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적병을 거제 바다 가운데서 크게 쳐부수었다.
※ 이억기 : 조선시대의 무신 일찍이 무과에 급제, 경흥 부사 · 온성 부사를 역임하면서 북방의 수비에 힘썼다. 선조24년(1591)에 전라 우수사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옥포 · 당포 · 안골포 등지의 해전에서 적의 병선을 크게 부수어 제해권을 잡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통제사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자, 이항복 · 김명원 등과 함께 그의 무죄를 주장, 구명에 앞장섰으며,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통제사 원균의 휘하에서 좌익군을 지휘, 용전분투하다가 칠천량 싸움에서 패전하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선무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완흥군으로 추봉되었다.
처음에 적병이 이미 육지에 오르자, 원균은 적의 형세가 큰 것을 보고 감히 나가 치지 못하고 그 전선 백여 척과 화포, 병기 등을 모조리 바다 속에 가라앉힌 다음, 다만 수하의 비장 이영남*, 이운룡* 등만 데리고 배 네 척에 나누어 타고 달아나서 곤양 바다 어귀에 이르러 뭍으로 올라가서 적군을 피하고자 하니, 이에 그가 거느린 수군 1만여 명은 모두 무너지게 되었다. 이영남이 간하기를 “공은 임금의 명령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지금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게 되면 후일 조정에서 죄를 물을 때 무슨 말로 해명하겠습니까? 그러니 전라도 수군에 구원병을 청하여 적군과 한번 싸워본 다음 이기지 못하거든 그 후에 도망치더라도 늦지 않을 테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원균이 옳다고 여겨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구원을 청하도록 했다.
☞ 이영남 : 조선시대의 무신. 임진왜란 때 율포 만호로서 경상우수사 원균을 도와 적군을 방어하고, 이어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가리포 첨사로서 조방장을 겸임,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서 진도해전에 공을 세우고, 선조31년(1598) 노량해전에서 적병을 섬멸하다 전사했다.
☞ 이운룡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18년(1585) 무과에 급제했고, 선조20년(1587)에 선전관에, 22년(1589)에 옥포 만호에 임명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이 도망치려는 것을 저지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하도록 건의하여 성사시켰으며, 이내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옥포 · 진해양 · 한산도 · 안골포 · 가덕포 등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선조29년(1596)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도수사가 되었다가,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원균이 패사하고 전 수군이 복몰되자 영천 · 창암 등지의 육전에 참가했다. 선조38년(1605) 도총부 부총관 · 포도대장에 임명되고 조금 후에 경상우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충무공 이순신의 유업을 계승, 발전시켰다. 선조40년(1607)에 북방 오랑캐가 침입하자 함경남도 병사로 전임되어 북방의 수비에 주력했다. 선무공신 삼등에 책정되고 식성군에 봉해졌다.
이순신은 “우리가 각각 맡은 경계가 있는데 조정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어찌 마음대로 경계를 넘어갈 수 있겠는가?” 하고 응하지 않았다. 원균은 또다시 이영남을 시켜 구원을 청하도록 대여섯 차례나 내왕했는데, 이영남이 돌아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서 바라보고 통곡했다.
얼마 후에 이순신은 판옥선 40척을 거느리고 이억기와 약속하여 함께 거제로 나와 원균과 군사를 합쳐 나아가 적의 전선과 견내량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바다가 좁고 물이 얕아서 배를 돌리기가 어렵겠으나 우리가 거짓으로 물러가는 체하여 적병을 유인하고, 바다가 넓은 곳으로 나가서 싸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원균은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바로 나가서 맞닥뜨려 싸우고자 했다. 이에 이순신은 “공은 병법을 알지 못하니 이같이 하면 반드시 패전할 것이오” 라고 말하고, 마침내 깃발로써 배를 지휘하여 물러갔다. 그러자 적병은 크게 기뻐하며 앞다투어 따라왔는데, 이미 좁은 곳을 다 나온 후 이순신이 북소리를 한 번 울리자 여러 배들이 일제히 노를 돌려 바다 가운데 열을 지어 벌려 서서 정면으로 적의 배와 맞부딪치니, 서로 거리가 수십 보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이순신이 거북선을 창조했는데, 목판으로 배위를 덮으니 그 형상이 가운데가 높아 마치 거북과 같았으며, 싸우는 군사와 노 젓는 사람들은 모두 배 안에 있고, 좌우와 전후에 화포를 많이 싣고 이리저리 마음대로 드나들기를 마치 베 짜는 북과 같이 행동했다.
적의 배를 만나면 잇달아 대포로 쏘아 부수고, 여러 배가 일시에 합세하여 쳐부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까지 가득하였고 적의 배가 수없이 불타버렸다.
