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패의 해전기록
1597년 2월 6일에 이순신을 잡아오라는 임금의 밀명이 내려지고, 이순신은 2월 26일에 붙잡혀서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에 옥에 갇히고, 3월 중순에 혹독한 국문을 당하고, 3월 13일에는 선조가 이순신을 마땅히 죽여야 한다는 취지를 말한 후 신하들에게 그에게 내릴 형량을 의논해서 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여기에서는 ‘청정을 바다에서 맞아 쳐 죽이라’ 는 요시라의 반간계(反間計)가 성공하는 과정을 정리해 본다.
1월 11일. 김응서를 만난 요시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 침략군 제1진의 지휘관으로 조선에 온 소서행장은 조선과 명나라에 대하여 강화(講和)를 성사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제2진의 지휘관 가등청정은 강화 자체를 반대하고 있으므로, 청정을 죽여 없애야만 강화가 성사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청정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으니, 조선 수군이 바다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청정이 일본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올 때 불시에 들이치면 틀림없이 그를 죽일 수 있다.”
소서행장은 이와 같은 허위 정보를 요시라를 통하여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전달하였고, 김응서는 이 허위 정보를 조정과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김응서와 권율로부터 이러한 허위 정보를 받은 임금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적이 전해준 거짓정보에 근거하여 황신을 권율에게 보내어, 바다에서 청정을 치라는 명령을 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내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판단하기를, 청정이 부산에 도착한다는 날짜로 보아서 그는 이미 부산에 도착해 있을 것이고, 따라서 이 정보는 적의 반간계임이 불을 보듯 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배를 이끌고 적을 맞아 치러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왜적의 뻔한 이간책에 당시 조선의 임금 이하 모든 대신들이 다 속아 넘어감으로써(어쩌면 속으로는 허위 정보인 줄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이순신은 적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적들에 의해 제거당하고 마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고, 결국 조선의 수군은 얼마 후에 무능하기만 할뿐, 재주라고는 없는 탐욕스러운 간신 원균의 지휘 하에서 전부 바다 속에 수장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 백의종군
※ 《난중일기》 1597년 4월 1일 ※
맑다. 옥문 밖으로 나왔다. 남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 분, 아들 울 그리고 사행들과 함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방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하였다. 지사 자신이 와서 위로해 주었고,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만나보았다.
윤 지사가 돌아가더니 저녁 식사 후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기헌도 왔다. 영공 이순신이 술병을 차고 와서 같이 취하면서 성의를 다해 주었다. 영의정,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좌의정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 등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남대문 밖 종(관노)의 집에서 자게 된 것은 죄인의 몸이라 도성 안에서는 거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마니가 깔린 종의 집 사랑방은 귀양을 떠나는 죄인들이 묵고 가는 집으로 금부 나졸들이 문 밖에서 보초를 섰다.
이순신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한성에서 살았고 이순신도 아홉 살까지는 한성에서 자랐다. 훈련원 시절에는 세 번이나 한성에서 근무했으며, 임진란 개전 초부터 그렇게도 지켜내고 수복하려던 한성이었다.
그런데 그 도성은 이순신을 죄인으로 몰아 남대문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이순신이 조정을 원망하는 글귀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당시에 겪은 심경과 일들을 담담한 심정으로 기록했을 뿐이다. 이 같은 면모도 이순신의 수도(修道)된 모습이다.
최원 전 전라병마사는 동지 벼슬에 올라 있었는데 사람을 보내어 위로 문안을 했다. 이순신이 죄인의 몸인지라 공개적으로 문안한다는 것은 양쪽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
2일. 비. 종일 비가 왔다. 여러 조카들과 함께 이야기하였다. 방업(성인 것으로 보아 처갓집과 가까운 인척인 듯)이 음식을 매우 풍성하게 차려왔다. 저녁에 성안으로 들어가 정승(유성룡)과 이야기하다가 닭이 울어서야 피하고 나왔다.
