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실록》 1594년 10월 10일※
“지금 고을 수령들은 고을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고, 장수들은 목숨을 바치려는 마음이 아예 없어서 성(城)과 해자를 수축하라고 하면 ‘백성을 수고롭게 할 수 없다’ 고 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라고 하면 ‘군사를 모아서는 안 된다’ 고 하며, 힘껏 싸우라고 하면 ‘중과부족이다’ 고 말한다.

 

적이 수 백리 밖에 있으면서 순식간에 충돌할 수 있는 긴박한 형세에서도 태연하게, 일은 간결하게 하는 것이 귀하다고 주장하면서, 어쩌다가 일을 감당할만한 사람이 있어도 함께 도와서 일을 성사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방하는 말을 끝없이 조작 유포하니, 이것이 바로 현재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비록 경이 처리한 일이 모두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이러함을 면하기 어려울 텐데, 더구나 경의 처사에 과오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이 틀어지고 인심은 분열되었으니, 이러한 형편에서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역시 어렵다 할 것이다.

 

경은 이미 지시를 집행하기 어렵게 되었고, 비록 유임시키더라도 한갓 치다꺼리 하는 폐단이나 끼칠 뿐 별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지금은 적의 난리가 한창 위급한 때인 만큼 장수 한 사람이라도 불러들일 때가 아닌 것 같다. 경은 그대로 자기 임무를 살피도록 하라.”

 

선조는 순변사와 감사 등 양쪽을 나무라고 무마시켰는데 전쟁이 3년째에 접어들자 후방 고을들은 인력과 물자 등 모든 면에서 궁핍해져 갔고, 이런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정신까지 피폐해져 갔다.

 

※ 《임진전란사》 ※
1594년 5월 22일, 전라감사 이정암이 비밀히 보고하기를 ‘명나라의 병력과 군량을 기대할 수 없고 아국(我國)의 방비책 또한 믿을 수 없으니 일본에 제포를 개방하고 3포에 거주를 허락하며 세공선은 이전과 같이 취급하는 조건으로 화(和)를 일본에 구(求)하여 아국의 보전을 도모해야 할 것’ 이라는 취지로 장계를 올렸다. 이 사건으로 이정암은 27일 감사직에서 해임되고 전주 부윤 홍세공이 그 후임이 되었으며, 이정암은 7월 3일에 전주 부윤으로 좌천되었다.

 

이정암은 3포를 여는 조건으로 강화회담을 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왜국은 명과의 교역, 조선의 4개 도의 분할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정암의 주장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괘씸한 주청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정암은 왜국과의 강화회담에 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한 임금의 명령을 어겼다고 탄핵을 받아 전주부윤으로 좌천되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1일 ※
경상도 순변사 이빈이 보고하였다.

“도원수 권율(˚사관은 말한다. 비록 한 때 공로를 세우기는 했으나 겁이 많고 지략이 부족하여 여러 장수를 잘 지휘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원수의 임무를 맡은 이래로 조금도 기록할 만한 공적이 없었다)이 명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9월 27일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거제의 적병을 쳐 없애려고 한다. 그러므로 각 진영의 여러 장수들이 거느리고 있는 정예 군사들을 선발하여 장수를 선정하여 들여보낼 것이며, 군사를 나누어 배정하는 등의 일은 순변사가 도맡아 처리할 것이다. 함안 등지에도 복병을 두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망을 봄으로써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도록 하라.’

 

이에 신은 경상도 조방장 곽재우를 장수로 정하고 김응함 · 장의현 · 백사림 · 주몽룡 · 나승윤 · 김덕령 · 한명련과 승장 신열 등이 거느린 군사 6백 50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면서 기회를 보아 적을 격멸함으로써 기필코 큰 공을 세우도록 각별히 신칙하였습니다. 그리고 신과 전라병사 이시언은 나머지 군사들을 직접 거느리고 함안 등 지경에 매복하여 변고에 대처하기로 하였습니다.”

 

작전회의 같은 것도 없이 공문서 한 장으로 장수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고 있는데 모두 650명이다. 이들 병력을 곽재우 등이 거느리고 낙동강과 지리산 자락 등의 험지에서 수비(이치 · 웅치 고개에서처럼)했다면 큰 힘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문포 · 영등포의 왜군(모두 8천 명)을 상대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신과 전라병사 이시언은 함안 등지에서 매복하였다’ 고 하였는데, 인근의 고니시 군만 해도 무려 1만 2천 명이었기에 소수의 복병으로는 함안도 위험했다.

 

이빈 순변사의 장계를 받은 조정은 확대 어전회의를 열었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선조는 자신은 이번 작전을 몰랐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9월 중에 비변사와 논의한 것과 10월 1일 권율의 장계를 받고 선조가 취했던 조치들은 무었이었다는 말일까?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1일 ※
영의정 유성룡, 판돈령부사 정곤수, 좌찬성 최황, 호조판서 김수, 병조판서 이항복, 좌승지 구성, 홍문관 부수찬 윤경립, 주서 이억온, 가주서 이순민 검열 심열, 김신극 등이 입시하였다.

