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평양이 함락되었다. 임금께서 가산으로 행차하셨고, 동궁은 묘사의 신주를 받들고 박천에서 산골에 있는 고을로 들어갔다.
처음에 적병이 강가 모래 위에 나누어 주둔하여 10여 진(陣)을 만들고 풀을 엮어 장막을 치고 있었으나, 여러 날이 되도록 강을 건너지 못하여 경비가 자못 게을러지고 있었다. 김명원 등이 성 위에서 이 모양을 바라보고 야음을 틈타 엄습하면 이길 것이라고 여겨, 날쌘 군사를 뽑아 고언백* 등에게 거느리게 하여 부벽루 아래 능라도 나루에서 몰래 배를 타고 건너게 했다. 그런데 처음에 삼경에 적을 치기로 약속했다가 그만 시간을 놓쳐서 강을 건넜을 때는 벌써 먼동이 환하게 트였다. 적의 장막 속을 보니 적병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적의 제일진으로 쳐들어가자 적병이 놀라서 요란해졌다. 우리 군사들이 활로 적병을 많이 쏘아 죽였으며, 토병 임욱경은 앞장서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며 적의 말 3백여 필을 빼앗았다.
☞ 고언백 : 조선시대의 무신. 교동향리로서 무과에 급제한 후, 변장 · 군관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양주 목사가 되어 이천에서 왜적을 쳐서 이기고, 경기도 방어사를 역임했으며, 이듬해 명나라 군사의 향도로서 서울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어 경상좌도 병사로 승진, 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전란이 끝난 후 선무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제흥군에 봉해졌으나, 광해군 원년(1609) 광해군에 의해 임해군과 함께 살해되었다.
조금 후에 여러 진의 적병이 모두 일어나 많은 군사가 한꺼번에 몰려오자, 우리 군사는 물러나 도로 배에 타려 했다. 그러나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은 적병이 가까이 뒤쫓아오는 것을 보고 강 복판에서 배를 강가에 대지 않아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나머지 군사들이 왕성탄에서 함부로 강을 건너오자, 적병은 그제야 물이 얕아서 건널 수 있음을 알았다. 이날 저녁에 많은 적병들이 여울을 따라 건너오는데, 여울을 지키는 우리 군사들은 감히 화살 하나도 쏘지 못하고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적병은 이미 건너와서도 우리 성안에 방비가 있는지 의심해서 머뭇거리고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이날 밤에 윤두수와 김명원은 성문을 열고 성안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으며, 병기와 화포를 풍월루 못 속에 가라앉히고, 윤두수 등은 보통문으로 나와 순안에 도착했는데, 뒤따라오는 적병은 없었다. 종사관 김신원*은 혼자서 대동문으로 나와 배를 타고 물을 따라 강 서쪽으로 향해 갔다. 이튿날 적병이 성밖에 이르러 모란봉에 올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성이 텅 비어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그제야 성안으로 들어왔다.
☞ 김신원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6년(1583) 알성문과에 급제했고, 선조26년에 의주 목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경기 감사가 되어 명군에게 시달림을 받던 도내 행정을 바로잡았다.
처음에 임금이 평양에 도착하니 조정의 의론은 모두 군량을 걱정하여 여러 고을의 전세를 다 거두어 평양으로 운반해두었는데, 이제 성이 함락되자 본창의 곡식 10여만 석까지 모두 적군이 차지하게 되고 말았다.
이때 내가 올린 장계가 박천에 이르렀고, 또 순찰사 이원익과 종사관 이호민*이 평양에서 와서 적군이 강을 건너온 상황을 말했다. 그러자 밤중에 임금과 내전께서 가산으로 향해 떠나시며 세자에게 명하여 묘사의 신주를 받들고 딴 길로 가서 사방에 있는 군사를 불러 거두어 나라의 흥복을 도모하게 했는데, 신료들을 나누어 따라가도록 했다. 영의정 최흥원은 임금의 명령을 받아 세자를 따라나섰는데, 우의정 유홍도 자청하여 세자를 따라가려 했으나 임금께서 대답이 없었다. 임금의 행차가 이미 떠나는데 유홍이 길가에 엎드려 하직하고 떠나가려 하자, 내관(환관)이 여러 번 우상 유홍이 하직하기를 청한다고 아뢰었으나 임금께서 끝내 대답이 없으셨다. 유홍은 마침내 동궁을 따라 떠나갔다. 이때 윤두수는 평양에 있어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임금 계신 곳에는 대신이라고는 없었고, 다만 정철이 예전 정승의 신분으로 임금의 행차를 따라 가산에 도착하니 벌써 밤이 오경이 되었다.
