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4월 20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명나라 군사가 성안으로 들어오고, 이 제독은 소공주댁(훗날 남별궁이라 일컬음)을 숙소로 정했다. 하루 전날 적군은 이미 성을 버리고 나갔다.
나도 명나라 군사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는데, 성안에 남아 있던 백성을 보니 백 명 중 한 명도 살아 있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었고, 그중에 살아남은 사람도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얼굴빛이 귀신과 같았다.
이때 날씨는 매우 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말의 시체가 곳곳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 썩은 냄새가 성안에 가득 차서 길 가는 사람들은 코를 가리고 지나갔다. 관청과 민간의 집들은 모두 없어지고, 숭례문에서부터 동쪽으로 남산 밑 부근 일대의, 적군이 거처하던 곳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종묘와 세 대궐과 종루, 각 관사 · 관학 등 큰 거리 북쪽에 있는 것은 모두 없어지고 재만 남았을 뿐인데, 소공주댁은 적의 장수 평수가가 있던 곳이기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먼저 종묘에 나아가 통곡하고, 그다음 제독의 처소로 가서 그에게 문안드리러 온 여러 신하들과 만나 한참 동안 소리 내어 통곡했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제독에게 나아가 안부를 묻고 “적병이 방금 물러갔으니 분명히 이곳에서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원컨대 군사를 출동시켜 급히 추격하도록 하십시오” 라고 말하자, 제독도 “나의 생각도 진실로 그러하나, 한강에 배가 없기 때문에 급히 추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만약 노야(중국말로 존귀한 사람에 대한 경칭)께서 적군을 추격하고자 하신다면 제가 먼저 강가에 나가서 배를 정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제독은 “매우 좋습니다” 라고 했다.
나는 한강으로 나갔다. 이보다 앞서 나는 경기 우감사 성영과 수사 이빈에게 공문을 보내 적군이 가고 난 후에 강 가운데 있는 크고 작은 배를 급히 거두어 모두 한강으로 모이게 했는데, 이때 배가 이미 도착한 것이 80척이나 되었다. 내가 사람을 시켜 제독에게 배가 벌써 준비되었다고 보고했더니, 조금 후에 영장 이여백이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강가로 나왔다. 그런데 군사들이 반쯤 건너자 날이 벌써 저물어 이여백은 갑자기 발병이 났다고 핑계하고는 “성안으로 돌아가 병을 고치고 나서 진격해야겠다” 하면서 가마를 타고 돌아가버렸다. 그러자 이미 한강 남쪽으로 건너온 군사들도 모두 도로 강을 건너서 성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원통했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제독은 적군을 추격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거짓말로 나를 속여 승낙했을 뿐이었다. 23일에 나는 마침내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5월, 이 제독이 적병을 추격하여 문경까지 갔으나 돌아왔다. 송 시랑(송응창)이 비로소 제독에게 패문(牌文)을 보내 적군을 추격하도록 했으나, 이때는 적군이 떠나간 지 벌써 수십 일이 되었다. 송 시랑은 사람들이 자기가 적군을 놓아 보내고 추격하지 않았다고 나무랄까 겁이 나서 이와 같은 행동을 일부러 꾸며 보인 것이고, 실상은 적군을 두려워해서 감히 진격도 못하고 되돌아왔다.
적군은 길을 천천히 지나면서 떠나갔는데, 어느 때는 머물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가기도 했으나, 연도에 있던 우리 군사들은 모두 길의 좌우에서 자취를 감추고 감히 나와서 싸우려는 사람이 없었다.
