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패의 해전기록
이날 선조는 유영순을 통하여 은밀히 당시 전라병사 원균에게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유서를 전하게 했다.
※ 《선조실록》 1597년 1월 28일 ※
우리나라에서 믿는 바라고는 오직 수군뿐인데, 통제사 이순신은 나라의 중대한 임무를 맡고서도 속임수만 부렸고 또 적을 내버려둔 채 토벌하지 아니하여 청정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바다를 건너올 수 있게 하였다. 나중에 마땅히 붙잡아다가 국문하고 용서해 주지 말아야겠지만, 당장에는 적과 더불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우선 공로를 세우도록 하였다.
나는 본래부터 경의 충성과 용맹을 알고 있기에 이제 경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하는 것이니 경은 나라를 위해 한층 더 분발하여 힘쓰고 우선은 이순신과 합심하여 지난날의 감정을 모두 풀어버리도록 하라. 그리고 왜적들을 모조리 무찔러 나라를 구함으로써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공훈을 종묘 제기에 기록하여 영원히 남기도록 할지어다. 경은 삼가 받들도록 하라.
임금을 비롯하여 한 나라의 대신들이 다 모여 앉아, 왜적이 재침하여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될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위급한 순간에, 지난 5년간 왜적의 침략으로 망할 위기에 처해 있던 나라를 지켜내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어떤 짓들을 하였는지가 그대로 다 기록되어 있는 ‘녹음테이프’ 를 틀어놓고 듣는 기분이다.
다음에서는 참고로, 앞에서 소개한 제7차 어전회의 이전인 1596년 11월 7일자에 있었던 어전회의 회의록을 소개해 둔다. 치열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윤두수 자신의 입으로 밝혔듯이, 원균이 윤두수의 친척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당시의 많은 정황들을 이해하기 쉬워진다.
사실, 요시라의 ‘청정 요격’ 허위정보를 이용한 반간계 이전에 이미 이순신 제거를 위한 음모는 진행되고 있었고, 부산 앞바다로 나가서 바다를 건너오는 가등청정을 치라는 임금의 명령을 이순신이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1596년 11월 7일 오후 2시경에 별전에서 개최된 어전회의 회의록을 보면,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서 몰아내기 위한 음모가 그 전에 이미 한찬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역사적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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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들 : 이산해, 유성룡, 윤두수, 김응남, 정탁, 이원익 |
※ 《선조실록》 1596년 11월 7일 ※
선조 : 각자가 품고 있는 생각들을 왜 말하지 않는가.
이산해 : 전쟁이 일어난 지 다섯 해 째인데도 전연 좋은 계책이 없고 오직 화친을 맺을 것만 믿어왔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막다른 지경에 빠졌으니 이런 한심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대체로 바다 싸움은 육지 싸움과 다릅니다. 육지 싸움은 쉽지 않지만 바다 싸움에서는 적을 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애당초 적의 장수를 사로잡을 때 원균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고 또한 요즘은 수군이 없어서 바다 싸움에서 성과를 거두었다는 말을 들어볼 수 없습니다. 대단히 분개할 일입니다. (바다 싸움에서 적을 쳐서 이길 수 없었던 것은 왜적이 이순신을 두려워 했기 때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선조 : 원균은 어떤 인물인가?
유성룡 : 옛날에는 육지에서 싸움을 잘하는 장수는 바다 싸움에 서툴렀고, 바다 싸움을 잘하는 장수는 육지 싸움을 잘 못했습니다. 그러나 원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어디서나 용감하게 싸우는 것이 그의 장점입니다. 그러나 만약 지친 군사들을 무마하라고 요구한다면 그는 감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그 임무를 감당할만한 다른 사람이 있다면 등용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정탁 : 바다에서 싸우는 것이 그의 장점입니다. 이제 그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쓰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유성룡 : 원균이 힘껏 싸웠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일이지만, 일단 바다 싸움이 있은 뒤로 잘못을 저지르자 영남의 수군들이 대부분 원망하고 있으므로 원균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구나 이순신과 원균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조정에서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신은 바다와 육지가 서로 다르지만 마땅히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모여 협의하도록 하였는데도 원균은 그저 성만 발끈 내는 것이었습니다.