☞ 이호민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17년(1584)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응교 · 전한 등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좌랑으로서 의주로 왕을 호종했고, 그 후 요양에 가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명장 이여송의 군대를 이끌어 들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그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와 지방관에게 유시하는 문서는 대부분 그가 만들었다. 선조33년(1600) 대제학을 거쳐 좌찬성에 승진되고, 호성공신 이등에 책정, 연릉군에 봉해졌다.
임금께서 정주에 행차하셨다. 임금의 행차가 평양을 떠나온 후로는 인심이 무너져서 지나는 곳마다 난민들이 곧바로 창고에 들어가서 곡물을 약탈하여 순안 · 숙천 · 안주 · 영변 · 박천 등 고을의 창고가 차례로 모두 약탈당했다. 이날 임금의 행차가 가산을 떠나는데 군수 심신겸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에는 곡식이 자못 넉넉하고 관청에도 백미가 1천 석이나 있어 이것으로 명나라 구원병을 먹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공이 이곳에 잠깐 동안 머물러 민심을 진정시켜주신다면 고을사람들이 감히 동요하지 못할 것이오나 그렇지 않으면 난동이 일어날 것이오니, 소인 또한 감히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므로 장차 해변을 향하여 피신하려고 합니다” 하였다.
이때 심신겸은 이미 그의 부하들에게 명령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다만 내가 데리고 있는 군관 6명과 도중에서 모은 패잔병 19명은 나와 약속하여 스스로 따르게 했으므로 각기 활과 화살을 가지고 곁에 있어서 심신겸은 이 군사를 믿고 자신을 보호하고자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마 갑자기 떠날 수가 없어 대문에 잠깐 앉아 있으니 해가 벌써 한낮이 지났다. 다시 생각해보니 임금의 명령도 없는데 내 마음대로 머물러 있고 떠나지 않는 것이 도리상 죄스러워 마침내 심신겸과 작별하고 길을 떠났다. 효성령에 올라 가산을 돌아다보니 고을 안이 벌써 요란해지고 있었는데, 심신겸이 창고곡식을 모두 잃어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이튿날 임금의 행차가 정주를 떠나 선천을 향하시는데 나에게 명하여 정주에 머물러 있도록 했다. 그러나 고을 사람들은 이미 사방으로 흩어져 피란하고, 다만 늙은 아전 백학송 등 몇 사람만이 성안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길가에 엎드려 임금의 행차가 성 밖으로 나가시는 것을 전송한 다음 연훈루 아래에 앉아 울고 있었는데, 군관 몇 사람이 좌우 섬돌 아래에 있었으며 도중에 모은 패잔병 19명도 아직 떠나지 않고 길가 버드나무에 말을 매고 둘러앉아 있었다.
저녁 무렵에 남문을 바라보니 몽둥이를 가진 사람들이 밖에서 잇달아 들어와 왼쪽을 향해 가고 있어서, 군관을 시켜 가보게 했더니 창고 아래 모여든 사람들이 벌써 수백 명이나 되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거느린 군사는 수효가 적고 약한데 만약 난민이 더욱 많아져서 그들과 서로 싸우게 되면 제어하기가 어렵겠으므로, 먼저 약한 사람들을 쳐서 놀라 흩어지게 하는 것만 못할 것이라 여겨졌다.
