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빠졌을 때,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지킨 구국의 영웅은 누구인가? 만약 그 때에 그가 없었다면 먼 훗날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럼으로 우리에게 그는 영웅이며, 신화이다.” - 신채호 선생.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세계 4대 해전
☞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해전
☞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왜군을 괴멸시킨 이순신(李舜臣) 제독의 한산대첩(閑山大捷)
☞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우리 민족은 훌륭한 역사적 위인을 많이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교육적 차원의 연구나 역사의식의 결여, 스스로를 패배한 민족으로 보는 비관론과 역사에 대한 홍보부족으로 대부분이 사장되어 버렸다. 헌데 유독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한 명의 해군제독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영국, 미국, 스페인 등의 해군강국들 사이에서 거의 신화적인 인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 무수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앞세워 좌초위기에 빠졌던 조선을 구한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 - 1598)이다.
1905년 막강한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격침시키며 세계를 놀라게 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하여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당시 승리에 취한 일본인들은 도고를 극찬하면서 영국에서 신격화되는 넬슨제독을 거론하며 그를 추켜세웠다.
“당신은 실로 영국의 넬슨과 견줄만 합니다!”
“넬슨이 위대하지만 그는 충분한 전력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나는 불리한 위치에서 적을 무찔렀습니다. 누가 더 위대한 가를 따지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건데 내가 이룬 업적이 더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고 자부합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나섰다.
“그렇다면 조선의 장군인 이순신은 어떻소?”
“그는 나의 스승이오. 나는 이순신에 비한다면 일개 하사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오늘 내가 이끌었던 함대가 이순신 제독에게 주어졌다면 그는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입니다. 나를 그에게 비교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모독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넬슨을 최고라 칭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서양인들의 시각입니다. 마땅히 군신으로 불릴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이순신 제독 뿐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해군전략가인 G.A. 발라드 중장은 세계의 해전사를 담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순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세계의 해전 역사에서 우수한 제독은 무수히 출현했지만 동양의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난 이 사람의 전공에 견줄만한 사람은 감히 단언하건데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조국에서 충무공으로 전해지는 이순신은 놀랍게도 7년의 전쟁기간동안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불패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가 치룬 전쟁은 모두가 적이었던 일본군에 비해 초라할 정도의 왜소한 세력이었으며 정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외로운 승리였다는 점이다. 이는 실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러한 인물이 세계사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나는 그를 가장 위대한 해군제독이라 생각한다.”
권력의 폐단과 민중의 시름, 잦은 쿠데타 등으로 얼룩진 조선 역사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하면서 민족의식을 깍기위한 일환으로 축소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진실로 크게 자랑스러워할 만한 왕조도 되지 못한다. 중국에 굽실거리고 툭하면 파당과 내분, 권좌에 대한 욕심으로 암살을 자행했던 조선이지만 두 사람의 역사적 위인은 우리 한국인의 가슴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성군의 표상으로 남아있는 세종대왕과 거북선으로 유명한 이순신 장군이다.
아버지인 태종의 철권으로 인해 다소 손쉬운 정치를 했다는 학설이 주장되는 지금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분이 남긴 업적에 대한 폄하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세종대왕이 남긴 업적 가운데 하나인 한글이라는 단 하나의 문화유산 만으로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한 왕임에 분명하다. 그가 밝은 곳에서 백성을 위하는 영웅이었다면 반대로 어두운 곳에서 시련을 극복하면서 민중을 구한 반대편의 영웅은 이순신이다. 군인의 신분으로 가장 치욕적이라는 백의종군을 두 번이나 하면서도 그는 충과 효를 잊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완수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7년이 지날 동안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인간적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전권을 일관하여 반복되고 있는 듯한 세가지 모티브가 떠오른다. 첫째는 출중한 무장(武將)이 간결하게 기록한 엄격한 진중(陣中) 생활의 <루틴>(일상 과정), 둘째는 다정다감한 인간이 토로하는 회포와 가족애, 특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 그리고 셋째는 임란 개전초부터 충무공을 일종의 <강박 관념>처럼 괴롭혀 온 문제의 인물, 경상좌수사 원균의 존재가 곧 그것이다. 이 원균이 이순신을 무고하여 죽음으로 몰고가는 줄거리는 <셰익스피어적 스케일>을 갖는 일대 음모극이다. 그 모함의 덫에 걸린 이순신은 한산대첩의 영웅에서 하루 아침에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등 얼토당토 아니한 죄명으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처럼 "비극적 무죄" 속에서 죽어가려는 그를 가까스로 구해낸 사람이 우의정 정탁(鄭琢)이다.