선조 : 이순신도 그렇던가?
이원익 : 이순신은 별로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았지만, 원균은 언제나 성을 내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옛날 장수들 가운데도 공로를 서로 다투는 사람은 있었지만 원균은 너무 심했습니다. 듣자니, 신이 올라온 뒤에도 원균은 이순신을 향해 분기(憤氣)에 찬 말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을 한산에서 옮기도록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만일 옮기기만 하면 모든 일이 다 틀어져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지시를 내려 (원균을) 병사로 그냥 눌러있게 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아무리 조정에서 여러 모로 타이른다고 하더라도 그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런 위급한 때에 마땅히 마음을 합쳐서 함께 난국을 타개해 나가야 한다고 신도 말해 주었지만, 원균은 노기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래서야 곤란하지 않습니까?
선조 : 곤란하겠다.
윤두수 : 원균은 신의 친척인데, 신은 오랫동안 그를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이순신이 후배이면서 벼슬은 원균의 윗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발끈발끈 성을 내는 것입니다. 아마도 조정에서 참작하여 알아서 처리해 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관계 및 감정과 공적인 일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한심한 간신의 말이다)
선조 : 내가 이전에 들으니, 애당초 군사를 요청한 것은 사실은 원균이 한 일인데, 조정에서는 원균이 이순신만 못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원균이 이렇게 화를 내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또 듣자니, 왜적을 잡을 때에는 매번 원균이 앞장을 섰었다고 한다. (한심한 수준의 사물 판단 능력을 보이고 있다. 왕이나 신하나 똑같이 한심한 모습이다)
유성룡 : 원균은 단지 가선대부인데 이순신은 정헌대부가 되었으니, 원균이 성을 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선조 : 내가 듣자니, 군사를 요청하여 바다에서 싸울 때 원균이 공로를 많이 세웠고 이순신은 원균을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또 듣자니, 이순신이 왜적을 많이 잡았으므로 원균보다 낫기는 하지만, 이순신이 그렇게 공로를 많이 세우게 된 것은 실제로는 원균 덕분이라고 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라는 자의 입에서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말이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다. 이러니 나라가 어찌 혼란하지 않겠는가.
※ 《선조실록》 1596년 11월 7일 ※
이원익 : 신이 조용히 원균에게 ‘당신의 공로가 결코 이순신을 능가할 수 없다’ 고 말해 주었더니, 원균이 말하기를 ‘처음에 이순신은 물러가 있으면서 구원해 주지 않았소. 천번만번 불러서야 비로소 군사를 데리고 왔었소’ 라고 하였습니다. 원균은 본래 왜적이 쳐들어오는 지역에 있었으니 적과 마주치기 마련이고, 이순신은 원균과 같은 때에 나가 싸우지 못한 것은 사정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덕열 : 이순신은 (원균이) 15번이나 불러서야 비로소 나가 적선 60척을 붙잡아 가지고 앞서서 자기 공로를 보고했다고 합니다. (이 또한 거짓말이다)
이원익 : 호남으로 적의 배가 쳐들어와 자기 진지로 돌입한다면 그 적도 수없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 자기 군사를 배치해 두어야 하므로) 부득이 뒤에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균은 애초에 많은 실패를 하였습니다. 이순신이 따라가서 비록 자기 손으로 직접 적을 잡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부하들이 잡은 적들이 많았습니다. 만약 적의 목을 많이 벤 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원균보다 많을 것입니다.
정탁 : 그들이 서로 공을 다툼을 하는 그 심리를 놓고 말한다면 두 장수에게 다 같이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도 역시 만만치 않은 장수이니 전하께서 지시를 내리셔서 서로 화해를 하게 하는 동시에 앞으로 공로를 세우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원익 : 원균은 처음에 많은 실패를 하였지만 이순신은 한 번도 실패를 하지 않고 공로를 세웠습니다. 둘이서 서로 옥신각신하게 된 발단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어전회의록을 보면, 이원익의 상황판단이 가장 사실에 부합하고 정확하다.