 

선조 : 내가 요즘 담증이 있어서 오래 동안 만나보지 못하였다. 지금 순변사 이빈의 장계를 보았는데, 왜적을 치기가 그처럼 쉬운 일인가? 이렇게 해서 큰 공을 세울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과연 그처럼 쉽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선조는 10월 1일, 비변사의 문관을 시켜 주야로 달려가게 하라는 어명도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이날에 와서는 ‘담증이 있어 오랫동안 ㅇ만나보지 못했다’ 고 하면서 거짓말을 했다. 또 적은 병력으로 왜군을 쫓아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식으로 장문포 · 영등포 작전을 냉소(冷笑)했다.

 

순변사 이빈의 장계를 보니 일은 이미 틀린 것 같고, 군왕으로서의 체면도 있고, 또 추후 있을 명나라 측의 항의를 예상했었는지 자신은 처음부터 몰랐다고 발을 빼고 있는 모습이다. 예로부터 국가원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알았어도 몰랐다’ 고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도 그러했다.

 

“육군으로 웅천이나 김해의 적을 치려는 것이 아니라, 수륙군을 합해서 거제의 적을 치자는 것입니다.”

 

유성룡은 이번 작전의 성격을 소수의 왜군이 주둔하고 있는 거제도의 왜성을 공격하는 작전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는 조선 수군이 육지 쪽에서 구원해 오는 왜군을 막을 것이기에 기대해 볼만하다면서 선조의 냉소로 인해 가라앉은 회의 분위기를 달랬다.

 

하지만 유성룡조차 조선 수군의 ‘거북선+학익진’ 이 바다에서는 강하지만, ‘왜성과 방파제에 의지한 왜군의 시스템적 수비전’ 을 깨치는 데는 적합한 전술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윤두수 등도 이 같은 인식에서는 유성룡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작전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윤두수가 사전에 이러한 이치를 따져보았다면(이순신의 진영에 머물면서 격물치지 했더라면), 그래서 추후 작전 때부터라도 반영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윤두수는 멀리 곤양과 순천 등지에 머물러 있었고, 또 통제사 대신에 원균을 선봉장으로 내세웠다. 그리고는 원균으로 하여금 돌격전을 감행하게 한다면 왜성을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원균이 한 일이라고는 거제 출신 15명을 길잡이로 삼은 것, 31명을 선발해서 곽재우의 지휘를 받게 한 것, 원사웅과 이광악 등이 왜군 방파제 밖에서 다소 접전을 벌이게 했던 것뿐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1일 ※
선조 : 전일에 조승훈을 잘못하게 해서 사유를 죽게 만든 사람이 바로 이빈이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군사는 겨우 5백 명이라고 하는데, 노루나 사슴을 사냥하더라도 5백 명만 쓰겠는가.

 

새삼스레 조승훈의 평양성 패전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조승훈이 패한 근본 이유는 조선 측에서 평양성의 왜군이 2천 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승훈의 평양성 패전은 이빈만의 책임이 아니다. 또 이빈의 군대가 5백 명뿐인 것도 이빈의 잘못이 아니라 그만큼 모병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의 경우도 건조하는 병선 숫자는 늘고 있었지만 병력은 오히려 줄고 있었는데, 이는 인구 감소 등으로 모병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1일 ※
유성룡 : 거제의 적은 수군만 가지고도 쳐 없앨 수 있습니다.

 

선조 : 수군이라면 비록 거제를 탈환하여 점거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선을 불태울 수는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전부터 비변사에서도 그렇게 하도록 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거사할 날짜를 내가 전혀 알지 못하였다. 비변사에서는 비밀리에 통지하지 않았던가?

 

유성룡 : 신들도 듣지 못했습니다.

 

‘거사 날짜를 내가 전혀 알지 못하였고’ 고 했다. 그러나 10월 1일 권율이 올린 장계에는 ‘그믐 전에 거사할 계획입니다’ 라고 했기에 선조는 거사 날짜를 알고 있었다. 권율은 이순신에게도 ‘밀서형 공문’ 으로 거사 시기와 내용을 알렸듯이, 비변사에도 ‘대외비형’ 장계로 보고했기 때문에 10월 1일에 있은 작전 논의는 왕과 비변사의 핵심 인물들 간에 독대형으로 진행된 것이다.

 

유성룡도 여러 정보망을 통해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국익의 차원에서 대외비로 추진한 작전이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몰랐다고 했을 것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1일 ※
선조 : 옛날에는 군사를 동원할 때에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 고하기도 하였는데, 조정에도 알리지 않고 경솔하게 제멋대로 거사를 하였으니 어찌 성공할 리가 있겠는가. 한 번 웃을 거리도 못 된다. 그리고 적장의 죄를 따지겠다는 말이 있는데 몇 줄의 글로써 적의 괴수를 구속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임금이 지도를 가져다 보이니, 성룡 등이 지도에서 가리키며 말했다.

