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26년 10월에 임금의 행차가 서울로 돌아왔다. 12월에 명나라 사신 행인사의 행인인 사헌이 우리나라에 왔다.

 

이보다 앞서 심유경은 왜적의 장수 소서비*를 데리고 관백(평수길)이 항복하는 표문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 표문이 관백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소서행장 등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 의심했다. 또 심유경이 겨우 돌아오자마자 진주가 함락당하자, 강화하려는 의사가 진실이 아니라 하여 소서비를 요동에 머물러 있도록 하고 오랫동안 왜적에게 회보하지 않았다.

 

☞ 소서비 : 소서비탄수 또는 내등여안이라고도 한다. 처음 이름은 충준이었다. 일본의 장군 족리의소(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봉사했으나 실정막부가 멸망한 후에 소서행장에게 중용되었다.

 

이때 제독(이여송)과 여러 장수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고, 다만 유정 · 왕필적 등이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팔거에 주둔해 있었다. 서울과 지방이 몹시 굶주렸고 또 군량 운반하기에 지쳐서 늙은이와 어린이는 도랑과 골짜기에 쓰러져 있었고, 건장한 사람은 도적이 되었으며, 역질이 겹쳐서 다 죽어 없어졌다. 심지어 부자와 부부가 서로 잡아먹었는데, 해골만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다.

 

얼마 후에 유정의 군사가 팔거에서 남원으로 옮겼다가 또 남원에서 서울로 돌아와 10여 일 동안 머물러 머뭇거리다가 서쪽(명나라)으로 돌아갔는데, 왜적은 아직 바닷가에 머물러 있어서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했다.

 

이때 경략 송응창은 탄핵을 받아 돌아가고, 새로 경략으로 임명된 고양겸*이 대신 요동에 도착하여 참장 호택을 보내 차부(공문의 한 종류)를 가지고 가게 해서 우리나라 군신들을 타일렀는데,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 고양겸 :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자는 익경이다. 우첨도어사로서 요동을 순무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병부시랑으로 기용되어 조선에 경략으로 나왔다.

 

“왜놈들이 아무 까닭도 없이 너희 나라를 침략하여, 칼로 대나무를 쪼개는 형세로 서울과 개성 등 세 도회지를 점령하고 너희 토지와 백성 중 10분의 8,9를 차지했으며, 너희 왕자와 배신들을 사로잡았다. 황상(황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군대를 일으켜 한 번 싸워 평양을 빼앗고 두 번 싸워 개성을 수복하자, 왜적은 마침내 서울에서 달아났고 사로잡은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냈다. 국토 2천여 리를 수복하느라 소비된 군비가 많으며, 군사와 말이 죽은 것 또한 적지않다. 우리 조정에서 속국(조선)을 대접한 은의가 이와 같으니 황상의 망극한 은혜가 또한 이미 과분한 것이다.

 

이제는 군량도 다시 운반할 수 없으며 군사도 다시 싸울 수 없게 되었는데, 왜적 또한 우리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항복하기를 청하고 또 봉공도 원한다. 명나라 조정에서도 왜적의 봉공을 허락하고 이를 용납하여 외신으로 두고자 하며, 왜적들을 몰아내어 모두 바다를 건너가게 하여 다시는 너희 나라를 침약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전쟁을 종식시키려 한다. 이것은 너희 나라를 위하는 장구한 계획이 될 것이다.

 

지금 너희 나라는 양식이 다 떨어져 백성이 서로 잡아먹고 있는데, 또한 무엇을 믿고 구원병을 청하는가? 이미 너희 나라에 군량도 주지 않고 왜적에게 봉공도 거절하면 왜적은 기어코 너희 나라에 분노를 나타내어 조선은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어찌 일찍이 계책을 세우지 않는가?

 

옛날 구천(중국 춘추시대 월왕의 이름)이 회계산에서 곤욕을 당할 때 어찌 부차의 살을 씹어 먹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잠시 부끄러움을 참고 견딘 것은 후일에 기대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자신은 부차의 신하가 되고 그의 아내는 부차의 첩이 되었었다. 하물며 조선이 왜놈을 위해서 중국에 신첩이 되도록 주선, 요청해주고는 스스로 여유를 가지고서 천천히 계획을 세우는 것은 구천의 군신의 게책보다 나은 것이다. 이런 사정인데도 참지 못한다면, 이는 발끈 화를 내는 소장부의 소견일 따름이고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는 영웅이 하는 일은 아니다.