적의 장수가 누선(다락이 있는 배)에 탔는데, 그 배는 높이가 서너 길이나 되고 배 위에 망루(적의 동정을 망보는 높은 누각)가 있으며, 붉은 비단과 채색 담요로 그 곁을 둘렀다. 이것 또한 대포에 맞아 부서지고 적병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 후에도 적군은 잇달아 싸웠으나 모두 패전하여 드디어 부산과 거제로 도망쳐 들어간 후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어느 날 한창 싸움을 독려하던 중, 날아오는 탄환이 이순신의 왼편 어깨에 맞아 피가 발꿈치까지 흘렀으나 이순신은 말하지 않고 있다가 싸움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칼로 살을 베고 탄환을 뽑아냈다. 그 깊이가 서너 치나 들어가서 보는 사람들은 얼굴빛이 변했으나, 이순신은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이 평상시와 같이 태연했다.
전쟁에 이긴 보고가 들려오니 조정에서는 크게 기뻐하여 임금께서 이순신에게 일품 벼슬을 주시려 했으나, 너무 지나친 승진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어 이순신을 정헌대부(정이품 관계)로 승진시켰고, 이억기와 원균은 가선대부(종이품 관계)로 승진시켰다.
이보다 앞서 적의 장수 평행장이 평양에 이르러 글을 보내 “일본 수군 10여만 명이 또 서쪽 바다로 오게 되니 대왕(선조)의 행차는 이곳에서 어디로 가시렵니까?” 라고 했다.
적군은 본디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내려오려 했는데, 이순신이 이 한 번의 싸움으로 드디어 적군의 한쪽 세력을 꺾었기 때문에 평행장이 비록 평양을 점령했으나 형세가 외로워져서 감히 더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라도 · 충청도 · 황해도 · 평안도 연해 지역 일대를 보전함으로써 군량을 보급시키고 조정의 호령이 전달되도록 하여 나라의 중흥을 이룰 수 있었으며, 요동의 금주 · 복주 · 해주 · 개주 · 천진 등도 소란을 당하지 않아서 명나라 군사가 육로로 나와 구원함으로써 적군을 물리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이순신이 단 한 번의 싸움에서 이긴 공이니, 아아, 이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이순신은 이내 삼도(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의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에 주둔하여 적군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막았다.
전 의금부 도사 조호익*이 강동(평안남도 강동군)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적군을 토벌했다. 조호익은 창원 사람으로 지조와 덕행이 있었는데, 남에게 무함을 당해서 온 집안이 강동으로 이사하여 살고 있었다. 집이 가난해서 학도들을 가르쳐서 생계를 이어온 지가 거의 20여 년이나 되었으나, 그의 지조는 더욱 굳어졌다.
☞ 조호익 : 조선시대의 학자. 선조9년(1576)에 경상도 도사 최황이 부임하여 조호익을 군적검독관으로 임명했으나 친상으로 사퇴하자 명령을 거부하는 토호라고 상주하여 강동에 유배시켰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체찰사 유성룡의 계청으로 풀려나서 소모관이 되어 군민을 규합, 중화 · 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선조28년(1595)에 안주 목사가 되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다시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으며, 후에 선산 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임금의 행차가 평양에 이르자 조호익의 죄를 용서하여 의금부 도사로 임명했는데, 평양이 적군에게 포위되었기에 조호익은 강동으로 가서 군사를 모집해 평양을 구원하고자 했으나, 얼마 뒤에 평양이 함락되고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조호익은 행재소로 향했다. 내가 양책역에서 그를 만나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가 곧 올 것이니 그대는 의주로 가지 말고 강동으로 되돌아가서 군사를 모집하고,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에 모여서 군대의 기세를 돕도록 하는 것이 좋겠네” 하자, 조호익은 내 말에 따랐다. 나는 드디어 그 사유를 장계하고서 기병(起兵)하는 공문을 만들어 조호익에게 주었으며 병기도 더 원조해주었다.
조호익은 강동으로 가서 군사 수백 명을 모아 상원에 나가 진을 치고, 적군을 맞아 싸워서 많은 적을 베어 죽였다. 조호익은 서생으로서 무예에는 익숙지 못했으나 충의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했으며, 동짓날에는 사졸들을 거느리고 임금 계신 곳을 바라보며 네 번 절하고 밤새도록 통곡하니, 전군(全軍)의 군사들이 따라 울었다.