 

유성룡 : 영등과 거제 사이에는 수로(水路)의 너비가 겨우 벽난도(개성으로 들어가는 예성강 입구의 백천에 있음)만 합니다.

 

작전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어의(語義)가 들어 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1일 ※
선조 : 이것은 영의정이 전에 한 말이다. 해안에서 총을 쏘면 사람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곳이 이곳인가?

 

유성룡 : 신이 말한 곳은 바로 견내량입니다.

 

김수 : 적병이 만일 견내량에서 차단한다면 거제로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선조 : 진군(進軍)할 날짜는 앞당기거나 뒤로 물리기 어려울 테니 27일에 거사하도록 하라. 그런데 변경의 정보는 언제쯤에나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거제도 일대의 지도를 놓고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왜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는 ‘거북선+학익진’ 과 ‘왜성 · 방파제+시스템적 수비전’ 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데, 조 · 왜 간의 핵심 전술과 그 쓰임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임금이 궁금해 하는 결과를 예측해 낼 수가 없다. 더구나 이순신이 올린 장계가 중간에서 차단되었다면 선조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보고서는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1일 ※
유성룡 : 만일 이긴다면 승전 소식은 쉽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조 : 내가 듣기로는, 병법에는 ‘군사의 수가 적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한다’ 고 하였는데, 이번의 거사는 어떻겠는가? 경들은 각자 생각하는 것을 말하도록 하라.

 

유성룡 : 만일 수군이 거제로 진격하면서 정예 군사를 뽑아 보내어 매복해 있다가 공격한다면 적들은 배가 불탈까봐 두려워할 것이고, 또 식량 운반 길이 끊길까봐 걱정하여 먼저 스스로 동요하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오히려 해 볼 만합니다.

 

정곤수 : 멀리에서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최황 : 버마재비가 수레바퀴를 밀쳐내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스스로의 약점만 드러내 보일 뿐입니다.

 

김수 : 신의 생각에는 성을 공략하는 일은 반드시 해낼 수 없다고 봅니다.

 

선조는 ‘10배의 군대가 되면 포위할 수 있다’ 는 군사학의 일반론을 제시한 후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군사학에 맹(盲)한 문관 출신들이고 더구나 ‘왜성  · 방파제+시스템적 수비전’ 의 원리에 대해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인사들이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1일 ※
임금이 말했다. “나는 본래 겁이 많아서 이 일을 들은 뒤로는 편히 잠을 자지 못한다. 전날에 내 생각을 써서 비변사에 내려 보냈다. 만약 혹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큰 나라에도 피해를 끼치게 될 것이며, 다행히 조그만 승리라도 한다면 큰 나라에서는 반드시 ‘조선의 군사가 충분히 자체 힘으로 해낼 수 있으니 굳이 우리나라 군사를 수고시킬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고 말할 것이며, 적이 만약 합세하여 다시 출동한다면 큰 나라 조정에서는 아마 우리가 말썽을 일으켰다고 말할 것이니, 무슨 말로 답변하겠는가.”

 

선조는 이번 작전에서 패한다면 조 · 명군의 국위가 손상되고, 다행히 조그만 승리라도 얻는다면 명나라에서는 이제 조선군도 잘 싸우니 명에서 더 이상 도울 것이 없다고 하면서 철수할 것이며, 이번 일로 화가 난 왜군이 다시 공세를 펴온다면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강화회담을 방해하고 혼란만 초래했다고 원망할 것이 아닌가 하면서 이번 작전을 비판했다.

 

선조는 윤두수를 3도체찰사에 제수하면서 이번 작전의 총지휘를 위하여 전라도로 내려 보냈다. 그리고 윤두수와 권율이 올린 비밀 장계를 승인할 때까지는 ‘공격하자(작전 지시)’ 는 쪽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결과가 태산명동에 서일필 격이 될 것으로 예상되자 작전에 반대한 측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선조로서는 그때그때의 사세에 따라 유리한 쪽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이 군왕으로서의 책임도 면할 수 있고 백성들로부터도 신뢰를 잃지 않는 방안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 이날의 어전 회의에서 선조는 작전에 반대했던 김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
도원수 권율이 급히 보고하였다.

“별초군 1천 수백 명에 대해서는 박종남, 김경로를 장수로 정하고, 의령의 여러 진에서 뽑아낸 군사 8백여 명에 대해서는 김덕령을 선봉장으로, 곽재우를 도별장으로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군이 지휘하도록 신칙하여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윤두수가 보낸 군사 140여 명과 이일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 210여 명은 육지에서의 싸움을 계속 응원하기로 하고 장수를 선정하여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김덕령이 공교롭게도 각기병에 걸려 말을 타거나 걸을 때 넘어질 형편이므로 여러 장수들은 마치 지팡이를 잃은 맹인처럼 모두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제의 적들이 산과 들에 가득 널려 있다는 말을 듣자 더욱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장수들이 벌써 동요하고 있다고 하니 군사들의 심정을 알만합니다.

