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이 제독이 파주에 진군하여 적군과 벽제관 남쪽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고, 개성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처음에 평양이 수복되니 대동강 이남의 연도(沿道)에 있던 적진은 모두 도망쳐 가버렸다. 제독은 적군을 추격하려고 나에게 “대군이 지금 앞으로 진격하려 하는데, 듣건대 앞길에 군량과 마초가 없다고 하니, 의정(유성룡)은 대신으로서 마땅히 나라 일을 생각해야 될 것이므로 수고를 꺼리지 말고 급히 가서 군량을 준비하여 소홀해서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라고 말했다.
나는 제독과 작별하고 나왔다. 이때 명나라 군대의 선봉은 벌써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지럽게 달리면서 길을 막으므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옆길로 돌아 빨리 가서 명나라 군대 앞으로 나아가 그날 밤에 중화군을 거쳐 황주에 이르니, 벌써 삼경(밤 12시경)이 되었다.
이때 적병이 갓 물러간 뒤여서 지나는 곳마다 황폐하고 텅 비어 백성들이 모이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해볼 계책이 서지 않았다. 나는 급히 공문을 황해 감사 유영경에게 보내 군량 운반을 재촉했다. 또한 공문을 평안 감사 이원익에게 보내 김응서 등이 거느린 군사 중에서 전투할 수 없는 이들을 징발하여 평양에서부터 곡식을 운반해 명군을 뒤쫓아 와서 황주에 도착하도록 했다. 평안도 세 고을의 곡식을 배로 운반해 청룡포를 거쳐 황해도에 도착하도록 했다. 그러나 일이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고, 임박한 때를 맞아 창졸히 서둘러댄 일이며, 대군은 곧 뒤따라오게 되니 군량이 결핍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마음으로 애가 쓰이고 속을 태웠다.
유영경이 저장한 곡식은 자못 많았으며 적군의 약탈을 두려워하여 산골짜기에 쌓아둔 것인데, 백성을 독려하여 운반해 와서 군대가 지나가는 연도에 군량이 모자라지 않도록 했다. 조금 뒤에 대군이 개성부에 들어왔다.
정월 24일에 적군은 서울로 돌아와서 우리 백성들이 내응할까 의심하고, 또한 평양에서의 패전에 분노하여 서울에 남아 있던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 공사의 집들을 거의 불살라 없앴다. 서도(西道)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적군들도 모두 서울로 모여 명나라 군사를 막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제독에게 빨리 진격하도록 연달아 청했으나, 제독은 머뭇거린 지 여러 날 만에야 파주까지 이르렀다. 이튿날 부총병 사대수가 우리 장수 고언백과 함께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먼저 가서 적군을 정탐했는데, 적군과 벽제역 남쪽 여석령에서 만나 적병 백여 명을 목 베었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자 대군은 머물러둔 채 혼자서 가정(家丁=집안에서 부리는 노복)과 말 탄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달려갔는데, 혜음령을 지나다가 말이 넘어져서 땅에 굴러 떨어지자 그의 부하들이 함께 부축해서 일으켰다.
이때 적군은 많은 군사를 여석령 뒤에 숨겨두고 다만 수백 명만 고개 위에 있었다. 제독은 이를 바라보고 자기 군사를 지휘하여 부대를 좌우로 나누어 앞으로 나아갔고 적병도 고개 위에서 내려와 서로 점점 가까워졌는데, 산의 배후에 숨어 있던 적병이 갑자기 산 위로 올라오자 수효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명나라 군사가 이를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두려워했으나, 때는 이미 접전에 들어가 있어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때 제독이 거느린 군사는 모두 북방의 기병으로서 화기도 없고 다만 짤막하고 무딘 칼만 가졌을 뿐인데, 적병은 보병으로서 그들의 칼은 모두 서너 자나 되고 예리하기 비길 데 없는 것이었다. 이들과 충돌하여 싸우는데, 적병이 긴 칼을 좌우로 휘둘러치자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서 감히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대적할 수가 없었다. 제독은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뒤에 있는 군사를 불렀으나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먼저 온 군사는 벌써 패전하여 죽고 부상한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적군 또한 군사를 거두고 급히 추격하지는 않았다.
날이 저물자 제독은 파주로 돌아와서 패전한 것을 숨기고 있었으나, 신기가 몹시 저상했으며, 그날 밤에 가정의 친신한 사람들이 전사한 것을 슬퍼하여 통곡까지 했다.