적병이 전라도를 침범하니 김제 군수 정담*과 해남 현감 변응정*이 힘껏 싸우다 전사했다. 이때 적군이 경상우도에서 전주의 경계로 들어오자 정담, 변응정 등이 웅령에서 이를 막았는데, 목책을 세워 산길을 가로지르고 장수와 군사들을 독려하여 종일토록 크게 싸워서 적병을 수없이 활로 쏘아 죽였다. 적병이 물러가려 할 즈음 마침 날이 저물고 화살이 다 떨어지자, 적병이 다시 쳐들어와 두 사람이 함께 전사하고 군사들도 드디어 무너졌다.
☞ 정담 : 조선시대의 무장. 선조25년에 김제 군수가 되었다.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해남 현감 변응정,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웅령을 방어하다 모두 전사했다.
☞ 변응정 : 조선시대의 무장.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이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남 현감으로서 김제 군수 정담과 함께 금산의 적을 쳐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 웅령 싸움에서 적의 야습을 받아 모두 전사했다.
이튿날 적병이 전주로 들어오자 관리들이 달아나려 했으나, 고을 사람 전 전적 이정란*이 성안으로 들어와 이속과 백성들을 이끌고서 굳게 지켰다. 이때 적병 중 용맹한 자는 웅령 싸움에서 많이 죽었으므로 기운이 이미 다되었고, 감사 이광이 성 밖에 의병을 설치하여 낮이면 깃발을 많이 달아놓고 밤이 되면 산에 횃불을 벌여놓자 적병이 성 밑에 이르러 몇 번을 둘러보다가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고 가버렸다.
☞ 이정란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 원년(1568)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전적을 지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성을 지켜 적병의 진로를 막아 그 공으로 태상시첨정이 되고, 이어 공주 목사를 역임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는 전주 부윤으로서 소모사를 겸임해 많은 전공을 세웠다.
적군이 웅령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시체를 모두 모아 길가에 묻어 큰 무덤을 몇 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세우고 “조선국의 충간, 의담을 조상한다” 라고 글을 썼는데, 이는 우리 군사들의 힘을 다해 싸운 것을 칭찬한 것이다. 이 싸움으로 전라 한 도(道)만은 홀로 보전되었다.
8월 초하루, 순찰사 이원익과 순변사 이빈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평양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당시에 이원익과 이빈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순안에 있었고, 별장 김응서* 등은 용강 · 삼화 · 증산 · 강서 네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20여 개 진을 만들어 평양 서쪽에 있었으며, 김억추*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하류에 있으면서 적군을 협격, 견제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 김응서 : 조선시대의 무장. 무과에 급제한 후, 감찰이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양 방위전에서 수탄장으로서 대동강을 건너오는 적병을 막은 공으로 평안도 방어사가 되었다. 선조28년(1595) 경상우도 병사로 승진되어 적의 간첩 요시라를 매수하여 적병의 동정을 탐지했다. 광해군10년(1618)에 평안도 병사가 되었는데, 이때 건주위의 후금을 공격하려는 명나라의 원병 요청이 있어서 부원수로 임명되어, 원수 강홍립과 함께 원병을 거느리고 요동 지방에 출전했다. 이듬해 심하 지방에서 전공을 약간 세웠으나, 부차에서 패전한 후 강홍립과 함께 후금군에 투항했다. 적중에 있으면서 적의 내정을 몰래 기록하여 본국에 보내고자 했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 김억추 : 조선시대의 무장. 관직은 평안도 방어사, 경상도 우수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날 이원익 등이 평양성 북쪽에서 군사를 내보내 적군의 선봉을 만나 20여 명을 쏘아 죽였으나, 조금 후에 적병이 크게 몰려와 우리 군사는 놀라 무너지고 말았으며, 강변의 용맹스런 군사들이 많이 죽고 상했다. 드디어 순안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9월에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이 우리나라에 왔다. 처음에 조승훈이 이미 패전하자 적은 더욱 교만해져서 우리 군중에 글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양 떼가 범 한 마리를 치는 것과 같다” 라는 말이 있었으니, 양은 명나라 군사를 비유한 것이고 범은 저들(왜병)을 자랑삼아 말한 것이다. 적군이 단시일 안에 당장 서쪽으로 내려갈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려 의주 사람들은 모두 피란짐을 지고 달아나려고 서 있는 형편이었다.