 

형편이 이러한데도 억지로 싸우게 한다면 틀림없이 패배할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곽재우에게는 수군과 합세하여 기회를 보아 뭍에 올라 제때에 격파하라고 하였고, 이일에게는 견내량의 북쪽 언덕에 머물러 있다가 뜻밖의 변고에 대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 장수들 중에는 간혹 배와 격군이 준비되지 못하여 제 마음대로 출전할 날짜를 뒤로 미루거나 혹은 바다가 어둡고 비가 내려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수일 동안 지체하며 기회를 타지 못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 적들은 성벽을 굳건히 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바다로 나오려는 뜻이 전혀 없으므로 맞붙어 싸울 수가 없습니다. 한갓 군사의 위세만 손상시키게 되었으니 아주 통분한 일입니다.”

 

임금이 이 보고서를 비변사에 내려 보냈다.

 

조선 조정이 수개월 동안 준비해 온 작전이 용두사미로 전락하고 있다. 그리고 통제사 이순신의 이름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윤두수와 권율이 이번 작전에서 통제사를 제쳐놓고자 했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튼 권율은 이순신의 의견을 장계에 수록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장계는 ‘거북선+학익진’ 과 ‘왜성 수비전’ 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격군이 고르지 못하여’ 라고 하였는데, 수군의 격군들은 가을걷이 휴가 중이었고 김덕령 등의 육군 병사들이 수군의 격군 노릇을 대신했기 때문에 손발이 맞지 않았다.

 

아래는 같은 날짜에 수록된 비변사의 견해인데, 이순신의 주장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
비변사에서 회답 보고하였다.

“싸움터에서 군사를 지휘할 때에는 상황이 잠깐 사이에 변동되므로 천리 밖에서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거제의 바다와 육지의 형편을 놓고 헤아려 본다면, 적군은 지금 영등포와 장문포 등지에 주둔하여 책루(목책)를 견고하게 하고 보루를 쌓아놓고 해안을 지키고 있으며, 기계를 많이 설치해 놓고 자기들은 편안히 있으면서 우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공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육군이 견내량을 따라서 건너가려고 한다면 적들은 반드시 남쪽 해안에 군사를 매복시킬 것이고, 만약 우리 군사가 그 아래에 배를 댄다면 절반쯤 내려쳐 와서 진을 치지 못했을 때 적이 뒤로부터 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반드시 전군이 위세를 떨치지 못할 근심이 있을 것이므로 이것은 매우 위험한 길입니다.

 

다행히 여러 장수들이 함께 진을 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수군과 같이 진격하였기 때문에, 비록 승리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패배하지는 않았으니, 이것은 오히려 불행 중 다행입니다.”

 

‘책루를 견고하게 하고, 해안에 기계를 많이 설치해 놓고, 우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고 했는데 ‘왜성 · 방파제+시스템적 수비진형’ 이다. ‘수군과 같이 진격하였다’ 는 것은 ‘거북선+학익진’ 으로 진격했음이고, 그래서 육군은 안전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
“대체로 거제도로 말하자면 북쪽의 영등, 장문에서는 적이 지금 엄하게 방비하고 있는 만큼 육군만 가지고 먼저 칠 수는 없으니 먼저 수군이 바다를 오감으로써 형세를 조성해야 할 것입니다. 적들이 만약 자기들의 배를 구원하려고 바다로 나온다면 비로소 싸움이 벌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적들이 우리 군사가 올 것을 먼저 알고 굳건히 지키고 나오지 않고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형편입니다.”

 

현지의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는데, 평소에 이순신이 밝혀둔 견해가 반영된 것 같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
만약 그들을 육지로부터 공격하려면 견내량 같은 곳으로 나갈 수는 없고 다만 한산도를 거쳐 나가면서 길을 잘 아는 활 쏘는 군사들을 선발하여 적의 군영 주변의 수풀이 무성한 가운데 분산 매복시켜서 출몰하게 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군사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혹은 밤에 습격하여 그들의 목책과 막사를 불태우기도 하고, 혹은 군사를 잠복시켜 땔나무를 하는 왜놈들을 붙잡아오기도 할 것이며, 적이 오면 나타나지 말고 적이 가면 도로 모임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소란스럽고 불안하게 한다면 10일이 채 못되어 그들의 기세가 저절로 수그러들 것입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 뒤이어 수군이 때때로 돛을 날리며 위엄에 떨쳐 격멸할 듯한 기세를 보인다면 혹시 도망갈지도 모릅니다.

 

거제도에서 게랄라전과 야간 매복전을 전개해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윤두수-권율의 계획은 당초부터 왜성을 공격하는 것이었으며, 10월 4일 왜군들의 ‘싸워서는 안 된다’ 는 패문을 보고는 각기 퇴각해 돌아갔기에 이날 비변사의 의견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격이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
“무릇 병가(兵家)의 일이란 비교하자면 바둑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바둑에는 선수(先手)와 후수(後手)가 있는데, 소위 ‘처음에 털끝만큼 틀린 것이 뒤에는 천리나 어긋난다’ 는 것으로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의 이 거사는 먼저 기일(期日)을 정하고 또 문서를 보냄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먼저 알고 대비를 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잘못한 이유이고…”

 

비변사의 지적처럼, 조선군은 작전 기일과 장소를 정해 놓았고, 그 기일에 맞춰 이일 · 이빈 · 김경노 · 박종남 등은 하삼도에서 모병을 하고 다녔다. 또 각 도 감사들은 이 같은 모병이 가혹하다면서 순변사들을 고발하는 사태까지 일어났기에 각 감영과 조정 내에 숨어 있던 첩자들은 작전 내용을 왜군 측에 알렸다.