이튿날 제독이 동파로 군사를 퇴각하려고 하므로, 나는 우의정 유홍과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이빈 등을 거느리고 장막 아래에 이르렀다. 제독은 장막 밖으로 나와서 섰고, 여러 장수들은 좌우에 서 있었다. 나는 힘써 반대하여 말하기를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에게는 흔히 있는 일인데, 마땅히 적군의 형세를 보아 다시 진격해야지, 어찌 경솔히 움직이려 하십니까?” 하자, 제독은 “우리 군사가 어제 적병을 많이 죽였으니 불리한 일은 없겠지만, 다만 이곳 땅이 비가 와서 진창이 되어 군사를 주둔하기가 불편하니 동파로 돌아가서 군사를 쉬게 했다가 다시 진격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나와 여러 사람들이 군사를 퇴각하지 말라고 힘껏 반대하자, 제독은 자기가 이미 본국에 상주(上奏)한 글의 초고를 내어 보였는데 글 가운데 “서울에 있는 적의 군사가 20여만 명이 되니, 적병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 대적할 수 없사옵고…” 하는 구절이 있고, 또한 말미에는 “신의 병이 대단히 심하오니 다른 사람이 그 임무를 대신하게 해주시옵소서” 하는 말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손으로 그 글을 가리키면서 “적병이 매우 적은데 어떻게 20만 명이나 있겠습니까?” 하자, 제독은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이는 너희 나라 사람이 하는 말이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핑계 대는 말이었다.
명나라 여러 장수 중에서도 장세작이 제독에게 가장 강력하게 군사를 퇴각하자고 권했는데, 우리들이 굳이 반대하고 물러가지 않는다 하여 순변사 이빈을 발길로 차며 물러가라고 꾸짖었으며 그 말소리와 낯빛이 모두 사나웠다.
이때 큰 비가 날마다 내렸는데, 또한 적군이 길가의 여러 산들을 불살라버려 모두 민둥민둥하게 풀 한 포기도 없었고, 더욱이 말이 병이 들어 며칠 동안에 쓰러져 죽은 말이 거의 1만 필이나 되었다.
이날 삼영(三營)의 군사들이 임진강을 도로 건너와서 동파역 앞에 진을 쳤다가, 이튿날 동파에서 개성부로 돌아가려고 하므로, 나는 또 힘써 반대하여 말하기를 “대군이 한 번 물러가게 되면 적군은 기세가 더욱 교만해지고, 우리의 원근(遠近) 지방의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임진강 이북 지방 또한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원컨대 잠시 동파에 머물러 있다가 적군의 틈을 살펴보고 움직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제독은 거짓 허락하는 체했으나, 내가 물러나오자 제독은 마침내 개성부로 돌아갔고, 여러 진영들도 모두 개성으로 퇴각했다. 단지 부총병 사대수와 유격장군 관승선의 군사 수백 명만이 임진강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래도 동파에 머물러 있으면서 날마다 사람을 제독에게 보내 다시 진병(進兵)하도록 요청했으나, 제독은 거짓 응답하기를 “날이 개고 길이 마르면 당연히 진병할 것이다” 라고 했으나 실상은 진병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대군이 개성부에 도착한 지가 오래되어 군량이 이미 다 없어졌는데, 다만 수로로 조와 말먹이 풀을 강화도에서 구해왔고, 또 충청도 · 전라도의 조세로 바쳐진 양곡을 배로 운반했는데, 조금씩 조금씩 도착했으나 오는 대로 곧 떨어져서 형세가 더욱 급해졌다. 어느 날 여러 장수들이 군량이 떨어진 것을 핑계 삼아 제독에게 군사를 돌이키자고 청하자, 제독은 노하여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 그리고 경기 좌감사 이정형*을 불러 뜰아래 꿇어앉히고 큰 소리로 꾸짖으면서 군법을 시행하려 했다. 나는 마음속 깊이 사죄했으나, 이내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제독도 민망히 여겨 다시 여러 장수에게 성난 빛으로 말하기를 “너희들이 전날에 나를 따라 서하를 정벌할 때는 군사가 여러 날을 먹지 못했는데도 오히려 감히 돌아가 자고 말하지 않고서 마침내 큰 공을 세우지 않았는가. 지금 조선에 와서 마침 며칠 동안에 양식이 보급되지 않았다고 어찌 갑자기 군사를 돌이키고자 하는가. 너희들은 가고 싶거든 가거라. 나는 적군을 쳐서 없애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마땅히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고향에 돌아갈 따름이다” 하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사과했다.
