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이후부터는 전해져 오는 장계가 없다. 그 대신 《난중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통제영의 종사관이 《난중일기》 등을 참조해서 장계의 초본을 작성하고 통제사의 수정과 결제를 받은 후 올려 보낸 것 같다. 장계의 초본은 통제영 내에서 공문서로 보관되다가 그 후 망실되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충무공의 친필 문집이므로 문중과 가족들에 의해 보관 ·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제2차 당항포해전의 장계 초본과 명나라 담종인에게 보낸 답신서도 처음에는 종사관이 작성했으나,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만큼 불편하였음에도 이순신이 직접 작성했다.

 

한편 제2차 당항포해전 무렵부터는 후방 고을들에 대한 경영 관리 등을 기록한 장계(초본)도 전해져 오는 것이 없다. 이유는 종사관이 기록했고 그 후 비본이 망실되었기 때문이다.

 

※ 《난중일기》 1594년 9월 ※
1일. 순무사 서성의 공문과 장계 초안이 들어 왔다.

 

2일. 맑다. 들으니 아내의 병이 나아가고 있기는 하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니 못내 걱정스럽다.

 

3일. 비가 왔다. 새벽에 (임금의) 밀지가 들어왔는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장수들은 팔짱을 끼고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서 적을 치는 일이 없다.’ 고 하였다. 3년 동안이나 바다 위에 있었는데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자고 맹세하고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곳에 소굴을 파놓고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적들을 나가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더구나 (병법에서도)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저녁에 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라 일을 생각하는데, (작금의 상황은) 엎어지고 자빠지고 위태롭기 그지없건만 안으로 구제할 대책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어찌하랴. 마침 흥양(배흥립)이 내가 혼자 앉아 있는 줄 알고 들어왔기에 둘이서 3경(자정)까지 이야기하였다.

 

선조가 ‘밀지’ 를 보낸 것은 명나라 군 모르게 왜군을 공격하고자 해서였다. 선조는 밀지에서 수륙의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있다고 질책했다. 하지만 명군 쪽에서 해전을 금지하고 있었고, 왜군들은 왜성 안에 숨어서 지키기만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나아가 적을 치지 않는다고 질책하는 밀지를 받자, 답답했다.

 

※ 《난중일기》 1594년 9월 ※
4일. 맑다. 원 수사(원균)가 와서 이야기하였다. 소비포(이영남)과 여도(김인영)가 들어왔다.

 

5일. 맑다.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6일. 맑고 바람도 잔잔하였다. 충청수사, 우후(이몽구), 마량(강응호)과 함께 활을 쏘았다. 저물녘에 김경노가 우도에 왔다고 하였다.

 

7일. 맑다. 순천(권준)의 편지를 보니 ‘좌의정과 순찰사(전라감사)가 초열흘쯤에 이곳 부(순천)에 온다’ 고 하였다.

 

이번 작전의 총사령관은 좌의정 윤두수였다. 그런데 윤두수는 기송사장의 체질이어서 그런지 4백리 밖인 사천에서 공문으로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그가 만약 격물치지-실사구시적 자질이 있는 인물이었다면 한산도 · 영등포 · 장문포 등지의 지형과 왜성도 살펴보았을 것이고, 그렇게 했다면 임진왜란을 조기에 수습했다는 후세인들의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윤두수와 전라감사가 왜 갑자기 순천까지 온다는 것일까?

 

※ 《난중일기》 1594년 9월 13일 ※
맑고 따뜻하다. 조도어사 윤경립의 장계 초안 2통을 보니, 하나는 진도 군수의 파면을 요청한 것이고, 하나는 수군과 육군을 서로 바꾸어 징발하지 말 것과 각 고을 수령들을 전쟁터로 내보내지 말도록 하자는 내용인데, 그 의견은 자못 눈앞의 일만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것이었다.

 

저녁에 하천수가 장계 회답 내려온 것과 홍패 97장을 가지고 왔다. 영의정의 편지도 왔다.