 

정보를 입수한 고니시와 심유경은 왜군들에게 성을 굳게 지키면서 패문을 내걸도록 지시했다. 고니시 등은 그 패문이 조선 장수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는데, 이는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싸우지 않고 적을 물리친다’ 는 작전을 실천한 것이다. 즉, 장문포 · 영등포 구상은 병법에 어두운 윤두수와 조선 조정이 왜군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작전이었던 것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
처음에 거사 기일을 27일로 정하면서 수군의 정돈 여부를 살피지 않아 결국 여러 번 거사 기일을 물렸으니 이것이 두 번째로 잘못한 것입니다. 또 거제의 적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그 수가 조금밖에 안 된다고 한 것을 다시 자세히 탐지해 보지도 않고 있다가 군사가 적군의 진영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적군의 무리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가 의구심을 가졌으며, 적들이 적선을 이미 높은 곳에 끌어 올려 매어 놓은 것조차 모르는 등 염탐을 자세히 하지 못하였으므로 아군이 놀라서 동요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이것이 세 번째 잘못한 일입니다.

 

‘수군의 정돈 여부를 살피지 않아…’ 라고 하였는바, 권율의 밀서가 이순신에게 도착한 것은 9월 22일이며, 그 무렵 수군 쪽은 가을걷이 휴가 중이었다. 그런데 작전 개시일은 9월 27일이었다. 때문에 박종남, 김경노 등이 인근의 포구 기지로 달려가서 수비병들을 달달 긁어모은 숫자가 겨우 6백여 명이었다. 또 격군이 부족해서 차질이 생겼다.

 

또 어떤 사람이 ‘거제의 적들은 그 수가 조금밖에 안 된다’ 고 했다는데, 이 같은 엉터리 정보를 믿는 사람은 이순신이 아닌 윤두수였다. 작전을 총괄 지휘해야 할 윤두수는 순천에 앉아 권준을 파직시키고, 이순신을 작전에서 제외시키면서 자신은 위엄있게 공문만 보내면 원균 · 김덕령 · 곽재우 등이 알아서 잘 해줄 것으로 낙관했다. 윤두수는 실사구시적 국정 운영에는 매우 취약했던 인물이다. 임진년에 있은 임진강 · 대동강 방어전과 조승훈의 평양성 탈환전 때에도 윤두수는 조선군 최고사령관 격이었지만 그 당시에도 왜군의 숫자도 모른 채 전쟁을 지휘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
“병법(兵法)에는 수많은 말들이 있지만 그 요체를 찾아보면 ‘공견공하(견고한 곳을 공격하고 취약한 곳을 공격함)’ 이 한 마디 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견고한 곳을 공격하게 되면 허술한 곳도 모두 견고해지고, 허점이 있는 곳을 공격하면 견고한 곳도 모두 허술해지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돌을 캘 적에 틈이 난 곳을 이용하지 않으면 돌을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바로 왜변이 일어난 초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이 일찍이 생각지 못한 것으로서, 다만 오합지졸(烏合之卒)로 아무 것도 모른 채 함부로 행동하면서 전혀 병가(兵家)의 기정(권도와 정도)과 적진의 강약(强弱)이 있음을 몰랐으니, 거사할 때마다 매번 불리했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비단 거제의 거사만을 지적해서 한 말이 아니라 여러 장수들의 용병(用兵)이 대체로 이렇다는 것을 일괄해서 논한 것으로 한 가지 일을 논함으로써 후일의 경계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견고한 곳을 공격하게 되면 허술한 곳도 견고해지고’ 라고 하였는데, ‘왜성 · 방파제+시스템적 수비’ 는 왜군이 자랑하는 견고함이다. 10배의 병력으로도 깨치기 어려운 적의 견고한 곳을 오히려 열세의 병력으로 공격했기 때문에 선조의 표현대로 ‘한 번 웃을 거리’ 가 되고 말았다.

 

● 전란 중에도 끊이지 않는 당쟁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
“수군이 이미 공을 세우지 못하였고, 또 경상감사 홍이삼이 원균의 보고서에 근거하여 보고한 내용을 보면, 비단 공을 세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약세만 내보이고 심한 모욕을 당했으며, 육군과 수군을 간신히 끌어 모았으나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옴으로써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흔들렸습니다.”

