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처음에 원균은 이순신이 자기를 구원해준 것을 은덕으로 여겨 두 사람의 사이가 매우 좋았으나, 조금 후에는 공을 다투어 점점 사이가 좋지 못하게 되었다. 원균은 성품이 음흉하고 간사하며, 또 중앙과 지방의 많은 인사들과 연결하여 이순신을 모함하는 데 있는 힘을 다했다. 늘 말하기를 “이순신이 처음에 내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굳이 청했기 때문에 왔으니, 적군에게 이긴 것은 내가 수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자, 이에 조정 의론이 두 갈래로 나뉘어 각각 주장하는 것이 달랐다.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은 나(유성룡)이므로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원균과 합세하여 이순신을 매우 공격했으나, 오직 우상 이원익만은 그렇지 않은 점을 밝혔으며 또 말하기를 “이순신과 원균이 각각 자기 맡은 지역이 있었으니, 처음에 곧바로 전진하여 구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꼭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라고 했다.

 

이보다 앞서 적의 장수 평행장이 졸병 요시라*를 경상 우병사 김응서의 진영에 자주 드나들도록 해서 은근한 정을 보였는데, 이때 가등청정이 다시 나오려고 하자 요시라는 은밀히 김응서에게 “우리의 장수 평행장의 말이, ‘이번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가등청정 때문이므로 나(평행장)는 그를 매우 미워하고 있는데, 아무 날에 가등청정이 반드시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조선 군사는 수전을 잘하므로 바다 가운데서 기다리고 있으면 능히 쳐부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결단코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고 합디다” 라고 했고, 김응서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자 조정 의론은 이 말을 믿었다. 해평군 윤근수*는 더욱 좋아라고 날뛰면서 이 기회를 놓치기가 아깝다 하여 여러 번 임금께 아뢰어 이순신에게 나가 싸우라고 잇달아 재촉했으나, 이순신은 적군의 간계가 있을까 의심하여 여러 날 동안 주저하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 요시라 : 왜군의 간첩으로, 이때 요시라의 활동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왜적이 거둔 최대 첩보전의 승리였다. 우리 속담에 이간공작하는 것을 ‘요시라질’ 이라고도 한다.

 

☞ 윤근수 : 조선시대의 문신. 영의정 윤두수의 아우다. 명종13년(1558)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헌 ·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선조23년(1590)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일등에 책정되고 해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서 왕을 호종했고, 한편 원접사, 주청사 등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해 광녕에 네 번, 요동에 여섯 번이나 왕래했다. 호성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시호는 문정이다.

 

이때 요시라가 다시 와서 “가등청정이 벌써 상륙해버렸습니다. 조선에서는 어째서 요격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면서 거짓으로 후회하고 애석히 여기는 뜻을 보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 의론은 모두 이순신에게 허물을 돌리고, 대간에서는 이순신을 잡아와 국문하기를 청했다. 현풍 사람 전 현감 박성*이란 자도 그때의 여론에 영합하여 소를 올려 “이순신을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 라고 극단적으로 말하자, 드디어 의금부 도사를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게 하고 원균을 대신 통제사로 삼았다.

 

☞ 박성 : 조선시대의 학자.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경상 초유사 김성일의 막하에서 군무를 도왔으며,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는 관찰사 이원익의 막료로서 군무를 도왔다. 후에 공조좌랑, 안양 현감을 지냈다.

 

임금께서는 오히려 이 일이 모두 사실이 아닐 것이라 의심해서 특별히 성균관 사성 남이신*을 보내 한산도로 가서 사찰하도록 했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들어가자 군사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이순신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가등청정이 바다 섬에 7일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으니 우리 군사가 만약 갔더라면 가등청정을 잡아올 수 있었을 텐데, 이순신이 머뭇거려 그만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라고 했다.