☞ 이성중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3년(1570)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0년(1587)에 부제학이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수어사로 왕을 호종하다 의주에 이르러 호조판서가 되어 군량 조달을 맡고, 선조26년 명장 이여송을 따라 영남 지방으로 내려가 군량 보급에 노력, 진력하다가 과로로 함창에서 죽었다.
☞ 이정형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 원년(1568)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형조정랑이 되었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좌승지로서 왕을 호종하다 개성에 이르러 개성부 유수에 특진되었다. 개성이 함락된 후 형 이정암과 함께 황해도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쳐서 많이 죽였으며 그 공으로 경기도 관찰사로 특진되었다. 그 후 대사성 ·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나는 제독과 작별하고 문 밖으로 나와서 군량을 제때 보급하지 못한 죄로 개성 경력 심예겸에게 곤장을 쳤는데, 곧 잇달아 군량을 실은 배 수십 척이 강화에서 서강 뒤편에 닿아 가까스로 무사하게 되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은 총병 장세작을 시켜 나를 불러 위로했고, 군사에 관한 일도 의논했다.
제독이 평양으로 돌아갔다.
이때 적의 장수 가등청정이 아직 함경도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을 전하기를 “가등청정이 장차 함흥에서 양덕 · 맹산을 넘어 평양을 습격해 오려고 한다” 라고 했다. 당시에 제독은 북쪽(평양)으로 돌아갈 생각은 있었으나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말 때문에 공공연히 말하기를 “평양은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 이곳을 만약 지키지 못하면 대군(명나라 군대)이 돌아갈 길이 없게 되니 평양을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군대를 돌이켜 평양으로 돌아가고, 왕필적을 남겨두어 개성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접반사 이덕형에게 이르기를 “조선 군대는 형세가 외롭고 구원병도 없으니 마땅히 모두 강(임진강) 북쪽으로 돌아오게 하라” 고 했다.
이때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고양군 행주에 있었고, 순변사 이빈은 파주에 있었으며, 고언백 · 이시언 등은 해유령에 있었고, 원수 김명원은 임진강 남쪽에 있었으며, 나는 동파에 있었는데, 제독은 적군이 틈을 타서 쳐들어올까 두려워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총사령관 신경진을 시켜 달려가서 제독에게 군사를 퇴각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전하기를 “우리나라 선왕의 분묘들이 모두 경기에 있는데 지금 적군이 점령하고 있는 곳에 빠져 신(神)과 사람들이 함께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므로 차마 버릴 수 없으니 이것이 그 첫째요, 경기 남쪽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날마다 황제의 군대가 오기를 바라고 있는데 물러갔다는 말을 갑자기 듣게 되면 다시 굳게 지킬 생각이 없어져 서로 이끌고 적군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이것이 그 둘째요, 우리나라의 강토는 한 자, 한 치의 땅일지라도 쉽사리 버릴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그 셋째요, 우리나라의 장수와 군사들이 보록 힘은 약하지만 바야흐로 명나라 구원병에게 의지하여 함께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군대를 거두어 물러간다는 명령을 한번 듣게 되면 분명히 원망하고 분개하여 흩어져버릴 것이니 이것이 그 넷째요, 대군이 한번 물러간 후에 적병이 그 후방으로 쳐들어오게 되면 비록 임진강 북쪽 지방마저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그 다섯째입니다” 하자, 제독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다가 떠나가버렸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적군을 행주에서 패퇴시키고, 파주로 군사를 옮겼다. 이보다 앞서 권율이 광주 목사로 있었는데, 이광을 대신하여 순찰사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국사에 힘썼다. 그는 이광 등이 들판에서 싸우다 패전한 것을 징계하고서, 수원에 이르러 독성산성에 웅거하고 있었더니 적군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했는데, 명나라 구원병이 장차 서울에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었다.