 

수군은 가을걷이 휴가 중이었다. 또 이순신에게 밀서가 도착한 것은 9월 22일, 작전 개시일은 9월 27일이었기에 휴가를 떠난 병사들이 때맞춰 귀대할 수 없었다. 원균은 이 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홍이상을 통하여 ‘수군이 공을 세우지 못하고… 약세만 보이고, 수모만 당하고…’ 등과 같은, 수군을 비하하는 말을 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
“이러한 때에는 3군(三軍)의 마음이 원수(권율) 한 사람의 몸에 달려 있으니, 원수는 마땅히 자기 자신부터 진정(鎭定)시켜야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지시하고 단속하여 각각 자기 초소로 돌아가 이전과 같이 적을 막는 동시에 특별히 포치하여 후일을 도모하도록 해야 합니다.

 

도원수 자신이 남원으로 감으로써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게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적절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서둘러 진영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조금도 지체하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작전은 종료되었기에 모두들 원대 복귀할 것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
“그리고 적과 싸운 실태에 대한 여러 장수들의 보고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폐단이 있으니, 다시 자세히 조사하여 급히 보고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작전에 대한 장수들의 보고가 절차와 계통도 거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올라왔다. 체계적인 보고가 되려면, 윤두수가 이순신의 기함에 승선하고 다니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내용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고, 장수들의 보고가 올라오면 그때그때 일지 내용을 보완했어야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작전에 대한 정상적인 결과보고이지만, 윤두수는 순천에 있었고 권율은 본진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장수들의 장계가 곧바로 비변사로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3일 ※
“싸움을 일으킨 다음부터 말썽이 이미 생겼고 소서비의 사신도 또 적진으로 갔으니(소서비가 명나라→한성→웅천으로 들어갔음) 앞으로의 일이 매우 걱정됩니다.

 

거제의 적들은 틀림없이 고성 등에서 노략질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웅천이나 김해의 적들도 반드시 소란을 일으킬 것이니, 수군은 비록 한산도로 돌아가더라도 별도로 골라 뽑은 가벼운 배들을 바다 어귀에 매복시켜 놓고, 의령의 육군도 인원수를 나누어 파수하는 등 철저히 경계하고 잠시도 태만하여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왜군의 반격에 대비해서 수군은 한산도, 육군은 의령 등지의 험지를 지키자는 계책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4일 ※
(10월 14일) 오시(12시경)에 영의정 유성룡, 판중추부사 최흥원, 판돈령부사 정곤수, 우찬성 최황, 좌참찬 한준, 호조판서 김수, 형조판서 신점, 훈련원 도정 조경, 판결사 윤선각, 호조참판 성영, 동지중추부사 이사명, 부수찬 윤경립, 우승지 오억령, 주서 이덕온, 가주서 이순민, 검열 심열 · 김신국을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선조 : 싸움을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적을 헤아려야 한다. 어찌 적을 헤아려보지도 않고 먼저 싸울 수 있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적에게 속은 것이다.

 

유성룡 : 들으니, 여러 장수들이 처음에는 군사(육군)들을 거느리고 견내량을 건너가려고 했다는데, 만일 그대로 했더라면 반드시 대패(大敗)했을 것입니다.

 

선조 : 육군이 배를 탔다고 하는데, 무슨 의도에서인가?

 

유성룡 : 수군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기세를 돋워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날도 확대 어전회의가 열렸고, 선조는 적을 헤아리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켰다면서 또다시 이번 작전을 비판했다.

 

‘견내량을 건너가려고’ 했다는 것은 조선 육군이 함안→고성반도→견내량→견내량의 나룻배로 건너서→육로로 장문포와 영등포까지 진군하여 왜성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을 말한다. 즉 그렇게 했더라면 8천의 왜군이 견내량 맞은편에 있는 나루와 장문포 · 영등포에 이르는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3천 미만의 조선군을 도륙했을 것이라는 것이 유성룡의 설명이다.

 

‘육군이 수군의 배를 탔기에 수군의 기세를 돋워주었다’ 는 것은 수군이 가을걷이 휴가 중이어서 한산도를 수비할 판옥선이 50척 정도밖에 안 되었고, 이에 육군이 승선해서 기세를 돋워준 것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육군은 이러한 방식으로 장문포 · 영등포 해안까지 이동했기 때문에 가는 도중에 왜군의 기습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4일 ※
선조 : 한 명의 왜적도 잡거나 죽이지 못했는가?

 

유성룡 : 적들이 나와서 싸우지 않는데 어찌 사로잡은 것이 있겠습니까.

 

김수 : 6명의 왜적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유성룡 : 바다에서 싸웠기 때문에 크게 패하지는 않았지만, 육지에서 싸웠다면 반드시 크게 패했을 것입니다.

 

선조 : 전날에 도원수의 보고서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 거사에 대한 소식을 물었더니, 군사들 가운데는 활을 갖지 못한 자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한 군사들을 가지고 어찌 성공을 바랄 수 있겠는가?

 

유성룡 :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전의(戰意)를 상실하였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선조 : 적을 치려는 마음이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형편은 따져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진격해서야 되겠는가.

 

최황 : 적을 치려는 마음은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거사에서 함몰당하지 않고 전군(全軍)이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선조 : 적들은 반드시 딴 꾀를 쓸 것이다.