이에 성문을 보니 또 10여 명이 잇달아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급히 군관을 불러 19명 군사를 딸려 보내서, 달려가 잡아오게 하였다. 그 사람들은 이 모양을 바라보고 도주했으나 뒤쫓아 가서 9명을 잡아왔다. 곧 이들의 머리털을 풀어 흩뜨리고 두 손을 뒤로 돌려 합쳐 묶고 벌거벗긴 다음 창고 옆 길가에 조리돌려 보이며 10여 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르면서 “창고를 약탈하는 도적은 사로잡아 죽여서 목을 매어달겠다”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성안 사람들이 이것을 보았으며, 그제야 이미 창고 아래 모여 있던 사람들도 이를 바라보고는 놀라서 모두 서문으로 흩어져 나가버렸다. 이로 인하여 정주의 창고 곡식은 가까스로 보전되었으며, 용천 · 선천 · 철산 등 고을에도 창고를 약탈하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정주 판관 김영일은 무인인데, 평양에서 도주해 돌아와서 자기 처자를 바닷가에 두고 창고 곡식을 훔쳐내어 거기에 보내려 했는데, 내가 이 말을 듣고 범죄 행위를 들추어 책망하기를 “너는 무장의 몸으로 싸움에 지고서도 죽지 않았으니 그 죄가 목을 벨 만한데, 또 감히 관청 곡식을 훔쳐내는가? 이 곡식은 명나라 구원병을 먹일 것이며, 네가 사사로이 먹을 것이 아니다” 하고 곤장 60대를 때렸다.
조금 후에 평양에서 떠난 윤 좌상, 김 원수, 무장 이빈* 등이 모두 정주에 도착했다. 임금께서 정주를 떠나시면서 명령하시기를 “좌상이 오거든 또한 정주에 머물러 있도록 하라” 하셨기에, 윤 좌상이 도착한 후 내가 임금의 명령을 전했으나 윤 좌상은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행재소로 가버렸으며, 나 또한 김명원 · 이빈 등에게 남아서 정주를 지키도록 하고 임금의 거가(車駕)를 따라 용천까지 갔다.
☞ 이빈 : 조선시대의 무신. 선조3년(1570)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회령 부사가 되었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경상 좌병사, 평안 병사를 거쳐 선조26년에는 이일을 대신하여 순변사가 되어 남방으로 내려가 의령에 진을 치고 영남 지방을 지켰다. 선조28년(1595) 상부와의 의견 대립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전란이 평정된 후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퇴했다.
이때 각 고을의 백성들이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적군이 뒤따라올 것이라 여겨 모두 산골 속으로 숨었고, 길가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으며, 강가에 있는 여러 고을 중에서 강계 등의 고을도 모두 이 모양이 되었다. 내가 곽산의 산성 아래에 이르러 보니 길이 두 갈래가 있어 하졸(下卒)을 불러 “이 길이 어느 곳으로 가는 길이냐?” 하고 묻자, 하졸은 “이것은 귀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말을 세우고 종사관 홍종록을 불러 “길가에 있는 창고가 모두 텅 비었으니 비록 명나라 구원병이 오더라도 무엇으로 식량을 공급하겠는가? 이 지방 부근에서는 다만 귀성 한 고을만이 창고 저장이 자못 넉넉한 모양이나, 또한 이속과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도주했다 하니 운반할 계책이 없다. 그러나 그대는 오랫동안 귀성에 있었으니 그곳 사람들이 그대가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비록 산골에 숨었던 사람이라도 반드시 와서 보고 적군의 형세를 듣고자 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대는 이 길로 빨리 귀성에 가서 백성들에게 ‘적군은 평양에 들어가서 아직 나오지 않았고 명나라 구원병은 곧 몰려올 것이니 멀지 않아 나라가 수복될 것인데, 다만 걱정되는 일은 군량이 부족한 것뿐이다. 너희들은 품관이든 아전이든 물을 것 없이 한 지방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군량을 운반해서 군용에 부족하지 않도록 하면 훗날 반드시 후한 상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여라. 이와 같이 한다면 마음과 힘을 합쳐서 군량을 정주 · 가산까지 운반하여 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홍종록은 개연히 응락하고 길을 나누어 떠나갔고, 나는 용천을 향해 떠났다. 홍종록은 기축년 옥사(정여립의 옥사)에 연좌되어 귀성으로 귀양 가 있던 중 임금께서 평양에 오신 후에 비로소 불러들여 사옹정(궁중의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사)에 임명했는데, 사람 된 품이 성실하고 참되어서 나라일을 위하여 자기 한 몸을 잊고 험난한 곳을 사피하지 않았다.
