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이순신이 다시 기용되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았다. 한산도의 패전 보고가 이르자 조야가 크게 놀랐다.
임금께서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보시고 계책을 물었으나, 군신들은 두렵고 당황하여 대답할 말을 알지 못했다.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조용히 임금께 아뢰기를 “이것은 원균의 죄이오니, 마땅히 이순신을 기용하여 통제사로 삼는 길뿐입니다” 하자, 임금께서 이 말에 따랐다. 이때 권율은 원균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순신을 현지로 보내 남은 군사를 거두어 모으게 했는데, 적군의 형세가 한창 강성한 때였다. 이순신은 군관 한 사람을 데리고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갔는데, 밤낮으로 몰래 가며 이리저리 돌아서 간신히 진도에 이르렀고, 군사를 거두어 적군을 막고자 노력했다.
왜병이 남원부를 함락시켰다. 이 싸움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은 달아나 돌아갔고, 전라 병사 이복남*, 남원 부사 임현*, 조방장 김경로, 광양 현감 이춘원, 명장 접반사 정기원* 등은 모두 전사했다.
☞ 이복남 : 조선시대의 무신. 일찍이 무과에 급제했고, 선조27년(1594)에 남원 부사와 전라 병사를 역임했다. 선조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성에서 적군과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조방장 김경로, 남원 부사 임현 등과 함께 전사했다.
☞ 임현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6년(1583)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도사로 기용되어 춘천에서 적군을 쳐부수고 그 공으로 회양 부사에 승진되었다. 선조30년 정유재란 때 남원 부사로 남원성 싸움에서 함께 방비하던 명장 양원이 도주한 후에도 남아서 분전하다 전사했다.
☞ 정기원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8년(1585)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 형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선조30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총병 양원의 접반사로 남원에 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그곳에서 죽었다.
군기시의 파진군 12명이 양원을 따라 남원에 들어가 있었는데, 모두 적병에게 죽고 김효겸이란 사람만이 홀로 빠져 나와서 성이 함락된 사정을 나에게 상세히 들려주었다.
양 총병(양원)이 남원에 이르러 성을 일장이나 더 쌓고, 성 밖의 양마장에는 포 쏘는 구멍을 많이 뚫고, 성 문에는 대포 서너 대를 설치하고, 호를 1, 2장이나 더 깊이 파두었다. 한산도에서 이미 패전하자 적군이 수로와 육로로 몰려왔는데, 그 보고가 매우 급하여 성안에서는 인심이 몹시 어수선해져서 백성이 모두 도망쳐 흩어졌으나, 홀로 총병(양원)이 거느린 요동의 마군(기병) 3천 명만은 성안에 남아 있었다. 총병은 전라 병사 이복남에게 격서를 보내서 불러오게 하여 함께 지키려고 했으나, 이복남은 시일을 지체하면서 오지 않으므로, 야불수(군중에서 정탐하는 병졸)를 잇달아 보내 재촉하자 마지못해 그제야 이르렀으나, 거느리고 온 군사는 겨우 수백 명뿐이었다. 광양 현감 이춘원과 조방장 김경로 등이 잇달아 도착했다.
8월 13일, 왜적의 선봉 1백여 명이 성 밑에 와서 조총을 쏘다가 잠깐 뒤에 그치고, 모두 밭고랑 사이에 흩어져 서너 명이나 네다섯 명씩 떼를 지어, 갔는가 하면 곧 다시 오곤 했다. 사람들이 성 위에서 승자소포로 응전했으나, 왜적의 대진은 먼 곳에 있어 유병을 출동시켜 교전하고 산개하여 번갈아 나오면서 진격하자, 우리 편의 소포는 적병을 맞히지 못했는데 성을 지키는 우리 군사들은 이따금 적병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조금 후에 왜병은 성 밑에 와서 큰 소리로 성 위 사람을 불러 서로 말하자고 청하여, 총병이 가정 한 사람을 시켜 통사(통역)를 데리고 적군의 진영으로 가게 해서 왜적의 서신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약전서였다.
14일, 왜병은 성을 3면으로 포위하여 진을 치고 총과 포로 전날과 같이 번갈아 공격했다. 이보다 앞서 성 남문 밖에 민가가 빽빽하게 모여 있었는데, 적병이 다다르기 전에 총병이 이미 이것을 불살라 버렸으나 돌담과 흙벽은 아직 남아 있었으므로, 적병이 와서 담과 벽 사이에 숨어서 총을 쏘니 성 위 사람들이 많이 맞아서 넘어졌다.
