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萬曆=명나라 신종의 연호) 병술년(선조19년, 1586) 무렵에 일본국 사신 귤강광(다치바나 야스히로)이 일본의 국왕* 평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

 

☞ 일본 막부의 장군을 지칭하는 것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창설한 후 모든 국정은 막부의 장군이 처결하여 사실상 국왕 구실을 했다. 실정막부(무로마치 막부)의 장군인 족리의만(아시카가 요시마츠)이 명나라와 교류할 때 명나라 국서에 “너희 일본 국왕 원도의” 라고 지칭한 데 대하여, 족리의만 자신도 이것을 시인하고 답서를 보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대개 명나라의 예를 따라 막부 장군을 일본 국왕으로 지칭한 것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풍신수길을 말한다. 미천한 신분으로 일찍이 군인이 되어 두각을 나타냈고 후에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어 큰 전공을 세웠다. 신장이 부하에게 살해되자 그 뒤를 이어 권력을 쥐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으며, 마침내 대륙정복의 야망을 품고 조선을 침략했다.

 

당초에 일본 국왕 원씨(실정막부의 장군 족리의만)가 홍무(명나라 태조의 연호로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 공민왕 17년에 해당) 초기에 나라를 세워 우리나라와 인교를 수호한 지 200여 년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 경조(慶弔)의 예절을 치렀으니, 신숙주가 서장관(외국에 보내는 사신에게 딸려 보내는 임시 벼슬)으로 왕래한 것이 곧 그 한 예다. 훗날 신숙주*가 죽을 때 성종께서 “할 말이 있는가?” 라고 물으시니 신숙주가 이렇게 대답했다.

 

“원컨대 일본과 실화(失和)하지 마옵소서.”

 

성종께서 그 말에 감동하여 부제학 이형원과 서장관 김흔을 보내 화목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들이 대마도에 이르렀을 때 심한 풍랑에 병을 얻었다는 서찰을 올려 그 상황을 보고하자 성종은 도주(島主)에게 서장(書狀)과 폐백만 전하고 돌아오도록 명했다. 이후로는 다시 사신을 보내지 않았고, 그 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만 예절을 갖추어 접대했다.

 

☞ 신숙주 :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 본관은 고영이다. 세종 21년 친시문과에 급제했고, 세종 23년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25년(1443)에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시명을 떨치고, 귀국 도중 대마도에 들러 계해약조를 체결했다. 후에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이 되고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이다.

 

이즈음 평수길이 원씨를 대신하여 국왕이 되었다. 어떤 이는 평수길이란 자에 대해 “원래 중국 사람인데 왜국에 흘러 들어와서 나무 장사로 생업을 삼고 살았다. 어느 날 국왕이 길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그 사람 된 품을 이상히 여겨 불러서 군대에 편입시켰더니, 용력(勇力)이 있고 전투를 잘하여 전공을 쌓아서 대관(大官)에까지 이르고, 이내 권력을 잡게 되어 마침내 원씨의 자리를 빼앗아 왕이 되었다.” 고 말했다. 또 어떤 이는 “원씨가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당하니 평수길이 또 그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았다.” 라고도 했다.

 

그는 무력으로 여러 섬을 평정하여 일본 국내의 66주를 통일한 뒤 마침내 외국을 침략할 뜻을 품었다. 그래서 “우리 사신은 자주 조선에 가는데, 조선 사신은 오지 않으니 이것은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며, 귤강광을 우리나라로 보내 통신사(通信使=외국에 보내는 사신)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는데, 그 서신의 언사가 대단히 거만해서 “이제 천하가 짐의 한 줌안에 들어올 것이다.” 라는 말까지 있었다.

 

원씨가 망한 지는 이미 10여 년이 되었는데, 여러 섬의 왜인들이 해마다 우리나라를 왕래했으나, 제 나라의 엄중한 금령(禁令)을 두려워하여 이러한 사실을 외국에 누설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귤강광은 이때 나이 50세가 넘었는데 용모가 크고 수염과 머리털은 반백이었다. 지나오는 관(館)과 역(驛)마다 반드시 상실(上室)에 거처하고 행동이 거만하여, 보통 때의 왜국 사신과는 아주 다르니, 보는 사람이 자못 괴상하게 여겼다. 예로부터의 전례에 따르면 연도(沿道)의 군, 읍에서 왜국의 사신을 맞게 되면, 그곳의 민정(民丁)을 동원하여 창을 잡고 길가에 늘어서서 군대의 위엄을 보였는데, 이때에 귤강광이 인동 고을을 지나다가, 창 잡은 사람을 흘겨보고는 조소(嘲笑)하며 “너희들이 가진 창의 자루가 너무 짧구나.” 라고 하였다.