● 간신들의 끝없는 모함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끌어내리고 원균을 그 자리에 대신 올리기 위해 이루어진 온갖 모함들 중에서 원균의 친척인 윤두수와 윤근수 현제의 서면보고가 그 백미를 이루고 있다. 이로부터 이순신 모함의 진원지와 그 세력의 핵심은 곧 자기 친척인 원균을 이순신 대신 수군통제사에 앉히고자 했던 이들 형제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선조실록》 ※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건의하였다.
“적이 만약 다시 쳐들어온다면 그 전날 실패만 거듭하던 군사들을 가지고 맞서서야 어떻게 지탱해 낼 수 있겠습니까. 신이 얼마 전에 원균을 도로 경상우수사로 임명하여 다시 수군을 거느리고 적이 오면 싸울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키자고 요청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균이 현재 맡고 있는 병사의 후임을 물색하기 곤란하다는 보고만 있었습니다.
신이 언젠가 《일본고(日本考)》란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왜적은 육지 싸움에서는 우수하나 바다 싸움에서는 무능하다는 말이 명백히 씌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진년 병란이 일어난 이후에 적의 예봉을 꺾어 놓은 것은 오직 수군이었고 육지 싸움에서는 모두 그만 못하였습니다. 또 듣자니, 적들은 수군을 특히 무서워하면서 접근하지 말고 피해가곤 하지만 우리 육군은 하찮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 모두가 이순신의 공로였지 결코 원균의 공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다음에 이어지는 엄청난 거짓말과 음흉한 모함은 그 끝을 모를 정도이다.
※ 《선조실록》 ※
“임진년 바다 싸움에서 공로를 세운 여러 장수들을 꼽아보면 그 중에서도 원균이 제일 용감하고 강직하였습니다. 제 한 몸 바쳐서 용감히 떨쳐나서서 죽음을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적이 매우 드러났던 것입니다. 또한 바다 싸움에 능숙하여 적을 만나는 족족 마주치고 싸워서 이기기만 하였지 실패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믿는 바가 있어서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군을 내어놓고 기병이나 보병을 통솔하고 있으니, 병사(兵使)의 직위가 아무리 수사(水使)보다 높다 하더라도, 이야말로 옛날 사람이 비난한 것처럼 그의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쓰게 한 것이니 인재를 잘못 등용한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5명의 왜적의 장수와 대부대의 왜적이 겨울이나 봄에 나올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는 판국에, 우리나라로서는 적을 바다에서 소멸시킬 계책을 세우기에 급급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시기를 놓쳐서 적이 육지에 오르게 되면 아무리 많은 기병, 보병이 뒤에 있다 하더라도 벌떼처럼 날아드는 그 예봉을 무슨 수로 막아내겠습니까. 임진년의 사실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바다에서 소멸시켜버림으로써 적이 육지에 오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오늘 적을 막는 유일한 계책인 만큼, 수군의 장수로는 응당 여러 번 싸워서 승리한 사람을 골라 세워야 할 것입니다. 원균이 수군을 통솔한다면 꼭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지만, 만일 적임자가 아닌 사람 (이순신을 지칭)을 그 자리에 앉혀 놓는다면 적을 감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실왜곡과 모함을 태연히 하고 있는 자가 과연 정상적인 인간인지, 정말 나라를 걱정하는 정치인의 모습인지 참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 《선조실록》 1596년 11월 9일 ※
“적이 일단 호남 방면으로 쳐들어가기만 하면 원균이 아무리 온 도의 기병, 보병을 거느리고 대장노릇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다 싸움에서와 같은 솜씨를 보여주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를 다시 수사로 임명하여 지난날 이미 시험해 본 우수한 재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육군 장수로 말하면 응당 적임자가 있을 터인데 장수로 원균을 대신할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원균과 이순신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순신이 통제사로서 원균을 지휘해야 하는데 원균이 그 밑에 있기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두 장수가 화목하지 않고서는 일이 제대로 되지 못할 듯하다’ 라고도 하지만,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통제사의 직위는 일시적으로 둔 것이므로 계속 그냥 둘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순신을 통제사의 직위에서 물러나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혹은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로 임명하여 칭호와 지위가 이순신과 서로 대등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신축성 있게 조절해서 안 될 것도 없을 것인바, 그 이유는 원균의 품계가 본래 이순신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야말로 나라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전하를 성가시게 한다는 혐의도 미처 고려할 겨를 없이 다시 건의하게 된 것입니다.