15일, 바라보니 왜병들은 성 밖의 잡초와 논안의 볏짚을 베어다가 큰 묶음을 수없이 만들어 담과 벽 사이에 쌓아두었는데, 성안 사람들은 그것을 무엇에 쓰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유격장군 진우충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전주에 있으므로, 남원 군사들은 날마다 와서 구원해주기를 바랐으나 오래도록 오지 않아 더욱 두려워했다.
이날 저녁 무렵, 성가퀴를 지키던 군사들이 이따금 머리를 맞대고 귀엣말로 수군거리며 말에다 안장을 준비하는 등 도망치려는 기색이 있었다. 밤 초경(오후 8시경)에 왜군의 진중에서 지껄이는 소리가 크게 일어나면서 서로 응답하기도 하고 물건을 운반하는 듯한 기색도 있었는데, 한쪽에서는 성을 향해 총을 함부로 쏘아 총탄이 우박처럼 성 위에 집중하니 성 위의 사람들은 목을 움츠리고 감히 밖을 내다보지도 못했다. 한두 시간이 지나 지껄이는 소리가 그쳤을 때는 묶은 풀단이 이미 참호를 메웠으며, 또 양마장 안팎에 풀단이 쌓아 올려져서 잠시 동안에 성 높이와 같아졌고, 많은 왜병들이 이것을 밟고 성 위로 오르니 성안에서는 벌써 크게 혼란해져서 왜병이 성안에 들어왔다고 야단이었다.
김효의는 처음에 남문 밖 양마장을 파수하다가 황망히 성안에 들어왔는데, 성 위에는 이미 사람은 없고 성안의 곳곳에서 불길이 일어난 것만 보이자 곧 달아나 북문에 이르렀다. 명나라 군사들은 모두 말을 타고 문을 나오려고 했으나 문이 굳게 닫혀 쉽사리 열리지 않으므로 말들의 발을 묶어세운 것처럼 모여서 길거리를 꽉 메웠다.
잠깐 뒤에 성문이 열리자 군사와 말이 문에서 다투어 나가는데, 왜병은 성 밖에서 두 겹, 세 겹으로 포위하고 각각 요긴한 길을 지키고 있다가 긴 칼을 휘둘러 함부로 내리찍었고 명나라 군사는 다만 머리를 숙여 칼날을 받을 따름이었다. 때마침 달이 밝아서 빠져나온 이는 몇 사람뿐이었다. 총병은 가정 몇 명과 함께 말을 달려 돌진해 나와서 겨우 제 몸만 살았는데, 어떤 이는 “왜병이 총병인 줄 알고 짐짓 빠져 나가게 했다” 라고 했다.
김효의는 동반한 한 사람과 함께 문을 나오다가 그 사람은 적병에게 죽고, 김효의는 논에 뛰어 들어가 풀 속에 숨었다가 왜병이 물러가기를 기다린 후에야 빠져나왔다고 했다.
양원은 요동 장수로서 북쪽 오랑캐를 방어하는 법만 알았을 뿐이고, 왜적을 방어하는 일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패전한 것이다. 또한 평지에 쌓은 성은 수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므로, 이제 김효의의 말을 상세히 기록하여 훗날 성을 수비할 사람들에게 경계할 것을 알리고자 한다.
남원이 이미 함락되자 전주 이북의 지방도 산산이 무너져서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훗날 양원도 결국 이 일로 죄를 얻고 참수당하여 그 머리가 조리돌려졌다.
통제사 이순신이 왜병을 진도 벽파정 아래에서 쳐부수고 그 장수 마다시*를 죽였다. 이순신이 진도에 이르러 병선을 수습해서 겨우 10여 척을 얻었다. 이때 연해 지방의 사람들 중에서 배를 타고 피란하는 이가 수없이 많았는데, 이순신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순신이 여러 방면에서 이들을 불러 맞자 멀고 가까운 지방에서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어서, 이들을 군대의 후방에 있도록 하여 우리 군대의 형세를 돕게 했다.
☞ 마다시 : 일본군의 수군장 관야우사낭(구루지마 미치후사)을 지칭한다.