 

유성룡 : 유정도 그 점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듣자니 김덕령은 병을 핑계 대고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거사가 성공하지 못할 줄 알고 병을 핑계 댄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조 : 덕령이 만일 일이 성공되지 못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응당 대장(大將)에게 힘써 말하여 중지시키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듣자니 ‘여러 장수들은 덕령이 오지 않자 마치 소경이 지팡이를 잃은 것처럼 생각했다’ 고 하던데, 여러 장수들이 덕령 한 사람이 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처럼 낙심을 하였단 말인가. 애초 거사할 때 나도 반드시 패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적을 치려는 마음만은 매우 취할 만하니 비변사에서는 지나치게 책망하지 말고 특별히 뒷일ㅇ르 잘 수습할 수 있는 계책을 세우도록 하라.

 

유성룡 : 보잘 것 없는 신이 혼자 대신의 반열에 있는 바람에 나라일이 갈수록 잘못되어 가고 있으니, 대궐 문 앞에서 죽음으로써 사죄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 것입니다. 청컨대 윤두수가 내려간 지 오래 되었으니, 신이 내려가서 그를 대신하여 외방에서 힘을 다하도록 해주십시오.

 

선조 : 체찰사의 임무를 어찌 서로 교대할 수 있겠는가.

 

차츰 작전의 전모가 밝혀지는 가운데 체찰사 윤두수의 교체설이 등장하고 있다.

 

윤두수는 이번 작전을 위해 오래 전에 남쪽으로 내려가 있었다. 따라서 많은 수의 장병들은 가을걷이 휴가 중이었으며, 그 같은 상황에서의 모병은 열에 아홉 명은 산으로 들로 숨어버린다는 민심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군대에 갔다 오니 가족들이 모두 굶어 죽었다’ 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작전을 계획한 윤두수는 천시(天時)를 놓쳤다.

 

그리고 거제도의 왜군은 주둔한 지 1년이 넘었고, 견고한 왜성에서 겨울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조선군의 작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군은 비상식량만을 가지고 현장에 도착하여 스스로를 지킬 목책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리(地利)도 왜군이 차지했다.

 

더구나 윤두수는 통제사 이순신을 작전에서 제외시키고 수군의 핵심 장수인 권준을 잡아 가면서 조선군을 보이지 않는 내분상태로 빠뜨렸다. 반면에 명 · 왜는 강화회담의 성사를 위해 합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윤두수는 인화(人和)도 그르치고 말았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4일 ※
유성룡 : 요즘 대간(臺諫)에서 하는 일을 보면, 정철 한 사람의 일로 매우 소란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의(公議)를 널리 펴지 않을 수 없다’ 고 하고, 어떤 사람은 ‘정철은 모르는 일이다’ 고 하면서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이처럼 다투고 비난함으로써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는 근거도 없는 일을 가지고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이전부터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말을 입에 담지도 않았습니다.

 

선조 : 공의란 지극히 엄한 것이며 시비(是非)는 속이기 어려운 것이다. 요즘 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어두운 밤에 온갖 물건들이 서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이러고서도 나라 일이 제대로 되겠는가. 영의정은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말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내가 물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왜적도 물러가고 조정도 안정될 것이다.

 

윤경립 : 정철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죄에 빠뜨린 일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도 요즘 정철을 비호하는 일종의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으니, 반드시 먼저 정철의 죄를 똑바로 밝혀야만 정철을 비호하는 논의가 저절로 종식될 것입니다.

 

정여립의 역모 사건으로 죽은 사람이 1천여 명에 달했고, 이는 몇 개의 사화(士禍)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를 합한 것보다도 많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서인인 정철이 동인 세력을 싹쓸이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높았다. 이 날도 정철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윤두수는 서인이고 유성룡은 동인이다. 뒷날 유성룡은 윤두수가 자신을 축출하기 위해 이순신을 모함했다고 한 바 있는데, 장문포 · 영등포 작전에서도 윤두수와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5일 ※
병조좌랑 김상준이 구례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선조 : 그곳의 소식은 어떠한가?

 

김상준 : 수군은 지금까지 군사를 퇴각시키지 않았습니다.

 

선조 : 원수(권율)와 말해 보았는가? 그곳의 일을 자세하게 말하라.

 

김상준 : 원수가 말하기로는, 수군은 아직도 흉도(거제도)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선조 : 흉도에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리고 원수는 뭐라고 말하던가?

 

김상준 : 수군은 2만여 명이지만, 육군은 여러 장수들이 거느리고 있는 것이 1천 명도 되지 못합니다. 원수는 스스로 말하기를, ‘명령을 받은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한 가지도 성공하지 못했으니 다만 먼저 신의 죄부터 꾸짖기만을 바라고 있다’ 고 하였습니다.