 

상주에 도착하여 목사 송응형*이 그를 접대했을 때 기생의 춤과 음악이 시작되었는데, 귤강광이 늙은 송응형을 보고 통역을 시켜 말하기를 “늙은 이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전쟁 속에서 살았으니 이렇게 수염과 머리털이 다 희어졌지만, 사군(송응형)께서는 노래와 기생 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지냈는데도 오히려 머리털이 희게 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며 송응형을 풍자했다.

 

☞ 송응형 :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공원, 본관은 은진이다. 선조 4년에 음보로 예빈시별제가 되고, 선조25년에 상주 목사로 재직하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곡산에서 죽었다.

 

귤강광이 서울에 도착하니 예조판서가 잔치를 베풀어 대접했는데, 술이 얼큰히 취하자 귤강광이 자리 위에 후추를 흩어 놓으니, 기생과 악공들이 서로 다투어 줍느라 소란스러워졌다. 귤강광이 숙소에 돌아와서 탄식하며 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망할 것이다.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했다.

 

귤강광이 돌아갈 때 우리 조정에서는 다만 그 서장에만 답하고 수로(水路)를 모른다는 핑계로 사신을 보내지 않았는데, 귤강광이 돌아가서 사실대로 보고하니, 평수길이 크게 노하여 귤강광과 그 일족을 다 죽여버렸다. 귤강광은 형 귤강년과 함께 원씨 때부터 우리나라에 와서 조공(朝貢)하고 직명(職名)까지 받았으므로, 그의 보고내용이 우리나라를 편든 까닭에 평수길에게 살해당한 것이라 한다.

 

일본국 사신 평의지*가 우리나라에 왔다. 평수길이 이미 귤강광을 죽이고 나서 평의지를 시켜 통신사를 보내주도록 다시 요청했다. 평의지는 그 나라 군권을 주관하는 대장 평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데, 평수길의 복심(腹心)이 되었다.

 

☞ 평의지 : 종의지를 말한다. 대마도주로서 풍신수길의 명을 받아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고, 훗날 임진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같이 선봉장으로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다.

 

☞ 고니시 유키나가 : 소서행장을 말한다. 풍신수길의 부하 명장으로 임진란 때 가등청정과 함께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선봉장이다. 7년 전쟁의 마지막에 순천의 왜고대에 웅거했으며, 이순신의 노량해전에서의 전몰을 기회로 본국으로 도주했다.

 

대마도 태수 종성장(대마도주)은 대대로 대마도를 지키면서 우리나라를 섬겨왔는데, 이때 평수길이 종씨를 내쫓고 평의지가 대마도의 정무(政務)를 대신 주관하도록 했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수로에 익숙지 못하다는 핑계로 통신(通信)하기를 거절했으므로 평수길이 거짓으로 “평의지는 바로 대마도주의 아들이므로 바닷길에 익숙하니 그와 함께 오시오.” 하고 하여 우리나라가 거절할 구실을 찾지 못하도록 했다. 또 우리나라가 방비하고 있는지 아닌지 엿보기 위해서, 평조신*과 중 현소* 등을 같이 보냈다.

 

☞ 평조신 : 류천조신을 말한다. 현소와 함께 종의지를 따라 우리나라로 와서 국정을 정탐했다.

 

☞ 현소 : 일본 박다 성복사의 중. 대마도주 종의지를 따라 여러 번 우리나라에 와서 국정을 정탐해 갔으며, 임진란 때는 군중에 섞여 와서 강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번번이 참여했고, 전쟁이 끝난 뒤인 선조 37년에 일본의 덕천씨가 강화를 청했을 때도 참여했다.