☞ 권율 : 조선시대의 명장. 선조15년(1582)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전라도사 · 호조정랑을 거쳐 선조24년(1591)에 의주 목사가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가 되었다가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되고, 수원의 독성산성과 고양의 행주산성에서 큰 승첩을 거두었으며, 후에 도원수가 되어 전군을 지휘했다. 37년(1604) 선무공신 일등에 책정되고,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이때 적군이 서울에서 많은 군사로 공격해오자 군중의 민심이 어수선하고 두려워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자 했으나, 강물이 뒤에 있어 도주할 길이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도로 성으로 들어와서 힘껏 싸웠는데, 우리 군사들의 화살이 비 오듯 하므로, 적군이 세 진으로 나누어 번갈아 진격해왔으나 모두 패퇴하고 말았다. 때마침 날이 저물어 적군은 서울로 돌아갔으며, 권율은 군사를 시켜 적병의 시체를 가져와서 사지를 찢은 후 나뭇가지에 여기저기 걸어 분개를 풀었다.
얼마 후에 적군이 서울에서 다시 나와 기필코 보복전을 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권율은 매우 두려워하여 영책을 헐어버린 후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에 이르러 도원수 김명원을 따랐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혼자 달려가서 파주산성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았는데, 그곳은 큰 길의 요충에 있고 지형이 험준하여 지킬 만하다고 생각되어 곧 권율에게 순변사 이빈과 군사를 합쳐서 이곳을 지켜 적군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도록 했다. 그리고 방어사 고언백, 이시언과 조방장 정희현, 박명현 등은 유격병이 되어 해유령을 막도록 했고, 의병장 박유인, 윤선정, 이산휘 등은 오른쪽 길을 따라 창릉 · 경릉 사이에 매복하여 각각 자기 군사들을 거느리고서 나타났다 숨었다 하면서 적군을 초격하되, 적병이 많이 나오면 피하여 싸우지 말고 조금 나오면 곳곳에서 맞아 치게 했다. 이때부터 적군은 성 밖으로 나와서 땔 나무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말이 수없이 죽었다.
또 창의사 김천일, 경기 수사 이빈, 충청 수사 정걸 등을 시켜 배를 타고 용산 서강으로 나가서 적군의 세력을 갈라놓게 했고, 충청도 순찰사 허욱*은 양성에 있었기에 돌아가 본도(충청도)를 지켜서 남쪽으로 쳐들어오려는 적군의 세력에 대비하게 했으며, 경기 · 충청 · 경상 각 도의 관군과 의병에게 공문을 보내 각기 자기들이 맡은 곳에 있으면서 좌우로 적군이 가는 길을 막도록 하고, 양근 군수 이여양은 용진을 지키도록 했다. 여러 장수들이 벤 적병의 머리를 모두 개성부 남문 밖에 매달아 놓았더니, 제독의 참군 여응종이 이것을 보고 기뻐하며 “조선 사람도 지금은 적병의 머리 베기를 공을 쪼개듯이 하는구나” 라고 했다.
☞ 허욱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5년(1572) 춘당대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공주목사가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을 수비하는 한편 의병장 조헌을 도와 청주 수복에 전공을 세워, 선조26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승진되었다. 청량사가 되어 명나라로 건너가 산동의 곡식 22,700석을 얻어 와서 국내의 기민을 진구하였다. 선조39년(1606)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나 광해군 즉위년(1608) 능창군 전의 추대사건에 관련되어, 8년(1616)에 원주로 귀양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어느 날 많은 적군이 동문에서 나와 산을 수색하여 양주, 적성을 거쳐 대탄까지 이르렀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사대수는 적군이 습격해올까 두려워하여 나에게 “정탐꾼이 와서 말하기를 적군이 사 총병(사대수)과 유 체찰(유성룡)을 잡으려 한다 하니 잠시 개성으로 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정탐꾼의 말은 아마도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적군은 방금 우리 대군이 가까이 있지나 않은가 의심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경솔히 강을 건너오겠습니까? 우리들이 한 번 움직인다면 민심이 반드시 동요될 것이니 가만히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하자, 사 총병도 웃으면서 “그 말이 정말 옳습니다. 가령 적군이 온다 하더라도 나와 체찰은 사생을 같이해야 할 텐데, 어찌 감히 나 혼자 가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가 거느린 용사 수십 명을 나누어 보내서 나를 호위하도록 하여, 비록 비가 많이 오는 날에도 밤새워 지키기를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다가 적군이 성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서야 군사의 호위를 그만두게 했다.