 

‘지방 고을 수령들을 전쟁터로 내보내지 말도록’ 하자고 했다는데, 고을 수령들이 단위 함대 사령관으로 한산도에 나와 있는 동안 후방 고을들의 경영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경국대전 등 조선왕국의 법과 제도부터 고쳐야 하므로 현실화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그래서 ‘눈앞의 일만 생각한다’ 고 하였다.

 

※ 《난중일기》 1594년 9월 22일 ※
맑다. 우수사와 장흥(황세득)과 경상우후(이의득)가 같이 와서 명령을 듣고 갔다. 원수(권율)의 밀서가 왔는데 ‘27일에는 꼭 군사를 출동시키도록 하라’ 는 것이었다.

 

권율로부터 밀서가 왔다. 9월 27일이 작전 개시일이다. 그러나 때는 다수의 장병들이 가을걷이를 위해 휴가 중이었다. 작전 개시 5일 전에 밀서가 왔으니 때에 맞춰 소집하기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또한 ‘사람이 인육을 먹고 있는 식량난’ 에 시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을걷이를 중단하게 된다면 이 또한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 《난중일기》 1594년 9월 23일 ※
맑으나 바람이 사납다. 아침에 활터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원 수사(원균)가 와서 군사기밀을 의논하고 갔다. 낙안의 군사 11명과 방답의 수군 40명을 점고하였다.

 

원균과도 ‘비밀작전’ 을 의논했다.

 

※ 《난중일기》 1594년 9월 ※
24일. 맑다. 하루 종일 큰 바람이 불었다. 공무를 보았다. 오늘 호의(각 영문의 군사와 의금부 나졸들이 입는 세 자락으로 된 옷)를 나누어 주었는데, 좌도는 누른 옷 9벌, 우도는 붉은 옷 10벌, 경상도는 검은 옷 4벌이었다.

 

25일. 맑다. 김 첨지(김경노)가 군사 70명을, 박 첨지(박종남)가 군사 6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조붕도 왔다. 같이 자며 밤에 이야기하였다.

 

김경노와 박종남은 통제영 소속 조방장들인데, 작전을 앞두고 인근 고을의 병사들을 긴급히 인솔해 왔다.

 

○ 김경노 : 남원 태생. 젊어서 문학을 배우다가 중년에 붓을 던지고 무과에 급제하여 당상관에 올랐다. 이때에는 충무공을 따라서 왕래하였고 정유년에는 조방장이 되어 전주에 있다가 남원이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정창에서 병사 이복남을 만났다. 그때 명나라 대장으로는 총병 양원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머뭇거릴 따름이어서, 그는 병사와 함께 탄식하기를 “진주성은 험고한데다가 수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무너졌으니 남원성과 같이 허술한 곳이야 다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더구나 우리 장수가 하나도 없으니 몇 날이면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나라 일에 명나라 군사들만 죽으라고 할 수는 없다” 고 하고는 결사대 100여 명을 이끌고 교룡산 아래로부터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적들은 성 남쪽 들판에 수십 리를 연하여 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간담이 떨어질 지경이었지만, 그는 “사나이로서 나랏일에 몸을 밫칠 때가 왔다” 면서 싸우다가 성이 무너지자 이복남과 함께 순사하였다.

 

○ 박종남 : 밀양 태생.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을미년에는 충무공 막하의 조방장으로 있었다. 상주 목사, 회령 부사를 지냈고 무예와 기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글씨로도 유명했다.

 

※ 《난중일기》 1594년 9월 26일 ※
맑다. 새벽에 곽재우, 김덕령 등이 견내량에 이르렀으므로 박춘양을 보내서 건너온 이유를 물어보게 하였더니 “수군과 합세하여 적을 칠 일로 원수(권율)가 명령을 전해서 왔다” 고 하였다.

 

곽재우와 김덕령도 군사들을 거느리고 왔다.