 

작전의 진행 과정은 ‘9월 27일 작전 개시→10월 6일 왜군의 패문→10월 7일 곽재우 · 김덕령의 귀향→10월 8일 수륙 장수들의 귀향→10월 20일 이억기 함대의 귀향→10월 30일 마지막 토벌 작전’ 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난중일기》 1597년 11월 7일자에는 ‘원수가 수군 진중에 머물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병조좌랑 김상준이 구례에 있을 때 권율은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만약 권율이 구례에 있었다면 작전이 한창일 때 그 역시 4백 리 밖 후방에 있었던 것이 된다.

 

‘수군은 2만 명’ 이라고 하였는데, 권율도 그렇게 알고 있었을까? 만약 2만 명이었다면 가을걷이 휴가는 없었던 것이 되고, 비변사가 보고한 원균-홍이상의 보고 내용(수군이 약세… 수모를 당함)은 모함한 것이 된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무렵 작전 상황에 대한 보고들은 중구난방으로 올라왔는데, 김상준이 올린 보고 역시 그런 것들 중의 하나로 보인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5일 ※
선조 : 정세게 대해서는 말하지 않던가?

김상준 : 한산도로부터 곧바로 거제로 들어가는 것은 형세상 매우 어렵기 때문에 고성 앞바다로 에돌아 나가 거제의 남쪽으로 돌아서 정박하였더니, 거제의 적들이 모두 성 위에 모여 진을 치고 깃발을 많이 벌려 세우고는 배 40여 척을 장문포에 집결해 놓고 항거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성 앞바다로 에돌아 나가 거제의 남쪽으로 돌아와 정박’ 하였다고 했는데, 잘못된 지도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그 무렵 조정의 남해안 지도에는 오류가 많았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5일 ※
선조 : 우리 군사들은 부상당하지 않았는가?

 

김상준 : 1명이 탄환에 맞았으나 중상(重傷)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선조 : 달리 또 무슨 말을 들었는가?

 

김상준 : 적의 형세가 요즘 약해졌다고 합니다.

 

1명이 탄환에 맞았지만 그마저도 중상이 아니었다는 사실로 보아 사실상 전투가 없었던 한심한 작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적의 형세가 약해졌다’ 고 했는데, 약해진 것이 아니라 명 · 왜 간의 강화회담이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었기 때문에 왜적이 준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5일 ※
선조 : 원수가 그런 말을 하던가? 적을 잘못 헤아린 것이다.

 

김상준 : 백성들이 한결같이 빈곤하니 겨울에는 둔전의 조세로써 해결할 수 있겠지만 내년 봄에는 식량을 이어댈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이 원수의 지휘를 따르지 않으니 매우 우려됩니다.

 

선조는 ‘적을 잘못 헤아린 것’ 이라고 하였지만 왜군이 약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김상준은 내년 봄의 식량 문제와 ‘여러 장수들이 원수의 지휘를 따르지 않는’ 것을 걱정했는데, 이 같은 걱정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가을걷이 중에 군사를 동원한 것이나, 명 · 왜 간의 강화회담을 감안하지 못했고, 남해안의 왜성과 4만 3천의 왜군을 가볍게 보았으며, 윤두수와 권율이 없는 전장에서는 수륙의 무장들끼지 모여서 무질서와 불협화음(예컨대 이순신과 원균의 불협화음)을 낳았다. 조선의 수륙군이 모처럼 합동전을 펼쳤으나 공격다운 공격이 없었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 윤두수와 권율의 지휘는 처음부터 통하기 어려웠을 만큼 그들의 리더십은 실추되어 있었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5일 ※
선조 : 수군이 흉도에 있는 것은 무슨 의도에서인가?

 

김상준 : 아직 체찰사의 지휘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지휘를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선조 : 체찰사는 무슨 말을 하였는가?

 

김상준 : 체찰사도 여러 장수들이 지휘를 따르지 않는 것을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체찰사의 지휘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고 했지만, 사실 그 무렵은 잔적 소탕 단계였기 때문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 《선조실록》 1594년 10월 15일 ※
선조 : 이번의 거사는 무슨 생각으로 한 것인가?

 

김상준 : 다른 곳의 적은 분탕질과 노략질을 하지 않는데, 그곳의 적은 분탕질이 더욱 심하기 때문에 그 죄를 따지기 위해서 백사림(김해부사)이 행장(고니시)에게 전언(傳言)하고 행장이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쳤다고 합니다.

 

선조 : 적의 말을 듣고 적을 쳤다는 말인가? 그때 덕령도 갔는가?

 

김상준 : 의당 선봉을 서야 하는데 병이 나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고니시에게 양해를 얻었다’ 는데, 고니시는 명 · 왜 및 조 · 왜 간의 강화회담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측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처럼 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굳게 지키면서 패문을 내걸도록 지시했는데, 말하자면 선조와 윤두수가 고니시에게 속은 사건이다.

 

훗날에도 선조와 윤두수는 고니시의 반간계에 속아 ‘이순신이 부산으로 나아가 가토를 잡지 않았다’ 는 이유로 이순신을 해임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삼았다. 이때 선조는 고니시를 가리켜 ‘하늘이 보낸 사람’ 이라고 하면서 고니시를 신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