☞ 심유경 : 명나라 절강성 사람이라고도 하고, 복건성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 아버지가 장사하는 일로 일본에 내왕했기 때문에, 그도 일본 사정을 조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명나라 조정에 글을 올려 자청하여 왜군의 진영에 들어가 사태를 무마, 조정하겠다고 하자 병부상서 석성이 이를 허락하고 경영첨주유격이란 이름으로 왜군의 정세를 살피게 했다. 이로부터 심유경이 적장 소서행장과 강화교섭을 추진한 지 약 4년여에 걸쳐 명나라와 일본 두 나라에서는 심유경과 소서행장의 중간농간에 속았는데 결국 강화교섭은 결렬되고, 선조30년(1597) 일본군이 재차 침범하는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이 일로 병부상서 석성은 파면, 옥사하고, 심유경도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심유경은 본디 절강성 사람인데, 석 상서(석성)가 왜국의 정세를 잘 안다고 여겨 그에게 유격장군이란 칭호를 주어 내보낸 것이다. 심유경이 순안에 이르자 왜국의 장수에게 글을 보내 명나라 황제의 교지로 “조선이 일본에게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일본은 어찌 함부로 군사를 일으켰느냐?” 라고 문책했다.
이때 왜적의 변고가 졸지에 일어났고 더구나 그 잔인하고 혹독함이 심해서 사람마다 두려워하여 감히 그들의 군영을 엿보는 사람이 없었다. 심유경은 노란색 보자기에 편지를 싸서 심부름꾼(가정) 한 사람에게 등에 짊어지게 하고 말에 태워 바로 달려가서 보통문으로 들여보냈다. 왜적의 장수 소서행장은 그 편지를 보자, 곧바로 서로 만나서 일을 의논하자고 회보해 왔다. 심유경이 곧 가려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중지하도록 권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심유경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들이 어찌 나를 해칠 수 있겠는가” 하고, 심부름꾼 서너 명만 데리고 왜적의 진영으로 갔다.
소서행장 · 평의지 · 현소 등이 군대의 위세를 성대히 벌여놓고, 성 북쪽 10리 밖의 강복산 아래로 나와 서로 만났다. 우리 군사가 대흥산 꼭대기에 올라가 바라보니 왜군이 매우 많았고, 칼과 창이 희게 번쩍여서 눈 빛과 같았는데, 심유경이 말에서 내려 적진 가운데로 들어가자 여러 왜적이 사면에서 둘러싸서 사람들은 심유경이 붙잡힌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날이 저물자 심유경이 돌아왔는데 왜적의 무리들이 매우 공손히 전송했다.
이튿날 소서행장이 글을 보내 안부를 묻고 또 말하기를 “대인(상대에 대한 경칭)께서 칼날 속에서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으니 비록 일본 사람일지라도 이보다 더 의젓할 수는 없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심유경은 회답하기를 “너희들은 당나라에 곽영공*이란 분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그는 단기로 회흘의 만군 중에 들어가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난들 어찌 너희들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나서 왜적과 약속하기를 “내가 돌아가 우리 황제에게 보고하면 당연히 무슨 처분이 있을 것이니, 50일 동안을 기한으로 하여 왜병은 평양 서북쪽 10리 밖으로 나가서 약탈하지 말아야 하고, 조선 군사도 10리 안으로 들어가서 왜적과 싸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고, 이에 땅 경계선에 나무를 세워 금지하는 표지를 만들고 떠났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 곽영공 : 당 나라 명장 곽자의에 대한 존칭. 곽영공은 현종 때 안록산의 반란을 평정하고 토번의 침입을 막아내어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이 태위 중서령에 이르고 분양군왕에 봉해졌다. 명망이 매우 높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았다.
경기 감사 심대*가 적군의 습격을 받아 삭녕에서 죽었다. 심대는 사람 된 품이 강개하여 왜적의 변고가 일어난 후로 항상 분개함을 참지 못했으며, 나라 일로 전지를 드나들 때도 안전한 곳과 위험한 곳을 가리지 않았다.
☞ 심대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5년(1572) 친시문과에 급제한 후, 사인 · 보덕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경기 감사가 되어, 서울 수복작전에 성안의 백성들을 내응하려는 등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남쪽으로 오다가 삭녕에서 적군의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다. 후에 호성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청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이해 가을에 권징을 대신하여 경기 감사가 된 그는 임금 계신 곳에서 임지로 떠날 때 길이 안주를 지나게 되어 나를 안주의 백상루로 찾아왔다. 그는 국난을 말하면서 개연한 빛이 있었는데, 그 의중을 살펴보니 몸소 시석을 무릎쓰고 바로 적군과 싸울 기색이 있었다. 나는 경계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밭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야 한다’ 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대는 서생이니 싸움에 나서는 일은 잘하지 못할 것이다. 그곳에 양주 목사 고언백이란 사람이 있는데 용력이 있고 싸움에 익숙하니, 그대는 다만 군사나 수습해주고 고언백을 시켜 군사를 거느려 싸우도록 하면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조심해서 직접 싸움에 나서지는 말도록 하게” 했더니, 심대는 그저 대답만 “예, 예”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꼭 그렇게 여기지 않은 듯했다. 나는 또 그가 군사도 없이 적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의 군관 중에서 활 잘 쏘는 의주 사람 장모를 동행하게 했다.