 

※ 《난중일기》 1594년 9월 27일 ※
아침에는 맑고 저녁에는 비가 왔다. 아침에 배를 타고 포구를 나가자 여러 배들도 일제히 출발하여 적도(통영군 둔덕면) 앞바다에 대었다. 곽 첨지(곽재우), 김충용, 한별장(한명련), 주몽룡 등이 모두 와서 작전을 지시한 뒤에 각각 원하는 곳으로 나누어 보냈다. 저녁에 선병사가 배에 오므로 본영의 배를 타게 하였다.

 

권율의 ‘밀서’ 에 따라 전개한 27일의 작전 내용이다.

 

※ 《난중일기》 1594년 9월 ※
28일. 흐리다. 새벽에 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서 적을 치는 일로 길흉을 점쳐 보았더니 매우 길하다. 흉도 안바다에 진을 쳤다.

 

29일. 맑다. 배를 출발하여 장문포로 돌입하니 적들이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나오지 않았다. 누각을 높이 짓고 양쪽 봉우리에는 벽루를 쌓아 놓고 전혀 나와서 항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선봉의 적선 2척을 무찔렀더니 그만 육지로 올라가 도망쳤다. 빈 배만 불태워 깨뜨리고 칠천량에서 밤을 지냈다.

 

‘양쪽 봉우리에는 벽루를 쌓고’ 라고 하였는바, 난공불락의 왜성 구조임을 알 수 있는데 조선군은 공성용 운제(雲梯)도 없었던 것 같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1일. 충청수사 및 선봉의 여러 장수들과 함께 곧바로 영등포로 들어가니 흉한 적들이 바닷가에 배를 대어놓고 한 놈도 나와서 항전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왔다. 마침 사도의 제2선이 뭍에 배를 대려고 할 즈음 적의 작은 배가 곧장 들어와서 불을 던졌다. 불은 비록 일어나지 않고 꺼졌지만 분하기 그지없었다. 우수사 군관과 경상수사 군관에게는 그 실수한 것을 대충 꾸짖고, 사도군관에게는 그 죄를 무겁게 다스렸다. 2경(밤 10시경)에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2일. 맑다. 선봉선 30척에게 장문포로 가서 적의 형세를 살펴보고 오라고 지시하였다.

 

3일. 맑다. 직접 여러 장수들을 인솔하여 아침 일찍 장문포로 갔다. 하루 종일 싸울 기회를 살폈으나 적도들은 무서워서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날이 저물어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웅천에서 강화회담을 진행한 심유경과 고니시는 히데요시가 명황제에게 바치는 가짜 항복문서를 만들었고, 이것을 소서여안에게 휴대시켜 북경으로 보냈다. 가짜 항복문서를 받아본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것이 진짜 항복문서인 줄 알고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하는 책봉사를 일본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 후 명나라 조정은 소서여안 일행을 한성→웅천으로 돌려보내면서 조선 측에 일체의 전쟁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때문에 이 같은 통지를 받은 조선의 수륙군 장수들에게는 이번 작전은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이 무렵 명군의 현황을 보면, 약 5천 명의 군사들이 한성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한성의 명군이 알지 못하게 윤두수로 하여금 경상 · 전라 · 충청도의 조선군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 이 무렵 남해안의 왜군 현황
서생포 : 가토 군 8,900명
기장 : 구로다 군 2,000명
부산 · 동래 : 모리 군 등의 5,000명
김해 · 안골 : 와키자카 군 등 6,700명
가덕도 : 고바야카와 군 등 2,800명
웅천 : 고니시 군 등 12,100명
거제도 : 시마즈 군 등 8,000명
계 : 43,000명

○ 이 무렵의 조선군 현황

체찰사 : 윤두수
도원수 : 권율
3도수군통제사 : 이순신
순변사 : 이일
경상병사 : 김응서
충청병사 : 선거이
경상우수사 : 원균
....

충청수사 : 이순신(李純信)
충용장 : 김덕령
조방장 : 곽재우
수군조방장 : 김경노
수군조방장 : 박종남
별장 : 한명련
조선 수군 전선 : 50여 척
.....