임금의 행차가 의주에 도착했다. 명나라 장수 참장 대모와 유격장군 사유*가 각각 1개 부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던 중, 임반역에 이르러 평양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와서 의주에 머물러 있었으며, 명나라 조정에서는 군사에게 나누어줄 은 2만 냥을 보냈는데 명나라의 관원이 가지고 의주에 도착했다. 이보다 먼저 요동에서는 우리나라에 적변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 명나라 조정에 알렸는데, 명나라 조정 의론이 한결같지 않았으며 심하게는 우리가 적군을 인도하고 있다고 의심하기도 했으나, 오직 병부상서 석성*만은 우리나라를 구원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 사유 : 명나라 장수로 요동총병 조승훈의 휘하에 있던 유격장군이다.
☞ 석성 : 명나라 신종 때의 병부상서로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구원을 요청하자, 석성은 병권을 장악한 사람으로서 조선 구원을 적극 주장하여 제독 이여송을 조선에 파견, 평양을 수복했다. 후에 유격장군 심유경을 시켜 일본과의 강화교섭을 추진했으나, 심유경과 적장 소서행장의 중간 농간으로 강화교섭이 실패하고 정유재란이 발생하여 왜적이 남원을 침범하자, 그 책임을 물어 관직에서 파직되고 마침내 하옥되어 죽었다.
이때 우리나라 사신 신점*이 옥하관에 있었는데, 상서(석성)가 불러들여서 요동에서 적변을 보고하는 문서를 내보이자 신점은 보자마자 소리 내어 울며 일행과 함께 조석으로 임금의 상차에 슬피 우는 것처럼 하여 구원병을 청했다. 상서는 황제에게 아뢰어 2개 부대의 군사를 보내 국왕을 호위하도록 하고 은도 내려주기를 청했다.
☞ 신점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일에 큰 공을 세워 선무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평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신점이 돌아오다가 통주에 도착했을 때 고급사 정곤수*가 뒤이어 들어오자, 상서가 안방으로 불러들여 친히 사정을 물으면서 눈물까지 흘리더라는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잇달아 보내 요동으로 가서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병을 청했으며, 또 중국에 귀부하기를 간청했다. 적군이 이미 평양을 함락하자 그 형세가 마치 높은 곳에서 병을 세워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아서,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압록강까지 쳐들어올 것이라 여겨졌기에 일이 이같이 위급하므로 중국에 귀부하고자 한 것이다.
☞ 정곤수 : 조선시대의 문신. 선조9년(1576) 별시문과에 급제했고, 선조16년(1583)에 강원도 관찰사,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로서 의주로 왕을 호종했다. 지돈영부사로 청병진주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우리의 위급한 사정을 울면서 호소하여 구원병 요청에 성공했다. 선조30년(1597) 영중추부사로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대명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뒤에 호성공신 일등에 책정되고 서천부원군으로 추록되었다.
다행히 적군이 평양에 들어와서는 수개월이 지나도록 성안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순안 · 영유 등 평양에서 지척에 있는 고을조차 침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심이 차츰 안정되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명나라 구원병을 맞아들여 마침내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하늘의 도움이며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
7월에 요동의 부총병 조승훈*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했다. 이 기별이 군대보다 먼저 이르렀는데, 이때 나는 치질을 앓아 고통이 심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임금께서 좌상(윤두수)에게 구원병이 오는 길에 나가서 군량을 준비하도록 하셨으므로, 나는 종사관 신경진을 시켜 임금께 글을 올려 아뢰기를 “임금 계신 곳에 현직 대신으로서는 다만 윤두수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오니 그를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신이 이미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는 명령을 받았사오니 비록 병든 몸이오나 제 스스로 힘써 나가보겠습니다” 했더니 임금께서 허락하셨다.