적의 장수 마다시는 수전(水戰)을 잘했는데, 그가 배 2백여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침범하려고 하니 이순신과 벽파정 아래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순신이 배 12척에 대포를 싣고 조수(潮水)가 밀려오는 것을 이용하여 순류(順流)로 적병을 치니 적병은 패전하여 달아났으며, 이로부터 이순신의 군대의 명성과 위세가 크게 떨쳤다.
이때 이순신은 이미 군사가 8천여 명이나 있었는데, 고금도로 나아가 주둔했다. 군량이 떨어질까 걱정하여 해로통행첩(해로를 통행할 수 있는 증명서)을 만들고 영을 내리기를 “삼도(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의 연해를 통행하는 공선(公船)과 사선(私船) 중에서 첩지(증명서)가 없는 것은 간세(간첩)로 인정하고 통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라고 하니, 배를 타고 피란길에 오른 백성들이 모두 와서 첩지를 받아 갔다. 이순신은 배의 크고 작은 차이에 따라 등급을 정하여 곡식을 바치고 첩지를 받아 가게 했는데, 큰 배는 곡식이 3석, 중간 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이었다.
피란하는 사람들이 모두 재물과 곡식을 싣고 바다로 들어왔기 때문에, 곡식 바치는 것은 어렵게 여기지 않고 통행을 금지하지 않는 것을 기뻐하여 열흘 동안에 군량 1만여 석을 얻게 되었다. 또 민정을 모집하고, 구리와 쇠를 수송하여 대포를 주조하며,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서 모든 일이 잘 진척되었다. 멀고 가까운 지방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이순신을 찾아와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막(幕)을 만들며 또한 장사를 생계로 삼으니 섬 안에서는 능히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조금 후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우리나라로 나와서 남쪽 고금도에 내려와 이순신과 군사를 합쳤다. 진린은 성품이 사나워서 다른 사람들과 대부분 뜻이 맞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 진린 : 명나라 신종 때의 장수로 세종의 가정 말기(1566)에 지휘첨사가 되어 호광, 귀주 총병관을 역임했다. 선조31년(1598)에 어왜 총병관이 되어 해군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나와서 통제사 이순신과 합세하여 끝까지 왜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 돌아갔다.
임금께서 청파 들까지 나와서 진린을 전송하셨다. 나는 진린의 군사가 수령을 때리고 함부로 욕을 하며, 찰방 이상규의 목에 새끼줄을 매어 끌고 다녀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역관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앉아 있던 재신(삼품 이상의 관원)들을 보고 “아깝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전하겠구나! 진린과 같이 군중에 있으면 행동이 제지당하고 의견이 서로 어긋나서 분명히 장수의 권한을 빼앗기고 군사들은 함부로 학대당할 텐데, 이것을 제지하면 화를 더 낼 것이고 그대로 두면 한정이 없을 테니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니, 여러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하면서 서로 탄식만 할 따름이었다.
이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인들에게 대대적인 사냥과 고기잡이를 시켜서 사슴 · 돼지 · 해산물 등을 많이 잡아왔으며, 성대하게 술잔치 준비를 갖추고 그를 기다렸다. 진린의 배가 바다에서 들어오자 이순신은 군대의 의식을 갖추고 멀리 나가서 영접했으며, 일행이 도착하자 그의 군사들을 풍성하게 대접하니 제장 이하의 군사들이 흠뻑 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졸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과연 훌륭한 장수다” 하였고, 진린도 마음이 흐뭇해졌다.
잠시 후에 적군의 배가 근방의 섬을 침범하자 이순신이 군사를 보내 패배시키고, 적군의 머리 40개를 베어 모두 진린에게 주어 그의 공으로 하도록 했다. 진린은 기대보다 과분한 대우에 더욱 기뻐했다. 이로부터 모든 일을 죄다 이순신에게 물었으며, 나갈 때는 이순신과 교자를 나란히 타고 다녔고, 감히 앞서 나가지 않았다. 이순신은 드디어 명나라 군사와 우리 군사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겠다고 진린에게 약속시켰으며, 백성의 조그마한 물건 하나라도 빼앗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잡아와서 매를 쳤기 때문에 감히 군령을 어기는 사람이 없어져서 섬 안이 삼가하고 두려워했다. 진린이 임금께 글을 올려 “통제사 이순신은 경천위지(천하를 다스릴 기재)의 재주와 보천욕일(국운을 만회시킨 큰 공로)의 공이 있습니다” 라고 했으니, 이는 마음속으로 감복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