3일. 맑다. 일찍 남으로 길을 떠났다. 금부도사 이사빈,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안양시 관양동)에서 말에게 먹이를 주고 조용히 누워 쉬다가 저물어 수원에 들어가 경기체찰사(홍이상)의 수하인 어느 병사의 집에서 잤다. 신복룡이 우연히 왔다가 내 행색을 보고 술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위로했다. 수원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보았다.
금부도사 등 호송 인원은 약 10~20명 정도였다. 이들은 왜 죄인을 호송하지 않고 수원부에 먼저 가 있었을까? 이순신을 죄인으로 삼아 호송한다면 한성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살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미리 가 있었던 것이다.
말에게 먹이를 준 것은 타고 가는 말을 챙겨야 하는 말 타는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행한 것이다. 또한 말은 당시 소처럼 큰 재산이었다. 조용히 누워서 쉰 것은 옥중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 때문으로 보인다.
수원부사도 이순신이 숙박하고 있는 어느 병사의 집에 와서 위로했고, 수원부사라는 공직자로서 여러 가지를 확인하고 점검했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4일 ※
맑다. 길에 올라 독성(오산시 양산동) 아래에 이르니 반자(판관) 조발이 술을 갖추어 막을 치고 기다리므로 마시고 취하여 길을 떠나 바로 진위의 구로(북면 봉남리)를 거쳐 냇가에서 말을 쉬게 하고 오산 황천상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황천상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주니 감사하기 그지없었다. 수탄을 거쳐 평택 고을 이내은의 손자 집에 이르니 대접이 매우 은근하였다.
수원 독성산성 아래에 이르니 산성을 지키고 있던 조발이 천막을 치고 일행을 접대했다. 황천상이라는 사람이 말을 내어주었는데, 이때 하인도 함께 딸려 보냈을 것이다(목적지에 도착하면 하인과 말은 다시 돌아간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5일 ※
맑다. 해가 뜨자 길을 떠나 바로 선산(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이르러 울며 절을 하고 그 길로 외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사당에 절을 하였다. 거기서 남양 아저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물어 집에 이르러 장인 장모님의 신위 앞에 절을 하였다. 곧바로 형님과 여필(아우)의 부인인 제수씨의 사당에 다녀와서 잠자리에 들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양 아저씨는 외숙인데 이순신의 모친을 따라 여수로 피난 와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순신의 부인 방(方)씨는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장인 장모의 제사는 현재까지 충무공 종가에서 모시고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6일 ※
맑다. 멀고 가까운 친척과 아는 이들이 모두 모여 와서 오래 동안 못 본 정을 풀고 갔다.
7년 만에 찾은 고향이지만 금의환향이 아닌 백의종군의 죄인이었다. 또 전란 중에 많은 친인척들이 세상을 떠났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
7일. 맑다. 금오랑(금부도사의 별칭)이 아산 고을로부터 오기에 나는 가서 그윽하게 접대하였다. 홍 찰방, 이 별좌, 윤효원이 와서 보았다. 금오랑은 흥백(변존서)의 집에서 잤다.
8일. 맑다. 자리를 펴고 남양 아저씨를 곡하고 상복을 입었다. 늦게 흥백의 집에 이르러 금부도사를 접대하였다.
9일. 맑다. 동네 안에서 각기 술병을 차고 와서 멀리 가는 길을 위로하므로 정리상 거절하기 어려워 몹시 취하여 헤어졌다. 홍군우(찰방)가 노래를 부르고, 이 별좌도 노래를 하는데 나는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다. 금부도사는 술을 잘 마시면서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
10일. 맑다. 아침 식후에 흥백의 집에 이르러 금부도사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11일. 맑다. 새벽에 꿈이 몹시 산란하여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다.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던 차에 눈물이 흐르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종을 보내어 어머님 소식을 알아오게 하였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들어갔다.
12일. 맑다. 종 태문이 안흥량(태안군 근흥면)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하는데, 초 9일에 어머님과 위아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무사히 안흥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울을 먼저 해정으로 보냈다.