신은 지난번에도 한산도의 수군을 빨리 거제의 장문포로 진주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였습니다. 지금은 저 적들이 침입할 조짐이 이미 나타나서 불이 당장 눈썹에 옮겨 붙을 형편이니 잠시도 늦출 수 없습니다. 모두 거제로 진주시켜 바닷길을 차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책봉하러 간 사신만 돌아오면 일체 오가는 적의 배들을 우리 수군이 제때에 차단하고 섬멸시켜 적의 길을 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만약 적의 장수가 나오는데도 수군의 여러 장수들이 적을 살육하기를 꺼려하면서 미처 막지 못하였다고 핑계를 대거든 즉시 군법으로 다룸으로써 군사 규율을 엄히 세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빨리 글을 내려 보내서 이순신 등에게 엄히 주의를 주어 시급히 거제로 진주하게 하기 바랍니다. 이러저러한 구실을 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선조가) 대답하였다. “이처럼 글로 써서 건의한 데 대하여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임진왜란 초기의 해전에 대한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윤근수가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들은 온통 사실 왜곡의 거짓말투성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년 후의 시점에서 이야기하다 보니 전혀 사실과 다른 말을 하고 있음에도 선조는 그것이 거짓말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이미 딴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그에 부합되는 여론을 앞장서서 조성해 주는 윤근수가 고마웠기 때문이었을까. 아니, 그는 누군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패전한 장수가 구원을 요청하여 적을 쳐부수었다면, 당연히 그 공로는 구원하러 나가서 적을 쳐부순 장수에게 있는 것이고, 조선 수군이 강한 점은 어디까지나 이순신이 왜적과의 접근전을 피하고 대포를 이용한 함포 사격전을 편 사실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런 함포 사격전을 할 수 있는 배와 대포를 미리 준비하고 거북선을 고안해낸 장수에게 승전의 공로가 전적으로 있는 것이지, 어떻게 먼저 자신의 전함과 군사들을 다 바다에 침몰시켜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갔다가 겨우 다른 지역을 관할하는 장수에게 구원을 요청한 자에게 가장 큰 공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를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이러한 간신들의 주장에 근거하여 원균의 전공이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마치 원균을 훌륭한 장수였던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또 다른 간신들이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
선조는 통제사 이순신을 옥에 가두고 원균을 대신 임명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보다 앞서 행장과 경상우도 병사 김응서가 연계를 가지고 요시라가 그 중간에서 오갔는데, 그의 말에는 행장과 청정이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듯한 암시가 있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그대로 믿었다. 이때 왜적이 다시 쳐들어올 계획을 하면서 우리 수군을 두려워하였고, 더욱이 이순신을 두려워하여 요시라를 보내어 말하기를 “화의 문제가 성사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청정 때문입니다. 만일 이 사람을 없애버린다면 나의 원한이 풀릴 것이고 귀국의 근심도 없어질 것입니다. 모월, 모일에 청정이 모 섬에 머물 것이니 귀국에서 수군을 잠복시켜 기다린다면 체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김응서가 이것을 임금에게 보고하니, 임금이 황신을 보내어 이순신에게 비밀히 지시하였으나, 이순신은 말하기를 “바다 길이 험하여 왜적은 반드시 매복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선을 많이 동원하면 왜적이 반드시 알아차릴 것이고, 적게 동원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하고는 집행하지 않았다.
이날 청정이 과연 다대포 앞바다에 왔다가 그 길로 서생포로 향했는데, 사실은 행장과 함께 소수의 군사로 우리를 유인해낼 계획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고 이순신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고는 전라남도 병사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1597년 2월 4일, 이날 사헌부에서는 이순신을 붙잡아 와서 죄를 주자고 청하였다.