☞ 조승훈 : 명나라 신종 때의 장수로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요동 부총병으로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구원하려고 와서 평양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뒤에 제독 이여송을 따라 다시 조선에 와서 평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초 7일에 병든 몸을 억지로 견디어 임금 계신 곳에 나아가서 하직하니, 임금께서 불러 보시므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가서 아뢰기를 “명나라 군사가 지나는 길에서, 소곶에서부터 남쪽으로 정주 · 가산에 이르기까지는 5천 명이 지날 동안에 하루 이틀 먹을 것은 준비될 수 있으나, 안주 · 숙천 · 순안 세 고을에는 양식이 전혀 없으니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날 때는 먼저 사흘 동안 먹을 양식을 가지고서 안주 이남의 식량에 대비해야 합니다. 군사가 평양에 이르러서 곧바로 수복하게 되면 성안에 곡식이 많으므로 능히 보급될 수 있을 것이며, 비록 성을 포위한 것이 여러 날이 되더라도 평양 서쪽 세 고을(강서 · 용강 · 함종)의 곡식을 힘을 다하여 운반해 전선(前線)에 수송하게 되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세한 사정은 이곳에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명나라 장수와 서로 의논하여 융통성 있게 계획하고 편의한 대로 일을 시행하도록 하시옵소서” 하니, 임금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내가 곧 나와서 떠나려 하자 위에서 웅담과 납약(섣달에 내의원에서 만든 청심원 같은 약)을 내려주셨다. 내의원복 용운이란 사람은 성문 밖 5리까지 나와 나를 전송하면서 통곡했는데, 내가 전문령 고개를 올랐을 때까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날 저녁에 내가 소곶역에 이르러 보니 이속과 군졸들이 도주해 흩어져서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다. 군관들을 시켜 촌락에 가서 수색했더니 몇 사람을 데리고 왔다. 내가 타이르기를 “나라에서 평일에 너희들을 길러온 것은 지금 같은 때에 쓰고자 한 것인데, 어찌 차마 도망칠 수가 있는가. 더구나 명나라 군사가 방금 이르러 나라 일이 급하니 지금이야말로 너희들이 힘을 다하여 공을 세워야 할 시기다” 하고, 이내 공책 한 권을 꺼내어 그곳에 와 있는 사람의 성명을 먼저 써서 그들에게 보이면서 “훗날 이것으로 공로의 등급을 사정하여 임금께 아뢰어 상을 줄 것인데, 만일 이 기록에 기재되지 않은 사람은 난리가 평정된 뒤에 일일이 조사해서 벌을 줄 것이니 한 사람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더니, 조금 후에 사람들이 잇달아 와서 “소인들은 볼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간 것이오니 어찌 감히 신역(나라에서 성정에게 부과하는 부역이나 노역)을 피하겠습니까 그 책에 이름을 기재하여 주십시오” 라고 했다.
나는 인심을 능히 수습할 수 있음을 알고 곧바로 여러 곳에 공문을 전하여,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고공책(공로를 고사하는 책자)을 비치하고 공로가 많고 적은 것을 기록해서 서로 알려 시행토록 했더니, 그제야 이 영(令)을 들은 사람들이 다투어 나와 시초도 운반하고 집도 건설하며 솥과 가마도 걸어서 며칠 동안에 모든 일이 점차 이루어졌다. 나는 난리 때의 백성은 급하게 사역(使役)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서 오로지 성심껏 타이르며 한 사람도 매질하지 않았다.