심대가 떠나간 후 수개월 동안 경기 사람으로 행재소에 일을 아뢰기 위하여 안주를 지나는 이가 있을 때마다, 번번이 그는 반드시 나에게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경기의 적군 형세와 심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친히 물어보았는데 “경기도는 적병의 피해가 다른 도보다도 심하고 적병이 날마다 나와서 불 지르고 노략질하여 청결한 땅(건정지)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전의 감사와 수령 이하의 관원들은 모두 깊고 궁벽한 곳에 숨어서 몸을 피하고, 따라다니는 사람도 없이 평복을 입고 몰래 다니며, 혹은 여러 번 이리저리 옮겨 거처가 일정하지 않아서 적의 환란을 방지했는데, 지금 부임해 온 감사는 조금도 적군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방을 순찰할 때마다 공문을 먼저 보내 알리기를 평일과 같이 하고, 깃발을 세우고 나팔을 불면서 다니고 있습니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걱정이 되어 다시 글을 보내 전과 같이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심대는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고, 군사를 모아 모두 자기를 따르게 하고 서울을 회복하고자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날마다 사람을 보내 성안에 들어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안에서 응하라고 약속시켰다. 그러자 성안 사람들은 난리가 평정된 후에 적군에 붙었다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연명(連名)하여 서장(書狀)을 만들어 성을 나와 감사에게 가서 스스로 능히 안에서 응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날마다 천 명, 백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혹은 약속을 맡기도 한다 하고, 혹은 병기를 운반하기도 한다 하며, 혹은 적군의 정세를 보고하기도 한다 하여, 사람마다 거리낌이 없이 왕래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중에는 또한 적군의 앞잡이가 되어 이쪽의 동정을 살피는 사람이 많아, 서로 섞여서 왔다 갔다 했으나 심대는 이들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때 심대는 삭녕군에 있었는데, 적군이 이를 탐문하여 알아낸 뒤에 밤에 몰래 대탄을 건너와서 습격했다. 심대가 놀라 일어나 옷을 입고 달아나자, 적군이 뒤쫓아가서 살해했으며 군관 장모도 같이 죽었다.
적군이 물러간 후에 경기 사람들이 시체를 거두어 삭녕군에서 임시로 장사지냈는데, 수일 후에 적군이 다시 와서 심대의 머리를 베어 가서 종루 거리 위에 매달아두었더니 50~60일이 지났는데도 낯빛이 산 사람과 같았다. 서울 사람들이 그의 충의를 애석하게 여겨 서로 재물을 모아, 지키는 왜적에게 뇌물을 주고 심대의 머리를 찾아와서 함에 넣어 강화로 보냈다가 적군이 물러간 후에 그의 시체와 함께 고향 산에 돌려보내서 장사지냈다.
심대는 본관이 청송이며 자는 공망이다. 아들은 대복인데 조정에서 심대의 공로로 벼슬을 주어서 현감에까지 이르렀다.
강원도 조방장 원호가 귀미포에서 적군을 쳐서 섬멸했다. 그러나 춘천에서 싸우다 패전하여 죽었다. 이때 적군의 큰 진영이 충주와 원주에 있었는데, 군영이 서울까지 이어져 있어 충주에 있는 적의 군사는 죽산 · 양지 · 용인 길을 왕래하게 되고, 원주에 있는 적의 군사는 지평 · 양근 · 광주를 거쳐 서울에 이르고자 했다. 원호가 여주 귀미포에서 적군을 쳐서 섬멸했고, 이천 부사 변응성이 배에 활 쏘는 군사를 싣고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적군을 여주 마탄에서 맞아 싸워서 적군을 죽인 것이 자못 많았다. 이 때문에 원주로부터 이어지는 적군의 통로는 드디어 끊어졌고, 적군은 모두 충주 길을 거쳐 올라오게 되었으니, 이천 · 여주 · 양근 · 지평 등 고을의 백성들이 적군의 칼날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은 원호의 공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순찰사 유영길이 다시 원호를 재촉하여 춘천에 있는 적군을 치게 했다. 원호는 이미 싸움에 이겼으므로 자못 적군을 깔보는 마음이 있었다. 적군은 원호가 장차 올 거라 생각하고 복병을 매복시켜 기다렸으나, 원호는 알지 못하고 나가다가 복병이 뛰어나와 드디어 살해되었다. 이로써 강원도 전체에서 적군을 막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