세우고, 돌아가 계요총독에 임명되었다.
☞ 정응태 : 명나라 병부주사로서 조선에 와서, 양호가 황제를 속인 죄상을 보고하고 또 조선에서 왜적을 끌어들여 요동을 침범하려고 했다는 허위사실을 보고했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변무사를 중국에 파견하는 등 큰 곤욕을 치렀다.
임금께서는 양호가 여러 경리들 중에서도 적군을 토벌하는 데 가장 힘썼다고 여겨, 곧바로 좌의정 이원익에게 그를 변명, 구원하는 주문(奏文)을 가지고 명나라 수도로 달려가게 했다.
8월, 양호가 서쪽(중국)으로 떠나가니 임금께서 홍제원 동쪽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작별하셨다. 만세덕은 우리나라로 나오려 했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9월, 형개는 다시 군대를 나누어 배치했는데, 마귀는 울산을 맡게하고 동일원은 사천을 맡게 하고 유정은 순천을 맡게 하고 진린은 수로를 맡게 하여 같은 때 나아가 적군을 치게 했으나 모두 이기지 못했고, 동일원의 군대는 오히려 적군에게 패전하여 죽은 사람이 가장 많았다.
10월, 유 제독(유정)이 다시 순천에 있는 적군의 진영을 쳤으며, 통제사 이순신은 수군으로 적의 구원병을 바다 가운데서 크게 패배시켰으나 이순신은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적의 장수 평행장은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부산 · 울산 · 하동 등 연해에 진을 치고 있던 적군도 모두 물러갔다.
이때 평행장은 순천 예교에 성을 쌓고 굳게 지키고 있었다. 유정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순천으로 돌아갔다가 잠시 후에 다시 나아가 공격했다.
이순신은 명나라 장수 진린과 함께 바다의 후미진 어귀를 제압하고 바싹 근접해 들어갔다. 평행장이 사천에 있는 심안돈오에게 구원을 청하자 심안돈오가 수로로 와서 구원했는데, 이순신이 나아가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왜적의 배 2백여 척을 불살랐으며 적병을 죽인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적병을 뒤쫓아 남해와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순신은 시석을 무릅쓰고 몸소 힘껏 싸웠는데, 날아오는 탄환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등뒤로 나갔다. 곁에 있던 부하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옮겼는데,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절대로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했으며, 말을 마치자 곧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조카 이완*은 담력과 국량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순신의 죽음을 숨긴 채 이순신의 명령이라 하여 싸움을 급히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 이완 : 조선시대의 무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조카이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휘하에 종군하여, 선조31년(1598)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이순신의 명령으로 독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선조32년(1599) 무과에 급제했고, 광해군10년(1618)에 충청 병사가 되고, 인조2년(1624)에는 이괄의 난을 토벌한 공로로 가선대부에 승진되었다. 인조5년(1627)의 정묘호란 때 내습한 적군과 싸우다 힘이 다하여 무기고에 불을 지른 후 그 속에 뛰어들어 분신, 자결했다.
진린이 탄 배가 적병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이완이 군사를 지휘하여 구원하니 적선이 흩어져 물러갔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원해준 것을 사례했는데, 그때 비로소 이순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의자에서 땅 위로 몸을 던지면서 “나는 노야(이순신)께서 생시에 오셔서 나를 구원한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돌아가셨습니까!” 하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온 군대가 모두 통곡하여 곡성이 바다를 진동시켰다.
평행장은 우리 수군이 적군을 추격하여 그의 진영을 지나간 틈을 타서 뒤로 빠져 달아났다. 이보다 앞서 7월에 왜적의 괴수 평수길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연해에 진영을 설치했던 적군이 모두 물러갔다. 우리 군대와 명나라 군대는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어져 있는 각 진영이 통곡하여 마치 제 어버이의 죽음을 통곡하는 것과 같았다. 또 영구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제전을 차리고서 상여를 붙잡고 통곡하기를 “공께서 진실로 우리를 살리셨는데, 지금 공은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하며 길을 막아 상여가 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길 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의정부 우의정을 증직했다. 형군문(형개)은 바닷가에 사당을 세워 그의 충혼을 제사지내야 마땅하다고 했으나, 이 일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이에 해변 사람들이 서로 모여 사당을 짓고 이를 민충사라 하여 사시로 제사지냈으며, 상고(상인)와 어선들도 왕래하면서 그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제사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