 

※ 순변사 이빈과 전라병사 이시언은 소수의 병력으로 함안 등지에서 복병했다. 한산도의 전선(판옥선)은 200척인데 50척만 참전한 것은 그 무렵 장병들이 가을걷이 휴가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4일 ※
맑다. 곽재우, 김덕령들과 함께 약속한 뒤 군사 수백 명을 뽑아 육지에 내려 산으로 올라가게 하고 선봉은 먼저 장문포로 보내어 들락날락 하면서 싸움을 걸게 하였다. 늦게 중군을 거느리고 나가며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도들은 갈팡질팡하며 형세를 잃고 동서로 분주하였다. 그런데 육군은 적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는 겁을 먹고 몸을 돌려 배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진을 쳤다. 선전관 이계명이 표신과 선유교서를 가지고 왔다. 임금께서 잘(담비 가죽)을 하사하시었다.

 

백병전 단계가 되자 조선 육군은 기가 죽어서 후퇴해 내려 왔다. 표신과 선유교서는 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임금이 내린 것인데, 이는 윤두수의 요청으로 내려진 것이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5일 ※
큰 바람이 종일토록 불었다. 장계를 썼다.

 

날씨 때문에 칠천량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6일 ※
맑다. 아침 일찍 선봉을 장문포의 적의 소굴이 있는 곳으로 보냈더니 왜인들이 패문을 써서 땅헤 꽂아 놓았는데, 거기에 쓰인 글은 ‘일본과 대명(大明)이 방금 화친을 맺으려 하니 서로 싸워서는 안 된다’ 는 내용이었다.

 

왜놈 1명이 칠천량 산기슭으로 와서 투항하고자 하므로 곤양군수가 불러서 배에 태운 후 물어 보니, 그 자는 영등포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이었다. 진을 흉도(거제도)로 옮겼다.

 

왜군들의 패문을 본 조선군은 허탈감에 빠졌다. 게다가 명군의 출전 금지령을 어겼으므로 추후 어떤 책임 추궁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작전을 개시한 지 10여 일이 지나자 각 부대들에는 식량도 떨어져 가고 있었으며, 때는 바야흐로 겨울로 들어서는 음력 10월이었다.

 

이번 작전에는 여러 위험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었다. 만약 가덕 · 김해 · 부산에 주둔해 있던 4만여 왜군들이 야습을 해 온다면 곽재우와 김덕령 등이 이끄는 3천의 조선 육군은 위기를 맞게 되고, 조선 육군이 섬멸되고 나면 명군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함안 · 의령 · 거창 · 선산 · 상주, 그리고 전라 · 충청도가 일거에 왜군들의 수중에 들어갈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곽재우, 김덕령 등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 같은 때에는 총사령관이 직접 나서서 군심을 안정시키고 대책을 제시해야 했다. 그러나 윤두수는 4백리 밖 후송인 순천에 있었다. 결국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곽재우 등은 각자 핑계를 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7일. 맑다. 선병사(선거이), 곽재우, 김덕령 등이 돌아갔다. 띠 183동을 베었다.

 

8일. 맑고 바람도 없었다. 아침에 출항하여 장문포에 있는 적의 소굴에 이르니 적들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군사의 위엄만 보인 후 흉도(거제도)로 돌아와서 띠 260동을 베고, 그대로 배를 띄워 한산도에 이르니 밤이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9일. 맑다. 첨지 김경노, 첨지 박종남, 조방장 김응함, 조방장 한명달, 진주 목사 배설, 김해 부사 백사림 등이 모두 돌아갔다. 활을 종일 쏘았다. 남해(현집), 하동(성천유), 사천(기직남), 고성(조응도)이 돌아갔다.

 

수륙의 장수들도 각자 군병을 이끌고 돌아갔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10일. 맑다. 장계를 수정하였다. 박자윤과 곤양(이광악)은 유숙하고 떠나지 않았고, 흥양(배흥립), 보성(김득광), 장흥(황세득)은 돌아갔다.

 

11일. 맑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충청수사가 와서 만나보았다.