 

평의지는 젊고 날래며 또한 사나워서 다른 왜인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그의 앞에서는 엎드려 무릎으로 기면서 감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평의지가 동평관(일본 사신이 와서 머무르던 객관)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으면서, 기어코 우리 사신을 데리고 함께 가려고 했지만, 우리 조정의 의론은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해 전에 왜적이 전라도 손죽도에 쳐들어와서 변장(변방의 일정한 지역의 국경수비를 맡은 장수. 첨사 · 만호 · 권관 등을 일컫는다) 이태원을 죽였는데, 그때 생포된 왜적이 “조선의 변방 백성 사을배동이란 자의 무리들이 나라를 배반하고 우리나라(일본)로 들어와서 우리를 인도하여 함께 쳐들어갔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우리 조정에서는 분하게 여겼다. 이때 사람들이 “마땅히 일본으로 하여금 반민(우리나라를 배반하고 일본으로 들어간 백성)을 돌려보내도록 한 후에 비로소 통신에 대하여 의논하도록 해서, 그들이 성심(誠心)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라고 했으므로, 관객(동평관의 접대관)을 시켜 이 뜻을 넌지시 전했다.

 

그러자 평의지는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오” 하고는, 곧바로 평조신을 보내어 본국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보고하도록 하니, 서너 달이 채 못 되어 왜국에 있던 우리나라 백성 10여 명을 모두 잡아와서 바쳤다.

 

임금께서 인정전(창덕궁의 정전)으로 나가 군대의 위세를 크게 벌리고 나서 사을배동 등을 묶어 뜰 안으로 끌어들여, 신문한 다음 끌어내어 성 밖에서 베어 죽였다. 평의지에게는 내구마(임금의 수레와 말 등을 관장하는 내구, 곧 내사복시에서 기르는 마필) 한 필을 상으로 내렸으며, 그런 뒤에 왜국 사신 일행을 불러 보시고 잔치를 베풀게 하시니, 평의지와 현소 등이 모두 대궐 안에 들어와서 차례대로 왕에게 술잔을 올렸다. 그때 나(유성룡)는 예조판서로서 또한 왜국사신을 예조 안에서 대접하고 있었는데, 통신에 대한 의론은 오랫동안 결정되지 못했다. 내가 대제학(홍문관 · 예문관의 정2품 벼슬)이 되어서 국서(國書)를 쓰려고 할 때 임금에게 글을 올려 “이 일은 빨리 의론을 결정하시어,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라고 청했고, 이튿날 조강에 지사 변협(조선시대 무장) 등도 또한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보답하도록 하고 또 그들의 동정도 살펴보고 오는 것이 잘못된 계책은 아닐 것입니다” 라고 아뢰어서 그제야 비로소 조정의 의론이 결정되었다.

 

어명으로 사신 보낼 만한 사람을 가리게 했는데, 대신(大臣)이 첨지 황윤길*과 사성(성균관의 종삼품직) 김성일*을 추천했으므로 이들을 상사와 부사로 삼고, 전적(성균관의 정육품직) 허성을 서장관으로 삼아 경인년(선조23년, 1590) 3월에 마침내 평의지 등과 함께 일본으로 떠나게 했다. 그때 평의지가 공작 두 마리와 조총(화승총의 옛말) · 창 · 칼 등을 바치자, 임금께서 명하여 공작은 남양의 해도에 날려보내도록 하고 조총은 군기시에 두게 했으니 우리나라에서 조총을 가진 것이 이때가 처음이다.

 

☞ 황윤길 :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길재, 호는 우송당, 본관은 장수다. 명종16년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선조23년에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정세를 보고 이듬해에 귀국하여, 장차 일본이 내침할 거라고 보고했다.

 