적군은 물러가 바닷가에 군대를 나누어 주둔했다. 곧 울산의 서생포에서부터 동래 · 김해 · 웅천 · 거제에 이르기까지 앞뒤로 서로 연해서 16둔이나 되었는데, 모두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기대여 성을 쌓고 참호를 파서 오래 머물러 있을 계획을 세웠으며, 바다를 건너갈 생각은 없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또 사천 총병 유정*이 복건 · 서촉 · 남만 등지에서 모집한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잇달아 진출하여 성주 · 팔거에 주둔하도록 하고, 남방 장수 오유충은 선산 · 봉계에 주둔하도록 하고, 이영 · 조승훈 · 갈봉하는 거창에 주둔하도록 하고, 낙상지 · 왕필적은 경주에 주둔하도록 해서 사면으로 에워쌌으나, 서로 버티기만 하고 진격하지 않았다. 이들의 군량을 충청도 · 전라도에서 공급하게 되었는데, 험준한 길을 지나 여러 진영에 나누어 주게 되니 백성들의 힘은 더욱 곤궁할 따름이었다.
☞ 유정 : 명나라 신종 때 장수. 용감하여 적군을 만나면 대도를 휘둘러 적진을 함락시켰기 때문에 군중에서 유대도라고 불렀다. 전공으로 사천 총병이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사천 · 귀주의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와서 싸웠다. 본국으로 돌아간 후 신종47년(1619)에 요동 살이호에서 후금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제독은 심유경을 왜적에게 보내 그들이 바다를 건너 본국에 가도록 타이르게 하고, 또 서일관, 사용재에게 낭고야에 들어가서 관백(평수길)을 만나보게 했더니, 6월에 비로소 적군은 두 왕자 임해군 · 순화군과 재신 황정욱 · 황혁 등을 돌려보내면서 심유경을 보내 돌아가 보고하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나아가 진주를 포위하고 작년에 패전한 원수를 갚는다는 말을 퍼뜨렸는데, 이것은 임진년에 적군이 진주를 포위했을 때 목사 김시민*이 잘 방어해서 적군이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기 때문에 한 말이다. 진주성을 포위한 지 8일 만에 성이 함락되어 목사 서례원, 판관 성수경*, 창의사 김천일, 본도(경상도) 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의병 복수장 고종후 등이 모두 전사했다. 또 군사와 백성 중에 죽은 사람이 6만여 명이며, 소 · 말 · 닭 · 개까지도 남기지 않았다. 적군은 성을 남김없이 무너뜨리고 참호와 우물을 메우고 나무를 베어 없애서 지난해의 분풀이를 마음껏 했는데, 때는 6월 28일이었다.
☞ 김시민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11년(1578)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진주 목사가 되어 사천 · 고성 · 진해 등지의 적군을 쳐부수어 경상우병사로 승진되었다. 이 해 10월에 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했으나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7일 동안 공방전을 벌여 적병을 3만여 명이나 사상케 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적병은 물리쳤으나 김시민은 이 싸움에서의 전상으로 얼마 후에 죽었다. 후에 선무공신 이등에 추록되고 상낙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 성수경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이 성수경을 신임하여 군무를 맡기자 성을 개축하고 무기를 정비하는 등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 선조26년 진주성이 함락될 때 의병장 김천일 · 고종후 등과 함께 전사했다.
☞ 황진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9년(1576)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이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하여 각지에서 적군을 쳐부수었다. 선조26년 충청 병사가 되어 상주에서 적군을 무찔렀으며, 6월에 적의 대군이 진주성에 몰려오자 창의사 김천일, 경상 병사 최경회와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굳게 지켜 9일 동안이나 힘껏 싸웠으나 결국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적군이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잇달아 교지를 내려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적군을 추격하도록 했는데,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권율 이하의 관군 · 의병들이 모두 의령에 모였다. 권율은 행주의 전첩으로 지나치게 자신을 가져 기강을 건너 전진하고자 했으나, 곽재우와 고언백이 “적군의 형세는 한창 강성하고 우리 군사는 오합지졸이 많아서 싸울 만한 사람은 적을 뿐만 아니라, 전도에는 군량도 없으니 경솔히 전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자, 다른 사람들은 망설일 따름이었다.