여수로 피난 가 있던 가족들이 아산으로 돌아오고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13일 ※
맑다. 일찍 아침을 먹고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해정길로 갔다. 가는 길에 홍 찰방 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울이 종을 보내어 하는 말이 “아직은 배가 온다는 소식이 없다” 고 하였다. 또 들으니 황천상이 흥백의 집에 왔다고 하므로 홍 찰방과 작별하고 흥백의 집에 이르렀는데,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하였다. 뛰쳐나가 뛰며 굴렀다. 하늘에 해조차 캄캄하였다. 곧 해암(아산시 인주면 해암리)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어찌 다 적을 수 있으랴.
이순신의 모친은 4형제 중 하나 남은 자식(이순신)을 따라 머나먼 객지 여수까지 피난을 갔으나 이순신이 그 무렵부터 한산도로 나가 있었기에 노모는 외로운 객지생활을 해야 했다. 그 후 자식이 하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 올라가 탄원서를 올리려고 배를 타고 오다가 도중에 임종을 맞았다.
할머니보다 먼저 상경한 아들 회와 조카 분 등은 《난중일기》를 가지고 유성룡과 정탁 등을 찾아가서 이순신의 억울한 사정을 읍소했고, 정탁은 구명상소 신구차(伸救箚)를 올려 이순신을 구했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
14일. 맑다. 홍 찰방, 이 별좌 등이 들어가 곡을 하고 관을 정돈하였다. 관은 본영에서 준비해 온 것으로 조금도 흠 난 데가 없다고 하였다.
15일. 맑다. 늦게 입관하엿다. 오종수가 극진한 마음으로 호상해 주니 뼈가 가루가 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천안 군수가 들어와서 초상 치를 준비를 하고, 전경복씨가 연일 진심으로 상복 만드는 일을 돌보아 주니, 감사한 말을 어찌 다하랴.
16일. 궂은 비. 배를 끌어 중방포(아산시 염치읍 중방리)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마을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찢어지는 아픈 가슴을 어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는 그대로 퍼붓고, 남쪽으로 내려가기는 해야겠고, 울부짖으며 다만 어서 죽기를 바랄 따름이다. 천안 군수는 돌아갔다.
17일. 맑다.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이 공주로부터 와서 남쪽으로 가기를 재촉했다.
18일. 비. 종일 비가 왔다. 몸이 몹시 불편했다.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19일. 맑다. 일찍 집을 나서서 길을 떠나야겠기에 어머님 빈소 앞에서 울며 하직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에 나 같은 이가 또 어디 있으랴! 어서 죽는 것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가서 조상의 사당에 하직을 고하고 가다가 금곡 강선전의 집 앞에 이르러 강정과 강영수 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하고, 다시 그 길로 보산원(천안시 광덕면 보산원리)레 이르니 천안 군수가 먼저 와 있기에 말에서 내려 같이 냇가로 쉬러갔다.
임천(부여군 임천면) 군수 한술이 중시(重試)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는 중에 앞을 지나다가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는 와서 조문하고 갔다. 아들 회, 면, 울, 조카 해, 분, 완과 주부 변존서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왔다. 원인남도 와서 보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공주시 장기면 신관리)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내렸다.
노산 이은상은 이 무렵의 《난중일기》에서 글귀들을 뽑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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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중일기》 1597년 4월 20일 ※
맑다. 공주 정천동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에 니산(논산시 노성면 읍내리)에 도착하니 고을 수령이 반가이 접대하였다. 김덕장이 우연히 왔기에 서로 만나보고 금부도사도 와서 보았다.
죄인이기에 공주 감영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공주 군청에서 숙박했는데, 감영의 금부도사가 찾아왔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21일 ※
맑다. 일찍 떠나 은원(논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하였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러 은진포에 왔다고 하는데 그 꼴이 몹시 괴상하다. 저녁에 여산(익산군 여산면) 관노의 집에서 잤다. 한 밤에 홀로 앉아 있노라니 슬픈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부모상을 당하면 전쟁 중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 시묘살이를 했다. 하지만 죄인이었던 이순신의 경우에는 초상도 치르지 못하고 끌려가야 했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
22일. 맑다. 정오에 삼례(완주군 삼례면 삼례면리) 역리의 집에 이르고 저녁에는 전주 남문 밖 이의신의 집에서 잤다. 판관 박근이 와서 보았다. 부윤도 역시 후대해 주었다.