☞ 김성일 :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사순, 호는 학봉, 본관은 의성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선조 원년(1568)에 증광문과에 급제했고, 장영 · 부제학을 역임했다. 선조23년에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임진란이 발발하자 선조가 김성일의 정세보고가 성실치 못한 죄를 국문하려 했으나 좌의정 유성룡의 구해로 석방되어 경상우도 초유사가 되고 의병초모에 진력했다. 이내 순찰사가 되어 국사에 진력하다가 선조26년에 진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신묘년(선조24년, 1591) 봄에 통신사 황윤길, 김성일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왜인 평조신과 현소도 함께 왔다. 처음에 황윤길 등이 지난해 4월 29일에 부산포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에 이르러 한 달 동안 머물고, 또 대마도에서 수로로 40여 리를 가서 일기도에 이른 후 박다주 · 장문주 · 낭고야(명호옥 북구주에 있는 지명)를 지나7월 22일에 비로소 그 나라 국도(國都=일본의 수도인 경도)에 이르렀으니, 왜인이 고의로 길을 멀리 돌게 하고 곳곳에서 머물렀거 때문에 여러 달 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들이 대마도에 있을 때 평의지가 사신을 청하여 절간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사신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데, 평의지가 교자(轎子)를 탄 채로 문안으로 들어와서 섬돌에 이르러서야 내렸다. 김성일이 노하여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번신(藩臣=번병의 신하라는 뜻)이다. 사신인 우리가 왕명을 받들고 왔는데, 어찌 감히 이토록 업신여기느냐. 나는 이 잔치를 받을 수 없다” 하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자 허성 등도 잇따라 나와버렸다. 그러자 평의지는 그 허물을 교군에게 돌리고 그를 죽여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와서 사죄했다. 그 뒤로는 왜인들이 김성일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예절을 극진히 하여 대접했고,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말에서 내렸다.

 

그 국도에 이르니 큰 절에 유숙케 했다. 이때 마침 평수길이 동산도에 출전 중이어서 서너 달 동안이나 그냥 머물러 있었으며, 평수길이 돌아온 후에도 또한 궁실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곧바로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므로, 전후 다섯 달 동안을 숙소에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국명(나라의 명령)을 전달하게 되었다.

 

그 나라는 그들의 천황을 높여 평수길 이하 모든 관원이 신하의 예로써 섬겼다. 평수길은 자기 나라에서 왕이라 일컫지 않고 다만 관백(關白)이라 부르거나 박육후(한나라 대장군 곽광에게 봉한 작명)라고 부르니, 관백*이란 옛날 곽광*이 모든 일을 자기에게 먼저 관백하도록 했다는 말을 따서 칭호한 것이다.

 

☞ 관백 : 일본의 옛 관명으로 태정대신 위에 있다. 885년에 등원기경 때부터 시작되었다가 명치유신 때 폐지된 제도다.

 

☞ 곽광 : 한대의 대신. 소제가 8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곽광이 대사마, 대장군의 직책으로 무제의 유조를 받들어 유주를 보필했는데, 이때 모든 국정을 그가 먼저 처결했다.

 

그들이 우리 사신을 접대할 때 교자를 타고 그들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으며, 날라리와 피리를 불고 앞에서 인도하여 당에 올라와서야 예를 행하게 했다.

 

평수길은 용모가 작고 못생겼으며 낯빛이 검어 남다른 위의는 없었으나, 다만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사람을 쏘아보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삼중으로 자리를 꾸미고 남쪽을 향하여 마룻바닥에 앉았는데 사모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었으며, 신하 몇 사람이 옆에 벌려 앉아서 우리 사신을 인도하여 자리에 앉도록 했다. 자리에는 잔치용 기구는 갖추어 놓지 않았고 앞에 탁자 하나를 놓았다. 탁자 한가운데는 떡 한 그릇을 놓았고, 질그릇 사발에 술을 부어 돌리는데 술은 탁주였으며, 그 예절이 매우 간략하여 서너 번 술잔을 돌리고는 그만두었으니, 절하고 읍하며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절차가 없었다.

 

잠시 후에 평수길이 갑자기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편복(평상시에 입는 옷) 차림으로 안에서 어린애를 안고 나와 당 안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에 쳐다보니 바로 평수길이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엎드려 있을 따름이었다. 잠깐 뒤에 평수길이 난간으로 나와 앉더니, 우리나라 악공을 불러 여러 가지 음악을 성대히 연주토록 하여 듣고 있다가 안고 있던 어린애가 옷에 오줌을 싸자 평수길이 웃으면서 시자를 부르자 한 왜인 여자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다. 그는 어린애를 주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모두 제멋대로이고 매우 자만하여 마치 옆에 사람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우리 사신이 하직하고 물러나온 후로는 평수길을 다시 볼 수 없었는데 다만 상사와 부사에게는 은 4백 냥을 주었고, 서장관과 통사(통역) 이하의 수행원에게까지도 은을 차등을 두고 주었다.