이빈의 종사관 성호선*은 어리석어 사세를 알지도 못하면서 팔을 휘두르며 여러 장수들이 머뭇거린다고 책망했는데, 권율과 의논이 맞아 마침내 기강을 건너 함안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은 비고 성안에 아무것도 없어서 여러 군사들은 먹을 것이 결핍되어 풋감을 따서 먹는 지경이 되어 다시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 성호선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22년(1589)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지제교 · 병조좌랑을 역임했다. 선조26년(1593) 순변사 이빈의 종사관으로 일했으며 후에 충주 목사가 되었다.
이튿날 정탐꾼이 보고하기를 적군이 김해에서 크게 몰려온다 하자, 여러 사람들이 혹은 함안을 지켜야 한다 하고, 혹은 물러가서 정암 나루를 지켜야 한다 하면서 부산하게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적군의 화포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마음이 매우 어수선하고 두려워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성 밖으로 달려 나가다가 조교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정암 나루를 도로 건너와서 바라보니 적병이 수로와 육로 두 길로 오는데, 들판을 덮고 냇물을 꽉 메웠다. 여러 장수들은 제각기 흩어져 달아났다. 권율 · 김명원 · 이빈 · 최원 등은 먼저 전라도로 향해 가버렸고, 김천일 · 최경회 · 황진 등만이 진주로 들어가자 적군이 뒤따라와서 포위했다.
목사 서례원과 판관 성수경은 명나라 장수 접대 차사원으로 오랫동안 상주에 머물러 있다가, 적군이 본주(진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돌아온 지 겨우 이틀 만이었다.
진주성은 본래 사방이 험준한 곳에 웅거해 있었는데, 임진년에 동쪽 평지로 옮겼다. 이번에 적군은 비루 여덟 개를 세워 그 위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며, 한편으로 성 밖의 대숲을 베어다가 큰 묶음을 만들어 둘러 세워 비루를 가려서 시석을 막고, 그 안에서 조총을 빗발처럼 쏘아대니 성안 사람들은 감히 머리를 내놓지도 못했다.
또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는 모두 서울의 시정에서 모집한 무리들이고, 김천일도 또한 전쟁에 관한 일은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고집이 지나치게 심했으며, 더구나 서례원을 평소부터 미워하여 주인과 손이 서로 시기하고 호령이 어긋나게 되어 이 때문에 더 크게 패전한 것이다.
황진만이 동쪽 성을 지키고 싸운 지 며칠 만에 총탄에 맞아 죽었는데, 군인들의 기운이 꺾여버렸는데도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때마침 비가 내려 성이 무너지자 적병이 개미떼처럼 성에 붙어서 들어왔고, 성안 사람들은 가시나무를 묶고 돌을 던져 힘껏 막아 적병이 거의 물러가려 했는데, 이때 김천일의 군사가 북쪽 문을 지키다가 성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지레 짐작하고 가장 먼저 무너져버렸다. 적병이 산 위에 있다가 우리 군사들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고는 일제히 몰려와서 성에 오르자, 여러 군사들은 크게 요란해졌다.
김천일은 촉석루에 있다가 최경회와 함께 손을 잡고 통곡하고서 남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군사와 백성 중에 살아서 빠져나온 사람은 몇몇 뿐이었다. 왜적의 변고가 생긴 이후로 사람 죽은 것이 이 싸움처럼 많은 것은 없었다. 조정에서는 김천일이 사절(死節)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정부 우찬성의 높은 관질은 증직했고, 또 권율은 용감히 싸우고 적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여 김명원을 대신해서 원수로 삼았다.
총병 유정은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팔거에서 합천으로 달려왔고, 오유충은 봉계에서 초계로 가서 우도를 지켰다. 적군도 진주를 함락시키고는 부산으로 돌아가서 “명나라 조정에서 강화를 허락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바다를 건너갈 것이다” 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