 

☞ 남이신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23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순신이 옥에 갇히자 임금께서 대신들에게 명령하여 이순신의 죄를 의논하게 했는데 이때 유독 판중추부사 정탁*만은 “이순신은 명장이니 죽여서는 안 되며, 군사상 기밀의 이롭고 해로운 것은 먼 곳에서는 미루어 헤아릴 수 없으니 그가 나가지 않은 것은 반드시 무슨 짐작이 있었을 것입니다. 청컨대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뒷날에 공을 이루도록 하시옵소서” 라고 했다. 조정에서는 한 차례 고문을 가한 후 사형을 감하고 관직을 삭탈한 채, 그대로 군대에 편입하도록 했다.

 

☞ 정탁 : 조선시대의 무신. 이황의 문인이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고, 선조27년(1594)에 우의정, 선조33년(1600)에 좌의정이 되었다. 호성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는 박학다식하여 경사 외에 천문 · 지리 · 상수 · 병법까지 정통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 곽재우 · 김덕령 등 명장을 조정에 천거하여 그들 모두 큰 공을 세우게 했다. 특히 이순신이 무함을 당하여 하옥되었을 때는 극력으로 신구하여 죽음을 면하게 했다.

 

이순신의 늙은 어머니는 아산에 있었는데, 이순신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이순신이 옥에서 나와 아산을 지나다가 성복하고, 곧 권율의 막하로 가서 종군하자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슬퍼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병부시랑 형개를 군문총독으로 삼고, 요동 포정사 양호*를 조선 군무경리로 삼고, 마귀*를 대장으로 삼았으며, 양원 · 유정 · 동일원*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 잇달아 우리나라로 나왔다. 정유년(1597) 5월, 양원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나와서 서울에 머무른 지 수일 만에 전라도로 내려가서 남원에 주둔했다. 남원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요충지에 웅거하여 성이 자못 견고하고 완벽했는데, 이것은 그전에 낙상지가 또다시 증축하여 지킬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성 밖에 교룡산성이 있는데, 여러 사람들은 산성을 지키고자 했으나 양원은 본성을 지켜야 된다고 하여 담을 더 늘려 쌓고 호를 파고 호 안에 양마장 설치했는데, 밤낮으로 역사를 독려하여 한 달 후에 공사를 대략 마쳤다.

 

☞ 양호 :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우첨도어사로서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군무경리로 우리나라에 나와 울산성을 쳤는데 이기지 못하여 파면되어 돌아갔다. 후에 후금병이 무순을 공격할 때 병부우시랑으로 기용되었으나 군기를 놓쳐 패전했기 때문에 하옥되어 처형당했다.

 

☞ 마귀 : 명나라 신종 때 장수로 만력년간에 전공을 세워 영하총병이 되었고, 후에 우도독이 되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제독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전공을 세웠다. 용병을 잘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므로 그 당시에 양장이라 일컬어졌다.

 

☞ 동일원 :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만력년간에 도독첨사로서 소주 총병관이 되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우리나라에 와서 공을 세웠고, 후에 좌도독에 승진되었다.

 

8월 초이렛날에 한산도의 수군이 괴멸하여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은 달아나서 죽음을 면했다.

 