그 후에 적군은 권율이 파주에 있는 것을 정탐해 알아내고, 전날의 원수를 갚고자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 길로 나와서 광탄에 이르렀다. 광탄에서 산성(파주산성)까지의 거리가 수 리인데도 군사를 멈추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오시부터 미시가 되도록 쳐들어오지 않았고, 물러간 후로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적군이 지형을 살필 줄 알았으며, 권율이 웅거한 데를 험준한 곳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왕필적에게 글을 보내 “적군이 지금 험준한 곳에 웅거하고 있으니 쉽사리 공격할 수 없겠으나, 명나라 대군은 마땅히 동파와 파주에 진군, 주둔시켜 적군의 뒤를 밟아 견제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명의 남방 군사 1만 명을 선발하여 강화에서 한강의 남쪽으로 나가서 적군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서 여러 둔영을 쳐부순다면 서울에 있는 적군이 돌아갈 길이 끊어져서 반드시 용진을 향하여 달아날 것이니, 이때 뒤에 남은 군대로 여러 곳의 나루터를 덮친다면 단 한 번에 적군을 소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왕필적은 감탄하여 손뼉을 치면서 참으로 기이한 계책이라 칭찬하고는, 정찰병 36명을 뽑아 충청도 의병장 이산겸의 진영으로 달려가서 적군의 형세를 살피게 했는데, 이때 적군의 정병은 모두 서울에 있고 후방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모두 파리하고 쇠약한 군사들뿐이어서, 정찰병이 기뻐 뛰면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우리 군사는 1만 명까지도 필요가 없으며, 2천~3천 명이면 쳐부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이 제독은 북방 장수라서 이번 전역에서는 남방 군사를 매우 억제해왔으므로, 그들이 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서 허락하지 않았다.
군량미 중 남은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도록 임금께 주청했더니 허락하셨다. 이때는 적군이 서울을 점거한 지 벌써 2년이 되었으므로, 병화(兵禍)의 피해 때문에 천리 강산이 쓸쓸했고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굶어 죽어서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성안에 살아남은 백성들은 내가 동파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붙들고 이고 지고 하여 동파에 이른 자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 총병(사대수)이 마산 가는 길가에서 어린애가 기어가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이를 거두어 군중에서 기르게 하고서 나에게 말하기를 “왜적은 물러가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이 꼴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는 “하늘도 근심하고 땅도 슬퍼할 것이다” 하며 탄식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때 명나라 대군이 곧 다시 도착한다고 하여 남쪽에서 온 군량 실은 배는 모두 줄을 지어 강기슭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감히 딴 데는 쓰지 못했다. 마침 전라도 소모관 안민학*이 겉곡식 1천 석을 거두어 배에 싣고 왔으므로 나는 매우 기뻤다. 곧바로 장계를 올려 이 곡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먹이도록 청했고, 전 군수 남궁제를 감진관으로 삼아 솔잎으로 가루를 만들어 솔잎 가루 십분에 쌀가루 한 홉을 섞어 물에 타서 먹게 했으나,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서 인명을 살린 것이 얼마 되지 못했다.
☞ 안민학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3년(1580)에 학행으로 선발되어 감찰이 되었으며, 이어 대흥 현감 · 아산 현감 등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는 소모관이 되어 군량 수속을 맡고, 후에 사도시 첨정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홍주에 우거했다.
명나라 장수들도 불쌍히 여겨 자기네 군량 30석을 덜어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으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어느 날 밤 큰 비가 내렸고 굶주린 백성들이 내 숙사 옆에 모여 신음하는 소리를 차마 들을 수가 없었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기저기 흩어져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도 전 전적 이로를 보내 위급한 사정을 나에게 알리기를 “전라좌도의 곡식을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나누어 먹이고 또 봄에 뿌릴 종자로 쓰고자 하나, 전라도사 최철견*이 곡식을 꾸어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때 지사 김찬*이 체찰부사로 충청도에 있었으므로, 나는 곧바로 김찬에게 공문을 보내 전라도로 달려 내려가서 남원 등지의 창고 곡식을 내어 1만 석을 영남으로 운반하도록 하여 백성들을 구제하게 했다.