 

12일. 경상수사(원균)가 적을 토벌한 일에 대하여 자기가 직접 장계를 올리고 싶어하므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비변사 공문에 의거하여 원수가 쥐 가죽으로 만든 남바위(이엄)를 좌도에 15벌, 우도에 10벌, 경상도에 10벌, 충청도에 5벌을 갈라 보냈다. 장계를 수정하였다.

 

원균 수사가 직접 장계를 올리려고 해서 문제가 되었다. ‘장계를 수정하였다’ 고 하였는바, 종사관이 쓴 초고를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올려 보낸 장계가 도중에 분실되었는지 《선조실록》에는 수록된 것이 없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13일. 맑다. 종사관(정경달)이 벌써 사천에 왔다고 하였다. 사천의 제1선을 내어 보냈다.

 

14일. 맑다. 새벽녘 꿈에 왜적들이 항복하여 육혈 총통 5자루를 바치고 환도도 바쳤다. 말을 전하는 자는 이름을 김서신이라 하였는데 왜놈들이 모두 항복한다고 하였다.

 

15일. 맑다. 박춘양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16일. 맑다. 순무어사 서성이 날이 저물녘에 도착하여 우수사(이억기), 원수사(원균)과 함께 이야기하였다.

 

순무어사 서성이 온 것은 이번 작전에 이순신 · 원균 간에 있을 수 있는 갈등을 예방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제2차 당항포해전 때에도 원균은 독자적으로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를 바로잡고자 장계를 올린 바 있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17일 ※
맑다. 어사(서성)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수사의 속이고 무고하는 말들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다. 종사관(정경달)이 들어왔다.

 

‘속이고 무고하는 말’ 이라고 하였는바, 영등포 · 장문포 작전 중에 있었던 일인 듯하다. 한편, 이번 작전을 주도한 좌의정 윤두수는 이 무렵에도 원균을 두둔했으며, 후에 이순신을 모함 · 실각시키고 원균을 통제사로 삼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작전에서의 윤두수-원균 관계가 주목된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18일. 맑다. 종사관(정경달)이 교서에 숙배하는 예를 행하였다.

 

19일. 바람이 순조롭지 않았다. 아침에 종사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20일. 아침에 흐리다. 순무어사(서성)가 나갔다.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돌아간다고 고하였다.

 

순무어사 서성도 돌아갔고, 이억기 함대도 귀항했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21일 ※
맑다. 종사관(정경달)과 우후(이몽구)와 발포(황정록)가 나갔다. 항복해 온 왜놈 3명이 원 수사(원균)에게서 왔다. 문초를 하였다.

 

종사관, 우후, 발포 만호도 귀항했다. 영등포 · 장문포 수륙전은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22일. 흐리다. 이적과 승 의능이 나갔다.

 

23일. 맑다.

 

24일. 맑다. 우후를 불러서 활을 쏘았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25일 ※
맑으나 서풍이 크게 불었다. 남도(강응표)와 영등(우치적)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전 낙안 신 첨지(신호)가 체찰사(윤두수)의 공문과 목화 벙거지와 정목(正木) 한 동을 가지고 와서 같이 의논하다가 밤이 되어 물러갔다. 순천 부사 권준이 잡혀가면서 와서 보았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권준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잡혀갔고, 이에 이순신은 마음이 아팠다. 이때 권준은 영등포 · 장문포 해전에 참전 중이었다. 권준이 잡혀가게 된 자초지종은 권준을 파직시키기 위해 순천부에 온 윤두수가 순천부에 대한 표적 수사를 하면서 어떤 꼬투리를 잡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당파 싸움과 중요한 관직에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한 사리(私利) 추구 행위가 왜적을 상대로 한 전쟁 중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 《난중일기》 1594년 10월 ※
26일. 맑다.

 

27일. 아침에는 비가 오고 저녁에는 개었다. 미조항 첨사(성윤문)가 와서 교서에 숙배(肅拜)하는 예를 행하고 그대로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28일. 맑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금갑도(이정표)와 이진 권관이 와서 보았다. 식후에 전라우도 우후(이정충)와 경상우도 우후(이의득)가 와서 목화를 받아 갔다.