☞ 배설 : 조선시대의 무장.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경상우수사로서 통제사 원균의 휘하에서 칠천량 싸움에 참전했으나 패전하여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로 퇴각했다. 그 후 통제사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갔는데 명량 싸움을 앞둔 며칠 전에 적군의 위세에 지레 겁을 내어 도주했다가 후에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처음에 원균이 한산도에 부임하고 나서 이순신이 시행하던 여러 규정을 모두 변경하고, 모든 부하 장수들과 사졸 가운데서 이순신에게 신임을 받던 사람들을 모두 쫓아버렸다. 특히 이영남은 자신이 전일 패전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더욱 미워했다.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원균의 이러한 처사를 원망하고 분개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 군중의 사정에 통달했으며, 매양 전쟁할 때마다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후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울타리로 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서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일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 라고 했고,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이때 적군이 쳐들어오려고 하여 평행장이 요시라를 또 김응서에게 보내 속이기를 “왜선이 아무 날에 더 올 것이니 조선 수군은 이를 맞아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자, 도원수 권율이 그 말을 가장 깊이 믿었으며, 또한 전에 이순신이 주저하고 싸우지 않았다가 죄를 얻었기 때문에 날마다 원균에게 나가 싸우도록 독촉했다. 원균도 또한 “이순신은 적군을 보고도 진격하지 않는다” 고 늘 말하여, 이 일로 이순신을 모함하고 자기가 그 소임을 대신 맡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 형세가 어려운 줄은 알았으나 부끄러워 핑계삼을 말이 없으므로 다만 가진 함선들을 죄다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언덕 위에 있던 왜적의 진영에서는 우리 배가 지나가는 것을 내려다보고 서로 전보했다. 원균의 배가 절영도에 이르자 바람이 일고 물결이 일어났는데, 날은 벌써 저물었으며 배를 정박시킬 만한 곳이 없었다. 바라보니 왜적의 배가 바다 가운데서 나타났다 숨었다 하므로, 원균은 여러 군사들을 독려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군사들은 한산도에서부터 하루 종일 노를 저어 왔기 때문에 잠시도 쉬지 못했으며, 또 기갈에 시달리고 피곤하여 배를 뜻대로 운행할 수가 없었다. 모든 배들이 바로 나가기도 하고 옆으로 처지기도 하며,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했고, 잠깐 앞으로 나갔다가 곧 뒤로 물러나기도 했다. 왜적들은 우리 군사들을 피곤하게 하려고 우리 배 가까이 왔다가 갑자기 배회하면서 피하여 가기만 하고 교전하지 않았다. 이때 밤은 깊고 바람은 세찬데, 우리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내려가서 갈 방향을 알지 못했다.

 

원균은 간신히 남은 배를 수습하여 가덕도(웅천에 있는 섬)로 들어왔고, 군사들은 갈증이 심해서 서로 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을 마셨는데, 왜병들이 섬 속에서 뛰어나와 덮치는 바람에 이 싸움에서 장수와 군사 4백여 명을 잃어버렸다. 원균은 물러나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권율이 고성에 있다가 원균이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며 격서를 보내 원균을 불러와서 곤장을 치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독촉했다.

 

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오자 더욱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웠는데, 여러 장수들이 원균을 보고 군사 일을 의논하고자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이날 밤중에 왜적의 배가 와서 습격하자 원균의 군사는 크게 무너졌다. 원균은 도망쳐 바닷가에 이른 뒤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올라 달아나려 했으나 몸이 살찌고 거동이 둔하여 갈 수가 없어 소나무 아래에 앉았는데, 측근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가버렸다. 어떤 이는 원균이 이곳에서 적에게 살해되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달아났다고도 하는데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이억기는 배 위에서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배설은 그전부터 원균이 반드시 패전할 거라고 생각해 여러 번 간했으며, 이날도 칠천도는 물이 얕고 협착해서 배를 운행하기가 불편하니 다른 곳으로 옮겨 진을 치자고 말했으나 원균은 전혀 듣지 않았다. 배설은 가만히 자기가 거느린 배들과 은밀히 약속하고 엄중히 경계하면서 싸움에 대비하고 있다가 적병이 내습하는 것을 보자 항구를 벗어나 먼저 달아났기 때문에 그가 거느린 군사는 홀로 보존되었다.

 

배설은 한산도에 돌아오자 불을 놓아 여사와 양곡, 병기를 불사르고, 성안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옮겨 적병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피란시켰다. 우리 수군이 한산도에서 패전한 후에 적군이 이긴 기세를 타고 서쪽으로 향해 쳐들어오자, 남해군과 순천부가 차례로 함몰되었다. 적군의 배들이 두치진에 이르러 상륙하여 나아가 남원부를 포위하자,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이 크게 진동했다.