 

너희가 왜적을 위하여 봉공을 요청해서 만약 이것이 실현되면, 왜적은 반드시 중국의 처사에 더욱 감동할 것이고 조선에도 고맙게 여겨 기필코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다. 왜적이 돌아간 다음에 너희 나라의 군신들이 애를 쓰고 속을 태우며 고생을 참고 견디어 구천이 하던 일을 이행한다면, 천운이 돌아와서 왜적에게 원수를 갚을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겠는가.”

 

그 말은 매우 상세하게 천 마디, 백 마디로 이어져 있었으나 말의 내용은 대략 이와 같았다. 호택이 객관에 있은 지 3개월이 넘었으나, 조정의 의론은 결정을 보지 못했고 임금의 생각도 이것을 더욱 어렵게 여기셨다. 나는 이때 병으로 휴가 중이었지만 장계를 올려 “왜적을 위하여 봉공하기를 요청한다는 것은 도리에도 진실로 옳지 못하오니, 마땅히 근일의 사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중국에 알려서 그곳의 처분을 기다리기로 하십시오” 하고, 여러 번 글을 올려 아뢰자 그제야 임금께서 허락하셨다. 이에 진주사 허욱이 중국으로 떠났다. 이때 고 경략(고양겸)은 남이 비난하는 말 때문에 돌아가고, 새로 경략에 임명된 손광*이 와서 대신했다.

 

☞ 손광 :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자는 문융이다. 벼슬이 병부시랑에 우도어사가 가직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고양겸을 대신하여 조선에 경략으로 나왔다.

 

명나라 병부에서 황제에게 주청하여 소서비를 서울(명나라 수도인 북경)로 들어오게 한 뒤 세 가지 일로 힐문했다.

 

“첫째 봉작(제후를 봉하는 일)만 요구하고 조공은 요구하지 말고, 둘째 왜병은 한 사람도 부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셋째 앞으로 영구히 조선을 침범하지 말 것. 이 세 가지 약속을 지킨다면 곧바로 봉작할 것이고, 약속대로 하지 않으면 허락할 수 없다” 라고 하자, 소서비는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드디어 심유경에게 다시 소서비를 데리고 왜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선유하도록 하고, 또 이종성*과 양방형*을 상사와 부사로 임명하여 왜국에 가서 평수길을 일본 국왕으로 봉하도록 하되, 이종성 등은 우리나라 도성에 머물러 있다가 왜적의 철병이 끝나기를 기다려 일본으로 떠나도록 했다.

 

☞ 이종성 :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천거로 도독첨사가 되어 정사에 임명되었고 지휘 양방형을 부사로 삼았다. 이종성이 부산에 이르렀을 때 왜병이 많이 몰려오고 또 길에서 소문이 왁자하기를 “두 사람을 위협할 것이다” 라고 하자, 이종성은 두려워하여 도망쳐 나왔다. 이 일로 하옥되었다.

 

☞ 양방형 : 명나라 신종 때 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가는 부사가 되었는데 정사인 이종성은 도망쳤으나, 양방형은 홀로 일본에 가서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다.

 

을미년(선조28년, 1595) 4월에 이종성 등이 한성에 이르러 잇달아 사자를 보내서 왜적에게 철병하여 바다를 건너가도록 재촉했는데, 사자의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왜적은 먼저 웅천의 몇 진과 거제 · 장문포 · 소진포 등의 여러 진에 있던 군사를 거두어 얼마간 신의를 보이고는 “평양에서와 같이 속아 넘어갈까 염려되오니, 원컨대 명나라 사신이 빨리 우리 군영으로 들어온다면 마땅히 모든 것을 약속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8월에 양방형이 병부의 공문에 의거하여 먼저 부산에 이르렀으나, 왜병은 시일을 끌면서 곧 전원이 철수하지 않으면서 다시 상사가 오기를 청하자 사람들이 왜적의 행동을 매우 의심했다.

 

병부상서 석성은 심유경의 말만 믿고 왜적이 딴 생각은 없다고 여기고서, 왜적의 철병을 서둘러 재촉하여 여러 번 이종성에게 앞으로 나가도록 독촉했다. 명나라 조정의 의론은 이론(異論)도 많았으나, 석성은 분연히 자기의 책임 아래 일을 진행시켰다.

 

9월에 이종성이 양방형의 뒤를 이어 부산에 이르렀으나 평행장은 곧 와서 만나려고 하지도 않고 “장차 관백에게 가서 복명하고 그의 결정을 얻은 연후에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겠다” 라고 했다.