※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 ※
통제사 이순신은 나라의 막대한 은혜를 받아 순서를 뛰어넘어 한껏 높은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다하여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다 가운데서 군사를 끼고 앉아 이미 다섯 해나 지나다보니 군사들은 늙어 약해지고 일은 망쳐지고 있습니다. 방비할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는 전혀 손 한 번 대지 않고 그저 남의 공로나 가로채려고 기만하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적의 배들이 바다를 덮으면서 밀려오는데도 오히려 길목을 지켰다거나 적의 선봉을 막아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뒤에 떠난 배들이 곧바로 나와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둔 채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습니다.
적들을 내버려 둔 채 치지 않고 나라와 은혜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붙잡아다 신문하고 법대로 죄를 주기를 바랍니다.
1597년 2월 6일, 선조는 비밀문서로 김홍미에게 이순신을 잡아올 때 주의할 사항을 지시했다.
※ 《선조실록》 1597년 2월 6일 ※
“이순신을 잡아올 때 선전관에게 신표(信標)와 밀부(密符)를 주어서 잡아오되,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오라고 일러 보내도록 하라. 또 이순신이 만일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과 대적하여 싸우고 있는 중이면 잡아오기가 불편할 터이니, 싸움이 끝나고 쉬는 틈을 보아 잡아오라고 일러 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다음 날(1597년 2월 7일) 선조는 또다시 김홍미에게 비망기를 내려서 수군통제사를 원균으로 경질하고 이순신과 가까운 수군 장수들을 모두 원균 측의 인물들로 경질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 《선조실록》 1597년 2월 7일 ※
“이런 때에는, 만약 그가 힘써 싸우는 장수라면, 설사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면 심하게 추궁할 것 없이 그대로 써야 할 것이다. 수군은 지금 적과 맞붙어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 형세가 매우 긴박하다.
그러나 통제사 이순신은 부득불 경질시킬 수밖에 없었다. 경상우수사를 교체시키는 문제와 관련하여, 나주 목사 권준과 경상우수사 배흥립이 서로 규탄하면서 타두고 있으니, 이들로서는 아마도 일을 그르칠 것 같다. 수사로 합당한 사람을 빨리 의논하여 건의하도록 하라.”
이리하여 1597년 2월 26일, 드디어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포박되어 서울로 향한다.
● 통제사 이순신, 투옥되다
1597년 2월 28일, 원균은 수군통제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자마자 제일 먼저 이순신을 모함하는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
※ 《선조실록》 1597년 3월 20일 ※
부산포 앞바다에서 드나들면서 무력을 시위한 것과 가덕 등지에서 맞붙어 싸운 경위에 대해서는 전 통제사 이순신이 이미 장계를 올렸습니다.
그 당시의 일을 자세히 알아본 바에 의하면, 본 수영의 도훈도 김안세는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전 통제사(이순신)가 부산 앞바다로 나가 드나들면서 무력을 시위할 때, 그가 탄 전선이 적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조수가 밀려나가 얕아지는 바람에 배의 밑창이 걸려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적들에게 거의 빼앗기게 되었을 때 배 위에 있던 군사들의 고함소리를 듣고 안골포 만호 우수가 노를 빨리 저어 달려 들어가 이순신을 업고 간신히 우수의 배에 옮겨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순신이 탔던 배는 안골포의 배꼬리에 묶어 매어 가지고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이번에 부산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나라의 군사를 바다 가득히 빠져죽게 만들어 적들의 비웃음이나 샀을 뿐 이득을 본 것은 별로 없었으니 심히 통분한 일입니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조정에서 처리하기를 바랍니다.
원균이 이순신을 밀어내고 통제사로 부임하자 첫 번째로 한 일이 자기 수하의 군관을 시켜서 이런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모함을 하도록 하고, 그 내용을 장계로 올린 것이다.