 

우리 사신이 돌아가려고 하자, 답서를 즉시 써주지 않으면서 먼저 가라고만 하기에 김성일이 “내가 사신이 되어서 국서를 받들고 왔는데 만약 답서를 없다면, 이것을 국명을 풀밭에 버리는 것과 같다” 라고 했다.

 

황윤길은 더 머물러 있게 할까 두려워, 서둘러 출발하여 계빈(지금의 대판부 계시)으로 와서 기다리니 답서가 그제야 왔으나, 글 내용이 거칠고 거만하여 우리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김성일은 이것을 받지 않고 몇 차례나 개정을 요청한 뒤에야 받아 가지고 떠났다. 일행이 지나는 곳마다 여러 왜인들이 물건을 선사했지만, 김성일은 이를 모두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황윤길이 부산으로 돌아오자 일본의 정세를 시급히 보고하며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서울에 와서 이윽고 복명(명령을 받고 일을 처리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하는 것)할 때, 임금께서 불러 보시고 물으시니 황윤길은 그전의 말대로 대답했고, 김성일은 “신은 그러한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고는, 이어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을 옳지 못합니다” 라고 했다. 이에 의론하는 사람들이 어떤 이는 황윤길의 말을 찬동했고, 어떤 이는 김성일의 말을 찬동했다.

 

내가 김성일에게 “그대의 말은 황사(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에 병화가 있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묻자, “나 역시 어찌 왜적이 끝내 동병(動兵)치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겠는가마는,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놀라 당황할 것이므로 이를 해명했을 뿐입니다” 라고 했다.

 

이때 가져온 왜의 국서에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에 뛰어들어 가겠다” 라는 말이 있었다. 내가 “마땅히 사유를 갖추어서 곧바로 명나라 조정에 보고해야 될 것입니다” 라고 하자, 수상(영의정 이산해)은“명나라 조정에서 우리가 왜국과 사사로이 통했다고 책망할까 하오니, 알리는 것이 숨겨두는 것만 못할 것 같습니다” 라고 했다.

 

나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로 이웃 나라와 왕래하는 것은 국가로서 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일찍이 성화(명나라 헌종의 연호) 무렵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통해 중국에 조공하기를 청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곧바로 사실대로 명나라에 보고하니, 명나라에서는 조칙을 내려 회유했습니다. 전날 일도 이미 그러하셨으니 다만 오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실을 숨기고 알리지 않는다면 대의에도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적이 만약 실제로 침범할 계획이 있는데 이 사실이 다른 곳을 통해 알려지게 된다면, 명나라에서는 도리어 우리나라가 왜국과 공모하여 숨긴다고 의심할 것이며, 그리 되면 그 죄는 통신했다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조정에서 내 의견에 찬동하는 사람이 많아, 마침내 김응남* 등을 보내 사실을 서둘러 알리도록 했다.

 

☞ 김응남 : 조선시대 명종 원년부터 선조 31년 때의 문신으로 자는 중숙, 호는 두암, 본관은 원주다. 선조 원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했고, 대사헌,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선조24년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일본의 정세를 보고했고, 임진란이 발발하자 병조판서 부체찰사에 임명되어 왕을 모시고 평안도로 피란했다가 환도 후에 좌의정이 되었다. 선조30년 정유재란 때 접무사로 영남에 내려갔다가 풍기에서 병을 얻어 사직했다. 호성공신 이등에 책정되고 원성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이때 복건성 사람 허의후, 진신 등이 왜국에 잡혀 있었는데 이미 왜국의 이러한 정세를 비밀리에 본국에 보고했으며, 유구국(일본 구주의 남쪽, 대만의 동북쪽에 위치한 나라) 세자 상녕도 잇따라 사신을 명나라로 보내 이 소식을 보고했는데도, 유독 우리나라 사신만 명나라에 가지 않았으므로 명나라 조정에서는 우리가 왜국과 내통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하여 의론이 떠들썩했다. 각로(재상) 허국이 그전에 사신으로 우리나라를 다녀간 일이 있어 홀로 두둔하여 “조선은 성심으로 우리나라를 섬기고 있으니 반드시 왜국과 함께 배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잠깐 동안 기다려봅시다” 라고 했다.

 

얼마 후에 김응남 등이 주문(奏文)을 가지고 도착하니 허공(허국)이 크게 기뻐했고 명나라 조정의 의심도 그제야 풀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