 

29일. 맑다. 서풍이 몹시 차가웠다.

 

30일. 맑다. 수색하고 토벌하도록 하기 위해 적진으로 들여보내고 싶었으나 경상도 전선이 없어서 모이기를 기다렸다. 자정에 회가 들어왔다.

 

작전 종료를 위한 마지막 단계인 수색 · 토벌전을 준비하고 있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1일.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였다.

 

2일. 맑다. 좌도에서는 사도(김완)를, 우도에서는 우후 이정충을, 경상도에서는 미조항 첨사 성윤문 등을 장수로 뽑아 수색 토벌하도록 들여보냈다.

 

3일. 맑다. 아침에 김천석이 비변사 공문을 가지고 항복한 왜인 야여문 등 세 명을 데리고 진으로 왔다.

 

잔적을 소탕하는 단계에서 왜인 탈영병 등이 붙잡혀 왔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4일. 맑다. 항복한 왜인들의 사연을 들었다. 유생이 전문(箋文)을 가지고 들어왔다.

 

5일. 흐리고 실비가 내렸다. 순변사(이일)가 자기 군관을 시켜서 항복한 왜인 13명을 보내왔다.

 

순변사 이일도 영등포 · 장문포 해전에 참전했으리만큼 조정은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3천 명으로는 거제도에 있는 왜성 하나도 공격할 수 없었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6일. 흐리나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이영남, 이정충, 신첨지(신호)가 와서 같이 이야기하였다.

 

7일. 늦게 개었다. 금갑도(이정표), 사도(김완), 여도(김인영), 영등포(조계종)가 와서 보았다. 신 첨지(신호)가 보고하기를, 원수(권율)가 수군 진중에 머무른다고 하였다.

 

권율이 ‘수군 진중에 머물고 있다’ 고 하였다. 수군 진중은 한산진인데, 이때 이순신은 영등포 · 장문포 앞에서 작전 중이었다. 권율은 한산진에 오기 전에는 구례에 머물러 있었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8일. 비가 뿌리다가 늦게 개었다.

 

9일. 맑으나 바람이 불순하였다.

 

10일. 맑다. 이희남이 들어왔다. 조카 뇌도 영문으로 왔다고 하였다.

 

‘영문으로 왔다’ 고 하였는바, 뇌가 한산진으로 온 소식을 영등포 근해에서 들은 것이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11일 ※
동지(冬至)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하고 군사들에게 죽을 먹였다. 우도 우후(이정충)와 정담수(전 어란포만호)가 와서 만났다.

 

‘죽을 먹였다’ 고 했다. 동짓날이라 팥죽을 먹인 것인지, 아니면 군량미가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12일. 맑다.

 

13일. 맑다. 원수가 방어사(防禦使) 군관에게 항복한 왜인 14명을 인솔시켜 보내왔다.

 

14일. 맑다. 우병사(김응서)가 항복한 왜인 7명을 자기 군관에게 인솔시켜 보내왔다.

 

권율과 김응서 등의 부대에서 포로로 잡힌 왜인들을 이순신의 진영으로 보내왔다. 이렇게 보내진 왜인들은 ‘왜인 귀화 부대’ 로 다시 보내졌다.

 

※ 《난중일기》 1594년 11월 ※
15일. 맑다.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음(陰)과 양(陽)이 순서를 잃어버린 모양이다. 오늘은 아버님의 기일(忌日)이므로 나가지 않고 혼자 방안에 앉았으니 슬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아들 울 등의 편지를 보니 어머님께서 평안하시다고 하였다. 다행, 다행이다. 영의정(유성룡)의 편지가 왔다.

 

16일. 맑다. 바람이 조금 차다. 우도 우후(이정충), 여도(김인영), 회령포(민정붕), 사도(김완), 녹도(송여종), 금갑도(이정표), 영등포(조계종), 전 어란 만호 정담수 등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잔적 소탕도 끝났고, 또 전투가 없는 겨울이었기에 견내량을 지키는 병력만 남고는 모두 귀항했다.