그가 통제사가 되기 위해 그간 온갖 모함을 한 것은 그 자리에 앉아서 적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순신의 자리를 빼앗아 대신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가슴속에 맺힌 전란 초기의 패전의 부끄러움, 그리고 열등의식과 원한을 풀려는 것이었으니, 이런 간신의 전형적인 행동은 현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통제사의 직책을 제수 받은 직후 그가 보인 이러한 행동의 심리상태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이 조선 중기의 유학자 안방준이 쓴 문집 《우산집(후에 증보판으로 은봉전서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행)》 가운데 《백사(白沙) 이항복의 장수론에 대한 비판》에 나오므로 여기에 소개한다.
※ 《우산집》 ※
백사 이항복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일찍이 여러 장수들을 평하면서 ‘마땅히 이순신과 원균의 해전에서의 공로와 권율의 행주 승첩을 으뜸공로로 삼아야 한다’ 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바꾸지 못할 정론이다” 고 해놓고는, 나중에 가서 또 말하기를 “원균은 특히 남으로 인해서 성공한 자인만큼 진실로 이순신과 더불어 맞설 수는 없다” 고 하였으니, 백사는 어찌 그리도 그릇된 생각을 하였을까?
적이 수군을 거느리고 호남을 향해 몰아칠 때, 이순신은 만 번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산도를 차단하여 적으로 하여금 감히 서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 지 무릇 6년 동안에, 원균은 겁을 먹고 어찌할 줄 몰라 스스로 자기 휘하의 전선들을 몽땅 침몰시키고 바닷가에 숨어 엎디어 있는 것을 이순신이 끌어내어 진중에 두고, 군량을 넉넉히 보급해주고, 자기가 싸워 얻은 적의 머리까지도 원균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원균으로 하여금 군법을 면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상까지 받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균이 이순신에 대해서는 그 양육 받은 은혜가 진실로 적지 않건만는, 원균은 득의(得意)한 후부터 도리어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무릇 이순신을 해치는 흉측한 짓이 극도에 이르렀는데 마침내는 이순신 스스로 ‘바다의 왕’ 으로 자처하고 있다는 헛소리까지 지어내어 퍼뜨리면서 모함하고, 청정이 바다를 건너올 때 이순신이 머뭇거리고 진군하지 않았다고 무고함으로써 결국 이순신은 잡혀가서 문초를 받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원균이 통제사를 대신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조선 수군 전부가 패망을 당했으니, 그에게는 목 베어 죽일 죄만 있지 기록할만한 공이 전혀 없는데도 이순신, 권율과 함께 나란히 으뜸공로자로 부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대개 원균은 서울에서 살아서 그 족속들이 귀인들과 연결되고 또 아첨하는 시속 사람들이 많이 그의 편을 들었다. 그래서 임금을 속여 상과 벌이 거꾸로 베풀어졌던 것인데, 백사(白沙)는 그런 것을 듣지도 못했던가?
어전에서 공로를 논평할 적에 어찌 이와 같이 아뢰어서 우리 선왕(선조)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소상히 알도록 하지 못하고 물러나온 다음에야 말을 하며, 또 처음에는 “바꾸지 못할 정론이다” 고 해놓고는 다시 나중에 가서는 “이순신과 더불어 감히 맞설 수 없다” 고 하니, 정론이란 것은 과연 그런 것인가?
나의 중부(仲父) 동암공의 처가 바로 원씨의 일가이기 때문에,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나의 중부를 찾아와 뵙고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 고 하므로, 중부는 “영감이 능히 성심을 다하여 적을 무찔러 그 공로가 이순신보다 뛰어나야만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이순신의 직함을 대신하는 것으로 통쾌하게 여긴대서야 어찌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균은 다시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멀면 편전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을 쓰고, 맞부딪치는 경우에는 칼과 막대를 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 라고 하므로, 중부는 웃으면서 “대장으로서 칼과 막대를 쓰게까지 되어서야 될 말인가?” 하고 대답했다.
원균이 떠난 뒤에 중부가 나에게 “원균의 인품을 보니 일은 다 글렀다” 고 하며 한참동안이나 탄식하였다. 남쪽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 일을 이야기할 적에는 부르르 화를 내며 팔을 걷어붙이지 않는 사람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