23일. 맑다. 일찍 떠나 오원역(임실군 관촌면 관촌리)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저물어 임실현에 투숙했다. 군수가 예사로이(죄인 다루는 원칙대로) 대접했다. 군수는 홍언순이다.
예사로이 대접했다는 것은 이순신을 죄인 취급 했음을 말한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
맑다. 일찍 떠나 남원에 이르렀다. 15리쯤에서 정철 등을 만나 남원부 5리 안에까지 이르러 작별하고, 이희경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하랴.
25일. 비가 올 것 같다. 아침 식후에 길을 떠나 운봉(남원시 운봉면)의 박롱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크게 퍼부어 출두할 수가 없었다. 거기서 들으니 원수(권율)는 벌써 순천으로 갔다고 하므로 곧 사람을 금오랑에게 보내어 머물러 있게 하였다. 현감(난감)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권율의 도원수부는 합천군 초계에 있었다. 이순신은 권율이 순천부로 가고 있다고 소식을 듣고 초계를 향해 앞서 가고 있던 금오랑 일행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
26일. 흐리고 개지 않았다. 일찍 식사하고 길에 올라 구례현에 이르러 손인필의 집에 이르렀다. 현감이 급히 나와 반가이 대접했다. 금오랑도 와서 보았다. 현감에게 금오랑에게 마실 것을 권하도록 청하자 현감이 진심으로 대접했다.
27일. 맑다. 일찍 떠나 송치(순천시 서면) 밑에 이르니 구례 현감(이원춘)이 점심을 짓도록 사람을 보내왔으나 도로 돌려보냈다. 순천 송원(서면 송원리)에 이르니 이득종과 정선이 와서 문안하였다.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이르니 원수(권율)가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조문하고 또 안부도 묻는데 위로하는 말이 매우 간곡하였다. 저녁에 부사(우치적: 순천부사)가 와서 보았다. 정사준도 와서 원공(원균)의 망령된 짓을 많이 말하였다.
권율은 군관을 보내어 먼저 조문부터 했다. 여수에 가까워질수록 이순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민심이 높아지고 있다. 또 구례 등 남해안으로 내려오자 원균 통제사의 문제점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28일 ※
맑다. 아침에 원수가 또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문안하며 “상중에 몸이 피곤할 터이니 기운이 회복되면 나오라” 고 전하였다. 그리고 또 “통제사와 친한 군관이 있다고 하니, 편지와 공문을 보내어 나오게 해서 데리고 가서 돌보게 하라” 고 하며 편지와 공문을 만들어 보내왔다.
‘친한 군관’ 은 이순신의 옛 군관들인데, 권율은 이들을 한산도에서 차출하여 이순신의 수발을 들게 했다.
※ 《난중일기》 1597년 4월 ※
29일. 맑다. 신 사과와 방응원이 와서 보았다. 병사(이복남)도 원수에게서 의논을 들으려고 고을로 들어왔다고 하였다.
30일. 아침에는 흐리고 저물 무렵부터는 비가 왔다. 병사 이복남이 식전에 와서 보며 원공(원균)의 일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전라감사(박홍노)도 원수에게 왔다가 군관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전라도의 군 수뇌진들이 모이고 있다. 외관상으로 보면 이들의 일정은 초계의 도원수부를 출발한 권율의 구례-순천지역 순찰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율의 순찰은 이순신의 구례 도착과 때를 같이 하고 있다. 이렇게 모이는 가운데 한산도에 있는 원균 통제사의 문제점이 화제가 되고 있다.
※ 《난중일기》 1597년 5월 1일 ※
비. 신 사과가 머물러 이야기하였다. 순찰사와 병마사는 원수가 머물고 있는 정사준의 집에 같이 모여 술을 마시며 무척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도원수, 순찰사, 병마사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날 논의한 내용은 형식적으로는 이순신을 초계 원수부에서 무밭을 가꾸게 하고, 실제로는 원수부의 군사 고문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