☞ 최철견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8년(1585)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는 전라도사로서 전주를 방위했으며, 그 후 대사간을 지내고, 선조34년(1601)에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 김찬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 원년(1568)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승지 · 대사관 등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는 대사헌으로 국왕을 호종했고, 영의정 이산해의 실책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후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대개 이때 서울에서부터 남쪽 변방까지 적병이 가로질러 꿰뚫고 있었으며, 때는 바로 4월인데 백성들은 모두 산골짜기에 숨어 있고 보리 심은 데라고는 한 곳도 없었으니, 적군이 몇 달 동안이나 물러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유격장군 심유경이 다시 서울에 들어와서 적군을 꾀어 군사를 물러나게 했다. 4월 초이렛날에, 제독(이여송)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에서 개성부로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김천일의 진중에 이진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자청하여 서울에 들어가서 적군의 정세를 탐지하고, 또한 두 왕자와 장계군 황정욱을 만나보고 돌아와 말하기를 “적군이 강화할 의사가 있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왜적이 용산에 있는 우리 수군에게 글을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자, 김천일은 그 글을 나에게 보냈다. 나는 “제독이 이미 싸우려는 의사가 없으니, 혹시 이 일(강화)을 빌어 적군을 물리치고자 한다면 제독은 다시 개성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일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여, 그 글을 사대수에게 보냈다. 사대수는 곧바로 가정 이경을 시켜 평양으로 달려가서 보고했고, 이에 제독은 심유경을 보냈다.
김명원이 심유경을 보고 “적군이 평양에서 속은 것을 분하게 여겨 반드시 좋지 않은 생각을 가졌을 텐데, 어찌 다시 적진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자, 심유경은 “적군이 빨리 물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패전한 것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적군의 진중으로 들어갔는데, 적군의 진중에서 한 말은 비록 듣지는 못했으나 대개 왕자와 배신(陪臣)들을 돌려보내라고 책망하고서 적군이 부산으로 물러간 후에야 강화하도록 허락한다고 했을 테고, 적군은 약속대로 하겠다고 했으므로 제독은 마침내 개성으로 돌아온 것 같이 여겨졌다.
나는 제독에게 글을 보내 “화친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니 적군을 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고서 있는 말을 다하여 역설했더니, 제독은 회보하기를 “이것은 내 생각으로도 그렇게 여겨집니다” 라고 하면서도 받아들일 의사는 없었다. 또 유격장군 주홍모에게 적군의 진영으로 가도록 했는데, 나와 김 원수(김명원)는 때마침 권율의 진중에 있다가 파주에서 주홍모를 만났다. 주홍모가 우리들에게 기패에 참배하라고 하므로, 내가 “이것은 왜적의 진영에 들어가는 기패인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참배하겠는가. 또 송 시랑(송응창)의, 적병을 죽이지 말라는 패문도 있으니 더욱이 들을 수가 없다” 라고 했더니, 주홍모가 세 번, 네 번 강요했으나 나는 듣지 않고 말을 타고 동파로 돌아왔다.
주홍모가 제독에게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자, 제독은 크게 성내면서 “기패는 황제의 명령이니 비록 북쪽 오랑캐라도 이것을 보면 절을 하는 법인데, 어째서 절하지 않겠다고 하는가? 내가 군법을 시행한 후에 군사를 돌이킬 것이다” 하였다. 접반사 이덕형이 급히 나에게 알리기를 “내일 아침에 제독 있는 곳으로 가서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튿날 나는 김 원수와 함께 개성으로 가서 영문에 나아가 성명을 통했으나, 제독이 성내서 만나주지 않으므로, 김 원수는 물러가려고 했지만 나는 “제독이 나를 시험해보는 것이니 잠시 기다려 봅시다” 하였다. 이때 부슬비가 내렸는데, 우리 두 사람은 문 밖에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고 서 있었다.
잠깐 뒤에 제독의 부하 사람이 두 번이나 문 밖으로 나와서 우리의 동정을 엿보고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들어오라고 했다. 제독이 당(堂) 위에 서 있기에 나는 앞으로 나아가서 예를 하고 이내 사과하기를 “소인들이 비록 매우 어리석지만 어찌 기패에 경례할 줄 모르겠습니까. 다만 기패의 곁에 패문이 있는데 그 속에 우리나라 사람은 적군을 죽이지 말라는 글이 있기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것을 원통히 여겨 감히 참배하지 않은 것이니 죄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자, 제독은 부끄러운 기색을 나타내면서 “그 말은 지극히 옳은 말이오. 그러나 패문은 곧 송 시랑의 명령이니 나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라고 하고는 계속해서 “이 지방에 근거 없는 소문이 하도 많으니, 송 시랑이 만일 배신(유성룡을 가리키는 말)이 기패에 참배하지 않았는데 내가 그것을 용인하고 문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는다면 반드시 나까지도 아울러 책망할 것이니, 모름지기 이 사정을 대략 변명한 정문을 만들어 오시오. 혹시 송 시랑이 물으면 내가 이것으로 해명할 것이고, 묻지 않으면 그냥 둘 것입니다” 라고 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하직하고 그곳을 물러나와 제독의 말대로 정문을 만들어 보냈다.