정주에 도착하니 홍종록이 귀성 사람들을 모두 동원하여 말먹이 콩과 좁쌀을 운반해서 정주 · 가산으로 옮겨놓은 것이 이미 2천여 석이나 되었다. 나는 여전히 안주에 구원병이 도착한 이후에 먹일 양식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충청도 아산 창고에 있는 세미(稅米) 합계 1천 2백 석이 배에 실려 장차 행재소로 가려고 정주 입암에 이르러 정박 중이었다. 나는 매우 기뻐서 곧바로 임금께 아뢰기를 “먼 곳에 있는 곡식이 때마침 약속한 듯이 도착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라의 중흥할 운수를 도와주신 듯합니다. 청컨대 이 곡식도 모두 다 가져다 군량미에 보충하도록 하여주시옵소서” 라고 한 후에, 수문장 강사웅에게 입암으로 달려가서 쌀 2백 석은 정주로, 2백 석은 가산으로, 8백 석은 안주로 나누어 운반하도록 했는데, 안주만은 적군 있는 곳과 가까워서 잠시 배를 물 가운데 정박시켜 기다리게 했다.
선사포 첨사 장우성은 대정강 부교를 만들고, 노강 첨사 민계중은 청천강 부교를 만들어, 명나라 군사들이 건너갈 길을 준비했으며, 나는 앞질러 안주로 가서 군량 보급을 보살폈다. 이때 적군은 평양에 들어가서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는데, 순찰사 이원익은 병사 이빈과 함께 순안에 머무르고 도원수 김명원은 숙천에 있었으며 나는 안주에 있었다.
19일, 조 총병(조승훈)의 군사가 평양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퇴각했고, 사 유격(사유)이 전사했다.
이보다 앞서 조승훈이 의주에 도착하자 사유는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다. 조승훈은 원래 요좌(요동)의 용맹스러운 장수로 여러 번 북쪽 오랑캐(여진족)와 싸워 공을 세웠으므로, 이번 길에도 왜병을 반드시 물리칠 것이라 여긴 것이다. 가산에 도착하여 우리 군사들에게 “평양에 있는 왜적이 벌써 도망하지는 않았는가?” 하고 물었더니, 군사가 대답하기를 “아직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조승훈은 술잔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빌기를 “적군이 아직 그대로 있다 하니 이것은 반드시 하늘이 나에게 큰 공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이날(19일) 순안에서 밤 삼경에 군사를 출발시켜 나아가 평양을 쳤는데, 때마침 큰 비가 와서 성 위에는 수비하는 적군이 없었으므로 명나라 군사가 칠성문으로 들어갔다. 성안은 길이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이 많아 말이 제대로 달릴 수 없었는데, 적병이 험준한 곳에 의지해서 조총을 난사하자 사 유격이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군사와 말도 많이 죽어 조승훈은 결국 군사를 물리고 말았다. 적병이 급히 추격하지는 않았으나, 뒤에 있던 군사들 중에 진흙에 빠져 몸을 빼내지 못한 사람은 모두 적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조승훈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 · 숙천을 지나 밤중에 안주에 이르러 성 밖에서 말을 세우고, 역관 박의검을 불러 “우리 군사가 오늘 싸움에 적병을 많이 죽이기는 했으나, 불행히 사 유격이 상처를 입고 죽었으며 천시(날씨) 또한 좋지 않아 큰 비가 내려 진흙투성이가 되어 적병을 섬멸하지 못했으니, 군사를 더 보충하여 다시 올 것이다. 너희 재상(유성룡)에게 동요하지 말도록 이르고 부교도 철거하지 말도록 하여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말을 달려 두 강(청천강 · 대정강)을 건너고 나서 군사를 공강정에 주둔시켰다.
조승훈은 싸움에 패하여 몹시 겁이 났으므로, 적병이 뒤따라올까 두려워 앞에서 두 강으로 추격을 막으려고 이같이 매우 서두른 것이다. 나는 종사관 신경진을 보내 조승훈을 위로하도록 하고 또 양식과 음식물을 실어 보냈다. 조승훈이 공강정에 머무른 지 이틀 동안에 연이어 밤낮으로 큰 비가 내렸는데, 군사들은 들 가운데인 한데서 거처했으므로 옷과 갑옷이 다 젖어 모두 조승훈을 원망했으며, 얼마 후에 요동으로 돌아갔다. 나는 인심이 동요할까 염려되어 임금께 아뢰어 그대로 안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뒤이어 올 명나라 군대가 이르기를 기다리도록 해달라고 계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