 

평행장은 일본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인 병신년(선조29년, 1596) 정월에야 겨우 돌아와서도 오히려 군사를 철수하는 일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때 심유경은 두 사신을 머물러두게 하고 자기 혼자만 평행장과 함께 먼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면서 장차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예절을 의논하고 정하는 일이라고 핑계를 댔는데, 사람들은 그 의사를 알 수 없었다. 심유경은 비단옷을 입고 배에 오르고서 깃발에는 “조즙양국(두 나라를 화해시켜 전쟁을 그치게 한다)” 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써서 뱃머리에 세우고 떠나갔는데, 가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회보가 없었다.

 

이종성은 개국공신 문충*의 후손이며 선조의 공으로 작(爵)을 이어받은 부귀한 집안의 자제인데 성질이 자못 겁이 많았다. 이때 어느 사람이 이종성에게 “왜추(왜의 추장, 평수길)가 실상은 봉작을 받을 의사가 없으며 장차 이종성 등을 유인하여 가두어두고 욕을 보이려 하는 것이다” 라고 하자, 이종성은 매우 두려워하여 밤중에 평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왜적의 진영을 탈출해 종복과 짐바리와 인절 등을 모두 버린 채 도망쳤다. 왜적은 이튿날 아침에야 알고 길을 나누어 이종성을 뒤쫓아 양산의 석교까지 이르렀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 문충 : 명 태조의 개국공신인 이문충으로 벼슬이 대도독부 좌도독에 이르고 조국공에 봉해졌다.

 

양방형은 혼자 왜적의 진영에 남아 있으면서 여러 왜적들을 무마하고, 또 한편으로 우리나라에 글을 보내 놀라 동요하지 말도록 당부했다. 이종성은 감히 큰 길로는 가지 못하고 산골짜기 속으로 도주해 들어가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못한 채 경주를 거쳐 서쪽(중국)으로 갔다.

 

얼마 후에 심유경과 평행장이 비로소 돌아왔다. 그리고 왜병이 서생포 · 죽도 등지의 진영에서 철수했는데 아직 철수하지 않은 곳은 부산의 네 진영뿐이었다.

 

심유경은 이에 양 부사(양방형)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는 우리 사신도 함께 가도록 요구하여 자신의 조카 심무시를 보내 떠나도록 재촉했다. 우리 조정에서는 좋아하지 않았으나, 심무시가 반드시 같이 가도록 요구하여 마지못해 무신 이봉춘 등을 수행하는 배신(陪臣)이라는 명목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무인이 그곳에 가면 실수가 많을 테니, 마땅히 문관이며서 사리를 아는 사람을 보내야 되겠습니다” 하자, 전에 황신*이 심유경의 접반사로 왜적의 진영에 있었기 때문에 황신이 수행하도록 했다.

 

☞ 황신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21년(1588)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감찰 · 호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지평으로 명나라 경략 송응창을 접반했고, 또 통신사로서 명나라 사신과 함께 일본에 갔으며, 화의가 실패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명나라에 원조를 요청하도록 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한가한 생활을 하다가 광해군2년(1610)에 호조판서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으로 위성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회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과 심유경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양방형 등이 일본에 도착하자 관백은 관사를 성대하게 꾸미고 그들을 영접하고자 했는데, 마침 어느 날 밤에 지진이 크게 일어나서 거의 허물어졌기 때문에 다른 집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관백은 두 사신과 한두 차례 만났는데, 처음에는 봉작을 받은 것처럼 하더니 갑자기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조선 왕자를 놓아보냈으니 조선에서는 당연히 왕자를 보내서 사례해야 하는데도 직위가 낮은 사신을 보냈으니 이것은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라고 하므로 황신 등이 임금의 명령을 전하지 못했는데, 양방형과 심유경 등까지 재촉해서 함께 돌아가게 했고, 또한 명나라 조정에 사은하는 예절조차 없었다.

 

적의 장수 평행장은 부산포로 돌아왔고 가등청정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서생포에 계속해 주둔하면서 “왕자를 보내서 사례해야만 비로소 군사를 철수시킬 것이다” 라고 성언(聲言)했다.

 

대체로 관백의 요구가 매우 과대하여 봉공뿐만이 아니었는데, 중국에서는 다만 봉작만 허락하고 조공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심유경은 평행장과 서로 친숙했기 때문에 일을 임시변통으로 꾸며대어 구차스럽게 성사시키려고 하여 실정을 명나라 조정이나 우리나라에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일이 마침내 합의되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명나라에 곧바로 사신을 보내 그 사실을 서둘러 아뢰었더니, 이에 석성과 심유경은 모두 죄를 얻게 되었고, 명나라 군대도 또다시 나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