이때부터 제독은 사람을 보내 잇달아 왜적의 진영을 왕래하게 했다. 어느 날 내가 김 원수와 함께 제독에게 가서 문안드리고 동파로 돌아오는 길에 천수정 앞에 이르렀을 때 사대수의 가정 이경이 동파에서 개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만났다. 우리는 말 위에서 서로 읍하고 지나갔는데, 초현리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말 탄 중국인 셋이 달려오면서 큰 소리로 묻기를 “체찰사는 어디 계시오?” 라고 하므로, “내가 체찰사다” 했더니, 말을 되돌리라고 소리 지르고서 한 사람이 손에 쇠사슬을 쥐고 긴 채찍으로 내가 탄 말을 후려치면서 “빨리 달려라, 달려” 하였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알지도 못하고 말을 되돌려 개성을 향하여 달렸는데, 그 사람이 말 뒤에서 채찍질하기를 멈추지 않아 수행하던 사람들은 모두 뒤떨어지고, 군관 김제와 종사관 신경진만이 있는 힘을 다해서 따라왔다. 청교역을 지나 토성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또 한 사람이 성안에서 말을 타고 달려 나와 세 사람을 보고 무엇인가 수군거리고는 세 사람이 나에게 읍하면서 “이제는 가셔도 좋습니다” 하였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고 돌아왔는데, 이튿날 이덕형의 통지를 받고 그제야 다음과 같은 까닭을 알게 되었다.
제독이 신임하는 가정이 밖에서 들어와 제독에게 “유 체찰이 강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임진강의 배를 모두 거두어가서 사자(使者)가 왜적의 진영으로 드나들지도 못하도록 해버렸습니다” 라고 보고하자, 제독은 갑자기 화를 내면서 나를 잡아다 곤장 40대를 때리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미처 도착하지 않은 사이에 제독이 눈을 부릅뜨고 팔을 휘두르며 앉았다 섰다 하자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조금 있다가 이경이 도착하자 제독이 임진강에 배가 있더냐고 물었고, 이경은 “배가 있어서 왕래하는 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제독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나를 쫓아간 사람들을 멈추게 하고, 그 가정은 거짓말을 했다 하여 곤장 수백 대를 쳐서 기절한 후에야 끌어냈다.
제독은 나에게 화낸 것을 뉘우치면서 사람들에게 “만약 체찰사가 오면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라고 했다. 제독은 항상 내가 강화에 찬성하지 않는다 하여 평소부터 불만스러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듣자마자 살펴보지도 않고 이렇듯 갑자기 화를 낸 것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나를 위하여 이것을 위태롭게 여긴 것이다.
그 후 며칠 만에 제독은 또 유격장군 척금과 전세정 두 사람을 시켜 기패를 가지고 동파로 와서 나와 김 원수, 관찰사 이정형을 불러 자리를 같이하고 조용히 말하기를 “적군이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고 서울에서 물러가기를 청하고 있으니, 지금은 그들의 요청에 따라 적군을 속여 성 밖으로 나오게 한 후에 계책을 세워 뒤쫓아 가서 섬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것은 제독이 그들을 보내 나의 의사가 어떠한지 탐지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전 의론을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 제독에게로 왕복하기를 그치지 않게 되자, 전세정은 성질이 조급하여 화를 내면서 큰 소리로 욕하여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희 국왕은 무슨 까닭으로 도성을 버리고 도주했는가?” 하였다. 나는 천천히 “국도를 옮겨 회복을 도모하는 것 또한 한 가지 방도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때 척금은 다만 자주 나와 전세정을 쳐다보면서 빙그레 웃었을 뿐이고 말은 없었는데, 전세정 등은 마침내 돌아갔다.
4월 19일, 제독이 대군을 거느리고 동파에 이르러 사 총병(사대수)의 영막에 유숙했는데, 적군이 이미 군사를 물리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장차 서울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나는 제독의 처소에 나아가 인사를 드리려 했으나, 제독은 나를 만나지도 않고 통역인에게 “체찰사는 나를 불쾌하고 여기고 있을 텐데, 또 와서 안부를 묻는가?” 라고 할 따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