 

적군이 임진년에 우리 국경을 침범한 이후로 오직 수군에게만 패전을 당해서, 평수길은 이것을 분하게 여겨 평행장에게 책임을 지워 우리 수군을 반드시 쳐부수라고 명령했다. 이에 평행장은 거짓으로 김응서에게 실정을 통하는 체하여 이순신이 죄를 얻게 하고, 또 원균을 유인하여 바다로 나오도록 하여 방비가 있는지 없는지 다 알게 된 후에야 습격한 것이다. 그들의 계책이 지극히 교묘하여 우리는 모두 그들의 꾀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왜병이 황석산성을 함락시키니 안음 현감 곽준*과 전 함양 군수 조종도*가 사절했다.

 

☞ 곽준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김면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 막하로서 공을 세우고, 관찰사 김성일의 천거로 자여도찰방이 되어 기민을 구휼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안음 현감으로서 전 함양 군수 조종도, 전 금해 부사 백사림과 함께 황석산성을 지키다 백사림이 먼저 도망치고 성이 함락되자, 아들 이상 · 이후와 함께 순절했으며, 그의 딸(유문호의 아내)도 목매어 죽었다. 이 싸움에서 곽준의 전 가족이 순절했기 때문에 후인들이 “곽존재의 집에는 삼강(충忠 · 효孝 · 열烈)이 모두 성취되었다” 고 칭찬했다.

 

☞ 조종도 : 조선시대의 문신. 명종13년(1558) 생원시에 합격한 후, 양지 현감 · 함양 군수를 역임했다. 선조30년 정유재란 때 의병을 규합해 안음 현감 곽준과 함께 안의의 황석산성에서 적장 가등청정의 군대와 싸우다 순절했다.

 

처음에 체찰사 이원익과 원수(도원수) 권율이 도내의 산성들을 수축하여 적군을 막을 일을 의논하고, 공산(달성군) · 금오(선산군) · 용기(운궁현) · 부산(월성군) 등 산성을 쌓았다. 공산산성과 금오산성에 백성의 힘이 가장 많이 들었는데, 이웃 고을의 무기와 군량 등을 모두 거두어 성안에 가득 쌓아두고, 수령들을 독려해서 늙은이와 어린이, 남자와 여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을 지키도록 하자 멀고 가까운 지방이 떠들썩했다.

 

적군이 다시 쳐들어올 때 가등청정은 서생포에서 서쪽으로 전라도를 향해 나아가서 장차 평행장의 수로로 오는 군사와 합쳐서 함께 남원을 치려 했다. 원수 이하 우리 장병들은 모두 멀리서 바라만 보고 적병을 피해가면서, 각처의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사람들에게 전령해서 각자 흩어져서 적병을 피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독 의병장 곽재우만은 창녕의 화왕산성에 들어가서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키자, 적군이 산 밑에 이르러 성의 형세가 험준하고 성안의 사람들이 안정되어 동요하지 않는 것을 쳐다보고는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다.

 

안음 현감 곽준이 황석산성으로 들어가자, 전 김해 부사 백사림도 성안으로 들어갔다. 백사림은 무인이므로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으로 의지하여 든든하게 여겼는데, 적병이 성을 공격한 지 하루 만에 백사림이 먼저 도망치자 여러 군사들은 모두 무너졌다. 적병이 성안에 들어오자 곽준은 아들 이상, 이후와 함께 사절했다. 곽준의 딸은 유문호에게 시집갔는데, 유문호가 적병에게 사로잡히자 곽씨는 이미 성 밖에 나와 있었으나 이 소식을 듣고 여종에게 “아버지가 죽었으나 내가 따라 죽지 않은 것은 남편이 살아 있기 때문인데, 지금 남편마저 잡혀갔으니 내가 어찌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목매어 죽었다. 조종도는 전부터 “나도 일찍이 벼슬한 사람인데, 달아나 숨는 무리들과 풀 속에서 같이 죽을 수는 없으니 죽는다면 마땅히 장부답게 당당하게 죽을 것이다” 라고 했으며, 이때 처자를 거느리고 황석산성으로 들어와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공동산 밖이라면 사는 것이 오히려 기쁘련만, 순원성 안에서는 죽는 것이 또한 영광스럽네.

 

성이 함락되자 곽준과 함께 마침내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