왜구의 재침이 임박한 정유년(1597년) 4월초 1일 “옥문 밖으로 나왔다.”는 말로 반년만에 다시 계속된 《난중일기》는 “울적한 마음 한층 이기기 어렵다.”고 적고 있다.
관직을 삭탈당하고 풀려난 이순신은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도원수 밑에서 계급없는 일개 병사의 신분으로 백의 종군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이미 그의 나이 42세 때 녹둔도 사건으로 백의 종군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백의 종군을 하는 충무공 앞에는 보다 더 가슴 쓰라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음(訃音)이 그것이었다.
출옥한 지 열흘째 되는 4월11일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에 꿈이 몹시 산란하여 마음이 매우 불안하다.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여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종을 보내서 어머님의 안후를 알아 오게 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4월 13일...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뛰며 뒹구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
본시 《난중일기》는 그 첫 장부터 자나깨나 극진하게 어머니를 생각하는 이순신의 효심이 도처에서 독자들의 가슴을 울린다. 예컨대, 계사년 6월 12일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다. 흰 머리털이 싫어서가 아니라 다만 위로 늙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갑오년 1월초 1일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 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동 12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으로 탄식하지는 아니하셨다.” 충무공의 어머니다운 현부인의 모습이 역력하다.
그 어머니가 아들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근심으로 애를 태우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난중일기는 이때부터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이순신의 내면을 들춰내 보여 주고 있다.
“마음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 길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정유 4월 16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같은 사정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은 것만같지 못하구나…” (정유 4월 19일)
이해 7월 이순신을 모함하여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던 원균이 왜군의 유인 전술에 빠져 거제 앞바다에서 전멸됨으로써 일찍이 이충무공이 힘써 길러온 무적 함대는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무능하고 어리석은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한다.
충무공이 붙잡혀가면서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할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비축해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약 1만석이 있었으며 화약은 4천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 말고도 3백 자루나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옥에서 풀려나 다시 통제사가 되어 내려온 이순신에게는 모든 것이 소실되어버리고 고작 군사 1백20인과 병선 12척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때의 충무공 모습을 생각하면 코카서스산의 독수리에게 가슴을 갉아먹힌 프로메테우스처럼 “신화적 스케일”을 갖는 비극의 주인공을 연상케 한다.
정유년 9월, 충무공은 이 12척의 전선으로 1백30여 척이 몰려든 왜군과 싸워 기적과도 같은 명량대첩(鳴梁大捷)의 전과를 거두게 된다. 이 해전 전야의 난중일기는 특히 주목을 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말했다. 예로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려고 도망하면 죽을 것이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고 엄격히 약속하였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하였다.” (정유년 9월 15일)
그 뒤 충무공이 장렬한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으나 난중일기에는 물론 그 기록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정인보는 일찍이 ‘혼자서 전 민족을 구해낸’ 충무공에 대한 보공(報功)의 전(典)이 너무도 허무하여 무덤 앞 신도비(神道碑) 하나마나 수삼대(數三代)를 지나서야 겨우 서게 되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정조대왕이 이순신 신도비명을 쓴 것은 1794년, 충무공 사후 2백년이 다 되어서이다. 왕명에 의해 《이충무공 전서》14권 8책의 활자본이 간행된 것도 1795년의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